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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

       

         

         

         

        뒤늦게 떠올린 사실.

         

        1장을 클리어하고 2장으로 넘어갈 때 게임에서는 도시를 찾았다는 대화와 함께 텍스트 몇 개만 넘기면 바로 그 도시 앞으로 이동해 있었다.

         

        공중으로 솟구치며 린은 생각했다.

         

        설마 그때도 루시의 도약 5번을 통해 갔던 걸까.

         

        아니다.

         

        시스템상 호감도는 높지만 루시가 정상적인 상태였기 때문에 평범하게 걷거나 마차에 타서 이동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에에엑…!”

         

        “린, 괜찮아?”

         

         

        이동이 끝난 후 게임 속 짐꾼은 자신처럼 헛구역질을 하며 고개 숙이고 있지 않았었다.

         

         

        “등 두들겨 줄까?”

         

        “아니, 아니….”

         

         

        네가 두들겨 줬다가는 내장을 쏟아낼 것 같아.

         

        원래도 용사 파티 내에서 독보적인 강함을 보유한 루시였지만 사지를 회복한 이후로 더 막강해진 것 같았다.

         

        성검의 선택을 받고 용사가 되어 강한 것이 아니다.

         

        원래부터 용사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만큼 강하기 때문에 성검의 선택을 받은 것이었다.

         

        본래 성검은 육체의 강함보다는 후보자가 가진 신념과 가치관을 샅샅이 확인하고 평가하여 선택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시는 역대 용사들 가운데서도 가장 강한 자로 꼽혔다.

         

        그 어떤 용사도 해내지 못하던 마왕 토벌을 해냈으니 당연하긴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세간은 강한만큼 행동거지도 유별난 인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자신의 직위와 강함만 믿고 설치던 용사가 단 한 사람을 위해 용사의 힘인 성검마저 내려놓았다는 것을.

         

        심지어 린도 모르고 있었다.

         

        알게 된다면 뒷목 잡고 쓰러질 게 뻔하지만 아직은 모르고 있었다.

         

        즉, 루시는 이제 용사가 아니었다.

         

        그저 한 남자를 쫓아다니며 짝사랑하는 소녀일뿐.

         

        결국 어지러움을 참지 못한 린은 도시에서 멀찍이 떨어진 위치에서 뻗어버렸다.

         

        평소라면 뻗어있는 시간조차 아까워하며 몸을 일으켰겠지만 도보로 한달 남짓 걸릴 거리를 고작 도약 5번으로 반나절만에 왔으니 급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컨디션을 제대로 회복시키고 2장으로 진입할 준비를 하는 게 나았다.

         

        루시는 자기 무릎 위에 린을 눕히고 머리칼을 쓸어넘겨 주었다.

         

         

        “움직여야 하는데….”

         

         

        어지러움이 심한 탓에 린은 곧장 잠이 들었다.

         

        지끈거리는 두통까지 동반되어 식은땀까지 흘렸다.

         

        루시는 그런 그의 이마를 갖고 있던 천조각으로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혹여나 깰까 염려하는 마음에 아주 살포시 천을 댔다가 떼는 루시의 얼굴에는 크나큰 만족감이 서려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포대기에 싸여 린에게 대롱대롱 매달려 다니던 그녀가 이제는 새롭게 생긴 무릎 위에 그를 누이고, 새로 생긴 팔과 손으로 그를 살핀다.

         

         

        “으읏… 흣…!”

         

         

        손가락을 깨물며 쾌락을 참았다.

         

        엘릭서로 새로 만들어진 몸에 린이 닿자 루시는 그것만으로도 몸이 달아올랐다.

         

         

        “하아… 하아….”

         

         

        당장이라도 이 입술에, 이마에 입맞춤을 하고 싶었다.

         

        꼭 감은 눈꺼풀이 너무나도 귀여웠다.

         

        가까스로 음심으로 마음이 젖어가는 걸 참아본다.

         

        그를 원하는 거친 숨결을 틀어막으며 루시는 자신의 머리카락 한 올을 꼬아내 뽑았다.

         

        붉디 붉은 머리카락 한 올.

         

        마력을 불어넣자 더 선명하게 빛난다.

         

        빛나는 건 갓 뽑아낸 머리카락만이 아니었다.

         

        전신에 마력을 순환시키자 루시의 새끼손가락을 따라 가느다란 붉은 실이 그려졌다.

         

        붉은 마력을 담은 작은 선은 린의 왼쪽 새끼손가락까지 이어졌다.

         

        루시는 그 선에 머리카락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붉은 실에 머리카락이 흡수되며 그만큼 더 길이가 늘어났다.

         

         

        “후훗.”

         

         

        몸을 되찾은 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루시는 린이 잠든 틈을 타서 붉은 실을 엮었다.

         

        처음에는 예민한 린이 바로 깨어날 것이 무서워 한참 시간이 걸렸지만, 되살아난 이후로 그는 잠에 매우 깊게 빠져드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그 때문에 린이 오래 깨어나지 않으면 루시가 불안해하며 심장소리를 확인하려 드는 것이었다.

         

        오늘도 실을 엮었다.

         

        루시의 마력을 머금은 붉은 실은 웬만한 간섭이 아니라면 끊어질 일은 없었다.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린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

         

        만일 실이 끊어진다면 린에게 심각한 위험이 닥쳤다는 뜻이리라.

         

        그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감시 속에 둘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운명의 붉은 실.

         

        아르실에게 들었던 옛 설화.

         

        성녀 자체는 증오스럽지만 루시는 그 설화만큼은 순수하게 믿고 싶었다.

         

        보란듯이 그와 그녀를 이어주는 이 붉은 실이 결국 두 사람의 결혼과 가정을 자아낼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차피 경쟁자는 없다.

         

        과거의 그릇된 행적이라는 과오가 있지만 루시는 조급해 하지 않고 천천히 시간을 들여 그 상처를 보듬어주고 린의 마음에 스며들 계획이었다.

         

        여유는 많다.

         

        어차피 성검도 소멸해서 용사도 아니다.

         

        린이 원하면 마족을 토벌하러는 다니겠지만 루시는 기본적으로 린을 데리고 둘만의 보금자리를 찾는데 주력할 것이다.

         

         

        “나의 유일한 아군, 최고의 동료, 나의 린.”

         

         

        아무리 시간이 많다고 하지만 1분1초도 허투루 쓸 생각은 절대 없었다.

         

         

         

        —

         

         

         

        의외로 린은 일찍 깨어났다.

         

        잠 든 지 한시간도 되지 않아 조용히 일어난 그는 혀를 살짝 내밀고 홍조 가득한 루시와 마주했다.

         

         

        “…….”

         

        “…린 먹어도 돼?”

         

        “안 돼.”

         

         

        가까이서 지내보니 루시에게는 특이한 버릇이 있었다.

         

        혼자 멍하니 있다가 눈을 감고서 혀나 입술을 내미는데 그게 꽤 선정적이었다.

         

        린이 주의를 줬지만 고쳐지지 않고 한술 더 떠서 먹어도 되냐고 직접적으로 묻기까지 한다.

         

        무슨 공기를 저리 색스럽게 먹으려 한담.

         

        이쯤되면 린도 일부러인지 정말 순진한건지 알기가 힘들었다.

         

         

        “두통은 괜찮아 린?”

         

        “응 덕분에. 무릎베개 고마워 루시.”

         

        “린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해줄게.”

         

        “필요할 때 말할게.”

         

        “아냐 그냥 내가 해주고 싶을 때도 해줄래.”

         

        “루시는 정말 자유분방하구나.”

         

        “응? 아냐, 전혀 그렇지 않아.”

         

         

        루시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

         

         

        “난 린이 없으면 안 되는 걸.”

         

         

        린은 별다른 반박없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마치 감정기복 심한 고양이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처럼.

         

         

        “그나저나 어떻게 들어간다?”

         

        “우리가 켕길 게 뭐가 있어? 그냥 들어가면 되지.”

         

         

        루시가 불만스레 중얼거렸지만, 현실은 켕길 거 한가득이었다.

         

        우선 두 사람은 추적자 유무와 상관없이 여전히 발각되면 안되는 상황이었고, 이동 경로도 노출되면 안된다.

         

        배드 엔딩은 아니지만 용사 파티에게 들키면 그대로 강제 합류다.

         

        그렇게 되면, 정상적으로 합류하는 시점 전까지 예정된 루시와 파트너 캐릭터의 호감도 이벤트, 아이템 획득, 능력치 강화까지 모조리 생략된 채로 마족과 결전을 벌이러 가게 된다.

         

        호감도 따위야 더는 중요하지 않지만 아이템과 능력치 강화는 루시 전용 이벤트도 있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루시는 미완성인 채로 남은 시나리오를 진행을 하게 되고 당연히 엔드 스펙을 갖추지 못해 마지막 전투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가 된다.

         

        에팔테르가처럼 루시를 포대기에 싸서 숨길 수도 없다.

         

        그렇다고 그냥 정면 돌파를 시도해보자니 이 세상에 붉은 머리 여성이라고 하면 곧 루시에나 에스텔이 떠오를만큼 인지도가 높아서 될 것 같지도 않았다.

         

        결국 답은 하나.

         

        린도 원래부터 알고 있던 그것 밖에는 정답이 없었다.

         

        하지만 정말 내키지 않았다.

         

        루시와 린은 후드를 뒤집어 쓰고 도시 관문 앞에서 검문을 기다리는 줄 끄트머리에 섰다.

         

        상업도시 발터크루아.

         

        육로와 항구를 통해 각종 진귀한 물품들이 오가는 무역상들의 도시.

         

        제국에 속해 있지만 국가의 직접적인 관리를 받지 않고 길드 연합체에서 통치하고 있는 일종의 복속된 도시국가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기다리는 줄도 길고 검문 자체도 굉장히 꼼꼼하고 빡세다.

         

        에팔테르가에서처럼 능청 부리고 돈 몇 푼 쥐어주는 걸로는 어림도 없었다.

         

        금융도시와 함께 돈이 가장 많이 오가는 도시다보니 한순간의 방심이 어떤 금전적 손해를 가져오는지 길드 통치자부터 말단 경비까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신분증이 없지만 루시의 존재 때문에 감금되거나 하지는 않을 거다.

         

        대신 바로 황궁에 보고되어 티그리아의 순간이동 마법으로 즉시 용사 파티가 출두하여 그들을 잡아갈 것이다.

         

        재수 없으면 그 과정에서 쓸모 없는 짐꾼은 즉결 처형당할 수도 있었다.

         

        린은 결정했다.

         

        그래, 내키지 않는 걸 하는 게 뒤지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주위를 둘러보던 린의 시야에 그가 들어왔다.

         

        잘 닦인 길 옆 우거진 수풀 사이에 소탈하게 주먹밥을 먹고 있는 사내.

         

        척 봐도 깔끔하지 못한 복장에 먼지와 때가 덕지덕지 끼여 소매가 반질반질한 중년이었지만 눈빛만큼은 검문 행렬을 샅샅이 훑었다.

       

        이목구비 선이 강한 걸 보니 호불호는 타도 여자한테 꽤나 인기 있을법한 얼굴.

         

         

        “린?”

         

         

        루시의 부름을 뒤로하고 린은 행렬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가 말을 붙여보려 했다.

         

         

        “실은….”

         

         

        혀가 꼬였다.

         

         

        “사씨은….”

         

         

        발음을 절었다.

         

         

        “뭐하자는 거냐?”

         

         

        사내는 먹던 주먹밥을 집어 던지며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진지해져야 한다.

         

        아 진짜 하기 싫은데.

         

        린은 자신을 다독이고 나서야 제대로 내뱉을 수 있었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당신 같은 남자를 기다려 왔다우.”

         

         

        루시가 경악했다.

         

         

        “에엣…?”

         

         

        사내가 맞받아친다.

         

         

        “솔직히 나도 그랬어.”

         

        “정말로?”

         

         

        린은 토하고만 싶었다.

         

         

        “뻥이야.”

         

         

        사내의 표정을 보니 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젠장, 이 암호문을 알다니. 설마설마 했지만 대장의 말이 맞았군.”

         

        “대장?”

         

        “시치미 떼긴, 이걸 아는 사람은 단 한 명이라고 들었다.”

         

         

        꽤나 특별하게 취급 해주고 있었네.

         

        동향이라 그런가?

         

        닭살 돋는 암호문 확인이 끝나고 린과 사내는 일부러 얼굴을 굳힌 채 근엄하게 대화했다.

         

         

        “운이 좋군. 마침 대장이 귀환한 지 얼마 안 되었다.”

         

        “괜찮다면 지금 바로 가고 싶은데.”

         

        “안 그래도 그럴 참이다. 암호문이라고 해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여기 계속 남아있을 강단은 없다고.”

         

         

        사내는 턱짓을 하며 등을 돌렸다.

         

         

        “따라와.”

         

         

        은근히 걸음이 빨랐기에 서둘러야 했다.

         

        사내의 뒤를 쫓아 달리려던 린은 우두커니 서있는 루시를 발견하고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루시, 가아해.”

         

        “린….”

         

         

        루시는 울먹이며 물었다.

         

         

        “남자 좋아해?”

         

         

        린은 오늘 들어 벌써 두 번째로 눈을 질끈 감았다.

         

         

         

         

         

         

         

         

         

       


           


He Became the Only Ally of the Abandoned Warrior

He Became the Only Ally of the Abandoned Warrior

Abandoned Hero's Only Ally, 버림받은 용사의 유일한 아군이 되었다.
Score 6.8
Status: Ongoing Type: Author: ,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saved the Warrior who used to ignore and bully me and now she is obsessed wit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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