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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

     

    콰득!

     

    ―크르륵!

     

    내 검에 얻어맞은 고블린이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 머리를 처박았다.

     

    제대로 명중했지만 즉사시킬 순 없었다. 근력이 허약한 탓이다.

     

    “어우.”

     

    오히려 내 손이 징 울리는데.

     

    거의 검으로 벤 게 아니라 몽둥이처럼 후두려 패 버렸고.

     

    역시 검은 잘 안 맞는다.

     

    기사들이 상황을 정리할 때까지만 버텨보기로 했다.

     

    “흡!”

     

    타냐에게서 배운 최소한의 잔기술이다.

     

    이런 최하급 마물은 덩치가 커 보이면 대체로 쫄아서 덤빌 각을 재느라 시간을 낭비하곤 한단다.

     

    그렇게 시간을 벌면 자신이 처리할 테니 무작정 검을 크게 휘두르라고 했다.

     

    비기, 풍차 돌리기다.

     

    ―휙휙휙, 파악!

     

    내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검이 바람소리를 내다가 지면을 파헤친다.

     

    그 모습을 본 고블린들이 한 걸음 물러나며 이빨을 갈아댄다. 언제 내게 뛰어들까 눈치를 보는 모습이다.

     

    “어우, 팔 아퍼.”

     

    효과는 있는데 오래는 못 하겠네.

    그래도 타냐가 알려준 기술이라 그런지 정확하게 먹혀들어간다.

     

    “도련님!”

     

    어린애처럼 팔을 빙빙 돌리고 있으니 아니나 다를까, 언제 날아왔는지도 모르게 타냐가 순식간에 남은 마물을 정리해주었다.

     

    “아이고, 팔이야. 다음부터는 좀 더 빨리 처리해줘라.”

     

    타냐가 나를 보고는 생긋 웃었다.

     

    “잘 싸우실 줄 알았습니다. 실전에서도 훌륭히 구사하셨군요.”

     

    “뭐, 그럼 일부러 늦게 도와줬어?”

     

    “후후, 그럴 리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쩐지 뒤끝이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얘 좀 봐라.

     

    “야, 네 덕분에 난 치료 실력을 어필할 기회를 놓쳤잖아. 영지민들에는 벌써 치유사 여섯이나 붙었고, 나머지는 기사단 보조했는데 난 뭐냐.”

     

    “덕분에 다른 치유사들이 활약할 수 있었지요. 실전에서는 상황 판단도 중요합니다. 가주님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나는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그가 지긋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 정신이 좀 드십니까?”

    “치유술이 들고 있습니다!”

    “이제 살아 돌아갈 수 있습니다!”

     

    치유사들이 소란스러운 걸 보니 영지민들이 깨어난 모양이었다.

     

    “애초에 도련님이 아니면 영지민들이 납치됐다는 사실도 몰랐겠지요. 중요한 활약입니다.”

     

    “그럼 뭐 하냐. 주치의 시험이지 모험가 시험이 아닌데.”

     

    타냐는 자신만만해하며 내게 대답했다.

     

    “아직 고블린 샤먼 토벌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저희 기사들을 보조해주시죠.”

     

    타냐가 터프하게 내 어깨를 두드리고는 본대로 돌아갔다.

     

     

     

    어쨌든 영지민 구출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치유사들이 시간을 들이니 그들은 곧 정신을 차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 농지가 북쪽에 있는데 숲 근처까지 비료를 찾으러 왔다가 그만 습격당했지 뭡니까.”

     

    “이대로 죽을 줄 알았는데… 으흑.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두 영지민은 최근 독립한 젊은 부부였다고 한다.

    부부는 아버지에게 연신 허리를 굽혔다.

     

    “후, 후작님! 어찌 귀하신 분이 직접 이런 곳까지… 영광입니다.”

     

    “영지민을 지키는 것도 영주의 일일세.”

     

    “후작님과 기사님들, 치유사님들이 아니었으면 그대로 죽었을 거예요….”

     

    “저희도 납치된 여러분을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돌아갈 뻔했습니다. 감사는 저분에게도 하시죠.”

     

    타냐가 끼어들어 부부에게 전했다.

     

    “네?”

     

    “여러분의 위험을 가장 먼저 눈치챈 건 공자님이셨습니다. 덕분에 구출 작전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고트베르크 공자님이!”

     

    “정말 감사합니다. 생명의 은인이셔요.”

     

    부부가 내게 헐레벌떡 뛰어와 덥썩 손을 잡고는 고개를 숙였다.

     

    하하, 뭘 그렇게까지 감동하실 것까지야.

    나는 의사의 본분을 다했을 뿐이다.

     

    “아직 부상 치료도 안 됐는데 그렇게 뛰어다니지 마십쇼. 피가 부족하니 저혈압으로 다시 쓰러집니다. 돌아가서 고기부터 구워 드시고.”

     

    “저혈압…? 공자님은 유려한 단어를 많이 아시는군요.”

     

    “예, 말씀 깊게 새겨듣겠습니다.”

     

    간단한 의학 지식이라도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면 좋을 텐데.

    민간요법은 틀린 것이 많기 때문에 올바른 정보가 처음에 퍼지는 게 중요하다.

     

    나도 쌩쌩하게 돌아다니는 환자들을 보면 조금 뿌듯하기도 하고 말이다.

     

     

    타냐가 기사 한 명을 붙여 영지민들을 입구까지 돌려보내게 명령했다.

     

    본대는 이어서 전진한다. 갈림길로 돌아와 왼쪽 길로 향한다.

     

    “습격이 있었다는 건 고블린들이 저희 움직임을 파악했다는 뜻입니다. 더욱 주의가 필요합니다.”

     

    “으음.”

     

    아버지가 타냐의 말에 긴장했다.

    내가 덧붙였다.

     

    “더욱이 저희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작은 비밀굴도 사방에 깔렸다는 의미입니다. 언제 기습당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가정해야 합니다.”

     

    “알겠다. 이 자리의 전원을 보호할 필요가 있겠군.”

     

    아버지가 로자리오를 들고 주문을 시전한다. 치유주문은 아니다.

     

    성서의 구절을 읽어나가자 그의 몸이 은은하게 빛난다. 평생 쌓아올린 신앙심에 신성력이 반응해 구체적인 주문으로 변화하는 과정이다.

     

    “…어두운 장막을 헤칠 도움을 바라옵나니, 축복을 내려주시길.”

     

    기사들에게 작은 별이 반짝인다.

     

    최상급 치유사들만이 쓸 수 있는, 치유사 스킬트리 후반부에 개방되는 [축복] 계열 주문이었다.

     

    “오오, 축복을 사용하셨어!”

    “몸이 한결 가벼워졌군.”

     

    기사들이 기분 좋게 검과 방패를 치켜들었다. 시험을 보던 치유사들도 아버지의 실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축복이라니, 어지간한 치유사들은 평생 실력을 연마해도 하나 배울 수 없을 정도 아닙니까?”

     

    “그걸 이 많은 기사들에게 전부… 역시 고트베르크 후작님이시군.”

     

    “고트베르크가 괜히 치유사 명가가 아니지. 반면 도련님은….”

     

    시험을 보던 치유사들이 나를 흘긋 돌아보는 눈치가 느껴진다.

     

    “아까도 병자를 치유하지 않으시고 칼만 휘두르고 계시던데.”

    “평소 하시던 버릇이 나오신 게 아닐까요?”

     

    짜식들 귓속말을 할 거면 제대로 하든가. 다 들려 이놈들아.

     

    내가 귀가 예민할 수도 있겠다. 밤에 마물에게 습격당하지 않기 위해 항상 귀를 세우고 있었으니까.

     

    “방심할 시간이 있으면 주변이나 한 번 더 확인하십시오.”

     

    타냐가 치유사들에게 일갈했다. 조용해진 그들이 기사단의 뒤를 따른다.

     

    동굴에 난 길을 따라 탐색을 재개한다.

    나는 여전히 가장 앞에서 전체를 지휘하는 타냐와 함께 선두에서 함께한다.

     

    “고블린입니다!”

     

    눈치가 빠른 보리스가 외치고 전투가 시작된다.

    아까 본 놈들보다 덩치가 큰 고블린들이 부대를 이루듯 몽둥이를 들고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이제 숨을 필요도 없이 대놓고 전쟁하자는 거군!”

     

    검과 몽둥이가 부딪치고 육중한 몸들이 난폭하게 동굴 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사방에 가득찬다.

     

    전투가 이어지니 이쪽의 부상자도 발생하기 마련이다.

     

    고블린들이 여럿이서 협공하면 제아무리 후작가의 기사라도 몇 번의 공격은 허용하게 된다.

     

    몽둥이에 맞아 팔이 까지고 다리가 멍든다. 자리에서 넘어져 어깨가 탈골된다.

     

    그들을 즉시 치유해 전투를 보조하는 것이 치유사들의 몫이다.

     

    “으으으…!”

     

    몇몇 치유사들은 다리를 후들거리며 버티기가 고작이라 치유주문을 제대로 시전하지 못하고 있다.

     

    치유사가 겁에 질리면 지식이 아닌 믿음으로 쌓인 분만큼의 신앙심은 정도에 따라 감소한다.

     

    신앙심과 신성력에 영향받는 치유주문은 약해지기 마련이다.

     

    본격적으로 채점이 들어가는 부분이다.

     

    “고대의 땅이 갈라지고 여신님께서 내려오셨으매, 세 개의 경전을 남기셨으니!”

     

    그나마 기스는 주문은 잘 시전하고 있지만 대상이 틀렸다.

     

    “진단.”

     

    기사들을 쭉 훑어본다.

    주로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았거나 실력이 부족한 기사들 위주다.

     

     

    [부상 상태 : 출혈]

    [부상 상태 : 골절]

    [부상 상태 : 타박상]

    ……

     

     

    상태창이 여러 겹으로 떠오른다.

    싸우는 기사들 한 명 한 명의 진단결과다.

     

    ‘타냐는… 멀쩡하고.’

     

    골절인 친구가 가장 시급하지.

     

    기스의 어깨를 툭툭 쳤다.

     

    “도련님? 방해하지 마십시오!”

     

    “저쪽, 팔에 빨간 아대 찬 기사부터 주문 시전해줘.”

     

    “뭐라고요?”

     

    “타냐 단장은 부상이 없어. 환자를 치료해야지 왜 멀쩡한 사람에게 주문 넣고 있냐.”

     

    “갑옷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건만 어떻게 압니까? 이런 상황이니 부상을 입으면 어떻게든 치료가 될 것 아닙니까!”

     

    전투에서 치유술의 불편한 부분 중 하나다.

     

    전위가 언제 피해를 받을지 모르니 치유사는 주문을 계속 시전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부상 입은 순간부터 조금이라도 빨리 효과를 볼 수 있다.

     

    치유부위도 랜덤이니 현장에서는 무식하게 때려박는 방법이 최선이다.

     

    “하라면 해. 쟤 발등뼈 금 갔다. 더 무리하거나 공격받으면 분쇄골절로 넘어가서 고치는데 더 시간 들어.”

     

    “그럼 도련님이 하시지 그러십니까!”

     

    “난 더 좋은 게 있어.”

     

    그렇게 대답하고 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냈다.

     

    안에서 좋은 붉은 색으로 반짝이는 액체가 찰랑인다.

     

    “그건 뭡니까?”

     

    “처음 보지? 유명한 만병통치약이야.”

     

     

    ―――――――――――

     

    강화된 빨간약 (성질변화됨)

     

    효과 : 바른 상처 부위의 소독 효과가 발생합니다.

     

    특수효과 : 군인에게 사용 시 부상 치료 효과가 추가됩니다.

     

    ―――――――――――

     

     

    군대의 만병통치약.

     

    빨간약 되시겠다.

     

    정확히는 포비돈요오드라 부르는 소독제다.

     

    본래 화학 합성물로 만들어야 하는 약이라 재료가 없어, 그냥 만들 순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빨간약은 2세대로 개량된 물건이다.

     

    1세대 빨간약은 수은 화합물로도 만들었다.

     

    ‘수은은 마법재료로 은근히 흔하단 말이지.’

     

    수은은 저택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성질변화] 스킬로 이리저리 만져보니 제작할 수 있었다.

     

    내 의학 지식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지라 군인 한정으로 치료 효과까지 붙었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친구들 대상이지만 넓게 보면 기사단도 비슷하지 뭐.

     

     

    전투가 끝나고 기사들이 정비에 들어간다.

     

    진단을 사용하며 기사들을 둘러본다.

    보초를 서던 기사, 보리스가 적합한 대상이라고 알 수 있었다.

     

     

    ―――――――――――

     

    진단이 발동합니다.

     

    부상 상태 : 찰과상

    부상 위치 : 왼쪽 어깨

     

    ―――――――――――

     

     

    “보리스, 어깨 다쳤지? 보여봐.”

     

    “예? 아, 예에.”

     

    붓에 빨간약을 스며들게 해 환부에 치덕치덕 발라준다.

     

    보리스가 생소한 감각에 놀랐는지 어깨를 움츠렸다.

     

    “아이고, 깜짝이야! 이게 뭡니까요?”

     

    “어허, 조금 기다려봐.”

     

    잠깐 시간이 지나니 바디페인팅처럼 보기 좋게 발린 빨간색이 주황빛으로 은은하게 반짝였다.

     

    치료 효과가 발생했다는 뜻이었다.

     

    “호오, 이것은…?”

     

    채점을 맡은 상급치유사가 관심이 생겼는지 내 모습을 보러 찾아왔다.

     

    “오오, 확실히 치유가 되었군. 이런 방식은 처음 보는데. 기사님, 느낌이 어떻소?”

     

    “어쩐지 상처가 확 시원해졌습니다. 통증도 가라앉는 기분입니다.”

     

    내가 설명했다.

     

    “이 약제의 최대 장점은 상처가 더 악화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색이 강렬해서 치료한 부상자를 바로 확인할 수도 있어 시간 절약도 되지요.”

     

    “과연. 이건 성수입니까?”

     

    “연금술로 만든 약입니다.”

     

    “연금술이라. 오호…….”

     

    상급치유사는 생소하다는 듯 놀란 눈치였다. 그도 당연했다.

     

    그가 돌아가서 다른 채점관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처음 보는 치료 방식에 꽤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예상했다는 듯 만족스럽게 나를 바라본다.

     

    “다음 기사, 얘도 찰과상. 너도 빨간약 바르면 낫고. 다음, 골절. 너도 일단 빨간약 발라 둬. 얜 감기네. 일단 목에 발라.”

     

    다른 치유사들이 기사 한 명을 치유하는 시간에 나는 다섯 명을 볼 수 있었다.

     

    상당한 효율이다.

     

    실제로 소독제가 적절했던 기사는 셋뿐이었지만 점수를 많이 딸 수 있으니 좋겠지.

     

    다다익선이다, 다다익선.

     

    “정비가 완료됐군. 이어서 출발하겠다.”

     

    타냐의 명령에 따라 다시 부대가 전진한다.

     

    이 동굴의 우두머리가 코앞에 다가와 있다는 느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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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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