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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

       내가 외교의 장에서 그런 개판을 쳐놨는데도 별다른 말 없이 넘어간 것을 보면, 황제는 정말로 내가 그렇게 개판을 쳐도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게 아니면 그만큼 제국의 힘이 깡패 같아서 말 잘못했다가 얻어맞을 생각을 하고 지레 겁먹었거나.

        

       사실 본편에서도 황제가 본격적으로 전 세계와 전쟁을 벌이는 미친 짓을 하려고 하고, 실제로도 그 직전까지 가다가 주인공 일행의 활약으로 저지되는 것을 보면 왕국과 법국은 그래도 그럭저럭 현명하게 대처하는 중이다. 현재로서는 제국이 스스로 분열하거나, 제국 외의 모든 국가가 연합하지 않는 이상 제국과 전쟁을 해서 이길 수 있는 나라가 없으니까.

        

       설령 전쟁을 하더라도 제일 먼저 제국을 친 쪽은 절대로 무사하지 못할 거고.

        

       ……그리고 나는 그 제국의 가장 중추인물 중 하나지. 아직 열 네 살인데.

        

       나 전범 되는 건가?

        

       뭐, 어차피 그때까지는 몇 년 남았으니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하자. 어차피 필요하면 아예 그 모든 개판을 없던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황제를 암살해버리면 그만이니까.

        

       그 전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기도 했고.

        

       아무튼, 그래서 내가 벌인 그 버릇없는 짓이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은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진짜 놀라웠던 일은 따로 있었다.

        

       “왕녀님과 대화를 나누셨다는 뜻입니까?”

        

       “왜? 나는 그러면 안 돼? 너는 3국이 모이는 회담장에 제국 대표로 있었으면서.”

        

       “아뇨,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나에게 그렇게 말하는 앨리스의 얼굴에는 문자 그대로 ‘뿌듯함’이 드러나 있었다.

        

       그럴만도 했다. 평소에 거의 황궁 안에서 공부와 수련만 하는 앨리스였으니까. 어떤 일을 해냈다는 것 자체가 뿌듯하겠지. 그것도 별 볼 일 없는 일도 아니고, 왕국의 유일한 왕녀와 친교를 다졌다니까.

        

       국왕은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게임에서 대사 몇 번 정도밖에 출연하지 않았었으니까.

        

       하지만 그 딸인 샤를로트는 선한 사람이다. 누구 앞에서 위선을 꾸밀 성격은 절대 아니었다. 애초에 공략할 수 있는 히로인인데 그렇게 속이 검은 캐릭터로 나오면 인기가 그렇게 많지도 않았을 거다.

        

       만약 앨리스가 대화한 사람이 다른 인물이었다면 그 인물에 대해 의심해보았겠지만, 샤를로트라면 큰 문제 없으리라. 어차피 내년에 아카데미에서 만날 예정이고. 샤를로트는 국왕에 의해 유학생으로 보내질 테니까.

        

       황제가 이번에는 앨리스를 엄하게 질책하지 않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직접 그러지 말아 달라고 간청한 것도 있을 거고.

        

       “보람찬 시간을 보내셨군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앨리스는 뽐내듯 턱을 치켜들었다.

        

       솔직히 고고하다기보다는 귀여운 인상이지만.

        

       *

        

       그 후로는 특별한 사건이 없었다. 황제는 나를 따로 불러서 이것저것 물어보지도 않았고, 또 다른 누군가를 암살하라는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나는 그게 나도 내년에 아카데미에 다니게 될 예정이라 그런 것인 줄 알았다. 학생으로 들어갈 학교에 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퍼지면 곤란하니까. 게다가 황제가 만약 나를 아카데미에 보낸다면 그건 열심히 공부하라고 보내는 것이 아니라 후에 중요한 자리에 오를 귀족들, 그리고 능력 있는 평민들을 조사하기 위함일 것이다.

        

       원작의 클레어도 그랬다. 그리고 클레어는 처음부터 아카데미에 다닌 것이 아니라 도중에 황제의 의향으로 편입한 편입생이었다. 심지어 본인은 딱히 아카데미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도.

        

       그러니까, 처음부터 아카데미에 입학할 생각으로 공부도 열심히 하고 모의고사도 꼬박꼬박 참석하고 있는 나는 당연히 아카데미에 바로 입학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네가 가 주어야 할 곳이 있다.”

        

       네?

        

       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을 참기 위해 굉장한 노력을 해야 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일이 예정되어있으면 미리미리 말을 해주셔야죠.

        

       “제국 북부의 군벌들을 정리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구나. 리클란트 자치국이 결국 우리 제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처리해야 할 군벌 수장들의 정보를 줄 테니 정리하고 오거라.”

        

       아, 군대 문제인가.

        

       사람 어디로 오라 가라 하면서도 일이 코앞에 닥치고서야 이야기해주는 걸 보면 이 세계 군대도 참 군대다웠다.

        

       “……알겠습니다.”

        

       물론, 여기서 내가 거절할만한 근거는 없다. 기껏해야 ‘전장 대신 학교에 가고 싶습니다’ 정도가 전부일 텐데, 황제는 애초에 나 학교 보내주려고 여기서 키워온 것이 아니니까.

        

       다만, 내가 전장으로 간다고 해서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니다.

        

       입학시험이야 전장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에서 치르면 되고, 아직 내년 4월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많이 남았으니까.

        

       ……만약 이 게임이 모티브로 삼은 유럽 국가 식으로 하면 원래 학기 시작은 8월에서 9월이 되어야겠지만, 아제르나 전기는 일본 게임이다. 해외에 수출이 되고 있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일본 내에서 가장 잘 팔리는 게임이었고, 당연히 게임적인 내용도 일본 플레이어들의 입맛에 맞도록 되어있다.

        

       그리고 학원물을 바라고 게임을 사는 일본 게이머가 굳이 유럽식 학기제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황립 론다리움 아카데미 또한 마찬가지로 4월 초에 입학, 그리고 3학기라는 일본식 학기제를 따른다. 그래야 일본 애니메이션 식 여름방학, 겨울방학 에피소드를 넣을 수 있으니까.

        

       참고로 배경 모티브는 유럽인 주제에 발렌타인 데이 이벤트도 있다. 1년을 어떤 캐릭터와 함께 보냈는지에 따라 초콜릿을 주는 히로인도 바뀌고.

        

       “혹시 아쉽느냐?”

        

       “…….”

        

       황제가 그렇게 물어서, 나는 고개를 들어 황제를 보았다. 황제는 평소와 같은, 조금 미소 짓고 있지만 별다른 감정은 내비치지 않는 표정 그대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닙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황제가 무엇을 묻는지는 잘 알고 있다. 그도 내가 앨리스와 함께 입학시험 공부를 해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이번 명령은 내가 진짜 황녀인 앨리스와 다른 위치에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려주기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백작 암살 이후로 처음 있는 암살 임무였다. 그것도 온갖 군벌이 궐기 중인 북부. 일부 겁도 없는 군벌은 제국이 정해둔 경계선을 침범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황제는 이참에 그들을 정리해버릴 생각인 모양이었다.

        

       “흠.”

        

       황제는 그런 의도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낸 뒤,

        

       “알았다. 이만 가 보거라. 출발은 일주일 뒤로 하마. 곧 군에서 직접 사람이 와 자세한 사항을 알려줄 것이다.”

        

       그렇게 말했다.

        

       ……만약 황제의 의도가 그런 것이라면, 내년 4월 입학은 무리일 것 같다.

        

       아쉽게 됐네.

        

       *

        

       “진짜로 전장으로 가는 거야?”

        

       방에서 짐을 챙기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앨리스가 그렇게 물었다.

        

       나는 가방 옆에 수통 주머니를 달다가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땀범벅이 된 앨리스가 열린 문 앞에 서 있었다.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내 대답에, 앨리스는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오면서 말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고 그냥 넘어가려고? 너도 아카데미 가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으면서!”

        

       음…….

        

       아카데미를 가고 싶었던 건 맞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도 사실이다. 앨리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열심히. 내가 좋아하던 캐릭터들이 가득한 곳이다. 나와 헤어져서 원작보다 훨씬 행복하게 자랐을 클레어가 과연 아카데미에 입학했을지도 궁금했고, 원작과는 다르게 앨리스와 친교를 맺은 샤를로트의 반응도 궁금했다.

        

       어쩌면 내가 그 원작 스토리에 휘말려 들어서 주인공 일행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엄청 위험한 일이 있다면 내가 미리미리 처리해줄 수도 있고.

        

       ……사실 후자는 실제로 할 생각이긴 했지만.

        

       지금 당장 가지 못한다고 해서 앞으로도 영영 못 가는 것은 아니다. 설령 학생이 아니더라도 주인공 일행의 상황에 개입하는 법은 몇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뭐라고 말 좀 해봐!”

        

       생각에 잠긴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더니, 앨리스는 내가 할 말을 잃었다고 생각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북부 국경 지대 너머에 있는 군벌 세력을 정리하고, 리클란트 자치국의 정치 상황을 안정시키라는 황제 폐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황제 폐하의 명령, 이라는 말에, 앨리스는 순간 할 말을 잃은 모양이었지만, 곧바로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

        

       나는 앨리스의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래서라니,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이 나라에서 황제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제국 의회가 괜히 황제의 말에 기를 못 펴는 것이 아니다. 의회는 철저하게 민중의 투표로 결정되는데, 민중은 의회가 황제를 따르기를 원하니까. 황제의 패권적인 정책은 제국민들에게 ‘이 나라의 국민’이라는 자존심을 세워주는 형태다. 그리고 실제로도 황제 덕분에 국민의 상황이 아주 좋아지기도 했고.

        

       대부분은 식민지에서 헐값에 뜯어온 원자재 덕분이지만.

        

       그리고 제국 의회를 뽑는 ‘국민’, 즉 참정권이 있는 자는 ‘순수 제국민 성인 남성’뿐이다.

        

       미성년자야 그렇다 칠 수도 있겠지만…… 아니지, 사실 미성년자를 두고 ‘그렇다 치고’ 넘어가는 것도 이상하다. 이 나라에서는 12세가 넘는 이는 사실상 성인으로 쳐서 죄다 공장에 처박아버리니까.

        

       그게 국가 정책이 아니라고 해도, 극도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그리고 강력한 황권이라는, 대체 어떻게 융합되었는지 알 수 없는 극단들이 마구 섞여 있는 곳이 이 나라였다. 황제의 최종 목적은 그 모든 것을 한곳에 몰아넣고 융화해 하나의 제국을 만드는 거고.

        

       말이야 그럴싸하지만, 그 방법이 가장 우악스러운 외교법, 전쟁이라는 점에서 오답이다.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황제는 기꺼이 벌일 생각이었다.

        

       아무튼, 12세의 어린아이에게 하루 열네 시간씩 막노동을 시키고, 그 아이들이 술을 마시건 담배를 피우건 아편에 찌들건 관심도 없으면서, 정작 투표권은 21세가 넘어서야 준다. 그때까지 멀쩡하게 살아남으면 다행이고, 살아남는다고 해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 정치에 제대로 된 관심을 가질 수 있을 리가 없다.

        

       덕분에 군대에는 언제나 자원하는 이가 넘친다. 장애를 가지거나 배고픔에 허덕이는 자가 전쟁에서 힘을 내 싸울 수 있을 리 만무하니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운동까지 시켜준다. 거기에 보수도 공장에서 손을 걸고 일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가끔 목숨 걸고 싸워야 하지만, 기술력이 압도적이라 사상자 수는 상대에 비해 적고, 보상금도 재깍재깍 잘 나온다.

        

       ……이렇게 생각하니, 일부러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 같기도 하고.

        

       거기에 여성은 참정권이 없고, ‘순수 제국민’이 아닌 식민지 출신 사람도 참정권이 없다. 혼혈도 마찬가지다. 최소 쿼터 정도가 되어야 순수 제국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고, 그나마도 ‘식민지 티’가 너무 많이 나면 거부당할 수 있다.

        

       노동자들은 식민지인이 자기네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고 생각하고, 일부에서는 외국인이 비밀결사를 만들어 국가의 배후에서 중상모략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대충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들이 많지 않은가?

        

       뭐, 그러면서도 역사 속에는 여제도 있었다는 게 웃긴 말이지만.

        

       “황녀라면서? 뒤에 황제의 권력을 지고 있으니 더 당당해도 된다면서? 그러면서 왜 그 명령을 그냥 곧이곧대로 듣는 거야?”

        

       “황녀라고 해도 같은 황녀가 아닙니다. 저는 황제 폐하께서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여 데리고 온 존재이고, 황녀님은 정말로 이 제국을 이어받을 재목이시니까요.”

        

       “……그러니까, 네가 무슨 도구라도 된다는 소리야?”

        

       그야 당연하지.

        

       황제는 실제로도 나를 도구처럼 생각할 테니까.

        

       딸로서 사랑하는 것은 사실일 거다. 루스, 제이든, 그리고 다른 형제자매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작중에서 황제는 자기 자식이 죽을 때마다 무척 가슴 아파했다.

        

       하지만, 동시에 황제에게는 그 자식이라는 존재조차도 결국 도구다.

        

       굉장히 아끼는 도구와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도구의 차이라면 설명이 될까?

        

       당연히 앨리스는 그 도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도구였고.

        

       ……하지만 그렇다고 앨리스한테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 그러기에 앨리스는 너무 어리다.

        

       나는 다시 배낭 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다시 돌아올 테니까요. 죽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내가 지금 그걸 말하는 게……!”

        

       앨리스는 답답하다는 듯 내 등에 대고 소리치다가 말을 멈췄다. 아직 문이 열려있었다. 여기서 소리 지르면 하녀들이 전부 듣겠지.

        

       종종 복도에서 떼를 쓰던 앨리스지만, 그래도 나이를 먹으면서 그런 행동이 자기 이미지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배웠다. 물론 그래도 종종 떼를 써서 사람들을 곤란하게 하긴 했지만.

        

       “…….”

        

       한동안 앨리스는 자기감정을 어떻게든 다스려 보려고 하는지 씩씩거렸다. 표정은 보지 못했지만, 거친 숨소리가 계속 들렸으니 아마 그랬을 거다.

        

       그리고 겨우 진정한 앨리스는—

        

       “……아버지께 가겠어.”

        

       —아니, 전혀 진정하지 못한 모양이다.

        

       “황녀님—”

        

       내가 고개를 뒤로 돌렸을 때는 이미 앨리스가 방 밖으로 뛰쳐나가 버린 뒤였다.

        

       “……하아.”

        

       나는 가볍게 숨을 내쉬고, 싸고 있던 짐을 내려놓은 뒤 앨리스 뒤를 얼른 쫓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플러스 달았습니다! 선작수도 1000이 넘었습니다! 모두 여러분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내일도, 모레도, 제가 쓰고 싶은 모든 이야기를 다 쓸 수 있을때까지 독자 여러분을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언제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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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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