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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

       

       

       

       

       

       

       

       

       

       

       

       

       ‘뭔가 달라보이긴 해.’

       

       의문의 사내가 엘든 라펠리온이 맞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솔직히 조금 무서웠었다.

       머나먼 땅에서, 의외의 곳에서 마주친 것이 반가워 덜컥 인사를 해버린 것이 후회될 정도로 말이다.

       재학 시절 내내 몇 번 말을 섞어보지도 않은 동급생에게 괜히 아는 척을 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게다가 엘든은 늘 술냄새를 풀풀 풍기며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는, 가끔 동급생들을 괴롭히기도 했던 학생이었다.

       그것이 뒤늦게 떠올라버렸고, 일은 저질러진 후였다.

       

       “졸업반 때 네 자리 대각선 뒷자리에 앉아있었는데?”

       “흐음.”

       “기억나지?”

       “모르겠는데.”

       “…….”

       

       엘든이 자신을 기억해내지 못 했을 때, 사실 ‘잘못 봤다’며 돌아가려 했던 아리엘이었다.

       그러려던 순간, 엘든이 자신의 이름을 내뱉었지만 말이다.

       

       “아리엘… 이었나?”

       

       당시만 해도 엘든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왔던 것이 다행일지, 불행일지 몰랐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 참. 혼약대전에서 최종 후보까지 올라갔다는 거 들었어. 축하해.”

       

       물론 어색한 시간은 있었다.

       

       “하, 하핫. 뭐, 너, 너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 아니. 그러니까 이성적으로 뭐 괜찮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다른 후보들이랑 비교했을 때 뭐, 그렇다…는…?”

       

       자아성찰과 함께 기권을 선언했다는 엘든에 마땅한 답을 내놓지 못 해, 한차례 풍파를 맞았던 것이다.

       딱히 관심없는, 형식적인 인사였을 뿐이었고, 그저 7층 책탑에 대해 묻고 싶었던 그녀가 이겨내기엔 상당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풍파였었다.

       

       “됐어. 어차피 기권표가 보류되서 아직 공식적으론 최종 후보니까.”

       “아… 그렇구나.“

       

       다행히 무사히 풍파가 넘어갔고, 곧장 관심을 돌렸다.

       

       “근데 소설 쪽엔 관심없지 않았어?”

       “이제라도 취미를 붙여볼까 해서.”

       “호오… 그렇단 말이지?”

       

       눈이 반짝여졌다.

       딱히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는 건 아쉬웠지만, 그저 재밌게 읽었던 책을 추천해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그리고 엘든 라펠리온에 대한 흐릿한 기억에 왜곡이 있었던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는 달라보였다.

       분위기가 달라보인달까.

       기억 속 엘든은 되게 사납게 생겼었는데.

       물론 착각이리라 여겼다.

       또한, 아무렴 어떤가 라고 생각했다.

       그가 과거에 악질이었든 아니었든 상관할 바 아니었으며, 아리엘의 눈엔 그저 순수 문학에 눈을 떼려는 입문자로 보일 따름이었다.

       소설광에겐 이제 막 걸음마를 떼려는 아기로 보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스륵.

       

       힐긋.

       

       스륵.

       

       힐긋.

       

       자신이 추천해준 책을 읽는 입문자의 눈치를 보기 바쁜 그녀였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추천을 해주고 그것을 읽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또한, 답을 기다리는 것은.

       처음 느껴보는 두근거림, 자신이 느낀 감상이 옳았을지 검증받는 것은 꽤나 설레이는 일이었다.

       물론 설렘과 더불어 걱정도 들었다.

       

       재미없으면 어떡하지?

       

       재미없다고 하면 어떤 책을 추천해줘야 할까?

       

       혹시나 추천해준 게 재미없다며 순수 문학을 읽지 않으려하면 어떡하지?

       

       꺗.

       

       그것만큼은 안돼.

       

       엘든이 책장 한장을 넘길 때마다, 설렘과 걱정이 곱절에 곱절로 커져갔고 심장이 터질듯 두근거려왔다.

       

       다행히.

       

       “재밌어.”

       “어, 응?”

       “이거, 재밌다고. 걱정하는 거 같아서.”

       

       기대했던 답이 들려왔다.

       

       꺄–!

       성공이다앗–!

       

       하마터면 비명을 내지를 뻔한 아리엘이 속으로 쾌좨를 내지르며 미소를 짓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휴우, 안도의 한숨과 함께 말이다.

       그리고 엘든이 고전과 신화에 대한 책을 추천해달라고 했을 땐, 그야말로 심장이 폭죽처럼 터지는 것 같았다.

       처음 느껴보는 기쁨이었다.

       자신만 알아야 했던 재미를 누군가에게 공유해준다는 게 이토록 기쁜 일인지 처음 느낀 아리엘이 연신 히죽거렸다.

       

       게다가.

       

       밥을 먹을 친구가 생겼다.

       저녁까지 굶을 것을 대비해 배가 터지도록 아침을 먹지 않아도 됐다.

       그럼에도 늦은 오후가 되면 연신 울려대는 꼬르륵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됐다.

       

       “그럼 이만 가볼게. 저녁엔 훈련이 있어서.”

       “응. 그럼 내일도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래서일 거다.

       먼저 약속을 해버린 것은.

       엘든과 합의를 하지 않았음에도 대뜸 이 자리에서 기다린다는 약속을 내뱉어버린 것은.

       숙녀로서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아리엘이 그 약속을 해버린 것이다.

       

       “그럼 간다.”

       “응!”

       

       그렇게 우연한 만남이 끝이 났다.

       아쉬움이 드는 건,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길게 나누지 못해 그런 것이리라.

       그래도 오늘 밤에 추천해준 것들을 전부 읽어본다 했으니, 내일이면 얘깃거리가 많이 생겨있겠지?

       그리 생각한 아리엘이 멀어지는 엘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둬 독서를 재개한다.

       책상 아래의 발끝이 기분 좋게 까딱거리는 것은, 아리엘도 인지하지 못 한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

       

       

       

       “그럼 레이첼을 훈련장으로 불러오겠습니다.”

       “…별채까지는 잘 찾아갈 수 있겠나? 도와줘?”

       “크흠흠, 도, 도서관이 워낙 복잡해 실수한 것일 뿐이옵니다.”

       “가다가 길을 잃거든 그곳에 서서 어른의 도움을 기다리….”

       “가, 가보겠사옵니다.”

       

       방범 직원에게 무단 침입 현행범으로 체포되어 도서관 밖으로 끌려나온 렌들러 영감.

       얼마나 대차게 길을 잃었으면 지하 4층까지 내려갈 수가 있었을까.

       사서의 말로 거긴 자신들도 찾아가기 힘든 곳이라고 하던데.

       그나저나 안내해야 할 일이 많은 중세시대 귀족가문의 집사장이 길치라, 이제껏 살아남아 집사장에 오른 것이 용한 듯싶다.

       

       어쨌든.

       

       렌들러를 보내고 훈련장에 도착한 상태였다.

       도서관과 별채의 사이에 위치해있던 터라 구태여 재걸음을 할 필요가 없어 렌들러만 보낸 것이었다.

       대공성 내부엔 훈련장이 여러 곳 있다.

       근위병들이 전술을 훈련하는 연병장, 개인 훈련을 할 수 있는 훈련장, 그리고 체력 운동을 할 수 있는 단련장이 대표적인데, 지금 내가 있는 곳은 ‘귀족’들만 이용이 가능한 훈련장이었다.

       딱히 권위의식을 세우고자 함은 아니었다.

       그저, 즐겁게 훈련하고 있을 평민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을 따름이었다.

       

       ‘훈련 끝내고 저녁 먹고 책 읽으면 하루 끝이겠군.’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민들이 사용하는 훈련장은 비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이 쌓이는 개방된 공간이지만, 귀족들을 위해 마련된 훈련장은 뚜껑과 벽이 있는 폐쇄된 공간이었다.

       귀족 우월 사회의 단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공간.

       아무도 없어 다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도 풍기는 훈련장, 그곳을 거닐며 레이첼을 기다렸다.

       

       10분쯤 지났을까.

       

       끼익.

       

       훈련장의 출입문이 열렸고, 레이첼인가 싶어 쳐다본 시선에 후회캐 3인방이 들어왔다.

       

       ‘…흠.’

       

       당연하게도 훈련을 하고자 온 것이 아닐 터.

       폐쇄된 공간에 홀로 있는 변절자에게 청탁 또는 협박을 하기 위함일 터였다.

       특히나 여주인공께서 평가단의 족쇄도 풀어주었고 말이다.

       충분히 예상했던, 당연히 진행되리라 생각했던 그림이었기에, 긴장보다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언제 오나 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예상했던 그림에 대비책 하나 세워두지 않을 정도로 멍청하게 살아오지는 않았다.

       앞서 얘기했듯, 인간이란 지성체는 최상보다 최악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며, 최악에 처했을 때의 대비를 해두어야 하는 법이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면, 대비와 더불어 최악을 최상으로 뒤집을 묘수를 강구하는 것.

       마침 모략질과 음해질이 일상인 그들에게 딱인 보험이 하나 있었다.

       그 보험을 챙겨둔 내겐 후회캐 3인방의 은밀한 방문은 외려 반가운 상황이었다.

       또한, 청탁보다 협박이 들어오길 바랐다.

       이어질 귀찮은 상황들에서 이 가련한 기권자를 구원해줄 보험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웃으며 그들을 맞았다.

       

       “귀하신 세 분께서 귀한 걸음을 하셨군요. 어쩐 일들이십니까?”

       

       여주인공께서도 이러한 상황을 유도하기 위해 평가단을 치워준 것이다.

       후회캐 3인방이 험악한 표정으로 나를 찾아오는 건 당연지사인 노릇이자, 참회보다 응징을 택하는 이들에겐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대공녀와의 첫 회동에서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희망을 주어 참전 의지를 샘솟게끔 만들려는 것이었고, 그 결과 후회캐 3인방에게 시기와 질투를 받게 되었다.

       아마도 기권 선언이 자신들을 기만하고 대공녀의 환심을 살 묘책이었다 생각할 터.

       그들의 생각과 결정은 내게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맛있게 튀겨진 팝콘과 함께 관전자 모드로 들어선 내게 직접적인 해악을 끼치겠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엄한 곳에 불똥을 튀기려 한다면, 그 불씨를 꺼뜨려주어야 하는 법.

       

       가진 것이 없다 하여 부당한 일에도 항거하지 못 한 채 억울한 현생을 살아야 했었다.

       빼앗길 것이 많아 밤잠까지 줄여가며 빠듯한 현생을 살아야 했었다.

       더 이상, 억울한 생을 살지도, 부당한 일에 순응하지도 않으리라.

       

       “독서에 훈련이라… 엘든, 자네는 참으로 태평하군?”

       

       그럼.

       당연한 소리를.

       어깨를 으쓱이며 익살스레 답해주었다.

       

       “기권자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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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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