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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

       “괜찮아요? 땀이 좀 흐르는 것 같은데.”

        ​

        “어, 아냐. 그냥.”

        ​

        마차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는 이 방 안에서 마리아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마리아는 굉장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고.

        ​

        하지만, 지난번과는 다르게 이번엔 탈출구가 없었다. 마차에서는 적당한 대답을 해주는 걸로 그녀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런 것도 없었다.

        ​

        순진하게 밥이나 먹자는 말에 졸졸 따라와 제 발로 함정에 들어간 거니까.

        ​

        ‘탈출구는, 없다…!’

        ​

        만약 이곳이 사람이 많은 광장이나 하다못해 시장통이기만 했어도 신체 능력으로 어떻게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제한된 공간에서는 마리아가 나보다 앞섰다.

        ​

        내가 익스퍼트에 도달한 검사라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

        마리아가 저 나이에 6 위계에 도달한 마법사라는 게 문제였다.

        ​

        “마리아.”

        ​

        “네?”

        ​

        “요새는 마법 수행에 진척이 좀 있어?”

        ​

        마리아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

        “아뇨…, 사실대로 말하자면, 6위계에 도달한 이후 생각보다 진척이 없어요. 물론 이 이상 저를 가르쳐줄 사람을 구하려면 마탑에 들어가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

        이 세상에서, 마력은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물질이었다. 마법사와 기사는, 모두 그 마력을 이용해 자신을 단련하는 사람들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들이 마력을 사용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었다.

        ​

        기사는, 기본적으로 마력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나와 같은 사람들은 마력을 느끼긴 했지만, 딱 그 정도였다. 그들이 마력을 운용하는 방법은 실제로 마력을 느끼고 그걸 움직인다기보다, 오랜 세월 동안 ‘이렇게 하니 마력이 움직이던데?’ 하는 결괏값을 쌓아 올려 만든 수행법을 통해 마력을 운용하는 식이었다.

        ​

        익스퍼트에 이르러서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나 또한 마법은 기껏해야 손에 불 피우는 정도가 전부였기에 전투에 쓸만한 위력을 뽑아내려면 결국 검을 잡고 휘둘러야 했다.

        ​

        하지만 마법사는 자신의 몸에 느껴지는 마력을 직접 움직이는 이들이었다. 당연히 그 수가 압도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뭐, 제가 대마법사가 될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충분하죠. 지금은 여지껏 이뤄온 것들을 반복하며 숙련도를 올리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

        “그래?”

        ​

        “후후, 이제는 예전처럼 아무것도 못 하고 벌벌 떠는 어린아이가 아니랍니다.”

        ​

        그리고, 그 마법조차 3위계 아래로는 마법사가 다루는 마법으로 취급해주지 않았다. 마법의 종류를 차치하고, 애초에 3위계 이하의 마법들은 일상생활에 소소하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수준 이상의 출력을 내지 못했다.

        ​

        그리고 6위계는, 대마법사로 분류되는 7위계의 턱밑까지 다가갔다고 여겨지는 경지였다.

        ​

        대부분의 마법사가 4위계나 5위계에서 삶을 마감하는 걸 생각하면, 마리아의 성취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

        다만, 그녀의 말에는 약간의 어폐가 있었다.

        ​

        “그때도 이미 5위계였으면서.”

        ​

        “윽.”

        ​

        마리아가 황후의 공세에 일방적으로 밀렸던 건, 그녀의 마법적 성취나 위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사실 그 이유는 그녀가 마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데 저항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옳았다.

        ​

        아니,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다.

        ​

        마리아는, 사람이 죽는 모습 자체에 공포심을 느꼈으니까.

        ​

        트라우마란, 그리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

        “뭐, 이젠 상관없잖아? 철십자 기사단이 있으니.”

        ​

        적당히 화제를 넘겼다. 더 오래 말해봐야 그녀의 트라우마만 자극할 뿐이었으니까.

        ​

        “솔직히, 조금 불안하긴 해요.”

        ​

        “뭐?”

        ​

        이건 흘려들을 수 없겠는데.

        ​

        혹시 그놈들, 요새 빠져가지고 돈 받고 대충 일하는 건가? 그럼 다시 한번 기강을 잡아야-

        ​

        “당신이 내가 미숙할 적 침대 머리맡을 지켜줄 때가 제일 안심이 됐었으니까.”

        ​

        뭣.

        ​

        아니, 그렇게 말하니 굉장히 내가 수상해 보이잖아. 나는 소작농이 아니야. 내 취향은 잘 구워져 나온 빵이라고. 

        ​

        뭐라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어차피 주변에 이걸 들을 사람도 없고, 마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띄워져 있는 게 장난치는 게 뻔해 한숨만 내쉬었다.

        ​

        “진짜로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심장 떨어지는 것 같으니까 하지 좀 말아줘….”

        ​

        “그런 반응이 재밌어서 더 자주 하게 되는 것 같은데요?”

        ​

        고개를 저었다.

        ​

        이래서야, 수도에 있는 내내 이런 장난을 당할 것 같았다. 뭐, 그래도 즐겁긴 했다. 그래도 가족들과 포메른 공작가 사람들을 제외하면 아마 가장 오래 얼굴 본 사람이 마리아인 만큼, 이렇게 서로 툭 터놓고 장난 칠 사람도 별로 없었다.

        ​

        물론 몬스터 사냥하고 지나가던 선비 노릇하면서 사람들 도와주고 다니는 게 제일 즐겁긴 했지만, 솔직히 수도에 사냥할 몬스터가 어딨겠어.

        ​

        “아무튼, 그럼 경호에는 별로 문제없는 거지? 난 또 뭐 얘들이 해이해졌나 해서-”

        ​

        “아뇨.”

        ​

        안심하고 지나가려던 찰나, 마리아가 내 말을 끊었다.

        ​

        “저는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요.”

        ​

        마리아는 정색했다. 그녀는 대체 무슨 말을 하냐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

        “불안하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에요.”

        ​

        툭.

        ​

        그녀가 탁자를 손가락으로 콕 찍었다.

        ​

        “당신이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사라졌을 때, 제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아요? 혹시 당신이 날 버린 게 아닐까, 어쩌면 황후가 당신마저 회유한 게 아닐까, 내가 당신을 실망시킨 건 아닐까, 온갖 고민을 하면서 손톱이 망가지고 이 손가락에 피가 흐를 정도로 짓씹으며 고민했어요.”

        ​

        그녀의 손가락 끝으로 시선이 향했다. 사람과 전투하는 상황이 오면 패닉에 빠져서 그렇지, 제 몸을 지키는 능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마리아의 손가락 끝에 흉터가 남아 있었다.

        ​

        마법이 다른 건 다 가능해도 치료만큼은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 대마법사들만이 시도할 수 있는 영역이었기에 스스로 치료할 수는 없었다.

        ​

        하지만, 사제들은 치료할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흉터를 남겨놓은 걸까.

        ​

        “당신이 사라지고, 매일 밤 또다시 암살자들이 몰래 들어오는 게 아닐까, 날 지키기 위해 어릴 때부터 함께해온 시녀들이, 마틸다가 다치거나 죽는 건 아닐까, 아니면, 눈을 감았다 두 번 다시 뜨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닐까 덜덜 떨며 잠도 잘 들지 못했어요.”

        ​

        탁.

        ​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내 쪽으로 기울이며 내 가슴팍을 손가락을 강하게 쿡 찔렀다. 신체 능력 자체야 평범했기에 내게 상처를 입힐 수 있을 리가 없었건만, 어째선지 그 손가락이 무척이나 아프게 느껴졌다.

        ​

        “마법과 수면제의 힘을 빌어 잠이 들어도, 악몽으로 새벽에 다시 깨고, 잠들기 위해 또다시 마법과 수면제를 사용하고, 그러다 어느새 몸이 적응해 수면제로는 도저히 잠에 들지 못해 어느 순간부터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어요.”

        ​

        그녀의 눈동자에 아까와는 조금 다른, 분노가 담긴 불꽃이 일렁였다.

        ​

        “내가, 어떻게 당신이 사라진 그 잠깐의 시간 동안 6위계를 달성했는지 알아?”

        ​

        존댓말조차 때려치운 그 말에 나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

        몰랐다.

        ​

        전혀 몰랐다.

        ​

        아니, 그녀가 나를 굉장히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 정도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기껏해야 깊은 친구 사이 정도로 여겼지, 이렇게 정신적으로 스스로를 학대할 정도로 의존하는 정도일 줄은 몰랐다.

        ​

        솔직히, 조금 억울한 측면도 있었다.

        ​

        1년도 아니다. 겨우 몇 개월, 겨우 몇 달이라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상대에게 의존하게 된단 말인가.

        ​

        “어머니를 잃고, 당신까지 사라지고 나니, 이제는 확실히 깨달았어요. 나는 생각보다 굉장히 의존증이 심한 사람이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아, 이대로 그저 남에게 모든 걸 맡기기만 하고 사는 건 문제가 있겠다.”

        ​

        “그, 그래, 그러면 이제 내가 한동안 같이 있어 줄 테니까 그 의존증을 조금씩-”

        ​

        “그러니까, 그 사람을 붙잡아서 영원히 내 곁에 묶어둬야겠다.”

        ​

        “뭣.”

        ​

        …내가 잘못 들은 건가?

        ​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파트너니 뭐니 하는 달콤쌉싸름한 게 아니라, 좀 더 무겁고 질척질척한 무언가 같은데…?

        ​

        “그거 알아요? 저, 이제 당당한 성인이에요. 이제 곧 아바마마로부터 작위를 받으면 황족으로서도 어엿한 지위를 주장할 수 있겠죠.”

        ​

        그녀의 눈빛, 분위기, 그리고 하는 말까지, 모든 것이 한 가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

        나는 지금 그녀가 오랜 시간 준비해둔 함정에 제 발로 걸어들어온 거다.

        ​

        “예전에 당신이 제게 했던 말 기억해요?”

        ​

        “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

        ​

        하 씨, 뭐더라.

        ​

        젠장, 여기저기서 도용해서 내뱉고 다닌 말이 하도 많아서 이런 질문이 오면 생각나는 게 너무 많았다.

        ​

        “이런 이야기는 나중에 자기 인생을 책임질 나이가 되면, 순간적인 충동에 감정을 잡아먹히는 시기가 지나고 나면 하라고 했었어요.”

        ​

        그랬던가?

        ​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분명 했었다. 내가 마리아를 처음 만났을 때는 그녀가 한창 사춘기의 끝물을 보내고 있을 나이였기에 저런 말을 해준 적이 있었다.

        ​

        “…그런데, 그건 결혼이 아니라 자살이니 뭐니 하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다 나온 말이었던 것 같은데?”

        ​

        “…아무튼.”

        ​

        허, 얘 지금 말 돌린 거지?

        ​

        “그런 사소한 문제는 차치하고.”

        ​

        “사소한 게 아닌 것 같은데?”

        ​

        “중요한 건, 오늘이 지나고 나면 당신은 더는 여기서 벗어나겠다고 발버둥 칠 수 없을 거라는 거예요.”

        ​

        헉.

        ​

        순간 내 머릿속에 온갖 상상이 지나갔다. 주로 빨간딱지가 잔뜩 붙고 살색이 흘러넘치는, 모자이크 잔뜩 쳐진 19금적인 무언가가.

        ​

        “후후, 식사가 끝나면, 오늘 저와 함께 반지를-”

        ​

        “아, 아직 우리 사이에 야한 건 좀 이르다고 생각하는데?!”

        ​

        우리는 동시에 입을 열었고,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

        “힉.”

        ​

        “…어라.”

        ​

        혹시, 이거 나만 쓰레기 되고 끝나는 그런 거냐?

        ​

        -―

        ​

        식사는 끝났다.

        ​

        굉장히 어색한 분위기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마리아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쥐구멍이라도 기어들어 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아쉽게도 이런 고급진 곳에 쥐구멍이 있을 리가 없었다.

        ​

        “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

        “아니! 네가 하는 말은 어떻게 봐도 흐름이었잖아!”

        ​

        “평소에 그런 생각을 하고 다니는 거예요?”

        ​

        “그럴 리가 없…! 는, 건 아닌데….”

        ​

        “변태.”

        ​

        오, 주여.

        ​

        눈앞이 깜깜해졌다.

        ​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우리는 약간 거리를 벌려 떨어진 채 이동했다. 눈치껏 마리아를 따라 움직였다. 아까 그런 말을 해버린 이상 적어도 며칠간은 나는 꼼짝도 못 하고 마리아를 따라 움직여야만 했다.

        ​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약혼도 안 했는데 벌써 반지는 좀….”

        ​

        “…혹시, 저 말고 딴 년과 아까 전 말한 그런 짓을 한 적 있는 건가요?”

        ​

        “아닙니다….”

        ​

        반발을 하고 싶어도 마리아의 눈초리에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황녀에게 먼저 섹드립을 치는 건 중죄가 맞았다. 이걸로 서로 다투면 무조건 내가 질 수밖에 없었다.

        ​

        그래서 얌전히 그녀의 손에 이끌려 이곳 지하에 위치한 유일한 장신구 가게로 향했다.

        ​

        “헉.”

        ​

        그리고, 가격을 보며 정말 헉 소리를 뱉을 수밖에 없었다.

        ​

        “이게 다 얼마야?”

        ​

        “흥, 그때 도망가지만 않았으면 이 정도는 우습게 볼 돈을 드릴 수도 있었는데.”

        ​

        “아니, 진짜로 돈이 필요해서 일한…건 맞는데, 막 이렇게까지 필요한 건 아니었다니까.”

        ​

        집 한 채는 따위로 만드는 가격의 장신구들을 구경하고 있으니 주인장과 이야기를 나누던 마리아가 날 불렀다.

        ​

        “빌, 이리로 와봐요.”

        ​

        “응….”

        ​

        정말 미래가 저당 잡히는 순간이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게 느껴지자 나는 내 발이 이렇게까지 무거워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마리아의 앞에 놓인 두 개의 반지가 어째선지 날 위해 마련된 수갑과도 같이 느껴졌다.

        ​

        그때, 누군가가 날 멈춰 세웠다.

        ​

        “이거, 마리아 전하 아니십니까.”

        ​

        “…하.”

        ​

        마리아의 표정이 순간 매우 심하게 구겨졌다. 그녀는 불만을 있는 대로 흘려대며 고개를 돌렸다.

        ​

        나도 혹시나 이 상황에서 나를 건져줄 사람인가 하는 희망을 담아 말을 건 상대가 누군지 살폈다.

        ​

        “혹시나 해서 여쭙습니다만, 앞에 있는 그 반지는 옆의 남자분과 나눠 끼실 물건입니까?”

        ​

        그리고, 나는 마리아가 왜 표정을 구겼는지 깨달았다.

        ​

        묘하게 중간중간 말의 음율을 끊는 호흡, 기이하게 끌어올리는 말꼬리, 그냥 듣기에도 불쾌한 하이톤의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 그리고 무슨 상황인지 뻔히 알면서도 굳이 굳이 묻는 그 태도까지.

        ​

        이 사람은, 마치 ‘시비’라는 개념이 인간의 탈을 쓰고 돌아다니는 것만 같은 존재였다.

       


           


I Wished for Romance, but it Turned Out to be a Romance Fantasy

I Wished for Romance, but it Turned Out to be a Romance Fantasy

낭만 판타지를 꿈꿨는데 로맨스 판타지였다
Score 7.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dreamed of a life filled with romance¹ and romanticism, but I didn’t dream of a romance fantasy… —- ¹ The “Romance” here means a feeling or atmosphere of something new, special and exciting, e.g., a hero’s adven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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