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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1

       *

         

         

         에쉬클리프 남작은 기름진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검게 물든 동공 아래에 세상이 손에 들어올 것처럼 작게 보였다.

         

         그는 지친 몸을 의자에 깊게 묻었다.

         

         

        -쿠궁!

         

         

         거대한 회장실 너머, 인간들이라면 응당 ‘알현실’이라 부를 이 거대한 실내의 끝. 상아와 흑단으로 꾸민 두꺼운 문을 넘어 저 멀리.

         

         먼 회랑에서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쿠궁, 쿠궁!

         

         

         점점 더 가깝게, 점점 더 위협적으로.

         

         이내, 쾅. 단단한 목조 문에 긴 실금이 생긴다. 그럼에도 에쉬클리프는 의자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쾅, 쾅, 쾅. 단조로운 파열음이 이어졌다. 완벽하게 동일한 리듬감으로. 곧 문의 파열이 크게 번진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실금이 이내 임계점에 이르렀다.

         

         쿠구궁, 먼지가 일고 톱밥이 튀었다. 그 사이로 도끼 한 자루가 고개를 내밀었다.

         

         

         “내가 이 섬에 자리 잡은 것이 500년 전이다.”

         

         

         두 개로 갈라져서 들리는 목소리에, 침입자는 아랑곳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 사이 대전쟁이라 할 만한 것이 열다섯 번이 있었고, 그때 죽은 수하들이 도합 38,312명이다.”

         “….”

         “마지막으로 내 앞에 날붙이를 들이밀었던 것이 212년 전이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나는 살아남았다.”

         

         

         에쉬클리프의 말이 끝날 때, 침입자는 알현실의 긴 융단을 소리 없이 밟아 다가왔다.

         

         서로의 이목구비가 온전히 보일 거리 앞에서, 에쉬클리프는 조용히 물었다.

         

         

         “네가 여기까지 올 때 죽인 내 수하가 고작 57명이다. 이 섬에 거주하는 사천여 명 중 고작 그 정도란 말이다. 내 병력이 이것으로 끝일 성 싶더냐? 네가 살아 나갈 수 있겠더냐?”

         “지금 어디에 있지?”

         “뭐?”

         “오직 산 자만 후일을 고려하는 법이다. 엘프. 너와 나 사이에 네가 자랑하는 그 숫한 병력이 어디에 있나.”

         

         

         침입자의 말에 에쉬클리프는 이를 꽉 물었다. 당연히 섬 외부에, 심지어 대부분은 바다 위에 있다. 그 누가 성내에 전 병력을 주둔시킨단 말인가.

         

         애초에 엘프는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암살이란, 엘프들에겐 너무 품위 없는 행동이었으니.

         

         차라리 정치적으로 공격한다, 차라리 경제적으로 압박한다.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다. 그리고 칼을 들고 직접 잠입해 야밤에 습격하는 일은, 그 중 최악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군왕과 같은 이들은, 결코 도적처럼 승리를 약탈하지 않는 법이다.

         

         

         “모든 엘프들이 너와 같다면 내 일이 쉬워지겠군.”

         “인간. 예의를 갖춰라.”

         “나는 시체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는 편이다.”

         

         

         네크로맨서들의 신을 죽일 때부터 쭉 그래왔다.

         

         이반의 말에 에쉬클리프 남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이를 이득 갈며 낮게 말했다.

         

         

         “내 세월이 곧 너희 족속들의 역사와 다르지 않다. 내가 겪어온 세월 동안, 너와 같은 자들을 대체 얼마나 보았으리라 생각하느냐?”

         

         

         그의 걸음걸음마다 어둠이 기름처럼 부유했다. 분노로 통제를 벗어난 마력이 알현실을 짙게 물들였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대지가 움츠러든다.

         

         빛이 섞이면 백색이 된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색이 섞이면 흑색이 된다. 온갖 색체의 조합은 곧 탁하게 오염된 오물의 것과 다르지 않다.

         

         연금학파의 수장이 곧 그랬다. 갑작스러운 급습으로 대응할 시간조차 없이 성문을 열어야 했던 늙은 왕의 분노가 그렇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왕이다. 일국의 군주이며, 그의 존재 자체가 세월의 방증이다.

         

         그러니 걸음걸음엔 여전한 오연함이 담겨 있다. 지독하게 휘몰아치는 살기는 그 자체로도 물리력을 갖춘다. 이반은 칼날처럼 저며오는 살기를 마주하며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 누구도 내 앞에 선 이후에 여전히 살아있지 못했다. 그 누구도!! 인간, 몇 해를 살았느냐? 고작해야 30, 40년을 살아가고, 쇠락해 늙어가는 족속 주제에!!”

         “루시아.”

         “엑, 넵?!”

         “너는 저렇게 늙지 말아라.”

         “…예…?”

         

         

         이 분위기에서 할 말인가? 그의 등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루시아가 멍하니 이반을 바라보았다.

         

         농담기 없는 얼굴로, 이반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저 자의 말대로 내 수명은 길지 않다. 너는 엔리케의 블러드라인을 이었으니 아주 오랜 시간 살아가겠지. 그러니 장생족으로서, 너는 저렇게 늙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 조언은 감사한데, 어어… 경청… 경청하겠습니다아… 그런데, 어….”

         

        -콰아아앙—!!

         

         

         그들의 말소리를 듣고 마침내 인내심이 끊긴 것인지, 에쉬클리프 남작의 몸에서 기세가 폭발하듯 쏟아졌다.

         

         

         “감히—!!”

         “치매의 전형적인 증상이로군. 어휘력이 감퇴하는 것 말이다. 연금학파엔 치매 치료 비약은 없던가?”

         “네 혀를 뽑고, 두 눈을 파고, 사지를 끊어 놓겠다!! 네 놈은 오래 살 것이야. 내가 가진 모든 비약을 동원해서라도, 영원한 시간 속에서 절규하게 만들 것이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궁금한 것은 여전히 많았지만, 호기심을 해결하는 것은 언제나 상대의 무력화 이후의 일이다.

         

         사전에 나누는 대화는 도발을 제외하면 모두 무의미하다. 그리고 이미 도발은 충분히 했으므로, 이반은 루시아를 내려놓고 도끼를 들었다.

         

         

         “사형? 저는 빠질까요? 빠져야겠죠? 방해가 되기 싫으니까요?”

         “그날 이후로 더 이상 방해꾼으로 남지 않게 노력하겠다 하지 않았더냐?”

         “에이, 그게 고작 서너 달 전인데요. 아직 멀었습니다~”

         “살을 발라줄 테니 네가 처리해라.”

         “…에….”

         

         

         루시아는 두려운 눈으로 전방을 응시했다. 온몸에서 검은 탁기를 줄줄 흘리는, 오백 년 이상 묵은 늙은 미치광이 엘프를 상대하는 것은, 같은 미치광이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녀의 곁에 선 ‘우리 편’ 미치광이는 묵묵히 말했다.

         

         

         “통제된 환경에서, 안전이 보장된 상황에서 치루는 실전.”

         

         

         이반은 도끼를 비스듬히 들고 눈을 감았다.

         

         

         “우리는 그것을 훈련이라 부른다.”

         

         

         마침내 이성이 끊어진 엘프가 이반을 향해 질주했다.

         

         

        *

         

         

         체스터홀드 남작과 엘피헤라, 그리고 에델플라트는 선상의 테이블에 모여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먼 동녘이 터오르고 있었다.

         

         새벽이 지났다. 어둠은 짙푸른 색을 남기며 부스러졌다. 언제나 맑은 칼리온의 하늘은 오늘도 여전히 청량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구—!!

         

         “?!”

         

         

         자리의 모두가 벌떡 일어섰다. 섬의 방향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진동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잔뜩 긴장한 무장 병력들이 성을 향해 달려갔다. 이미 성 외부에 모여 있던 군사들은 침을 삼키며 본성의 드높은 담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섬 전체에 울릴 진동의 진앙지는 명백히 본성을 향해 있었다. 에델플라트는 하나 남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시원하기도 하구나.”

         “뭐가 보이세요…?”

         “볼 필요가 있느냐. 느끼는 것이지.”

         “뭘요…?”

         “수신(修身)의 끝에 도달한 검사가 보일 법한 의념.”

         

         

         마침내 일출이 끝났다. 먼 수평선 너머로 오른 태양이 아침의 칼리온을 비추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검은 연기가 한 줄기 올랐다. 본성의 한켠을 완전히 무너트리며 치솟아서, 푸른 하늘에 실금을 긋듯이 길게 이어졌다.

         

         병사들 사이로 웅성거림이 이어졌다. 에델은 비릿하게 웃으며 체스터홀드 남작을 바라보았다.

         

         

         “병력을 지휘하지 않아도 좋은가?”

         “…이 계획은 검각의 것입니까, 아니면 천문학파의 것입니까.”

         “계획?”

         “연금학파를 암습할 계획!! 흑마법학파와 손을 잡았습니까? 그 놈들의 뒷공작은 진실입니다! 추밀원은 지금 속고 있는 겁니다!”

         “그럼 그 치들도 한 번 조사는 해보마.”

         “…뭐…?”

         

         

         에델은 당황한 체스터홀드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지나가던 길에 들렀다. 내쫓기길래 궁금해졌다. 호기심이 든 차에, 마침 호기심이 아주 많은 녀석이 우리 중에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호기심을 해결할 방법이 아주 많은 편이다.”

         “그게 무슨… 이게 다 우연이었다고? 후폭풍이 두렵지 않았느냐, 에델플라트 코엔울프! 심증조차도 없이, 그저 지나가다가 들러서 본성을 급습했다고?!”

         “후폭풍? 누가 말이냐?”

         

         

         에델은 벌떡 일어선 체스터홀드 남작에게 츳츳, 하고 혀를 찼다.

         

         그녀의 새하얀 손가락이 검파 위에 얹혀 있었다.

         

         

         “움직이지 마라. 체스터홀드. 지금 그 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인질을 잡고 겁박을 하겠다…? 이 섬의 모든 엘프들이 네 짓을 똑바로 보고 있다. 추밀원에서 가만히 있을 성 싶으냐?!”

         “인질도 아니고 겁박도 아니다. 충고지. 떠나고 싶다면 떠나라, 반격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알고 있느냐.”

         

         

         나는 서로의 무장이 확인된 자리에서 벌어진 모든 ‘결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다.

         

         검각의 주인이 낮게 말하자, 체스터홀드 남작은 이를 꽉 깨물며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검격의 사정 거리 안에 있다. 이 거리 안에서, 그녀는 홀로 칠용장조차도 막아낸 적 있던 여인이다.

         

         

         “코엔울프 경! 오고 있습니다! 무사해요!!”

         

         

         엘피헤라의 밝은 목소리가 울렸다. 에델은 시선을 돌려 성을 바라보았다.

         

         몰려든 병사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선다.

         

         오만한 엘프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마른침을 삼키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고 있었다.

         

         

        -저벅.

         

         

         이 거리에선 들릴 리가 없으나, 에델의 귓가엔 저 무거운 발걸음이 선연히 들리는 듯 했다.

         

         등 뒤에 루시아를 업은 채로, 한 사내가 동녘을 등지고 긴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가는 걸음마다 길이 열렸다. 엘프 병사들은 지휘관의 연락도 받지 못한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체스터홀드 남작이 있는 방향을 다급하게 힐끗거리는 모습도 더러 보였다.

         

         

         “그래야지. 길을 열어야지. 그게 당대의 용사가 할 일이지.”

         

         

         에델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체스터홀드는 눈을 꾹 감고 있었다.

         

         

         “아는 것이 많은 모양이더군. 우리 중 가장 호기심이 많은 녀석이 살아 돌아왔는데, 서로 아는 바를 맞춰 보겠나?”

         “기업들이 가만히 있겠소? 추밀원의 늙은이들이 이 사태를 좌시하겠소?”

         “여왕 폐하를 만날 참이었다. 마침 잘 되었지.”

         “하.”

         

         

         체스터홀드는 끝내 한탄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늙은 여왕이 짠 판이었구나. 제 손에 들어온 무엇도 놓치지 않는, 욕심만 가득한 늙은이 같으니.”

         

         

         에델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착각은 대화를 주도할 때 좋은 소재가 되곤 하니까.

         

         이 나라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대체 이 나라 추밀원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베올그린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낼 참이다.

         

         

         “왔나.”

         

         

         에델이 고개를 돌렸을 때, 승선한 이반이 반쯤 시체가 된 루시아를 선수부에 던져버리곤 걸어오고 있었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번편 내일 끝내고, 이제 본격적인 연계퀘스트 시작합니다!
    그게 먼데 씹덕아는 오늘까지만 참아주세요!!
    죄송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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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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