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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

       『이 솜씨는, 설마 교단인가.』

         

       악마가 각성제를 살폈다. 약을 쪼개고 검은 내용물을 핀셋으로 유심히 들여다봤다.

         

       『……아니 교단일 리 없겠지. 우리가 그 고생 끝에 토벌한 지 20년도 안 됐는데 이럴 순 없어. 아카데미가 침입하기 만만한 곳도 아니니.』

         

       핀셋이 특정 내용물을 분리했다.

         

       『하늘고래의 지느러미인가. 각성제 유포의 목적은 모르겠지만 이 비싼 재료를 순수한 판매용으로 쓸 리는 없겠지.』

         

       악마가 핀셋을 내려놨다.

         

       『어린 크래프트, 넌 어차피 먹어도 영향은 없을 거다. 효과도. 음식으로 에너지를 못 얻듯이 각종 약물도 안 통하지.』

         

       악마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들겼다.

         

       『하지만 만약이 있으니 안 먹는 게 낫겠어.』

         

       잉?

         

       파스텔은 눈이 동그랗게 됐다.

         

       벌려진 입안에 각성제 몇 개가 굴러다녔다.

         

       돌아본 악마가 이마를 짚었다.

         

       『아니 그걸 왜 먹는 거냐.』

       “하, 하지만 이거 맛있어요!”

         

       파스텔은 빠르게 우물우물거렸다. 각성제를 씹을 때마다 눈이 반짝였다.

         

       마석은 불량식품 사탕 맛이었다. 그런데 각성제는 마석보다 훨씬 맛있었다.

         

       고급 사탕?

         

       사탕 공예 전문 셰프가 손수 사탕물을 뽑은 다음 며칠에 걸쳐 힘쓴 명품 사탕 같다.

         

       이걸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던 파스텔은 번뜩이는 표현을 떠올렸다.

         

       “수석 셰프의 약물 칵테일!”

         

       우왕.

         

       셰프님 솜씨 완전 판타스틱.

         

       『약물 칵테일……?』

         

       악마의 얼굴이 굳어갔다. 그러더니 각성제 상자를 뺏었다.

         

       『먹지 마라.』

         

       아앗?!

         

       “돌려주세요!”

         

       파스텔은 손을 뻗었다.

         

       『안 돼.』

         

       악마가 일어나더니 상자를 위로 들어 올렸다. 훤칠한 키가 상자를 높이높이 올렸다.

         

       “돌려주세요! 돌려주세요!”

         

       파스텔은 악마에게 매달려 손을 뻗었다. 손이 상자 근처에도 닿지 못한 채 허우적댔다.

         

       아앗, 키가!

         

       키가……!

         

       악마가 단호히 내려봤다.

         

       『약물 칵테일이 뭐냐, 약물 칵테일이. 그냥 먹지 마라.』

         

       으아아.

         

       표현이 너무 이상했나 봐.

         

       “정정할게요! 약물, 아니아니.”

         

       으으.

         

       머리를 짚고 심각하게 고민하던 파스텔은 살짝 자신 없게 악마를 올려봤다.

         

       “마석 칵테일……?”

         

       헤헤.

         

       악마가 표정 변화 없이 선언했다.

         

       『안 돼.』

         

       아아.

         

       내 스페셜 마석 칵테일이……!

         

       수석 셰프님, 악마님 좀 혼내주세요!

         

       비슷한 솜씨가 교단이랬나? 교단에게서 혈육의 정까지 느껴지는 거 같아. 나는 교단과 함께 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으으, 진정해.

         

       필기 수석 파스텔, 넌 마석 칵테일을 지켜낼 수 있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두뇌 회전!

         

       야압……!

         

       “악마님, 악마님. 제가 이것저것 가려 먹을 처지는 아니잖아. 표현이 이상하긴 했지만 악마님 말대로 먹어도 아무 문제 없고요!”

         

       스스로를 가리켰다.

         

       방금 각성제를 몇 개나 삼켰는데 딱히 변화가 없다.

         

       『그건…….』

         

       악마가 머뭇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애가 아무거나 주워 먹으니 꺼림칙한 모양이었다.

         

       빈틈!

         

       파스텔은 폴짝 뛰었다. 각성제 상자를 낚아채고 후다닥 도망쳤다.

         

       오예오예.

         

       각성제를 입에 털어 넣었다.

         

       사탕의 단맛!

         

       악마가 말릴지 머뭇거리다가 포기했다. 그리곤 찝찝해하는 시선으로 지켜봤다.

         

       파스텔은 밝게 웃었다.

         

       “괜찮아요!”

         

       아무 문제 없으니까.

         

       정말로.

         

         

         

       #

         

         

         

       다음날 파스텔은 먹다 남긴 각성제 하나를 학생회 자격으로 교수회의에 제출했다.

         

       그리고 구 기숙사로 향했다. 1학년에게 유령의 결과를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밤중의 유령 기척은 레너드 무리였어.”

         

       유령님이 아니라니, 아쉽.

         

       “레, 레너드?”

         

       1학년이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어제도 소리가 났어.”

       “정말? 다들 정원에 있었는데?”

       “정말 났어!”

         

       유령님이 있는 건가?

         

       오예.

         

       파스텔은 반색이 됐다.

         

       1학년이 움찔하더니 시선을 피했다.

         

       “그, 그래서 내가 직접 확인해 봤어. 정말 유령인지.”

         

       오잉.

         

       우리 친구, 의외로 용기가 있었네.

         

       1학년이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더니 덜덜 떨며 바닥을 가리켰다.

         

       “원인은 여기였어.”

         

       손가락이 가리킨 바닥은 그냥 복도 바닥이었다.

         

       “밤중에 아래서 모, 목소리가 울려. 유령이 분명해……!”

         

       잉?

         

       그런가? 그냥 바닥 아래에 공간 있는 거 아니야? 지하실이라던가.

         

       “알겠어, 학생회가 해결해 볼게.”

         

       겁에 질린 1학년을 돌려보냈다.

         

       파스텔은 지면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들어봤다.

         

       뭐가 들린다는 걸까?

         

       잠자코 있자 동물 소리가 가늘게 들렸다.

         

       야옹야옹.

         

       파스텔은 눈이 동그랗게 됐다.

         

       “악마님! 악마님! 고양이 소리예요! 땅속에 고양이가 살아요!”

         

       우왕, 땅고양이.

         

       『지하실일 거다. 장교 양성소였으니 그 잔재겠지. 기숙사로 덮었지만 완전히 없애진 않은 모양이군.』

         

       오오, 모험의 조짐이 모락모락.

         

       파스텔은 눈이 반짝였다.

         

       “당장 진입하죠!”

         

       그리고 하루 종일 들쑤신 끝에 지하실 입구가 아예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에.

         

       『기숙사로 덮어버렸나. 이러면 못 들어간다. 포기해라.』

       “고양이는요? 어떻게 들어갔데요?”

       『내부가 넓다면 멀리 떨어진 곳에 우연히 열린 입구가 있었겠지. 버려졌어도 과거엔 군사기밀이었을 거다. 숨겨진 입구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아아, 그럴 수가.”

         

       아쉽.

         

       모험은 이렇게 끝이 나버렸습니다.

         

       삶이란 원래 이런가 봐.

         

       유감.

         

       모험은 관두고 유령에 질린 1학년을 어떻게 달랠지 고민했다.

         

       팔짱을 끼고 복도 바닥을 내려봤다.

         

       문득 품속에서 소리가 들렸다.

         

       잉.

         

       꺼내보니 마왕의 유적에서 얻은 운명 나침반이었다.

         

       나침이 팽글팽글 돌더니 바닥을 가리켰다.

         

       오잉.

         

       『……마왕의 안배가 지하에 있나 보군.』

         

       파스텔은 눈이 빛났다.

         

       이번에야말로 마석 복제를?

         

       아니면 숨만 쉬어도 대기에서 마기 냠냠을?

         

       뭐가 됐든 마왕의 안배면 인생 너무 쉬워 치트키가 하나쯤 있겠지?

         

       『요행을 바라야겠지만 도서관을 뒤적이다 보면 지하 자료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운이 좋다면 입구를 추론할 수도 있겠지.』

         

       뭐라고요? 책을 왕창 읽으라고요?

         

       떠들지도 못하는 도서관에 앉아 칙칙하게?

         

       으에, 필기 수석 파스텔은 그런 거 안 해.

         

       “제게 아이디어가 있어요!”

         

       똑똑한 사람은 공부하지 않는 법.

         

       파스텔의 날카로운 시선이 기숙사를 훑었다.

         

       깔끔하지만 꽤 허름했다.

         

       “이렇게 안 좋은 시설에서 학생이 지내다니!”

         

       보이는 건 구식, 전부 구식.

         

       “학생회로서 용납할 수 없어요!”

         

       한 팔을 번쩍 들었다.

         

       “기숙사 신축!”

         

       파스텔은 눈을 빛냈다.

         

       “학생회가 추진하겠습니다!”

         

       기숙사 아래 있다면 기숙사를 밀어버리면 되지 않을까?

         

       학생회 권한으로 공사 현장에 슬쩍 간섭해 마왕의 안배를 냠냠.

         

       완전 천재적 아이디어.

         

       그리고그리고!

         

       “건축 회사는 학생회가 직접 마계에서 섭외해 오겠습니다!”

         

       왜 굳이 마계일까?

         

       그냥, 헤헤.

         

       별일 아님.

         

       “가난한 아이를 먹여 살려요~.”

         

       악마가 불안해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마계지.』

         

       처음은 어렵고.

         

       두 번은 할만하고.

         

       세 번은 쉽다!

         

       오예.

         

       마계로 출발~!

         

       아차차.

         

       그 전에 학생회 인원을 늘려야겠다.

         

       엘리 혼자선 힘들어하는 거 같아.

         

         

         

       #

         

         

         

       더스틴 와일드.

         

       와일드 남작가의 차남.

         

       평민의 농장 뺏기가 취미인 아버지와 그런 남편과 짝짜꿍이 잘 맞는 금실 좋은 어머니 아래서 자랐다.

         

       하하호호.

         

       아버지와 판박이인 형은 하녀를 채찍질하는 취미를 즐길 때마다 동생을 찾을 만큼 우애가 좋았다.

         

       하하호호.

         

       한 번도 맞은 적 없고 한 번도 고함을 들은 적 없다.

         

       하지만 더스틴은 본인도 원인 모를 반항심 때문에 집안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 결과 절치부심 노력해서 아카데미 입학에 성공했다.

         

       고생했다, 더스틴.

         

       하지만 현실은 냉혹한 법.

         

       정작 맞이한 건 필기시험 하위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더스틴은 자존심을 참지 못하고 만만해 보이는 필기 수석에게 시비를 걸었다.

         

       이해타산도 있었다.

         

       남작가에 차남이라는 신분은 미래가 막막하다. 어떻게든 명성과 인맥을 얻어 자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첫 대련으로 명성만 높은 가문의 소녀를 이기는 건 거칠지만 해볼 만한 시나리오다.

         

       욕은 먹어도 악명이 무명보단 낫다.

         

       그 시작점으로 크래프트의 파스텔은 손쉬운 상대처럼 보였다.

         

       분명히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참패.

         

       연약한 소녀는 어이없는 괴력의 소유자였다.

         

       소녀가 으랴으랴!

         

       더스틴은 으악! 으악!

         

       아니.

         

       그 이후 더스틴은 애들 사이에서 조용한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철저히 따돌렸는지 입학시험 동안 친구 한 명 못 사귀었다.

         

       더스틴은 이불 속에서 남몰래 눈물을 질질 짰다. 콧물도 나왔다.

         

       친구, 사귀고 싶었는데.

         

       아카데미에서 친구랑 할 일 목록도 100개 만들었는데…….

         

       혼자 밥 먹는 매일이 흘렀다.

         

       친구랑 같이 밥 먹기라는 장난삼아 만든 첫 번째 리스트가 전혀 달성되지 않았다.

         

       괜히 적었어.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는 매일매일.

         

       하지만 인생에 볕 들 날이 있던 걸까?

         

       입학 후 레너드가 접근했다. 바라는 건 파스텔과 대련하며 겪은 전투 경험.

         

       레너드도 파스텔을 꺾고 악명 겸 명성을 얻고 싶은 모양이었다.

         

       고학년 같은 체격의 소유자에 방심하지 않고 상대를 사전 조사하는 심계라니.

         

       얘라면 파스텔을 이긴다!

         

       얘와 친구가 되자!

         

       그리고 밥을 같이……!

         

       사실 그냥 친구와 밥 먹고 싶던 더스틴은 레너드의 명령 같은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했다.

         

       어째 친구가 아니라 부하가 되는 기분이지만 착각일 거다.

         

       그리고 시작된 레너드의 계획.

         

       레너드는 냉철했다. 본인이 고학년 체격이면서도 소녀가 괴력을 가졌다는 부분에 방심하지 않았다.

         

       소녀가 연속된 팔씨름 시합을 한다는 소식을 듣자 대련 기회를 포착한 채 소녀의 팔힘이 완전히 빠지길 기다렸다.

         

       이건 이긴다……!

         

       냉철한 레너드와 어벙한 파스텔이 맞붙었다.

         

       소녀가 빠샤빠샤!

         

       레너드가 으억! 으억!

         

       아니.

         

       레너드 너 덩치를 어디에다가 쓴 거야. 준비 철저하게 해놓고 주먹질 한 번에 쓰러지면 안 되잖아.

         

       생각을 포기했다.

         

       되는 게 없네, 하아.

         

       그리고 여전히 되는 게 없는 더스틴은 현재 절찬리에 땅을 구르는 중이었다.

         

       “야! 밟아! 감히 미인계에 넘어가?! 이 괘씸한 자식!”

         

       레너드가 명령하자 부하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발길질이 몸을 때렸다.

         

       부하들의 사심이 담긴 발길질이 이어졌다.

         

       “그렇지! 이 괘씸한! 우리도 파스텔한테 미인계 당하고 싶었다고!”

         

       같이 발길질하던 레너드가 움찔했다.

         

       “뭐뭐?! 방금 어떤 자식이야! 어떤 자식이냐니까!”

         

       창피해하는 레너드의 사나운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범인 찾기가 시작되자 더스틴은 그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얻어맞은 온몸이 욱신욱신했다.

         

       벽을 짚고 비척비척 걸었다.

         

       “망할 것들, 미인계가 아니라 순진한 친구 확인이었다고…….”

         

       내가 남작가 차남이라도 나름 귀족인데 전자면 오히려 안 당했지. 이것들이 멋대로 망상하고 있어.

         

       다리를 살짝 절며 움직였다. 삐었는지 발목이 찌릿찌릿했다. 조심스럽게 걸었다.

         

       “어? 안녕, 친구.”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렸다.

         

       문득 시야에 벚꽃이 피었다.

         

       풍성한 머릿결이 걸음에 맞춰 흔들렸다. 몽롱한 분홍 눈동자가 눈을 마주쳤다.

         

       이 순간 바람은 꽃향기를 품은 듯했다.

         

       “너 괜찮아? 어디 아파?”

         

       더스틴은 걱정하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아씨, 하필 지금이야.

         

       창피하게.

         

       “됐어, 갈 길 가.”

         

       단호한 거절에 파스텔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하.”

         

       소녀가 급격히 미안해했다.

         

       “네 입장을 고려 못 했네. 미안, 내가 평소에 주변을 제대로 못 봐.”

         

       부드러운 손이 더스틴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따듯한 감촉이 느껴졌다. 체온은 손을 타고 팔까지 올라오는 듯했다.

         

       “미안해, 친구.”

         

       분홍 눈동자가 곱게 접혔다.

         

       “한 번만 봐줘라아.”

         

       더스틴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소녀의 손에서 올라온 온기가 몸 전체를 감도는 것만 같았다.

         

       “물론 레너드는 얼씬 못하게 해줄게!”

         

       망상이 폭주했다.

         

       설마 이거 말로만 듣던 자유연애인가?

         

       “음, 뭐랄까. 아하!”

         

       파스텔이 활짝 웃었다.

         

       “넌 남 아래서 수발드는데 재능이 많구나! 학생회에 들어와! 지금 손발이 부족하거든! 네 재능에도 맞을 거야!”

         

       뭔가 형성되려던 마음이 와장창 깨졌다.

         

       “뭐라고……? 내가 꼬붕 체질이라고?”

         

       더스틴 와일드, 학생회 가입.

         

       직책, 꼬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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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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