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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1

       “지, 진짜로 오전 10시 전에 도착했어…….”

        

       신기하지?

        

       릴리의 중얼거림에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주인공답고 정직하고 성실한 성격의 레오는 약속도 엄청나게 잘 지킨다. 단순히 약속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에 온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게임에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나 정말 어려운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뛰어들곤 했다.

        

       시간 맞춰서 일을 끝내는 것 정도는 당연하지.

        

       물론 거기 휘말리는 사람은 마냥 웃기만 할 수는 없겠지만.

        

       게임에서는 플레이어의 편의를 위해 걷거나 뛰기, 혹은 전투를 위한 스테미너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기에 캐릭터들이 일을 끝마치고 지친다는 표현이 거의 없거나 대사 한 줄로 넘어갔지만, 지금 내 주변의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다들 지친 표정이었다.

        

       감탄사를 내뱉은 릴리까지 전부.

        

       특히 체력이 약한 미아 크로우필드는 거의 죽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쌀쌀할 때 나가서 해가 떠서 한창 뜨거울 때 돌아왔으니 그 큰 일교차를 온몸으로 만끽하고 들어온 셈이다. 안 지치는 쪽이 이상하지.

        

       “여러분은 언제나 이렇게 일찍 움직이시나요?”

        

       “‘언제나’는 아니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릴리에게 앨리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언제나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쪽은 이 두 사람뿐이에요.”

        

       샤를로트가 레오와 클레어를 지목하면서 말하자,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레오는 그렇다 쳐도, 클레어는 대체 어쩌다가 이런 성격에서 본편의 그런 성격이 되어버린 걸까?

        

       내가 이 세상에 오는 바람에 원작과 이렇게 달라지게 되었다는 건 알겠지만, 참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러니했다.

        

       “아, 그런데 괜찮겠어? 친구들이랑 약속 있다고 했었잖아.”

        

       레오가 릴리에게 물었다.

        

       잘생긴 귀족 소년이 자기한테 말을 걸자 아주 잠깐 멍한 표정이 되었던 릴리는 금세 현실을 깨닫고 울상이 되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한창 일을 하고 왔더니, 거의 쉬지도 못하고 또 친구들 따라 일하러 가야 하는 상황이라는 뜻이었으니까. 게다가 하나하나가 탈인간급인 이 일행과는 다르게, 평민들은 대부분 마법이나 검기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일을 처리해야 했다.

        

       당연히 더 오래 걸렸으면 걸렸지, 짧게 끝날 일은 없으리라. 아무리 못해도 오후 다섯 시까지는 일해야 하지 않을까? 한창 햇볕이 강할 때는 일하기도 곤란하니 그동안 쉰다고 하면 더 늦을 수도 있고.

        

       …….

        

       평민 반에서 우리 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돌아도 그러려니 해야겠다.

        

       하지만 릴리의 울상은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았다.

        

       문득 뭔가 잊은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자기가 여기 따라왔던 이유를 생각해냈는지 나를 한 번 보고, 로티를 한 번 본다.

        

       그리고 그 시선을 따라서, 한 박자 느리게 다른 애들의 시선도 나를 향했다가, 다시 로티를 향했다.

        

       “아…….”

        

       그리고 혼자 뭔가 이해한 것 같은 표정으로 릴리가 나를 보자, 다시 한번 다른 시선들도 모두 나를 향했다.

        

       뭐, 원작에서도 꽤 똑똑하다고 나오는 캐릭터였으니까. 수석 자리는 언제나 앨리스, 그리고 그 아래의 자리도 샤를로트와 다른 귀족반 애들이 거의 차지하고 있었지만, 릴리도 그사이 어딘가에 이름이 늘 끼어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평민 출신이라서 기초 지식이 귀족들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다. 원작에서도 그런 말이 나오기도 했고. 본인은 별로 달갑게 듣지는 않았지만.

        

       “그렇구나.”

        

       릴리는 뭔가 이해했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생각을 완전히 따라갈 수는 없다. 릴리의 사고방식은 나와는 다를 테니까.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로티를 평민이라는 이유로 내려다보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았으리라.

        

       “여러분 모두, 감사합니다. 좋은 경험이 되었어요.”

        

       그리고 이내, 허리를 숙여 우리를 향해 인사했다.

        

       “응? 그냥 시간이 남는다길래 같이 의뢰를 해결하러 다녔을 뿐이잖아. 너무 신경 쓰지는 마.”

        

       그런 릴리에게 레오가 그렇게 말하자, 릴리는 쓰게 웃었다.

        

       “만족하셨습니까?”

        

       “네, 제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요.”

        

       나의 질문에 릴리가 활짝 웃었다.

        

       “그럼 다음에 보자. 복도에서 마주치면 모른다고 무시하지 말고.”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귀족 여러분을 무시할 평민이 몇 명이나 될까 싶은데요…….”

        

       클레어의 말에 릴리는 웃으며 대답했다.

        

       뭐, 그런 거다.

        

       원작의 주요 캐릭터 중 하나인 릴리에게는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고, 내가 생각하는 다른 쪽으로 이야기가 뻗어나가기 좋도록 기반도 다질 수 있었고.

        

       말하자면 일거양득이랄까.

        

       *

        

       방으로 올라가 가볍게 씻고 내려와 점심 식사를 마치고 라운지 테이블을 하나 잡아 앉아 멍때리고 있는데, 제이크가 멋대로 내 앞자리를 잡고 앉았다.

        

       “실비아.”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는 평소보다도 밝게 들렸다.

        

       아니지, 어쩌면 그 밝음의 ‘종류’가 다르다고 할 수도 있겠다. 평소에는 다소 과장된, 연기하는 톤이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그냥 친구한테 아침 인사를 건네는 것 같은 자연스러움이라고 해야 할까.

        

       적어도 내 앞에서 연기를 유지해야 할 이유는 이제 없다는 거겠지.

        

       신뢰를 쌓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오늘 있었던 일이 쟤 머릿속의 내 이미지를 단번에 끌어올려 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제가 이 자리에 혼자 앉아있는 이유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 이유가 뭔데?”

        

       내가 시큰둥한 말에 제이크는 실실 쪼개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솔직히 저런 표정을 짓는 사람이 그런 순정남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생긴 거랑 지금 행동만 보면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는 히로인한테 작업 거는 양아치 캐릭터였는데.

        

       이러니 그런 동인지가 나오지.

        

       뭐, 원작에서 캐릭터 이미지가 그렇게 된 건 제이크 잘못이라기보다는 제이크를 그렇게 디자인한 개발자들 잘못이 크기는 하다만.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제가 먼저 자리를 잡고 혼자 앉아있는 것이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 옆자리에 즐겨 앉는 앨리스나 클레어, 그리고 레나는 이럴 때 저를 방해하는 일이 거의 없죠.”

        

       “다들 네가 이름으로 부르는 애들이네.”

        

       “……저는 제 주변의 사람들을 거의 다 이름으로 부릅니다만.”

        

       “미아는 아니잖아.”

        

       미아는 안 친하니까.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서로 과거가 있다 보니 쉽게 친해질 수 없다. 그리고 내가 너무 갑자기 들이대면서 친한 척하면…… 그건 좀 너무 사이코패스스럽지 않나?

        

       “표정도, 목소리도 나름대로 감추고 있기는 하지만, 네가 행동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친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해서 움직이는 것 정도는 알 것 같거든. 아, 물론 네가 나쁘다는 건 아니야. 그보다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거겠지.”

        

       “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오늘 그런 일을 벌여놓고도 그렇게 말하는 거야?”

        

       “…….”

        

       “평소엔 총알 한 발 낭비하는 법이 없는 네가 뜬금없이 총알 순서를 헷갈린다고? 나는 전투에 돌입하기 전에 네가 총을 점검하는 모습을 봤거든. 마르마로스 탄의 생김새를 갑자기 헷갈릴 만큼 느슨한 사람이 아니야, 너는.”

        

       내가 오늘 사자 앞다리에 깔려서 낸 소리를 들었어야 하는 건데.

        

       물론 그랬다가는 시간을 다시 되돌렸겠지만.

        

       “그러니까, 우리 그냥 전부 까놓고 말해보자.”

        

       제이크는 허리를 펴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앉으며 말했다.

        

       “너, 로티를 더 높은 곳으로 올릴 생각이지?”

        

       “…….”

        

       그렇긴 하지.

        

       “그런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기 힘들어서 말이야. 설마 네가 로티와 내가 결혼하는 걸 도우려는 생각인 건가 해도, 갑자기 우리한테 그런 호의를 베푸는 건 이해가 안 가서. 뒤쪽에 숨겨진 의도 같은 것이 있는 거 아냐?”

        

       아닌데.

        

       나는 진짜로 너희 둘 결혼하게 만들려고 그러는 건데.

        

       왜냐하면—

        

       솔직히 로티가 쿨데레에 츤데레 섞어서 틱틱거리는 걸 보고 있는 것도 재미있기는 하지만, 그 이상으로 장애물에 가로막혀서 질질 끄는 게 짜증 나거든. 물 없이 찐 고구마 먹는 느낌이라고.

        

       “그래서.”

        

       하지만 그런 말을 직접 해줄 수는 없지.

        

       나는 제이크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제가 그녀를 이용할 계획이라고 말씀하고 싶으신 겁니까?”

        

       “음, 글쎄. 솔직히 내 머리로는 네가 지금 하고 있던 그 생각 정리 속에서 로티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판단할 수는 없지만.”

        

       제이크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말했다.

        

       “그냥 장식 취급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런 식으로 기용해줄 사람이 있는 쪽이 낫겠지.”

        

       하지만, 제이크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는 않았다.

        

       “그래도, 로티의 목숨이 위험해지거나 하면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생각이지만.”

        

       당연히 그럴 일은 없다.

        

       로티도, 너도.

        

       전부 내가 보호하고자 하는 존재 중 하나였으니까.

        

       적어도 이 거대한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는 살아있도록 할 생각이다.

        

       “유념하겠습니다.”

        

       그런 생각이었기에, 내 대답에는 꽤 진심이 담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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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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