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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고 나서야, 나는 훈련을 끝마쳤다.

       

       땀에 푹 젖은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가쁜 숨을 토해냈다.

       

       떨어트린 훈련용 검의 겉면에는 내가 처리한 인형들의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처리한 더미 수:376개]

       

       

       “으음…”

       

       

       꽤나 높은 수치였으나, 만족할 정도는 못되었다.

       

       목표는 500개 이상이었는데.

       

       아무래도 낮은 스탯이 발목을 잡은 모양이었다.

       

       

       ‘……뭔가 안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은 감각이란 말이지.’

       

       

       몸이 머리를 못 따라가 준다고 해야하나.

       

       움직임이 생각한대로 따라주지를 않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복잡한 한숨을 흘리며 장비들을 정리했다.

       

       

       몇 시간 동안이나 쉬지 않고 검을 휘둘러댄 탓인지, 온 몸의 근육들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마나도 차오르는 족족 사용했더니 속까지 울렁거렸다.

       

       끈적해진 침을 뱉어내며 주변을 둘러봤다.

       

       

       “……”

       

       

       연무장은 어느새 텅 비어있었다.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다들 기숙사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나도 어서 돌아가야만 했다.

       

       너무 늦었다가 기숙사 출입을 제한 당하면 곤란하니까.

       

       

       대충 짐을 챙겨든 채로 연무장을 나서려던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시트 공자.”

       

       

       이 목소리는…?

       

       나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파일러 공녀님…?”

       

       

       그곳에는 라이덴의 전약혼자.

       

       마하렛이 팔짱을 낀 채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매혹적인 붉은색 눈동자와 길게 늘어진 은발의 머리칼.

       

       그녀 특유의 신비로운 분위기에 나는 흠칫 몸을 떨고 말았다.

       

       

       ……너무 비현실적으로 예쁘니까, 오히려 무서워.

       

       거기다가 라이덴이랑 얘 사이에는 껄끄러운 일들이 너무 많았단 말이야.

       

       뭔지는 모르겠으나 빠르게 용건을 처리한 뒤 사라져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시선을 맞췄다.

       

       

       “부르셨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마하렛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뭐야.

       

       왜 그래.

       

       

       “공손한 말투.”

       

       “……”

       

       “이제 와서 점잖은 척이라니, 같지도 않네요.”

       

       

       ……왜 갑자기 시비지?

       

       점잖은 척이라니, 나 요즘 되게 성실하게 생활하지 않았나?

       

       더 이상 주변에 밉보이지 않으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나는 억울하다는 감정을 담아 마하렛을 바라ㅡ

       

       

       “최근 몇 주 동안, 제가 아끼는 아이들을 실컷 괴롭혀주셨더군요?”

       

       

       보려고 했다가, 슬며시 시선을 깔았다.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민 신분의 우등생들, 레비온 자작가의 장녀, 플론트 백작가의 차남까지.”

       

       “……”

       

       

       전부 내가 두들겨 팼던 녀석들이다.

       

       아니, 물론 악감정이 있던 건 아니었고. 칭호작을 위해 제물로 바쳤던 불쌍한 양들이었다.

       

       

       “알고 있었죠? 그 아이들이 제 파벌이었다는거.”

       

       “……몰랐습니다.”

       

       

       노렸던건 아니다.

       

       막상 패고 보니까 다들 마하렛의 파벌이었던거지.

       

       그마저도 금태양과 아리엘이 말해주고 나서야 뒤늦게 알게 된 것이었다.

       

       

       “하, 거짓말.”

       

       

       물론 눈앞의 우리 공녀님은 믿어주실 생각이 없는 것 같지만.

       

       은발의 소녀는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기색을 뿜어냈다.

       

       

       “당신의 거짓말은 이제 지긋지긋해요… 과거에도, 지금도.”

       

       

       아마도 라이덴의 업보를 말하는 듯 했다.

       

       마하렛한테도 잘못한게 많기는 하지.

       

       아마 라이덴의 망나니 짓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본 사람 네 명을 꼽으라면 마하렛, 루시, 아리엘, 레이첼 정도가 되지 않을까.

       

       그렇게 내가 반성하는 척을 하며 딴 생각을 곱씹고 있던 그때.

       

       

       “당신은 기만으로 가득 찬 거짓말쟁이일 뿐이잖아요.”

       

       

       날카로운 한 마디가 폐부를 쑤시고 들어왔다.

       

       거짓말쟁이.

       

       순간 숨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예상치 못했던, 역린을 후벼파는 공격이었다.

       

       

       -나루야!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과거의 마수들을 떨쳐내려 해보았으나.

       

       무의미한 시도에 불과했다.

       

       이미 머릿속에서는 애써 잊고 있던 장면들이 재생되고 있었으니까.

       

       

       -나루야!

       

       

       싫다.

       

       이 기억은 싫다.

       

       꽉 조여오는 숨통에 목을 부여잡았다.

       

       거칠게 팽창하는 호흡이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리시트 공자?”

       

       “으, 허억… 허억…”

       

       

       힘이 풀려버린 다리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당황한 마하렛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리는 듯 했으나,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오, 오늘 훈련은 어땠어? 마, 많이 힘들었어?

       

       -으응… 나, 나는 괜찮아! 오늘은 마, 많이 안 혼났거든!

       

       -나, 나루가 앞으로도 쭈욱, 나랑 같이 있어줬으면 좋겠어!

       

       

       도와줘.

       

       도와줘 상태창.

       

       씨발 어디간거야, 이 목소리 좀 빨리 지워줘.

       

       듣고 싶지 않아. 그 말만큼은.

       

       말하지마.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줘.

       

       제발……

       

       

       -너만은, 내 옆에 있어주겠다고 말했었잖아.

       

       -……이 거짓말쟁이.

       

       

       “우욱……”

       

       

       헛구역질과 함께 혼절하려던 순간.

       

       모든 것을 지워내는 기계음이 또렷하게 울렸다.

       

       

       -띠링!

       

       [스킬 ‘철의 정신’이 사용자의 상태 이상(공황장애, 자살충동, 자학, 트라우마 등…)을 무효화합니다.]

       

       

       “하아… 하아…”

       

       

       나는 몸을 웅크린 채로 잠시 숨을 헐떡였다.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호흡도 정상적으로 돌아왔지만.

       

       도저히 털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뒤늦게 나타난 상태창에 대한 원망과 스스로를 겨냥한 혐오.

       

       그리고 누군가를 향하는 죄책감.

       

       엉망으로 뒤섞여버린 감정의 잔재들이 내 마음을 찍어눌렀다.

       

       

       “라이덴!”

       

       

       그런 상황 속에서 내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은, 애타게 내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 덕분이었다.

       

       

       “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에요? 저번에도 그렇고, 어디가 아픈거죠?”

       

       

       마하렛은 당황한 목소리로 내 등을 두드려주고 있었다.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 기다려요! 사람을 불러올게요. 늦은 시간이지만 의무실은 아직 열려있으니까……”

       

       

       마음은 고마웠지만.

       

       괜찮았다.

       

       이 이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으니까.

       

       상태창의 개입으로 머리가 개운해지기도 했고.

       

       

       “……괜찮습니다, 공녀님.”

       

       “라이덴…?”

       

       “민폐를 끼쳐서 죄송했습니다.”

       

       

       그녀의 손을 뿌리쳐 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머리가 뒤죽박죽이어서 그런지 행동이 조절되지가 않았다.

       

       비틀거리는 걸음과 함께 도망치듯이 자리를 벗어났다.

       

       

       조금…

       

       피곤한 느낌이었다.

       

       

       

       ***

       

       

       라이덴이 떠나고 고요함만이 남아있는 연무장.

       

       은발 머리의 소녀는 제자리에 멈춰선 채로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녀를 잡아먹은 상념이라 함은, 당연하게도 금방까지 자리에 있었던 소년에 대한 것이었다.

       

       

       -허억… 허억…

       

       괴롭게 헐떡이던 숨.

       

       애처롭게 흔들리던 검은색 눈동자.

       

       공포에 질려있는 듯 했던 표정.

       

       마하렛은 그 모든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왜…”

       

       

       분명 아무 일도 없었다.

       

       질책과 함께 그를 압박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정도가 심했던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자신이 쏘아붙인다고 해서 신경을 쓴다거나 그러지도 않을 사람이고.

       

       그렇다면.

       

       방금의 그 모습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민폐를 끼쳐서 죄송했습니다.

       

       

       마치 못 보일 꼴을 보이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던 모습.

       

       그는 두려움에 젖어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무서웠던 걸까요.’

       

       

       마하렛은 라이덴을 미워했다.

       

       아니, 미워하는 것을 넘어 증오하는 수준까지 왔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만큼이나 소녀와 소년 사이에 존재하는 감정의 골은 깊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데, 모른 척 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요.’

       

       

       그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변해버리기 전의 시절과 망나니 시절의 라이덴을 전부 통틀어서도.

       

       그렇게 떨고 있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소년에 대한 원망과는 별개로, 마하렛은 눈앞의 고통스러워 하는 타인을 무시할 정도로 잔인한 성정이 되지 못했다.

       

       그녀의 걱정은 어찌보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하아… 뭐, 자기가 알아서 하겠죠.”

       

       

       소녀는 긴 날숨을 흘리며 생각들을 털어냈다.

       

       그래, 제멋대로인 사람이니. 굳이 신경 써줄 필요는 없겠지.

       

       애초에 자신이 그를 걱정한다는 것 자체부터가 웃기기도 하고.

       

       마하렛은 씁쓸한 표정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

       

       

       -달칵, 끼이이익…

       

       출입 제한 시간에 맞춰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기숙사.

       

       무거운 몸을 이끌고 현관문을 잡아당기니, 문 뒤에 서있던 누군가가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왔다.

       

       

       “아, 도련님! 오셨어요?”

       

       

       레이첼이었다.

       

       잠자리에 들기 직전이라서 그런지, 하녀복 대신 가벼운 잠옷 차림을 한 모습.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은 양갈래 머리도 단정하게 풀어져 있었다.

       

       소녀는 상큼한 미소와 함께 나를 맞이해주었다.

       

       

       “오늘도 잘 지내셨나요?”

       

       “……응, 다녀왔어.”

       

       

       밝은 목소리로 대답해주고 싶었으나, 이게 최선이었다.

       

       나는 물에 젖은 솜처럼 늘어진 채로 내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레이첼 역시 그런 나의 반응을 이상하다고 여겼는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티내고 싶지 않았는데.

       

       항상 느끼는 거지만 포커 페이스는 어렵구나.

       

       

       “괜찮아.”

       

       “표정이 어두우신데……”

       

       “조금 피곤해서 그래.”

       

       

       억지로 얼굴 근육에 힘을 주어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어색한 웃음기를 잘라붙였다.

       

       꽤나 그럴듯한 가면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레이첼의 눈빛은 어두워져만 갔다.

       

       

       “……목욕물은 준비되어 있어요. 씻고 바로 주무시면 돼요. ”

       

       “그래.”

       

       

       고맙게도 레이첼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역시 눈치가 빠르다니까.

       

       나는 레이첼을 뒤로 하며 방 문을 닫았다.

       

       

       “……빨리 잠이나 자야지.”

       

       

       괜찮을거야.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이고, 뽀송한 잠옷을 입고, 푹신한 침대에서 눈을 감으면.

       

       이 눅진한 우울도 씻어낼 수 있겠지.

       

       나는 그리 중얼거리며 욕실에 내 몸을 밀어넣었다.

       

       하지만, 그런 바램을 배신하듯이.

       

       

       -나루야, 위험해!

       

       -끼이이익, 쾅!!

       

       -엄, 마…?

       

       

       나는 그날 밤.

       

       내가 꿀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잔혹한 악몽을 꾸고야 말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2024.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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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Depressed Kendo Player Possesses a Bastard Aristocrat

A Depressed Kendo Player Possesses a Bastard Aristocrat

A Depressed Kendo Player Possessed by a Bastard Aristocrat DKPBA 망나니 귀족에 빙의한 우울증 검도 선수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Don’t worry, Mom.

This time I will be truly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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