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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수석교수님? 평균이 낮아진다니?”

       “그런 게 있어. 일일이 설명하기는 귀찮다.”

       

       디안의 대답에 나이틀리는 그 속뜻을 알아내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아카데미 수석 공작 딸의 개인교습이 경력에 도움이 안 된다라….

       당연히 공식적인 경력으로 그것을 내세울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나이틀리가 말한 ‘경력’이라는 건 이력서에 한 줄 추가하는 정도가 아니다.

       

       그녀가 뜻하는 ‘경력’은 바로 제국 귀족원의 실세 중 하나인 톨루즈 공작가와의 끈끈한 연줄. 고작 일개 아카데미 수석교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특혜다.

       디안 교수가 자신의 아버지와 일면식이 있으니 이렇게 인연 하나를 더 만든다면 훗날 분명 인생에 도움이 될 일이다.

       

       사실 나이틀리는 정략혼에서 벗어나 마음속에 품은 로망인 특임요원의 미래를 실현하기 위해 아카데미로 도피한 상황. 그러니 지금 자기 아버지의 위세를 빌려 쓰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그런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10년 전 4년전쟁에서 생환한 오빠들에게 들으며 가슴 벅차 올랐던 제국 특임대원들의 이야기.

       나이틀리는 답답한 새장 같은 저택에서 벗어나 대륙을 활보하며 암약하는 요원이 되고 싶었고 그래서 특수임무 아카데미가 설립되자마자 도망쳤다.

       

       하지만 도망친 아카데미에서는 그녀가 바라던 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래서 혼자서라도 수련을 하던 차에 디안 교수가 나타난 것.

       

       얼마나 잘난 놈인지 보자며 호기롭게 목검을 들고 달려들었을 때, 디안 교수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지겨운 표정으로 목검을 한 번인가 두 번 휘둘렀고 나이틀리는 자기가 어떻게 당하는지도 모르고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었다.

       

       그때 나이틀리는 결심했다. 저 교수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로. 디안 교수를 발판 삼아 자신의 로망을 실현하기로.

       

       그리고 때마침 아버지가 아카데미에 찾아왔다가 디안 교수를 보고는 자신이 아카데미에 다니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해 주었기에 나이틀리는 그 기회를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즉 디안 교수가 아카데미에 있는 한 나이틀리는 공작가에서 추방당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가문을 등에 업고 마음에 드는 교수 하나 정도 차지하는 것도 가능한 거야.

       그런데 둘은 어떤 관계였지? 뭐, 그냥 전쟁 때 지휘관 부하 관계로 만났었겠지. 자세한 거 내 알 바 아냐.

       

       여튼… 당신이 있으면 나는 강제로 자퇴하거나 가문에서 추방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고 그러니 이렇게 당당하게 가문과의 연줄을 내세우며 회유하는 거야.

       당신은 나를 가르치며 이력서 한 줄 추가가 아니라 대귀족 톨루즈와의 관계를 더욱 공고하게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당연히 디안 교수도 나이틀리의 ‘경력’에 대한 의도를 모두 파악했으리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라고? 오히려 자기 경력을 깎아 먹는 짓이라고?

       

       대체 무슨 생각이지? 거기다 본인의 경력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데? 기껏해야 전쟁터에서 표창 한두 장 받은 게 전부일 거 아냐?

       

       귀족영애 특유의 오만과 독선이 상당히 강한 나이틀리는 도통 디안의 반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쉽게 포기할 생각은 없다. 나이틀리는 자신이 가지고자 마음 먹은 것은 끝까지 쟁취한다.

       그게 지금까지 나이틀리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며 살아온 방식. 저 디안이라는 교수도 마찬가지다.

       

       “교수님.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시죠. 모두 교수님께 이득….”

       “일주일에 한번.”

       “네?”

       

       디안 교수가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 봐주는 거라면 가능하다. 하지만 담임교수마냥 매일매일 너한테만 신경을 쓸 수는 없어.”

       “하지만 교수님. 그건 너무 뜸한 거 아닌가요? 지금까지 아카데미에서는 전투 관련으로는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요. 졸업까지는 딱 일 년이 남았는데 현장에 바로 투입될 수 있는 수준까지 가려면….”

       “충분해.”

       “네…?”

       “충분하다고. 일주일에 한번이면 졸업 때 즈음에 너는 바로 요원으로 임무수행할 수 있을 거야.”

       

       디안이 자신만만하게 말했음에도 나이틀리는 그것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전투수석이라지만 그건 좀 어렵지 않을까….

       

       그러나 나이틀리는 곧 생각을 바꿨다. 일단은 이 정도로 약속을 받아내자. 빈도야 나중에 차차 조금씩 늘려 나가면 될 일이다.

       

       나이틀리는 저 디안이라는 희멀건한 남자를 휘어잡을 자신이 있었다. 대가문의 딸에 아카데미 수석, 거기다 스스로 예쁘다는 것도 명확히 자각하고 있다.

       무기는 충분하고 디안 교수는 한 달 내로 함락되어 전적으로 자신을 케어하는 담임교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좋아요, 교수님. 그렇게 해요. 저는 교수님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으니 좋고 교수님은 우리 가문과 관계를 맺을 수 있으니 좋고, 서로 나쁠 거 없네요.”

       “그래그래. 그럼 이제 돌아가라. 나 바빠. 회의 들어가야 해.”

       

       디안이 손을 휙휙 내젓자 나이틀리가 물었다.

       

       “그럼 첫 번째 개인교습은 언제인가요?”

       “그건 나중에 알려줄게. 당장 이번주 일정 조정할 수 있는지 봐야 해서. 이제 가 봐. 얼른.”

       “알겠어요, 교수님. 연락 기다릴게요. 제 기숙사로 찾아오셔도 돼요. 혼자 따로 살고 있거든요.”

       

       나이틀리는 제법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다리를 꼬았다. 그러자 치마가 말려 올라가며 매끈한 허벅지가 훤히 드러났다.

       

       그러나 디안 교수는 거기에 대답하지 않고 휘적휘적 걸어가 책상에 앉더니 고개를 숙이고 서랍을 뒤적거렸다.

       

       그 모습을 본 나이틀리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 방금은 회의에 참석한다더니 갑자기 서랍을 왜 뒤져?

       내 다리를 보고는 당황한 빛을 숨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군. 의외로 순진한 면이 있네.

       

       기대하라고, 교수님…. 절대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당신은 오직 나만을 위한 교수가 되는 거야.

       

       

       # # # # #

       

       

       나이틀리가 나가는 것을 확인한 나는 서랍 안쪽에서 체리를 올린 생크림 파이를 꺼냈다.

       냄새를 맡아 보니 다행히 아직 상한 것 같지는 않다. 오늘까지 먹어 치워야 하는 건데 하마터면 썩힐 뻔했네.

       

       사실 나이틀리와의 면담 중반부터 이게 생각났는데 계속 이야기가 길어져서 곤란하던 참이었다. 그렇다고 하나뿐이라 나눠먹기는 그래서 회의 핑계로 얼른 쫓아낸 것.

       

       생크림 파이를 크게 한입 베어 물자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지며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거 진짜 맛있다. 아카데미 정문 앞 빵집에서 만든 거라고 하던데, 올리시아에게 종종 사오라고 해야겠어.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 넓은 아카데미에 이렇다 할 편의시설이 없다. 당장 현생의 대학만 하더라도 온갖 프랜차이즈들이 들어와 있잖아?

       

       이것저것 들여 와서 교직원과 학생들이 이용하게 하고 대신 아카데미에서는 임대료와 일정 수수료를 받는 거지. 이거 서로 좋지 누구 하나 손해볼 일은 절대 없어.

       

       대신 자칫 독점하듯이 대충 할 수 있으니 품질관리는 철저히 해야겠지. 이거야 뭐 행정실에서 알아서 할 일이고.

       

       전투학과와는 크게 관련은 없지만 대신 나의 삶의 질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으니 이 부분도 나중에 따로 논의를 해봐야겠다.

       

       흐음, 그래. 그러면 어떤 것을 들여 오는 게 좋을까. 올리시아가 최근에 장을 보러 많이 나다니니까 이따 저녁에 물어봐야겠어.

       

       일단 빵집이 들어와야 하고 식당도 하나 있으면, 아니, 종류별로 해서 두세 개는 들어와야지? 사람이 몇 명인데. 그리고 또….

       

       

       # # # # #

       

       

       그로부터 며칠 후 늦은 저녁 기숙사.

       

       “저기, 반장….”

       

       몇 명의 여학생들이 수줍은 표정으로 나이틀리에게 다가왔다. 모두 손에는 예쁘게 포장한 작은 상자를 든 채였다.

       

       “혹시… 이거….”

       

       얼굴을 붉히며 그 상자를 내미는 학생들을 빤히 쳐다보던 나이틀리가 코웃음을 쳤다.

       

       “미안하지만 나는 여자끼리 사귀는 취향이 아니야. 다른 곳에서 알아 봐.”

       “아?”

       

       지독히도 차가운 반응에 여학생들이 놀란 것처럼 눈을 크게 뜨더니 이윽고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이, 이거… 네가 아니라 디안 교수님께….”

       “뭐?”

       “전투수석교수님께 전해줬으면 하고….”

       “뭐라고?”

       

       여학생들의 목소리가 작아서도 아니고 일부러 겁을 주려고 되묻는 것도 아니다. 저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었다.

       

       “저번에 보니까… 전투수석교수님하고 개인적으로 친해 보여서…. 직접 드리기에는 너무 높으신 분이라….”

       

       잠시 물끄러미 여학생들을 보던 나이틀리는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수치심과 분노로 순식간에 표정이 일그러졌다.

       

       신입생 시절부터 주변에서 선물과 고백 공세를 받아 왔었기에 당연히 자신에게 주려는 것이라고 응당 넘겨 짚었던 것.

       

       “내가 너네 하인이야? 이리저리 선물이나 전달하게?!”

       

       그러자 깜짝 놀란 여학생들이 미안하다며 호다닥 도망쳤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며 숨죽여 웃던 다른 학생들도 덩달아 표정 관리를 하며 다른 쪽으로 시선을 외면하거나 자리를 피했다.

       

       “쟤네 정말 웃긴다.”

       

       나이틀리 주변에 모여 있던 추종자들이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눈을 흘겼다.

       

       “지들이 뭔데 나이틀리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그러게. 밖에서였으면 나이틀리 근처로 다가오기도 전에 제지당했을 평민 주제에.”

       “그건 너희도 마찬가지 아니야?”

       

       나이틀리의 날선 대꾸에 추종자들이 입을 다물고 서로 불안한 시선을 교환했다.

       

       그런 추종자들을 남겨둔 채 나이틀리는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갔다.

       

       “나이틀리! 어디 가! 곧 야간침투 수업인데!”

       “내가 알아서 하니까 신경 꺼!”

       

       지금 나이틀리는 신경이 굉장히 곤두선 상태. 그래서 아주 사소한 것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며칠이 지나도록 디안 교수에게서 아무런 응답도 없기 때문이다.

       

       분명 일주일에 한번은 맡아서 가르치겠다고 했고 나이틀리의 의도적인 추파에 부끄러워 하는 모습을 보이기에 제대로 낚았다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왜 아무 소식이 없지?

       

       머리 끝까지 화가 난 나이틀리는 기숙사를 나와 교수동으로 향했다. 직접 교수실로 찾아가 따지고 물을 생각이었다.

       

       “교수님! 디안 교수님!”

       

       ‘전투수석교수 디안’이라는 명패가 붙은 문을 부서져라 두드렸지만 응답이 없다. 문틈으로 보니 불빛이 안 보이는 게 벌써 퇴근한 모양. 아무래도 교수숙소로 찾아가야 하나.

       

       하지만 이제 곧 야간침투수업 시간. 이론수업이면 모를까 아카데미 외부의 실제 산악지형에서의 실습이기 때문에 빠지는 건 곤란해.

       

       고민하던 나이틀리는 도로 기숙사로 돌아갔다.

       

       일단 수업에 참여한다. 디안 교수야 내일 다시 만날 수 있지만 야간침투 실습은 매일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 저기 계신다! 나이틀리 선배! 디안 교수님께 제 편지를….”

       “꺼져!”

       “히익! 죄송합니다!”

       

       

       # # # # #

       

       

       아카데미 외부. 해안절벽과 고지 몇 개가 이어진 곳에서 야간침투 수업이 진행됐다.

       

       흑복을 입고 얼굴에는 검게 숯칠을 한 학생들은 몇 명씩 조를 이루어 담당조교의 통제하에 야간 산악지형을 극복한다.

       

       각 조마다 각기 다른 침투경로가 하달되며 공통적으로는 고지들을 넘어 아카데미로의 침투를 가정하는 내용. 아카데미 창립 이래 처음 실시하는 야간침투 실습이기에 난이도는 그다지 높지 않다.

       

       침투조들이 속속들이 출발하는 가운데 나이틀리는 팔짱을 낀 채로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수업 진행방식에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녀만 조가 없었기 때문이다.

       

       “교수님. 저는 아직인가요?”

       “안 그래도 이제 네 차례야.”

       

       나이틀리가 손을 들자 침투교수 리나가 손에 들고 있던 지도 한 장을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나이틀리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게 뭔가요…? 설마 침투경로인가요?”

       “맞아. 그 경로를 따라 아카데미로 침투하면 돼.”

       “하지만 이건….”

       

       지금 나이틀리가 보고 있는 경로는 다른 조의 경로와는 사뭇 다르다. 등고선만 봐도 악랄한 지형들을 의도적으로 골라 선으로 이어놓은 듯한 모양새.

       

       “이런 곳을 사람이 갈 수 있을 리가 없는데요.”

       “미안해. 전투수석교수님께서 직접 지시하신 사안이라 내게는 권한이 없어.”

       

       전투수석이라고? 디안 교수가? 그럼 설마 이게 그때 말한 일주일에 한번의 개인교습?

       

       아마도 다른 애들 보는 눈이 있어서 별도로 장소를 선정해 가르치려는 생각인가? 나쁘지 않네.

       

       야심한 밤에 인적이 닿지 않는 으슥한 곳에서 둘만의 개인교습이라…. 아무래도 이번에도 저한테 패배하시겠네요, 교수님.

       

       나이틀리는 드디어 며칠만에 편안한 기분으로 만족감을 느끼며 발걸음을 옮겼다.

       

       지도 하단에는 ‘네가 선택한 교수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라는 이상한 말이 써져 있었지만 크게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그때 면담 때 나이틀리의 교태에 홀린 것을 만회하고 기선제압할 목적으로 이런 허풍을 떠는 것이겠지. 귀엽네, 이 사람.

       

       

       # # # # #

       

       

       그로부터 한 시간 후.

       

       “젠장, 젠장젠장! 이 빌어먹을 교수가!”

       

       거의 수직에 가까운 경사면에 네 발로 납작 달라붙은 나이틀리가 욕을 내뱉었다.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왜 아직까지 안 나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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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Quietly 은퇴한 조력캐는 조용히 살고 싶다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stead of causing chaos with my knowledge of the original work, I assisted the protagonist.

I successfully completed the story and now planned to retire and live peacefully.

However, it seems the protagonist still needs my help.

An academy professor? That’s nothing much.

But why is the state of the academy so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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