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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

       2황자 이리드는 자신이 불러올 수 있는 모든 인력을 긁어모았다. 누군가에게는 권위로, 누군가에게는 돈으로, 누군가에게는 인정으로. 가능한 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알량한 자존심은 한 꺼풀 벗어던진 지 오래였다. 센트라 구출을 위해서 평소 사이가 좋지 않은 1황녀 일레인에게도 손을 벌렸다. 

       

       평소의 사이를 감안하면, 그녀가 맨입으로 이리드의 부탁을 들어줄 가능성은 낮았다. 그래서 이리드는 황위 계승 경쟁에서 다소의 손해를 볼 각오까지도 했으나⋯⋯.

       

       의외로 1황녀는 기꺼이 초대에 응했다. 누님으로서 가여운 동생의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말과 함께. 이리드는 정치적인 빚을 지워두겠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회의실에 들어가는 길, 이리드는 1황녀 일레인과 마주쳤다.

       

       화려한 드레스와 목에 두른 숄. 눈길을 사로잡는 빼어난 미모와, 누더기처럼 꿰맨 자국이 있는 두 손. 일레인과 만난 지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리드의 기억에 있는 모습과 같았다.

       

       황실의 혈통임에도 그녀의 머리카락은 백금의 색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혈통과 정통성을 의심하는 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1황녀는 능력으로 증명했기 때문에.

       

       그리고, 함부로 떠드는 이들의 머리를 두 손으로 모조리 깨버렸으므로.

       

       1황녀는 수행원을 대동하지 않았다. 마계에도 단신으로 발을 들여놓은 여인다운 자신감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을 해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굴었다. 

       

       이리드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리드? 오랜만이구나. 어렸을 때처럼 누님에게 안겨보겠니?”

       

       1황녀가 두 팔을 벌렸다. 만국 공통의 호의적인 제스처임에도, 이리드의 눈에는 입을 벌리고 기다리는 사자의 아가리처럼 보였다. 

       

       1황녀는 예전부터 그랬다. 그녀는 이리드를 굴복시키기를 즐겼다. 이리드가 열네 살의 생일을 맞이해 연회를 열었을 때, 온갖 귀족들이 모인 이벤트 홀에서도 이렇게 두 팔을 벌리고는.

       

       마치 애를 다루는 것처럼 끌어안고── 들어 올려서. 무려 세 바퀴나 원을 그리며 돌지 않았던가. 어린애 취급에 항의하려고 해도, 드래곤 발톱에 끼인 것 같은 완력을 느끼고 나면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전까지의 이리드였다면, 굴종하며 1황녀의 품에 안겼을 것이다.

       

       1황녀는 이리드의 뒷머리를 잡고 얼굴을 자신의 깊은 가슴골에 파묻었을 테고, 귀족들은 그 모습을 보고는 이리드의 평가를 깎았을 것이다. 역시 황좌에 어울리는 것은 1황녀라면서.

       

       그러나 지금의 이리드는 달랐다.

       추억을 되새기는 한, 그는 폭풍 앞에서도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사양해 두지. 이미 내 품에는 주인이 따로 있다.”

       

       “섭섭하네⋯⋯. 그래도, 조금은 남자다워진 것 같아서 이 누님은 기쁘단다. 우리 왕자님이 어느새 여자라도 만난 걸까?”

       

       “만났지.”

       

       “⋯⋯자, 잠깐만, 만났다고?!”

       

       이전처럼 굴종하지 않는 이리드에게 당황한 것일까, 1황녀는 당혹스럽다는 목소리를 냈다. 작은 반항이었지만, 어쨌든 한 방 먹였다.

       

       이리드는 가슴 깊은 곳에서 뿌듯함을 느끼며 등을 돌렸다. 자신은 성장했다. 이제 이 성장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센트라를 구하기 위한 회의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얘, 만났다는 게 무슨 소리니⋯⋯. 조금만 더 자세히 설명해 주면 안 될까? 응?”

       

       ===============================================================

       

       “우선은, 갑작스러운 지원 요청을 받아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군. 이번 회의의 목적은 긴급상황에서의 인명구조 및 소규모 반란 대응 시뮬레이션이다. 복합적인 과제가 주어지는 만큼, 다양한 전문가들을 불러 모았다. 소개부터 하지.”

       

       2황자가 상석에서 운을 떼자, 테이블에 앉은 순서대로 일어나 자신의 신분을 소개했다.

       

       깔끔한 정장 차림의 여성이 일어나 묵례했다.

       

       “제국수호방위국 분석관 C입니다.”

       

       그다음으로는, 잿빛 로브를 두른 노인이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숙였다.

       

       “적색 마탑 원로⋯⋯ 펄선이오. 재미난 면면들을 모으셨구려?”

       

       맞은 편에 앉은 1황녀가 다소곳하게 손을 모으며 말했다.

       

       “1황녀 일레인이에요. 우리 동생을 돕기 위해 모여줘서 기쁘네요. 그 헌신은 제가 기억해 두죠.”

       

       

       2황자 이리드는 머릿속에서 정치어 번역기를 돌렸다. 

       띠리릭.

       

       1황녀 일레인이에요 => 나 황제 유력후보 1황녀인데.

       

       

       우리 동생을 돕기 위해 모여줘서 기쁘네요. => 불편하다.

       

       

       그 헌신은 제가 기억해 두죠. => 너희들 얼굴 기억했다.

       

       칼같이 정치질을 시작하는 1황녀의 모습에 이리드는 치를 떨었다. 그 정치적 협박에, 순수하게 재밌어 보여서 참여했던 적색 마탑의 원로는 지금이라도 나가야 하나 고민하는 표정이 됐다.

       

       이리드는 긴급 대응을 시작했다.

       

       “내가 초빙한 이들이고, 그건 누님 또한 마찬가지다. 도움을 주러 온 거라면 상황에 걸맞게 처신해 줬으면 좋겠는데.”

       

       => 닥쳐.

       

       “어머, 그래⋯⋯. 이건 우리 동생의 회의니까, 동생이 이끌어야 맞는 거겠지. 처음 겪는 일이라서 당황했어. 이 누님을 용서해 주겠니?”

       

       => 그래 이 응애야.

       

       일방적인 딜교에 이리드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러나, 1황녀는 이 회의에 분명히 도움이 된다. 그녀는 몸을 쓰는 모든 행위의 달인이었으니까. 이리드는 턱짓으로 다음 순서에게 눈치를 주었다.

       

       눈치를 받은 미친 마법사가 일어나서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자색 마탑의 마법사입니다.”

       

       “⋯⋯자네는 이름도 밝히지 않는겐가?”

       

       “밝힐 정도로 가치 있는 이름이 아니기에. 그런 이름은 따로 있죠.”

       

       미친 마법사는 시작부터 예의와 법도를 타파하며, 옆에 나란히 앉은 소녀를 두 손으로 가리켰다. 빙결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얼어있었다.

       

       “자색 마탑의 마탑주, 유나 유렌스토 바이올렛아이리스님입니다.”

       

       “⋯⋯아, 안, 반, 가갑⋯⋯.”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황자님. 자색 마탑주 유나 바이올렛아이리스입니다. 미력한 힘이나마 최선을 다해 보태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군요.”

       

       “회의실 들어올 때부터 미동도 없길래 인형이라고 생각했더니, 사람이었군요?”

       

       “⋯⋯무, 무례⋯⋯ 죄송⋯⋯.”

       

       “1황녀님의 무례한 언사에 사과를 요구하고 계십⋯⋯ 억!”

       

       빡!

       멋진 원인치 펀치가 미친 마법사의 옆구리에 작렬했다. 

       

       황실 모독죄에 생존본능이 최대치까지 차오른 자색 마탑주는 속사포처럼 자기소개를 내뱉었다.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말을 뱉어야 했다.

       

       “마탑주유나바이올렛아이리스입니다잘부탁드려요제가말하려던건이겁니다!”

       

       황실 모독죄를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무빙치는 자색 마탑주를 가엾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이리드는 옆에서 지원사격을 넣어줬다.

       

       “저 남자 마법사는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 마법 연구의 부작용이지.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어쩐지 눈이 탁하더라.”

       

       “끌끌끌⋯⋯, 환상 마법을 공부하면 미치기 쉽다더니.”

       

       “⋯⋯그, 그런 으, 음해는, 고, 곤란⋯⋯.”

       

       

       그 소란 속에서, 마지막 순서였던 사제가 자기소개를 위해 조용히 손을 들었지만. 

       거짓말처럼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회의의 마지막 멤버, 종군 사제 율리우스는 소심하게 웅얼거렸다.

       

       “저, 잘 부탁드립니다⋯⋯. 전임 추기경, 현 종군 사제 율리우스입니다.”

       

       

       “그러게 대마법사의 재목을 왜 빼앗아 가셨소, 자색 마탑주. 우리 탑주님이 『태양 대폭발』 주문을 완성시킬 수 있겠다며 그토록 설레어하셨거늘⋯⋯.”

       

       “그건, 그건 얘가 그냥⋯⋯ 환상 마법에 과, 관심이 있어서⋯⋯!”

       

       “최면 세뇌로 자색 마탑을 고르도록 한 게 정설이잖소?”

       

       “⋯⋯으, 음해⋯⋯!!”

       

       “유, 율리우스입니다⋯⋯ 저기요⋯⋯?”

       

       

       그렇게 자기소개가 마무리되자, 이리드는 박수를 두 번 쳐서 이목을 끌어모았다. 

       

       “회의를 시작하지.”

       

       ===============================================================

       

       이리드는 커다란 도화지에 여관방의 구조도를 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려냈다. 폭과 높이, 구조물의 상세한 디테일, 사건 발생 지점까지.

       

       “전략 시뮬레이션, 워게임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내가 도움을 구하고 싶은 것은 이거다. 이 상황에서, 내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는 방법.”

       

       “뒤늦게 놀이에라도 빠진 거니?”

       

       “누님.”

       

       이리드의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나는 진지해.”

       

       1황녀 일레인은 눈을 크게 떴다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놀이는 아닌 모양이네. 그렇게 굳건한 표정이라니,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구나. 좋아, 진지하게 들을게.”

       

       

       “좋아. 나는 이 침실, 침대에 앉은 채로 위치하고 있다. 폭발 지점은 좌측 복도의 끝. 구조 목표는 예상컨대 이 지점에서 습격당했다.”

       

       “오호라, 그래서 적색 마탑을 부르셨구려? 폭발의 모양, 떨어져나온 잔해의 모양, 진동의 크기와 후폭풍의 형태를 자세히 들려주시오.”

       

       눈을 빛내던 적색 마탑의 원로는 2황자의 증언을 꼼꼼히 새겨듣고는 결론을 냈다.

       

       “그 주문은 『불정령의 거센 숨결』 내지는 『이코믹의 한탄』으로 보이오. 2차 폭발의 물리적 충격파보다는 화염 원소에 치중한 주문들인데⋯⋯. 변수가 꽤 많군, 다른 단서가 있으시오?”

       

       “마법사의 시전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여관에 모인 면면 중에는 마법사가 없었어. 속단은 이르지만, 스크롤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계산이 편하지! 어디⋯⋯. 그렇군. 마력 사용자라면 어지간히 재수가 없지 않고서야 죽지 않소. 애초에 두 주문은, 살상력보다도 무력화에 중점을 둔 주문이오. 화염 그 자체로는 화상에 그칠 뿐이니.”

       

       사각사각.

       

       

       그 말을 듣고는, 종군 사제 율리우스가 눈을 빛냈다.

       

       “⋯⋯아하, 황자님. 응급치료의 방법이 필요하시군요. 체내에 침투한 마나를 흩어내는 요령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화염 마법에 당했다면 도움이 될 겁니다⋯⋯ 이후의 쾌유에도요.”

       

       

       건물의 지도를 유심히 살펴보던 제국수호방위국 분석관 C는,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려 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이 여관, 내부 구조가 낯이 익군요. 창관 ‘로자리아’로 유명했던 건물입니다. 현재는 제국수호방위국 측에서 인수하여, 요원이 접선지로 사용하는 비밀거점 중 하나입니다.”

       

       “⋯⋯방위국의 거점이었나? 그래서였군.”

       

       레지스탕스의 거점으로 사용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리드는, 어쩌면 센트라의 부친은 방위국의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근처에 이용하실 수 있는 비밀통로가 있습니다. 적대세력이 통로를 파악하고 있지 않다면,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2층의 벽면에 다음과 같은 마력문을 그려 넣으시면 열립니다.”

       

       “참고하지.”

       

       사각사각.

       

       

       마지막으로 1황녀 일레인이 나섰다.

       

       “몇 가지 움직임을 연습해 두는 게 좋겠네. 우리 동생은 몸치니까, 그렇지?”

       

       “⋯⋯누님은 기사단장에게도 몸치라고 하지 않나.”

       

       “원하는 대로 못 움직이면 그게 몸치잖니. 적으로 나타날 것이 유력한 자의 정보를 말해보렴.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

       

       “로냐, 여자 용병이다. 얼굴에 흉터가 있고, 가죽 갑옷으로 무장했다. 허리춤에 손바닥 길이의 단검을 차고 있으며, 단검 손잡이가 많이 닳았다. 주 무기는 롱소드로 보인다. 듣기로는 석궁도 다룰 줄 아는 것 같더군.”

       

       “주 무기가 롱소드는 아닐걸? 용병 같은 못 배운 사람들은⋯⋯ 머리가 나빠서 롱소드 검술을 못 써. 배웠더라도 제대로 쓸 수는 없지. 더러운 전장에서는 얻을 수 없는 묘리가 있단다. 아, 단검에서 끝까지 눈을 떼지 말렴. 답답해지면 마지막 수는 단검으로 올 테니까.”

       

       “내가 죽일 수 있겠나?”

       

       “그러엄. 이 동작을 알아두렴. 롱소드 검술은 체스와 같아서, 패턴에 따라 정확하게만 자세를 바꾸면 돼. 상단으로 올 때는 이렇게⋯⋯. 아니, 회의 끝나고 연무장으로 같이 가자. 종군 사제분도 같이.”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이름을 불린 종군 사제가 깜짝 놀랐다.

       

       “⋯⋯예?”

       

       “거칠게 할 거라서.”

       

       

       사각사각.

       

       “⋯⋯자네는 아까부터 뭘 그렇게 받아 적는겐가?”

       

       “아, 하는 게 없으니까 서기라도 하려고 합니다.”

       

       자색 마탑의 마법사는 회의 내용을 수첩에 열심히 받아 적었다. 회의는 밤늦게까지 이어졌고, 마법사가 받아적는 소리도 회의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회의가 끝났을 때, 마법사는 정말이지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세션 다 짰다.”

       

       소재를 통째로 날먹했기 때문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쫌 넉넉하게 담아봤습니다.

    오늘도 재밌게 즐겨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독자님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마이 프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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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world TRPG Game Master

Otherworld TRPG Game Master

Another World TRPG Game Master, 이세계 TRPG 게임마스터
Score 8.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wizard of the Illusion Magic School and decided to create a virtual reality with illusion magic to play a tabletop role-playing game (TRPG). It was great to create a virtual reality, but I was in trouble because there were no suitable players. During that time, I received an offer to be the professor from the Royal Academy. The offer was to use illusion magic to fill the students’ lack of practical experience safely. And so, I became a professor at the academy. “Send me back, send me back to that world right now-!” “Outer god, someday an outer god will be our doom, we’ll all die!!” “I am not the bastard of the Redburn Ducal Family. I am the foremost disciple of the Great Namgung Clan, Namgung Qinghui!” But it seems there is a bit of a misunderstanding. This isn’t a spell for dimensional travel, kids. It’s 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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