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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1

     졸지에 황궁에서 쫓겨났다.

     정치외교적으로 따지고 보면 암살당할 수 있는 사신을 급히 본국으로 송환시킨 꼴이지만, 나는 나 홀로 황궁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 저 좀 들어가서 잠 좀 자겠습니다.”

     어찌나 피곤해보였는지, 마도자동선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벽을 짚고 가는 로버트도 로버트지만.

     “세상에. 호위기사가 저래도 되는 거예요?”

     

     황궁이 아닌 내 옆에 서 있는 여인, 아스타시아와 함께 황궁을 벗어나게 되었다.

     “괜찮습니다. 황녀님께서 있으니까요.”

     “제가 있다고 뭔가 달라지는 건가요?”

     “최소한 면전에서 대놓고 암살자를 보내지도 않을 뿐더러, 황제의 깃발을 걸고 달리는 마도자동선을 대놓고 습격할 자는 없겠죠.”

     나는 현재, 왔을 때 탔던 마도자동선에 오른 채로 제국을 횡단하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백은이라도 빨고 달려오고 싶을텐데, 지금 그러지 못하는 걸 보십시오.”

     

     마도자동선이 그렇게까지 빠른 속도는 아니라 암살자들 중에는 분명 우리 뒤를 쫓아오거나 전보를 보내 앞 길을 막거나 그럴 자들이 차고 넘쳤지만, 더 이상의 암살 위협은 없었다.

     “이렇게 얌전히 클레이돌 후작령을 지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지금 황제가 엄청 화가 났다는 겁니다.”

     “왜요? 당신을 함부로 암살하려고 한 그림자들 때문에?”

     “예.”

     아무래도, 나는 회귀 전의 황제를 계속 생각했었던 모양이다.

     “조금, 의외였습니다. 설마 암살자들이 황제가 보낸 게 아니었다니.”

     “…….”

     “영락없이 ‘이 또한 시련이리라’라고 하면서 보낸 거라고 생각했는데. 퍼레이드 끝날 때까지 한 번 견뎌보라는 건 줄 알았는데. 그림자 중에서 아집에 가득 차서 상대의 실력도 가늠할 줄 모르고 덤비는 부나방들을 대신 제거하는 김에 묵과한 줄 알았는데.”

     “그, 대변해주려는 건 아니지만….”

     아스타시아는 겸연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황제 폐하도 자신이 황제가 된 날 하루 정도는 모든 걸 내려놓고 잠을 잘 수 있는 거 아닐까요? 그래도 사람이니까.”

     “제가 생각하던 합스베르크 황제답지 않은 행동이라서 그랬습니다.”

     “그레이가 생각하던?”

     “뭔가 합스베르크 황제라면 한 잔 정도 와인을 들이킨 다음, ‘황제가 된 기쁨은 이 한 잔으로 끝내지’라고 하면서 상황에 집중했을 것 같았거든요.”

     회귀 전의 황제는 그랬다.

     종종 자신의 아래에 있는 그림자들 중 선을 넘는 자식들이 있었는데, 그를 제거하기 위해 때때로 휘하나 주변을 이간질시켜 그 열등감을 내게 표출하게 만들었다.

     암살이라는 방식으로. 

     덕분에 언제 한 번은 화를 냈던 적도 있었다.

     ‘레타르 장난감을 보내줘서 고맙기는 하지만, 시체 치우는 것 정도는 사람을 좀 보내서 처리해달라고 그랬지.’

     무상으로 쓰레기 소각시켜주는데, 최소한 쓰레기 처리 정도는 생산자의 몫이 아닐까.

     그랬던 황제였는데, 설마 기분 좋게 하룻밤 소위 ‘꿀잠’을 잤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혹시….”

     “혹시?”

     “어머니…랑 사이가 좋아졌다거나 그런 거 아닐까요? 왜, 어른의 시간….”

     “그럴 일은 전혀 없습니다.”

     에르윈 회장은 샤를로트 백작부인이 아니다.

     자신의 위치와 입지, 다짐 등을 과거의 연심 때문에 흔들리거나 할 사람이 아니다.

     애초에 에르윈 회장은 황제의 침실에 들어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며, 가장 완벽한 ‘쇼윈도부부’를 자처할 것이다.

     “애초에 합스베르크 황제가 에르윈 회장님을 황후로 받아들인 이유는….”

     “제 어머니이기도 하고, 다른 여자들 중에서 황후 자리를 노리는 여자를 견제하기 위함인 거죠?”

     “그러합니다.”

     황후와 황녀 자리가 비어있으면 곤란하다.

     황태자 자리가 비어있는 현 상황에서도 이렇게나 황궁 전체가 떠들썩한데, 그 자리까지 비어있으면 여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그거 아십니까? 과거에 합스베르크 황제가 노스트럼 왕국에 처음 직접 왔던 날, 합스베르크 황제의 얼굴에 반한 노스트럼의 귀족들이 제법 생겨났다는 걸요.”

     “어머, 진짜요?”

     “예. 아마 합스베르크 황제의 대관식을 찍은 제국신문 말입니다. 노스트럼 곳곳에 퍼져나간다면 아마 귀부인들이 한 부씩 몰래 빼돌릴 겁니다.”

     에르윈 회장이 한순간이나마 그 외모에 반하여 아스타시아를 낳게 되었을만큼, 합스베르크 황제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남자인 건 틀림없다.

     “어쩌면 한순간 사랑했던 남자가 죽은 뒤, 그 공허함을 한순간이나마 위로해준 것에 반해버린 미망인조차도 말이죠.”

     “네…?”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아직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크게 터질 폭탄 같은 존재가 하나 있다.

     “그보다, 황녀님?”

     덜컹.

     가볍게 흔들리는 마도자동선의 갑판 위에서, 나는 아스타시아에게 손을 뻗었다.

     “노스트럼의 연회장에서 종종 보셨겠지만, 음악과 함께 춤을 추는 건 귀족의 소양이랍니다.”

     “저는 따지고 보면 제국 귀족인데요?”

     “혹시나 제국이 망하게 된다면 백작부인을 하셔야 하는데, 미리 배워둬야하지 않겠습니까?”

     “정식 프로포즈 전까지는 노카운트라고 하면서, 이렇게 대놓고 말하기 있어요?”

     아스타시아는 피식 웃으며 내 손을 붙잡았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다가 또 화제를 바꾸나 했는데, 설마 이런 걸 제안할 줄은.”

     “이런 거라뇨? 이게 얼마나 진지한 건데.”

     “어떻게 진지한, 흣…?!”

     

     아스타시아의 허리를 잡고 얼굴을 가까이하자, 아스타시아가 놀라 고개를 뒤로 빼버렸다.

     “꺅…?!”

     

     평소에는 신지 않는 굽 높은 구두 때문일까.

     아스타시아는 그만 뒤로 넘어질-

     “저런.”

     뻔 했으나, 나는 아스타시아의 등허리를 한손으로 받치며 그녀를 붙잡았다.

     “노스트럼에서 간혹 레이디들이 이런 식으로 상대 파트너를 유혹하고는 하는데, 혹시 그거 따라하시는 겁니까?”

     “아, 아닌데요? 놀라서 넘어진 건데요?”

     “당신이?”

     “…저는 그러면 안 되나요? 가, 갑자기 다가오길래, 그, 그….”

     “키스라도 하는 줄 알았습니까?”

     “…….”

     아스타시아의 얼굴이 붉어진다.

     내게 잡힌 손을 놓았다가는 그대로 자신의 등을 받친 손에 몸을 의지해야 한다는 걸 알기에, 아스타시아는 어떻게든 더 뒤로 넘어지지 않으려고 자세를 다잡으려고 했다.

     “아스타시아.”

     나는 아스타시아가 도망치지 못하게, 그녀의 옆으로 살짝 몸을 비틀며 상체를 숙였다.

     “지브롤터의 맹약에 따르면 성인이 될 때까지 자제를 해야 하기는 합니다만, 조상님들이나 이 핏줄에 담긴 맹약에 그런 저주를 건 사람도 인정머리는 좀 있었나봅니다.”

     “네?”

     “이해하셨으면서, 모른척 하시는 겁니까?”

     “…….”

     아스타시아는 잠시 입술을 오물거린 뒤.

     “…에잇!”

     그대로 내 손을 잡아당기며, 자세를 바로잡고는 바로 내 앞에 마주섰다.

     “그렇다는 거죠? 그러면….”

     사락.

     “…하아.”

     살짝 고개를 숙이자마자 닿은 따스한 감촉.

     이전의 차가웠던 밤공기의 기운과 달리, 지금은 따스한 숨결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것도, 노카운트인가요?”

     “네.”

     “네? 이게요? 아하, 혹시 직접 하시겠다는….”

     “공주님.”

     나는 아스타시아의 손을 맞잡고 비틀며, 손가락이 교차되듯 깍지를 끼며 꽉 붙잡았다.

     “에, 엣…?”

     “뽀뽀와 키스의 차이를 아십니까?”

     “어, 어…? 지금, 뭐라고요?”

     “모르시는 것 같군요. 노스트럼의 키스와 테르시안의 키스가 가진 차이점은요? 혹시 아십니까?”

     “그, 그건….”

     “지금부터 아시게 될 겁니다. 정확히는….”

     도망치지 못하게, 아스타시아를 잡아당기며.

     “버드 키스와, 프렌치 키스 사이의 차이에 대하여.”

     * * *

     푸화ㅡㅡ악!

     피가 튄다.

     붉은 피가 대리석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며, 핏물이 대리석 사이의 줄을 가득 채운다.

     “건방진 놈들.”

     손에 도끼를 든 합스베르크 황제는 지하감옥과도 같은 방의 가운데를 빙글빙글 돌며, 이까지 갈며 대놓고 분노를 드러냈다.

     “너희들 때문에 연회의 주인이 사라졌다. 그 알량한 욕심만 내지 않았다면, 그레이 지브롤터는 최소한 닷새는 황궁에서 머무르다가 떠났을 것이야.”

     지하감옥의 벽, 쇠사슬에 사지가 묶인 백발의 남녀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죄인이었고, 말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으니까.

     “말을 듣지 않는 것들은 곧 짐승이지. 내가 분명 전달했을텐데. 그레이 지브롤터는 ‘나의 손님’이니, 건드리지 말라고.”

     “…….”

     “네가 대답해봐라. 대표로서.”

     백발의 남녀들 가운데,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자상이 생긴 청년이 피를 줄줄 흘리며 입술을 깨물고 있다.

     

     “나의 말이 말 같지 않더냐? ’01’.”

     “아닙니다.”

     번호, 01로 불린 청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네게 뒷 일을 맡긴다고 하고 하룻밤을 느긋하게 즐겼다. 광장에 나온 제국 시민들을 위한 퍼레이드를 일찍 마치고, 오후에 느긋하게 그레이 지브롤터와 티타임을 즐길 예정이었어.”

     “…….”

     “내가 자작을 하며 그 티타임에서 나눌 화제가 무엇이 좋을까 고민하는 사이, 너는 네 아래에 있는 ‘소수’들을 보내서 그레이 지브롤터가 한숨도 자지 못하게 괴롭혔더구나.”

     “…….” 

     “하고 싶은 말이 있더냐? 그래, 기회를 주마. 어디 한 번 말해보거라.”

     “…아버님.”

     01이라고 불린 백발의 남자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레이 지브롤터는 저희가 모르는 아버지의 아들입니까?” 

     “아니다. 그는 크림슨과 샤를로트의 자식이다. 제국 황실과는 피가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지.”

     “그런데 왜 그에게는 그렇게 잘 해주시는 겁니까?”

     “왜냐고? 그걸 굳이 내 입으로 설명해야 하느냐?”

     “예.”

     01번의 말에, 벽에 묶인 백발의 그림자들도 하나둘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희 모두, 아버지의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 자식. 나의 씨를 받은 모체로부터 태어난 자식들이지. 나의 수족이자, 나의 그림자.”

     합스베르크 황제가 도끼자루를 어깨에 걸치며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그런 불만이라면, 목숨 한 번 정도는 봐주도록 하마. 비록 너희들은 그레이 지브롤터를 직접 죽이려고 나서지는 않았으니.”

     “…….”

     “01. 묻겠다. 네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으니, 분명히 물어보도록 하마.”

     쿵!

     “나의 이름이 무엇이더냐. 나의 직책이 무엇이더냐. 나의 나라가 무엇이더냐?”

     “…위대한 통일 대륙의 지배자. 500년의 시간 동안 수십 개의 나라를 정복하여 새롭게 떠오른 은빛 태양의 나라 테르시안, 그 대제국의 합스베르크 폰 테르시안 황제 폐하십니다.”

     “…….”

     합스베르크 황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그 답이, 너희와 그레이의 차이라는 것이다.”

     “…….”

     “어리석은 것들. 애초에 너희가 그레이가 바라보는 시야의 1/10만 따라왔어도, 너희 중 누군가는 번호가 아니라 이름으로 불리우며 그레이의 옆에 두었을 것을.”

     덜커덩.

     “흥이 식었다.”

     합스베르크 황제는 피 묻은 도끼를 바닥에 냅다 집어던지며 몸을 돌렸다.

     “나의 명령이 없는 한 그 누구도 협곡을 넘어가서는 아니될 것이다. 만일 그레이 지브롤터를 귀찮게 하는 일이 있다면….”

     “제가, 그레이 지브롤터를 죽인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뭐라?”

     01번의 말에 합스베르크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네까짓게, 그레이 지브롤터를 죽이겠다고?”

     “실력은 숨겼다고 하더라도, 다리가 병신이라면 이길 수 있습니다.”

     “……쯧.”

     합스베르크는 진심으로 탄식했다.

     “자식을 더 낳아야 하는 건가, 아니면 내 씨앗이 이리도 형편없단 말인가?”

     “……!”

     “아니지. 그래도 여아 쪽으로는 제법 괜찮으니, 딸이나 더 낳게 해야겠군.”

     합스베르크는 대답도 하지 않고, 자문자답하며 감옥을 나섰다.

     “치료하라. 그리고 알아서 정리해.”

     “폐하, 대답을…!”

     “대답? 하.”

     합스베르크 황제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탄하듯 말했다.

     “죽일 수 있다면 죽여보든가. 그래. 그레이 지브롤터를 죽인다면, 내 그를 인정해주마.”

     “……!”

     “물론, 제국의 그 어떤 도움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내야 하겠지만.”

     합스베르크 황제가 빈정거리듯 중얼거렸다.

     “애초에 너희들 같은 벌레들에게 죽을 사내였으면, 내가 내 뒤를 이을 차기로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나의 (다음) 황제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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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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