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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0

*

오로지 이기적인 인간은 이해하기 쉽다.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이타적인 인간은 신뢰하기 쉽다. 타인의 비극에만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인간을 믿지 못하는 이유다. 어떤 인간도 오로지 이기적이지도, 오직 이타적이지도 않다. 인간이란 때때로 자선을 베풀고, 때때로 부모형제의 주머니까지 앗아가니까.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결코 엘프를 믿을 수 없다. 이것은 사상의 차이가 아니라, 차라리 세상의 차이에 가깝다.

인간은 엘프의 시간을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으니.

기나긴 세월을 살아갈 수 있으며, 동시에 지성을 가지고 우월한 문명을 이룩한 족속들이란 그렇다. 막연히 동경할 수도, 막연히 혐오할 수도 없는.

엘프들은 지독할만큼 욕망에 충실한 족속이다. 긴 세월이 보장하는 그 시간만큼의 무료함을 욕망으로 해소한다. 이는 놀랍도록 저열하다.

동시에 엘프들은 정결한 구도자이기도 하다.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 신앙과 도를 쌓아 올리는 수도자들처럼 진리를 탐구하며 침잠한다. 긴 삶을 모두 털어 넣더라도 아낌없이 과감하게.

그 양가적인 감성이 지금의 칼리온을 만들었다. 지독하고, 저열하고, 고아하며, 정갈한. 마천루가 늘어선 대도시와, 하늘을 날아다니는 거대한 함선, 그리고 쏟아지는 부화 사치, 향락.

그 탓에 인간은 엘프를 경애하고, 동시에 혐오한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차별은 무지에서 나오므로, 인간과 엘프는 서로에게 가장 끔찍한 인종차별주의자가 된다.

당연하게도, 이반은 그렇지 않다.

-콰직.

이반은 종족으로 우열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는 선진 21세기의 문화대국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교육 시스템을 신봉하기 때문이다. (물론 대한민국은 종족으로 우열을 구분한다.)

이반이 구분하는 것은 대부분 종족이나 국가가 아닌, ‘쓸모’, ‘위협’, 그리고 ‘피아’에 한한다. 종족은 그 족속을 ‘구별’하는 데에 필요한 요건 중 하나일 뿐이다.

-콰직…!

따라서 이반은 상대의 종족을 파악하고 혐오하기에 앞서서, 도끼와 권총을 드는 편이다. 이는 지난 30년간 그를 배신한 적 없는 협상 수단이요, 외교 수단이요, 거래 수단이었다.

-콰직!!!

그는 이토록 합리적인 사람이다.

이반은 눈을 감은 채 걸음을 옮겼다.

애원이라도 하듯 틀어막힌 바리게이트가 종잇장처럼 찢겨 나간 사이로.

*

“15번 게이트 돌파!!”

“연구동에 출동한 대응팀 전원 무력화 되었습니다!!”

“15분… 아니, 10분 안에 접근제한범위 내에 도달합니다!”

연구총괄팀은혼란에 빠져 있었다. 말이 좋아 연구총괄이지 사실상 이 섬의 모든 것을 관리하는 이들이라 해도 좋았다. 연금학파가 지배하는 섬인 이상, 이 섬의 모든 물자와 인구는 거시적인 범위 내에서 연구팀에 속해 있으니까.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섬의 중추부터 말단까지의 시선이 몰려 있다 해도 좋았다.

“대체 누가 고발한 게냐… 누구야!”

늙은 엘프가 손톱을 뜯으며 소리쳤다. 거대한 전황판엔 온통 붉은 칠이 가득했다. 저 붉은 궤적이 곧 침입자의 진군 경로나 다름없었다.

처음 ‘사전 신고 없던 함선의 접근’이 인지되었을 때, 이 자리의 누구도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예상한 범주 내의 일이었던 탓이다.

늙은 여왕의 긴 치세가 끝나고 있다. 이건 단순히 왕위 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엘프의 삶에서 권력 이양이란, 곧 문자 그대로 ‘세대의 교체’를 뜻하니까.

이제 곧 격동의 시기가 도래할 것이다. 마왕은 죽었고, 세상은 먹음직스러우며, 혼란은 곧 기회다. 모든 추밀의원들은 입맛을 다시며 세상이란 케이크를 조각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시기, 칼리온의 어떤 섬에 도달하더라도 같은 상황이다. 기업이 기업을 공격한다. 추밀의원이 추밀의원을 암습하고, 경제 보복이 뒤따르고, 물류 압박이 시작되고, 때때로 군사 도발까지 이어진다.

그러니 ‘신고 없는 무허가 선박의 접근’이란, 곧 애가 탄 상대 중 하나가 접촉을 시도했다는 뜻이 되겠다.

다소 과격한 수단이지만 이해 가능한 범주였다.

그 함선에 탑승한 선객 명단을 확인하기 전까진.

“에델플라트 코엔울프가 베올그린의 배에 타서 입항을 했다! 이게 내부 고발 없이 가능은 한 일이야? 어?!”

“하지만 전하… 저, 저희는…!”

“너희가 아니면 누가!!”

늙은 엘프의 비명에 장내가 서늘해졌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나이를 합치면 신화 시대에 육박할 것이다. 가장 어린 엘프도 이백 년 이상 살았다.

그런 이들이니 패닉은 빠르게 끝났다. 한 엘프가 침착하게 말했다.

“전하, 지금은 급한 불을 끄는 것이 우선입니다.”

“저 용병 말이냐?”

“예.”

“저 놈들이 입힌 손실이 어느 정도라고?”

“다행히 연구동 자체를 파괴하진 않았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돌파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달리고 있는지라… 당면한 피해가 크지 않습니다.”

“팔다리를 잘라서 내 눈 앞에 대령해. 코엔울프 그 애꾸년에게 주는 선물 정도는 되겠지.”

“예, 전하.”

코엔울프가 있는데 인간을 잠입시켰다…. 베올그린의 배를 타고 기습해온 시점에서 이미 무언가 낌새를 눈치채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물증이 없는 모양이다. 직접 타격할 만한 증거도, 명분도 없으니 인간 용병을 고용한 셈이다.

그렇다면 누굴까. 열 둘 남은 ‘기업’ 중 누가 감히 연금학파를 고발했기에, 베올그린과 코엔울프가 동시에 나타났단 말인가.

“놈의 사지를 찢고 코엔울프에게 던져주면 표정이 볼만 하겠지. 증거도 없이 남의 집을 온통 헤집었으면, 베올그린이 직접 나서더라도 문제 삼을 수 있다.”

“예, 전하.”

“너는 즉시 추밀원에 고등법원 소원을 내라. 감히 검각이 직접 칼질을 하려 들다니. 그것도 인간의 손으로!”

그의 경쟁자 중 누군가가 손을 써서 고발을 했다. 이건 확실하다.

그 자존심 높은 코엔울프가 인간들의 땅에서 돌아오자마자 베올그린의 후광을 업고 들이닥친 이상 이 부분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그러나 인간 용병을 써서 내부를 뒤적인다라. 그건 조사의 핵심 증거가 없다는 뜻이며, 뒷탈이 생기더라도 인간 선에서 손을 털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조치일 것이다.

어느 기업이든 털어서 먼지가 나오지 않는 회사는 없다. 업력이 오래된 업체일수록 더욱 그렇다. 이 시기에, 남의 작은 티끌이라도 털어가며 짓밟으려는 승냥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베올그린, 지금 상황이 급한 건 이해해도 이렇게 저지르는 건 품위가 너무 없지 않나.”

늙은 엘프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연금 학파의 진압대가 지하에 동원되는 것이 상황판에 보였다. 저 두 인간놈을 잡아 오면 문제의 대부분이 해결될 것이다.

그리고 저 인간들에 적당히 약을 쳐서 진술 몇 자 받아두면, 코엔울프의 검각이든, 베올그린의 천문학파든 둘 다 엮어 넣을 소재가 될 법도 했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하필이면 이 시점에, 엎친데 덮친 격이 아니라.

정확히 ‘이 시점’에 감사하게도 기회를 던져준 셈이 아니겠는가.

*

누구에게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다. 리버샷을 맞기 전까진 그렇다. 마이클 타이슨의 이 격언은 놀랍게도 지구가 아닌 세상에서도 적용되는 법이다.

이반의 도끼에 어느덧 마물과 합성 괴수, 골렘 따위의 핏물이 아니라 엘프의 피가 묻기 시작했을 시점이다.

“허억— 헉. 사, 사형… 지, 진짜 죽을 것 같… 으윽.”

“해라.”

“하지만 사형, 지금 흡혈을 하면 사형이—.”

“날 걱정할 만큼 여유로우냐?”

“죄송합니다….”

루시아는 결국 버티지 못했다. 독에 대한 면역력이 떨어진 탓이다. 마력으로 독소를 배출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니, 아직 어린 루시아에겐 과도한 전장이다.

이미 이 복도는 대기 중에 호흡이 가능한 공기보다 독극물이 더 많이 검출될 수준이 되어 있었다. 엘프 타격팀 둘을 갈라버린 직후부터.

이 학파의 엘프들은 회랑 전체를 영구적으로 포기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굴었다. 폭약을 던지고, 독극물을 살포하고, 생체 골렘을 접근시켜 터트리기까지 하면서.

이반은 견딜 수 있어도 루시아에겐 처음 보는 종류의 실전이다. 혈액 대부분을 마력으로 불태워가며 겨우 버텼지만 그것도 한계가 왔다.

-으득.

송곳니가 파고드는 느낌과 함께 아릿한 감각이 목덜미 인근을 마비시켰다. 짧은 흡혈 이후, 루시아는 달뜬 숨을 내뱉으며 그의 등에 고개를 묻었다.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다.”

“부끄러워요….”

“약한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야. 부족함을 알고 있다면 더 나아지는—.”

“그게 아니라, 이 자세가요.”

루시아는 포대기에 꽁꽁 싸인 채로 이반의 등에 매달려 있었다.

양 팔을 모두 사용해야 하고, 전투 중에 몸에 걸리는 것이 없어야 하는 상황에서, 이반의 등까지 보호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인 자세다.

그가 이토록 합리적인 사람이다. 애석하게도 어린 꼬마들은 이를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이반은 무어라 대답하려다가, 문득 발을 멈췄다.

그는 곧장 도끼를 손에서 놓고 팔을 올렸다. 피잉,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든 것이 그의 손에 잡혔다.

작은 엠플이었다. 눈으로 확인하는 즉시 바닥에 던지고 숨을 참았다. 곧, 슈확.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인간… 인간 놈.”

회랑 너머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반은 고개를 돌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그 애꾸년은 뭘 데려온 게냐….”

배에 깊은 상처를 입은 엘프가 바닥에 쓰러진 채로 헐떡거렸다.

두 개의 타격팀, 열댓 개의 생체 골램, 수십 가지의 보안 체계, 적어도 십수 개의 즉효성 극독을 퍼붓고도 저지하지 못했다.

이제 조금만 더 나아가면 이 섬의 중추에 도달한다. 그들이 직접 나와 교전했다는 것 부터가 그런 뜻이었다. 더 물러설 곳이 없다고.

이반은 바닥에서 헐떡이는 엘프에게 다가갔다.

-콰직!

철을 덧댄 군화 굽이 엘프의 가슴을 거칠게 밟았다. 커헉, 하는 신음소리가 흘렀다. 두려움보다 수치심이 더 크게 든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려워해야 마땅하다.

이반은 도끼를 쥐고 엘프를 내려보았다.

“절멸부대.”

도끼 끝에 묻은 혈흔이 회랑의 천장에 매달린 보안장치 위까지 길게 튀었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당분간 10시 안팍으로 올라갈 것 같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시간 다시 조율해 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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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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