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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0

     

    “벌써 세계수님의 치료법을 찾으셨단 말씀이시군요.”

     

    나는 엘프 장로회와 마주 앉았다. 우리를 안내했던 대장로를 제외하면 그다지 신뢰를 보내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렇습니다. 이쪽이 손상된 세계수의 샘플입니다만.”

     

    내가 나무껍질을 꺼내니 일부 엘프가 식겁하는 태도를 보였다.

     

    “지금 저 단명종이 세계수님의 신체를 뜯어온 거요?”

    “내 사고 칠 줄 알았지. 감시 안 하고 뭘 한 게요.”

     

    주로 늙은 엘프들이 시끄러웠는데, 대장로가 손을 내밀어 그들을 저지했다.

     

    “세계수님을 고치는 일이 더 시급하다고 동의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지, 천 년 전만 해도 말이여…!”

    “옛날이야기는 나중에 하시죠.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고트베르크 선생님.”

     

    어느 동네나 노인들의 상식은 바꾸기 힘든가 보다. 대장로가 말이 잘 통하는 친구라 다행이었다.

     

    “증상 자체는 심각하진 않습니다. 박테리아성 감염인데, 쉽게 말하면 영양분을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뺏기고 있습니다.”

     

    나는 품에서 병 하나를 꺼냈다. 연금술로 제조한 용액이다.

     

     

    [고목수액 포션]

     

    영양이 듬뿍 담긴 비타민을 식물용으로 변형해서 나무수액과 섞어 제조했다.

     

    나무껍질에 떨어트리니 화아악!

    썩은 부위는 거품이 일며 때가 벗겨지듯 사라지고 새살이 돋았다.

     

    “허어…!”

    “어떻게 저리 단숨에…!”

     

    장로들이 순식간에 나은 세계수 껍질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들이 한참이나 끙끙 앓던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된 걸 보고 허탈해하는 눈치였다.

     

    나도 효과를 보고 놀라긴 했다. 고목수액 포션은 지금 만들 수 있는 포션에서도 최고 랭크긴 하지만, [연성]의 효과는 확실히 상식을 뛰어넘는다.

     

    “이렇게 하면 복구는 됩니다만 머잖아 증상이 다시 발생할 겁니다. 말씀드렸듯 세계수의 영양을 빼앗는 존재는 그대로니까요.”

     

    “악령이라도 들렸단 말인가?”

     

    “그리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만 영혼은 아니고 엄연한 생물입니다.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 생물은 다른 숙주, 더 커다란 생물에 기생해서 세계수에 옮겨붙었습니다.”

     

    “그게 어떤 생물이오?”

     

    “회충이라는 벌레입니다. 그리고 이걸 세계수에게 옮긴 건 다름 아닌 여러분입니다.”

     

    내 손바닥이 자신들을 가리키자 늙은 장로들은 길길이 뛰었다.

     

    “말도 안 되오. 이해할 수 없는 소리투성이로군.”

    “우리가 세계수님을 해할 리가 없잖소.”

     

    “여기 썩어 문드러지던 집들 밑둥에서 찾은 벌레입니다.”

     

    백 번 말보다 한 번 보는 게 빠르지.

     

    내가 신호하니 타냐가 상자를 가져왔다.

     

    달칵, 뚜껑을 여니 안에 징그럽고 기다란 흰색 벌레가 꿈틀거렸다.

     

    “맙소사, 엄청나게 크군.”

    “이 벌레를 우리가 어찌 옮겼단 말이오. 본 적도 없소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다름 아닌 여러분 뱃속에 있습니다.”

    “뭐라고?”

    “하하하.”

     

    장로들은 아예 말이 안 된다고 여겼는지 어이없어하는 눈치였다.

     

    “대충 봐도 3미터는 넘어 보이는데, 어찌 저 벌레가 우리 몸 안에 들어간단 말이오. 입 밖으로 튀어나오겠군.”

    “이래서 인간은 상종하면…”

     

    대장로가 격해진 분위기를 중재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손을 들었다.

     

    “그렇게 인간을 무시하다 500년 전 참패를 맛보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발전 속도는 저희의 생각보다 훨씬 빠릅니다.”

     

    그가 나를 향해 손깍지를 끼고 진중하게 질문했다.

     

    “고트베르크 선생님. 저희는 말씀하신 게 잘 이해되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영상 자료 보시죠.”

     

    타냐가 준비한 수정구를 틀었다.

    공중에 화면이 표시됐다.

    내가 지금껏 찍어온 엑스레이 사진 몇 장이었다.

     

    “이게 여러분의 내부입니다. 여기가 입이죠. 보면 아시겠죠? 들어간 음식은 한참을 이 구불구불한 기관에서 소화하는데, 저 벌레는 여기에 접힌 채 살고 있어서 얼마든지 살 수 있어요.”

     

    “맙소사.”

     

    “아, 생명엔 전혀 위험하지 않으니 걱정 마십쇼. 가장 좋은 건 음식을 날로 안 먹는 습관을 들이는 건데, 정 힘드시면.”

     

    쿵, 내가 병을 한 개 더 내려놓았다.

    안에는 꿀과 섞어 그들이 거부감이 없도록 만든 액체가 들어있다.

     

    “구충제입니다. 도시의 엘프 여러분 모두 하루 한 번, 잠들기 전에 한 숟가락씩 드세요. 뱃속의 벌레를 없애줄 겁니다.”

     

    “…농담이겠지, 설마.”

     

    “농담처럼 보이니?”

     

    아셀라가 많이 참았다는 듯 현실을 부정하는 장로들을 쏘아붙였다.

     

    그녀의 태도에서 이게 장난도 뭣도 아니라고 드디어 깨달은 그들이 하나둘씩 입가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속이 안 좋아져서 잠시 실례하겠소.”

    “저도 같이…”

    “우웁.”

     

    흠, 숲에서 사는 엘프니까 벌레 정도는 평범하게 먹지 않나.

    뱃속에서 키우는 건 다른 이야기긴 하겠다.

     

    대장로는 자리를 지켰지만 비위는 상했는지 울렁거리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이 구충제란 걸 먹으면 정말 괜찮아지는 거겠죠.”

     

    “물론입니다. 성능은 보장하죠. 아, 어지간하면 뱃속의 벌레를 녹일 텐데 가끔 저항력이 강한 놈들은 살아 나올 수도 있어요. 그때는 당황하지 마시고 엉덩이에서 잡아 뽑으면…”

     

    “나도 실례하겠소.”

     

    결국 장로도 벌떡 일어나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조용해진 회의실.

    아셀라가 살짝 긴장한 채 내게 물었다.

     

    “라스, 혹시 나한테도 저런 게 있진 않지?”

     

    “에이, 없죠.”

     

    “휴.”

     

    “저희 궁에는 진작 배포했어요. 있었어도 옛날에 화장실로 내려갔을…”

     

    “그만.”

     

    아셀라의 명령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

     

     

     

    세계수 치료 의뢰를 해결하고 나오니 상태창에 알람이 떴다.

     

     

    ―――――――――――

    · [이종족 문화 교류인] 업적을 획득했습니다. 종족감수성이 풍부하시군요.

    · [밤의 선두자] 업적을 획득했습니다. 나이트엘프가 당신에게 우호적입니다.

    · 위대한 업적! [세계수의 수호자]를 획득했습니다.

     

    · 진귀한 경험으로 경험치가 대량 상승했습니다.

    · [연성]이 B로 랭크업했습니다.

    · [연금술]이 B로 랭크업했습니다.

    · 1개의 스킬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

     

     

    그간 열심히 연금술을 사용한 덕일까. 세계수가 계기가 되어 연금술 랭크가 올랐다.

     

    ‘다음 스킬은 인챈트가 좋으려나.’

     

    곧 열릴 연무회에서 효과적으로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했던 대로 저희 경비대를 호위로 빌려드리겠습니다. 세 명을 차출하지요.”

     

    기다리던 시간이었다. 장로가 우리에게 엘프 궁수들과 대면시켜주었다.

     

    스무 명 정도의 궁수가 대기하고 있었다. 내가 섭외하고 싶은 인물, 발렌도 그중에 있었다.

     

    짝다리를 짚고 껌…은 아니고 굳힌 나무수액을 씹는 태도가 영 불량해 보인다.

     

    대놓고 지목하면 경계할지도 모르니 자연스럽게 데려가는 게 제일 좋지.

     

    “장로님께 이야기는 들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저희는 제국에서 왔습니다. 여기에서는 북쪽으로 꽤 여행을 가야 하는 곳이죠. 돌아가기까지 호위가 필요하기에 도움을 구하고자 합니다.”

     

    “아앙? 주렁주렁 달고 다니던 칼잽이들은 어쩌고?”

     

    아니나다를까, 발렌이 성질 급하게 시비를 걸어왔다.

     

    “하하, 보셨지만 저희에겐 궁수가 없습니다. 오는 길은 어떻게 흘러왔지만 여러분과 전투를 겪고 나니 돌아가는 길에는 큰 필요성이 느껴져서 말입니다.”

     

    이 정도면 명분으로는 충분하다.

     

    “세계수님도 고쳐줬으니 호위를 맡는다면 우리도 영광이다. 부탁하고 싶군.”

     

    숲의 입구에서 만났던 남자 궁수, 파멜름이 말했다. 내가 그에게 미소지었다.

     

    “염치 없지만 실력 좋은 분을 모시고 싶은데요. 다름 아니라 저희 마차에 화살을 명중시키셨던 궁수님, 어느 분이신지요?”

     

    “…그건 난데.”

     

    발렌이 소심하게 앞으로 나섰다.

     

    “아, 궁수님이셨군요. 괜찮으시다면 꼭 호위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내 제안에 기세등등하던 태도는 어디로 사라지고, 발렌이 식겁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야, 지금 나보고 숲에서 나오라고? 무슨 생각인지 다 알아 자식들아. 변절자들처럼 나를 타락시킬 생각이지?”

     

    생각보다 바깥 문명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다. 살살 꼬셔서 나중에 연무회까지 진출시킬 생각이었는데 첫 단추가 안 맞으려나.

     

    “타락이라니요. 맹세코 그런 의도는 없습니다. 제국은 이곳만큼이나 질서 바르고 점잖은 나라입니다. 마음에 드실걸요.”

     

    “못 믿어. 밖에 나간 하이엘프들이 얼마나 추잡하게 노는지 소문 다 들었다고. 그리고 너, 너희도 말이야. 어?”

     

    발렌이 팔을 부들대며 나와 아셀라를 힘겹게 손가락질했다.

     

    “내가 다 봤거든? 세계수님을 살핀답시고 둘이서 몰래 시시덕대고 말이야…! 나도 그런 걸로 타락시킬 생각이지!”

     

    나랑 아셀라가 얘기하는 장면을 봤나.

    거 참, 뭘 시시덕댔다고 그래. 장난만 조금 쳤지.

     

    여기 있는 궁수 중에서 단언코 제일 난폭하게 생긴 주제에 말하는 태도는 영 숫처녀가 따로 없었다.

     

    “오해가 있으신 듯하군요. 저는 궁수님의 실력만 눈여겨봤을 뿐, 다른 의도는…”

     

    “그래. 쓸데없는 걱정이란다, 엘프여.”

     

    등 뒤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함께 아셀라가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별안간 홱, 그녀가 탱고의 한 장면을 추듯 내 허리를 잡아 균형을 무너뜨렸다.

     

    그 매혹적인 몸놀림에 모든 이의 시선이 주목됐다. 나도 예상치 못한 습격이었기에 아셀라에게 몸을 맡기게 됐다.

     

    그녀가 발렌을 흘겨보며 말했다.

     

    “이 남자에 한해서는 쓸모없는 의심이란다. 이미 본녀에게 푹 빠져서 다른 불순한 생각을 할 여유도 없거든.”

     

    “어…”

     

    발렌은 아셀라의 당돌함에 홀렸는지 할 말을 잃고는 고개를 돌린 채 시선만 연신 흘끔거렸다.

     

    복귀 동작으로 일어선 후 나는 아셀라에게 예를 표하는 인사를 했다.

     

    “제국은 재미있단다.”

     

    아셀라의 말이 인상적이었는지 다른 궁수들의 얼굴에도 흥미가 깃들었다.

     

    사실 진짜 좋은 기회인 게 아닐까? 발렌의 당혹스러워하는 심리를 여기서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역시 아셀라다. 인간 뿐만 아니라 엘프도 가지고 노는구나.

     

     

     

    “출발하겠습니다.”

     

    타냐의 신호와 함께 우리는 제국을 향한 귀환길에 올랐다.

     

    올 때는 없었던 세 명의 엘프 궁수가 함께한다.

     

    발렌이 그 안에 포함됐음은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라스, 너도 하나 챙겼나 보네.”

     

    아셀라의 눈짓에 나는 가벼운 미소로 회답했다.

     

    백의 안주머니에는 세계수의 가지가 정갈하게 꽂혀있었다.

     

     

    ―고마어.

     

    환청이었는지, 어째 멀리서 앳된 목소리가 들린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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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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