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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

       1층의 계층 수호자를 쓰러뜨리겠노라 선언했지만, 당연히 그게 지금 당장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애초에 나는 아직 절대적인 스펙이 부족해 최소 공헌치도 제대로 못 채울 게 뻔하니까.

       

       지금 중요한 건 강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빨리 강해지는 방법은 역시….

       

       “가챠인가.”

       

       “응? 방금 뭐라고 했어 요나?”

       

       다음날. 이번엔 제대로 무기를 갖추고 다시 내려온 미궁에서 앞장서 길을 찾던 리디아가 뒤를 돌아본다.

       

       선명하게 빛나는 적안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 또한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리디아 님. 한 100골드만 빌려주실 수 있어요?”

       

       “…그 큰돈으로 뭐 하려고?”

       

       어디 보자, 가챠를 알기 쉽게 말하자면….

       

       “도박?”

       

       “절대 안 돼.”

       

       “왜요오오오! 따서 갚으면 되잖아요!”

       

       “헛소리 곤란. 됐으니까 전투 준비나 해. 전방에 고블린 하나 있어.”

       

       “그건 저도 알아요. 잠깐 다녀올게요.”

       

       빠른 걸음으로 리디아를 스쳐 지나갔다. 위화감이 느껴지는 곳은 약 5m 앞의 굵직한 나무.

       

       나무 위에서 기다리다가, 숨겨둔 함정에 누가 당하기라도 하면 그대로 뛰어내려 숨통을 끊을 생각인 거겠지.

       

       함정도 흙으로 얇게 덮었고, 본인도 나뭇가지 사이에 숨었으니 나름 철저한 위장이랍시고 한 것 같긴 한데….

       

       고블린답게 일 처리가 좀 엉성하다.

       

       함정은 자세히 보면 흙 위로 윤곽이 보이고, 고블린도 숨어 있지만 가만히 있질 못하겠는지 자꾸만 부스럭거린다.

       

       조금만 신경을 기울이면 얼마든 간파할 수 있는 정도의 위협. 딱 1층 몬스터다운 난이도네.

       

       아무것도 모른 척 무방비하게 걷다가 나무 근처에 도착하는 순간, 함정에 걸린 척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고브브븟! 멍청한 작은 인간! 내 남편이 되어라!”

       

       단박에 속아 넘어간 고블린이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나무에서 떨어진다. 낙하하는 기세를 살려 그대로 나를 몽둥이로 내리찍으려는 것 같지만….

       

       정말로 함정에 걸려 못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고블린의 위치를 미리 알고 있었는데 맞아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종족도 다른 나한테 발정하는 이유를 모르겠네.”

       

       그리 투덜거리며 지면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다만 한 번으로는 부족하니 나무를 향해 비스듬하게.

       

       타닷!

       

       나무의 몸통에 발을 딛고 삼각 점프로 재차 도약한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

       

       아직 몽둥이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을 뿐, 휘두를 준비가 되어있지 않던 고블린. 녀석을 양팔 활짝 벌려 끌어안듯 붙잡았다.

       

       낭창하게 휘어진 팔이 고블린의 관절 사이를 파고들더니, 그대로 단단히 구속한다.

       

       “고브브븟?!”

       

       공중에서의 관절기를 당할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고블린. 근력은 나보다 강하니 시간을 들이면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겠지만…녀석에겐 그 시간이 없다.

       

       허리에 힘을 주어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는 잽싸게 구속을 풀며 고블린의 몸뚱이를 박찬다.

       

       그 반동으로 공중에서 자세를 바로잡으며 안전하게 착지했다. 반대로 고블린은 완전히 몸이 뒤집어져 머리부터 추락했고.

       

       “고브으으읏…!”

       

       우득.

       

       결국 홀로 목이 부러져 즉사한 녀석. 단검을 꺼낼 것도 없이 순살 당한 시체를 등지며 목소리를 깔았다.

       

       “흥. 또 쓸데없는 것을 베어버렸군.”

       

       “아니. 아무것도 안 베었잖아.”

       

       어이없어하는 리디아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고블린의 해체 작업에 들어갔다.

       

       손뼈는 연금술 재료로 팔린다니 손목 부근에서 잘라 배낭에 던져넣고, 심장을 갈라 안쪽의 마석을 꺼냈다.

       

       이걸로 끝. 고블린은 약해서 잡기 쉽지만, 그만큼 몸값이 얼마 안 된단 말이지.

       

       한숨을 푸욱 내쉬며 단검을 검집에 돌려놓자, 얼마 지나지 않아 색을 잃고 무너지는 고블린의 사체.

       

       흙먼지처럼 변한 찌꺼기의 절반은 바람에 날아가고, 절반은 지면에 스며든다. 그렇게 고블린이 존재했다는 흔적이 사라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10초.

       

       몬스터를 이 시공에 묶어놓는 닺 역할을 하던 핵이 사라지자, 더는 형상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부위가 있으면 마석을 뽑기 전에 먼저 잘라둬야 하는 거고.

       

       뭐, 사라진다고는 해도 완전히 소멸하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서 다시 뭉쳐 새로운 고블린으로 리젠되겠지만…그게 어느 시간대의 고블린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천 년 전의 미궁에 나타날 수도, 지금 이순간 대수림 어딘가에 솟아났을 수도, 몇백 년 뒤의 미래로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우리가 상대하는 고블린도 본래는 전혀 다른 시간대의 고블린이었을 수도 있겠지.

       

       미궁의 시공간은 기본적으로 꼬여있고, 우리가 탐험하는 계층은 이를 최대한 풀어서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만들었을 뿐이라 가능한 일.

       

       뭔가 복잡하지만 대충 미궁의 몬스터와 자원이 무한히 솟아난다는 설정을 위해 덧붙인 내용이다.

       

       다만, 계층을 이루는 중심. 죽은 신의 유해는 예외긴 한데…애초에 그건 계층을 이루는 핵심 같은 것이라 미궁의 구조를 구축한 사랑의 여신을 제외하면 누구도 간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1층 어디에서건 고개를 들면 보이는 세계수. 저건 사실 거대한 환상이나 다를 게 없다.

       

       계층 안쪽에서 관측할 수 있는 유해는 특정 시공간에 드리워진 그림자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점점 흉포해지는 몬스터를 뚫고, 어찌어찌 세계수 앞에 도착하더라도 만지거나 부수는 건 불가능하다.

       

       그저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통과할 뿐이겠지.

       

       잠시 세계수 쪽을 바라보다 리디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리디아 님. 이제 고블린은 제 상대가 안 되는 것 같은데, 슬슬 다른 몬스터를 상대해 보죠?”

       

       “응. 기껏 단검 사줬더니 갈무리용으로 쓸 줄은 몰랐어.”

       

       “아…이번에는 무기를 뽑는 쪽이 오히려 불편할 것 같아서요. 그, 왜. 공중에 체공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굳이 단검을 뽑아야 하나? 어차피 한 방에 죽일 힘도 없는 데라는 느낌?”

       

       “뭐라고 한 거 아냐. 잘했어. 좋은 판단이었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 리디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리디아는 내가 쓰다듬 받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별거 아닌 일에도 칭찬해 준답시고 머리를 쓰다듬더라고. 물론 싫은 건 아닌데…막 좋아할 정도도 아니란 말이지.

       

       지금은 미궁이라 갑옷을 입은 탓에 바스트 모핑이 안 보이기도 하고.

       

       미묘한 표정으로 리디아를 바라보고 있던 것도 잠시. 내 시선을 느낀 걸까. 리디아가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흠흠. 이제 슬슬 좀 더 깊은 곳으로 가자. 요나 실력이라면 충분해.”

       

       “오오…!”

       

       “하지만 그 전에 잠깐 이리 와 봐.”

       

       제자리에 쪼그려 앉으며 자신의 옆을 통통 두드리는 리디아. 뭔가 싶어 나란히 쪼그려 앉자, 그곳에는 고블린의 허접한 함정이 있었다.

       

       “이걸 해체해 볼 거야.”

       

       “함정인 걸 알면 피하면 그만이잖아요. 굳이?”

       

       “함정인 걸 알아도 피하지 못할 때가 있어. 변방의 방랑 고블린과 중심부의 홉 고블린의 차이를 알아?”

       

       “문명이죠.”

       

       전반적으로 홉 고블린이 덩치도 크고, 힘도 센 데다가, 드물게 주술사도 나오니 종족적인 차이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래봐야 고블린. 스펙의 차이가 어마무시한 수준은 아니다.

       

       그렇기에 가장 큰 차이점은 다른 무엇도 아닌 생활 양식.

       

       방랑 고블린은 언제나 혼자, 많아 봐야 셋을 넘지 않는 소규모로 움직이며 야만적인 삶을 산다.

       

       반면 홉 고블린은 몇 십마리가 뭉쳐 부족을 형성하고, 나름의 문명을 일구어 체계적으로 살고.

       

       홉 고블린에겐 원시적인 수준이지만 움막과 그 주변을 둘러싸는 울타리가 있고, 좀 더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며, 계급의 구분도 뚜렷하다.

       

       그렇기에 방랑 고블린을 야만인 취급하며 경멸하지만…성욕이 강한 건 똑같기에 예외적으로 수컷은 찾아오는 족족 받아들이고.

       

       수컷 고블린은 평생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일도 안 하며, 그저 하루 종일 교미만 하다 일생을 마치기에 번식 계급으로 불린다는 설정도 있다.

       

       조금 부럽긴 한데 상대가 전부 고블린이라는 걸 생각하면 팍 식더라.

       

       …잠깐. 그래서 방랑 고블린이 나만 보면 발정한 건가.

       

       수컷은 죄다 홉 고블린 쪽으로 갔으니, 암컷밖에 안 남았겠구만. 수컷이기만 하면 종족이 달라도 일단 흥분하고 보는 게 분명하다.

       

       죽기 직전까지 내 고간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고블린이 생각나 몸을 부르르 떨고 있자니, 리디아가 또다시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정말 이런 건 갑옷 벗고 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정답. 요나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 홉 고블린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어. 가장 강한 몬스터는 아니지만, 가장 많은 몬스터니까.”

       

       “그래서 함정을 해체할 줄 알아야 하는 건가요?”

       

       “응. 홉 고블린은 함정을 그냥 던져두고 걸리길 바라는 식으로 쓰는 게 아니라, 걸릴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써. 그러니 미리 예습해두는 거야. 함정을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체하는지, 이미 당했다면 어떻게 빠져나가는지.”

       

       고개를 끄덕인 리디아가 덩그러니 남아있던 함정을 대상으로 시범을 보이기 시작했다.

       

       “전문적인 함정 해체는 워낙 어렵고 복잡해서 척후 중에서도 익힌 사람이 얼마 없지만…고블린의 함정은 조잡해. 이 정도는 모험가라면 누구나 할 줄 알아. 어때? 쉽지?”

       

       “오….”

       

       이후로도 조금씩 중심부로 향하며 몇 번인가 함정을 맞닥뜨렸지만, 리디아의 말대로 전부 간단한 구조라 해체하는 법은 간단했다.

       

       다만, 그렇게 몇 번이고 함정을 간파하거나 해체하기를 반복하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블린도 비겁하게 싸우는데, 고블린보다 약한 내가 정정당당하게 단검과 석궁으로만 싸울 이유가 있나?’

       

       똑같이 함정을 파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 외에도 이런저런 방법이 많을 터.

       

       하여 조금 상상력을 발휘해보기로 했다. 어떻게 하면 일방적으로 줘팰 수 있을까 하는 음습한 상상력을.

       

       분명 언젠가는 도움이 되리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음습 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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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남녀역전 세계의 가챠 중독자
Score 8.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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