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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2

     

    네르는 공허하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왼손 약지에는 여전히 베르그와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베르그가 버려두고간 반지는 왼손 엄지에 끼워두었다.

     

     

    이혼한 상대가 혼인의 증거를 지니고 있는게 추하다는 걸 본인도 알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하루에 수십번은 더 이 창 밖으로 몸을 던질까 생각한다.

     

    죽지 않을만큼만 크게 다쳐, 베르그에게 소식을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아무리 베르그라도 자신을 위해 달려와 줄게 분명했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크게 다치면 베르그가 찾아온다는 것만큼은, 그 누구보다 분명히 알았다.

     

    그게 베르그라는 사람이었다.

     

     

    이토록 추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네르는 베르그의 착한 마음을 이용하려는 지독한 괴물이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네르.”

     

    네르는 순간적으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약해져버린 그녀의 심신은 작은 소리에도 이렇게 크게 반응했다.

     

     

    돌아보니 그녀의 오라버니 기딘이 있었다.

     

    네르는 그가 대체 언제 들어왔는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또 언제 떠났는지 의문이었다.

     

     

    기딘은 한동안 깊은 숨을 내쉬다,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렇게 있으면, 무엇이 달라지기라도 하느냐?”

     

    “…”

     

    “네 현 상황에 어떠한 변화라도 생기냐는 말이다.”

     

    “…”

     

    네르는 기딘의 압박에서 놀랍도록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예전에 느껴졌던 공포도, 두려움도 없었다.

     

     

    베르그와의 이별이 준 극심한 아픔이 나머지 모든 걸 무디게 했다.

     

     

    그러니 네르는 그저 기딘의 말을 무시하며 고개를 돌렸다.

     

    다시 창 밖을 바라보며 베르그에 대한 생각을 이어나갔다.

     

     

    “…내가 그 인족 용병이었어도, 너 같은 사람은 밀어냈을 거다.”

     

    하지만 기딘의 다음 말이 그 어느때보다 네르를 자극했다.

     

    -드르륵!!

     

     

    “……”

     

    그녀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일어나 덜덜 떨었다.

     

    폭발적으로 피어난 증오.

     

    기딘에게 이런식의 반항은 그 언제라도 해본적이 없었다.

     

     

    “…오라버니.”

     

    네르는 입술을 악물며 기딘에게 경고했다.

     

    “…입조심 하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베르그가 남들에게 경고하는 모습조차 흉내내보았다.

     

     

    하지만 생김새만큼이나 고집이 강한 기딘은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네가 생각해보거라. 처음부터 그 인족용병을 두려워했던 너다. 이제와 보니 몸에 손가락 하나 올리지 않았던 것 같더구나. 그마저도 그 용병의 배려였겠지. 그렇게 너를 조심스럽게 대하고… 소중히 챙겨주려했던 그였는데. 배신을 준비했으니, 당연히 밀어내지 않겠느냐.”

     

    “…..”

     

    -투두둑…투둑…

     

    콧잔등이 찌푸려진 네르의 얼굴에서 분한 눈물이 흘러나왔다.

     

    기딘의 그 어떠한 말에도 거짓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가세요.”

    결국 네르가 말할 수 있는건 떠나라는 말 뿐이었다.

     

    기딘의 아픈 진실이 그녀를 상처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아플수록 그녀는 한 사람만을 떠올렸다.

     

    언제나 자신의 아픔을 치유해준 그 남자만을.

     

     

    하지만 기딘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런 너였는데, 매일 같이 편지를 쓴다고. 매일 같이 청승을 떤다고 갑자기 그 인족 용병의 마음이 달라지기라도 할 것 같으냐? 너를 향한 그 용병의 마음은 이미 떠나갔다는 걸 아직도 깨닫지 못했느냐?”

     

     

    “나가라고요!!!”

     

    자신을 향한 베르그의 마음이 떠나갔다는 말에, 네르는 있는 힘껏 비명을 질렀다.

     

     

    기딘도 그에 질세라 외쳤다.

     

    “정신 좀 차리란 말이다!!”

     

     

    기딘의 외침에 네르가 흠칫 놀랐다.

     

    네르를 바라보는 기딘이 이어간다.

     

     

    “네 꼴을 한 번 살펴 보거라. 피부도 푸석해졌고, 털도 윤기를 잃었다. 최소한의 매력이던 얼굴마저도 생기를 잃었구나. 누가 당장의 너 같은 여인을 받아 들이겠느냐. 울고 있으면…그 용병이 돌아오기라도 한다더냐…!”

     

     

    네르는 그제야 스스로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베르그가 아름답다 말해준 꼬리털조차 지저분해진 상태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든게 다 망가져 있었다.

     

    방이 언제 이토록 지저분해졌는지 그녀는 깨닫지 못했다.

     

     

    찻잔과 주전자가 방바닥에 굴러다녔고, 옷자락이 널브러져 있다. 그녀를 위해 사용인들이 가져온 음식이 식은채 탁자에 놓여있다. 넘어진 의자들과 가구에서 부서져 나온 판자들마저도 보였다.

     

    발 디딜 틈 하나 없었다.

     

    그녀가 정신없이 눈물을 흘리고 비명을 지른것에 대한 결과였다.

     

     

    며칠만에 처음으로 그녀는 주위의 모든 걸 인식했다.

     

     

     

    네르의 얼굴에서 점차 분노가 빠져나간다.

     

    그리고 분노가 빠져나간 자리에 자기 혐오와 슬픔만이 들어찼다.

     

     

    “…베르그…”

     

    그녀가 속삭였다.

     

    그에 대한 그리움이 고점을 찍고 있었다.

     

    베르그의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그 무엇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딘이 말했다.

     

    “이렇게 망가져 있을수록 너와 그 용병의 거리는 멀어지는 것이다.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면 제발 좀 깨달으란 말이다…!”

     

    “….흐윽….으흑…”

     

    네르가 끝없이 눈물을 흘리자, 기딘도 한숨을 내쉬며 숨을 돌렸다.

     

    한참동안 방에는 네르의 흐느끼는 소리만 존재했다.

     

     

     

    그렇게 침묵을 이어가다, 기딘이 다시 이어갔다.

     

    “너를 향한 그 용병의 분노가 식을때까지는 절대 그를 만나보지 못할거다.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이야. 앞으로 무슨 일이 없다면 몇 달 동안은 만나지도 못하겠지.”

     

     

    기딘이 내뱉는 현실적인 기간에, 네르는 심장이 아파왔다.

     

     

    “그마저도 부족할지도 모른다. 몇 년, 혹은 십 여년이 흘러야 될지도 몰라. 굳이 너를 만나고 싶어하지 않을테니까.”

     

     

    10년이면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그 기간 동안 베르그를 못 볼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너무나도 아프게 했다.

     

    그렇게 오랜 이별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게 두려웠다.

     

     

    “그런데 이렇게 망가져 있다면, 다음 재회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네 마지막일 거다. 이렇게 추하게 무너져 있다면 그는 널 돌아보지도 않을거야. 오히려 남아있는 미련만 털어내겠지.”

     

     

    기딘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 선택이다. 일어나거나…망가져 있거라. 하지만 하나 약속하자면, 먼 훗날 내가 가주가 되었을 때. 그때에도 이딴 꼴이라면…난 널 가문을 위한 장기말로 사용할 것이다. 널 다시금 팔아넘기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야. 이건 협박이 아닌 약속이니…기억하거라.”

     

    기딘은 그 말과 함께, 네르를 내버려둔채 떠나갔다.

     

     

    “……….”

     

    네르는 눈물을 뚝뚝 흘리다, 힘 없이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기딘의 끝없는 폭언이 어째서인지 그녀의 상황을 더욱 말끔하게 전달해주는 느낌이었다.

     

     

    기딘의 말이 옳았다.

     

    이대로 있는다고 무엇이 달라지지 않는다.

     

    그건 베르그를 통해 너무나도 잘 느꼈다.

     

    베르그는 어떠한 상황이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움직였으니.

     

    최근에는 아담 단장을 잃고도 행동하던 그였다.

     

    아내였던 네르는 그 모습을 너무나도 많이 지켜봤다.

     

     

    동경했던 그의 모습이었다.

     

    힘이 되어주고 싶던 순간들이었다.

     

     

    이제는 그 과정을, 네르 스스로도 밟아야만 했다.

     

     

    네르는 그렇게 밤이 될 때까지 같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오랜 생각과 고찰에 끝없는 생각이 이어진다.

     

     

    지금 생각해본다면…베르그는 자신에게 과분한 남자였다.

     

    정을 나누었을 뿐,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그 어떠한 자질도 갖추지 않았다.

     

     

    “…이렇게…어려운 거였어, 베르그?”

     

    그녀는 다시 일어나 움직여야한다는 걸 느꼈다.

     

    기딘의 말이 옳았던만큼…최소한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기라도 해야했다.

     

     

    아직 블랙우드와 홍염단의 관계도 끊기지 않은 상태다.

     

    베르그의 배려 덕에 블랙우드는 갚아야할 빚이 남아있었다.

     

    베르그가 무엇을 요구할지 알지 못했으나…그 과정속에서 그에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는 알지 못했다.

     

    기약없는 기다림이 될 거라는 건 알았다.

     

    그리고 그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베르그를 향한 끈적한 마음이 짙어질 게 분명했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길 바랐다.

     

    그녀도 자신이 어떻게 변할지 알지 못했으니.

     

     

     

    네르는 달을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베르그도 저 달을 보고 있을까.

     

     

    “…너무 보고싶어…베르그…”

     

    그녀가 속삭였다.

     

     

    네르의 몸이 추위에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베르그가 다가와준다고 한다면 견뎌냈던 그런 밤공기였는데…오늘따라 더더욱 춥게만 느껴졌다.

     

     

    네르는 끝내 책상에 엎어졌다.

     

    기딘의 말대로 정신을 차려야하는 걸 알았지만…오늘까지만, 눈물을 흘려야할 듯 했다.

     

     

    .

    .

    .

    .

     

     

     

    이튿날, 네르는 몸을 가꿨다.

     

    수많은 사용인들이 그런 그녀의 모습에 놀란다.

     

     

    눈물을 닦아냈고, 꼬리를 다듬었다. 베르그가 좋아하던대로 옅은 화장도 얼굴에 발랐다.

     

     

    그렇게 스스로를 가꿔, 그녀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일어선 그녀의 모습에 깁슨은 반색했다.

     

    “…네르…!”

     

     

    깁슨의 곁에는 기딘도 함께였다.

     

    기딘의 말에 일어난 네르였지만…그렇다고 기딘에게 감사함을 느끼는 일 따위는 없었다.

     

    여전히 네르는 기딘을 향한 원망이 남아있었고, 베르그가 나타난 이상…가족들의 사랑은 더는 필요하지 않았다.

     

     

    네르는 천천히 제 아버지에게 다가가 굳은 태도로 질문했다.

     

    “…제 덕분에, 블랙우드가 일어설 수 있다고 하셨죠?”

     

    네르의 변화에 눈치를 잠시 살피던 깁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랬지. 다 네 덕이란다.”

     

    “…그럼,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어요?”

     

    깁슨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네르. 힘이 닿는 한 도와주마.”

     

     

    네르의 굳었던 표정이 잠시 깨진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스탁핀으로 절 데려다주실 수 있나요?”

     

    깁슨은 그 말에 쉽게 대답을 돌려주지 못했다.

     

    분위기가 굳었다.

     

    계속해서 침묵이 돌았다.

     

     

    그 침묵을 깬 것은 기딘이었다.

     

    “…데려다 줄 순 있지만, 넌 쫓겨날 뿐일거다.”

     

    “기딘…!”

     

     

    네르는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도 아는 이야기였다.

     

     

    그저 말해본 것 뿐이다.

     

    베르그가 자신의 힘이 필요할때까지는 기다려야만 할 듯 했다.

     

     

    그러니 대신 그녀가 말했다.

     

    기약없는 기다림을 버틸 힘이 필요했으니.

     

    “…그럼, 베르그의 근황이라도 지속적으로 제게 알려줄 순 없을까요?”

     

    “…뭐라고?”

     

    “어떻게 사는지. 밥은 잘 먹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누구와 또 만나는지…저를 그리워는 하는지…”

     

    네르는 베르그에게 궁금한게 너무나도 많았다.

     

    네르는 제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아픔이 사라지지를 않는다.

     

    오히려 계속해서 생생해질 뿐이었다.

     

    단 한 명만을 사랑할 그녀의 심장은 여전히 베르그를 그리워했다.

     

     

    끝내, 그 말에 깁슨이 말했다.

     

    “….알겠다.”

     

    “…”

     

    “그건…내가 노력해보마. 어떤식으로라도.”

     

     

    네르는 그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은 그것만이라도 원했다.

     

     

    ****

     

     

    실프리엔은 셀레브리엔 영지를 떠들썩하게 만든 소식에 밖으로 달려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수많은 엘프들이 마을 중심에 모여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아르윈이 있었다.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가 말을 이끌며 영지로 돌아온 것이다.

     

     

    아르윈의 실종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저 그녀가 말 한 필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는게 마지막 목격정보였다.

     

     

    세계수를 미워했던 아르윈인만큼…실프리엔은 이곳에서 아르윈을 다시 보게 될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아르윈은 대장로들과 마주하고 있었다.

     

     

    실프리엔이 생각하기에도 대장로들은 변덕이 심했다.

     

    당장 성년인 200살이 되지 않은 아르윈에게 또 어떠한 해가 갈까 두려운 마음이 있었다.

     

    1년도 채 안되는 시간에 이혼이 이뤄졌으니…다시 영지에 갇힐수도 있는 일이다.

     

     

    그 가능성을 보지 않았을 아르윈이 아니었다.

     

    그런데 대체, 왜 돌아온걸까.

     

     

    실프리엔은 아르윈을 향한 죄책감이 있었다.

     

    그녀의 행동이 끝내 아르윈의 불행을 불러 일으켰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물론 멜의 눈물을 지녔던 것은, 또 베르그에게 바르디 술을 먹였던 것은 아르윈의 선택이었지만.

     

    궁극적으로 마지막 조각은 실프리엔이 맞춘 것이다.

     

     

    아스칼이 가장 먼저 달려나가 제 딸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르윈….! 대체 어딜 갔던 거냐…!”

     

    “….”

     

    예전보다 더더욱 감정이 메말라버린듯한 아르윈이 제 아버지를 보았다.

     

    아르윈의 목에는 두 개의 세계수잎이 겹쳐진 목걸이가 매달려 있었다.

     

     

    그런 그녀가 말했다.

     

    “…대장로님들에게 부탁할게 있어서 왔어요.”

     

    그리고는 무미건조하게 제 아버지를 지나쳐갔다.

     

     

    아스칼은 아르윈의 말에 귀를 의심하듯 물었다.

     

    “…부탁…?”

     

    그건 평소의 아르윈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일이었다.

     

    특히나 대장로가 상대면 더욱이나 그랬다.

     

     

    실프리엔은 대장로들에게 다가서는 아르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렇게 일정한 거리에서 대장로들을 바라보다….천천히 두 무릎을 꿇었다.

     

     

    웅성임이 번져간다.

     

    망가져버려 기행을 이어가던 아르윈이 대장로들에게 무릎 꿇는 날이 올거라 생각이나 했을까.

     

    실프리엔도 그 광경에 숨을 삼켰다.

     

    하지만 아르윈이 이어갔다.

     

     

    “대장로님들.”

     

    대장로들의 표정도 복잡해보였다.

     

    그들의 얼굴에도 아르윈을 향한 연민의 빛이 존재했다.

     

     

    아르윈이 이어갔다.

     

    “앞으로…매일 같이 세계수 밑에서 희생의 의식을 치러도 되니까…”

     

     

    그 말에 엘프들의 웅성임이 커져갔다.

     

    아스칼도 아르윈의 뒤에서 그녀를 붙잡는다.

     

    “아르윈….무슨 말을 하는…”

     

     

    하지만 아르윈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이어갔다.

     

    “앞으로는…하라는대로 할테니까…”

     

    눈물을 이내 한방울 흘린 아르윈이 빌었다.

     

     

     

    “…수명을 전달하는 방법이 있다면…알려주시면 안될까요?”

     

     

    그 말에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엘프들 사이에서는 수명만큼 중요한게 없었다.

     

    그런데 그 중 가장 긴 수명을 지닌, 오랫동안 역사에 남을 재능을 지닌 아르윈이 수명을 공유하는 방법을 물은 것이다.

     

    그녀가 그토록 그리던 자유가 주어졌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아르윈은 그 중심에서 홀로 속삭였다.

     

    “…제게 없으면 안될…존재가 생겼어요…”

     

     

    .

    .

    .

     

     

     

    잠깐의 소동이 끝나고, 실프리엔은 아르윈과 마주하고 있었다.

     

    대장로들은 일단은 아르윈을 진정시키고자 그녀를 방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머무르게 된 것이 바로 실프리엔이었다.

     

    실프리엔은 그 날의 대화 이후 아르윈과 이야기를 나눈적이 없었다.

     

     

    실프리엔이 어렵게 물었다.

     

    “…수명을 나눠주겠다니…?”

     

    “…”

     

    “아르윈, 그게 무슨 소리야?”

     

    “…이미 내 생각을 언니도 알잖아.”

     

    아르윈은 모든걸 체념한 목소리였다.

     

    어디에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그녀가 설명한다.

     

    “…난 더 이상 베르그가 없다면…이 세상을 살아갈 이유가 없어.”

     

    “아르윈-”

     

    “최근 들어서 감각들이 사라져가고 있어, 언니. 색깔도 구분이 잘 안되고…냄새도 요새는 못맡아. 뭘 먹더라도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아…”

     

    아르윈이 실프리엔을 올려다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지난날의 원망은 잊어버린것처럼.

     

    그런 그녀가 말했다.

     

    “…나 시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

     

    “…”

     

     

    실프리엔은 할 말을 물색하다, 아르윈에게 말했다.

     

    “아르윈. 혹시나 수명을 나눠주는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도…분명 금기시 될게 분명해. 다른 종족들이 이 사실을 알아차린다고 해봐. 엘프는 수명을 늘리기 위한 장치로 쓰일 수-”

     

    “-내 알 바 아니야.”

     

    역시나 무미건조하게 아르윈이 말했다.

     

    자신의 어떠한 말도 그녀에게 닿지 않는 느낌이었다.

     

     

    “내가 죽을 것 같은데…남을 신경 쓸 겨를이 어디있어.”

     

    “………”

     

     

    이내, 아르윈이 웃기 시작했다.

     

    가볍고도 무해한 느낌의 웃음이었다.

     

    “…난 기다릴 수 있어.”

     

    “뭐?”

     

    “베르그가 만약 그 성녀와 이어진다고 하더라도…난 기다릴 수 있어.”

     

    “…”

     

    “성녀의 수명이 끝날때까지. 베르그가 그녀와 충분한 행복을 보낼때까지 기다렸다가…난 다음 순번이 되도 괜찮으니까…이후에 수명을 나눠주고 살아갈거야. 달리 사랑할 사람이 없다면…그때는 날 다시 사랑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실프리엔은 눈가가 떨렸다.

     

    아르윈의 짙은 집착의 일면을 잠시 본듯한 느낌이었다.

     

     

    아르윈이 고개를 돌려 실프리엔을 바라보았다.

     

    “…언니.”

     

    “…응?”

     

    동시에 실프리엔은 아르윈의 눈을 보며 깨닫는다.

     

     

    아르윈이 얼마나 눈물을 참아내고 있는지.

     

    그런 그녀에게 더 이상 어떠한 모진말도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슬픈 눈을 한 것으로 보아, 아르윈 또한 자신의 말이 얼마나 말도 안되게 들리고 있을지 자각하고 있는 듯 했다.

     

     

     

    아르윈이 실프리엔과 눈을 마주하는 동안, 한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아르윈의 어깨에 앉았다.

     

    파랑새.

     

    아르윈의 새였다.

     

     

    “…내 새를 통해 세상을 보는 마법이 있어?”

     

    “뭐?”

     

    “내 새가 보는걸…혹시 나도 볼 수 있어…?”

     

    “…”

     

    당연히 그런 마법은 있었다. 오히려 간단한 마법에 속하는 편이었다.

     

    제 동물에게 시야를 공유받는 마법. 실프리엔도 애용하던 마법이었다.

     

     

    하지만 아르윈이 그 마법을 어디에 쓰려하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일까.

     

    실프리엔은 대답을 하는게 망설여졌다.

     

     

    “….언니?”

     

    동시에, 아르윈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자신도 모르게 맺히는 눈물인 듯 했다.

     

    스스로 자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

     

    결국 실프리엔이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였다.

     

    아르윈을 향한 죄책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응, 있어.”

     

    “가르쳐줄래?”

     

    “…”

     

    아르윈이 간절히 실프리엔의 손을 잡았다.

     

    “…가르쳐줘, 언니. 나…베르그의 얼굴이 보고 싶어.”

     

     

    실프리엔은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려줄게.”

     

     

    ****

     

     

    또 며칠이 더 지나간다.

     

     

    나는 매일 같이 날아드는 정략혼 제안에 넌더리가 나고 있었다.

     

    그나마 그 편지가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었다면…가문의 문양을 좀 더 쉽게 외우게 됐다는 점일까.

     

     

    “타스 가문?”

     

    “타스 맞네.”

     

    문양을 보며 맞추는 걸 반복적으로 이어나갔고, 게일이 그럴때마다 나에게 도움을 주었다.

     

    목을 좌우로 풀던 게일이 한 순간 내게 물었다.

     

    “그래서, 베르그. 농기구들은 어찌 잘 준비되고 있나?”

     

    “아마 오늘 그에 대한 편지가 도착할 겁니다.”

     

    “그렇군. 아직 흩어져가는 용병단들에 대한 소식은 없고?”

     

    “……”

     

     

    나는 몇 개의 편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홍염단과 마찬가지로 용병 회의에 참가했던 용병단들에게서 편지가 날아오긴 했다.

     

    아라크레단, 달사슴단, 용언단… 다 하나 같이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당장 우리의 앞가림만으로도 벅찬 상황이었기에 모두 무시했지만.

     

     

    -똑똑똑.

     

    그때, 방에 울리는 노크소리.

     

     

    ‘데스몬드입니다.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새로 고용한 집사, 데스몬드였다.

     

    “들어와.”

     

    그는 문을 열며 고개를 숙인다.

     

    처음부터 각이 잡혀 있는 사람이었다.

     

     

    “가주님, 새로운 편지들이 왔습니다.”

     

    게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쉴 새 없이 들어오는군.”

     

    나는 아담 형이 그랬을것처럼, 불만 없이 그 편지들을 받아냈다.

     

     

    어디에서 왔는지부터 차례차례 확인하던 나의 눈이 잠시 굳었다.

     

    “….”

     

    내 망설임에 게일이 질문했다.

     

    “…또 네르님인가?”

     

    “…”

     

    나는 입술을 깨물며 네르의 편지부터 서랍에 넣어두었다.

     

    그렇게 보지 않고 쌓인 편지만 해도 벌써 열통이 넘어갔다.

     

     

    네르가 날 여전히 찾고 있다는게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내가 이겨내야할 부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편지에 머리가 복잡해지는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기나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숨 좀 돌리고 오겠습니다.”

     

    “마음대로.”

     

    .

    .

    .

     

     

    나는 마을에서 잠시 벗어나, 펼쳐지는 초원에 앉아있었다.

     

    과거 아르윈과 자주 찾아왔던 그 초원이었다.

     

     

    -사박…사박…

     

    “…힘들어?”

     

    그때, 누군가가 다가와서 내게 물었다.

     

    옆을 바라보니 시엔이 서 있었다.

     

     

    그 동안 우리는 천천히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조금.”

     

     

    시엔은 조심스럽게 걸어와 내 옆에 자리했다.

     

    우리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함께 자연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추억이 떠오르네.”

     

    내 생각을 읽었는지 시엔이 속삭였다.

     

    나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녀와 나의 어깨는 맞닿아있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있다보니 이렇게 있었다.

     

     

    “…7년간 전쟁터에 있다가 이렇게 평화를 느끼니까… 익숙하지 않아.”

     

    “…”

     

    나도 마찬가지로 용병일만을 하다 이러고 있는게 익숙하지는 않았다.

     

    따지고 보면 여전히 그녀와 나에게는 공통점이 많았다.

     

    “….그러네.”

     

     

    -짹! 짹!

     

     

    그때, 한 파랑새가 날아와 내 허벅지에 앉았다.

     

    참새처럼 작은 새였다.

     

     

    시엔은 그 신기하고도 귀여운 모습에 놀라며 웃는다.

     

    “벨…!”

     

    새가 날아가지 않도록 속삭여오는 시엔.

     

     

    나도 그 새의 모습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손을 뻗어 새를 부드럽게 쓰다듬어봤지만, 새는 날아가지 않았다.

     

     

    -짹! 짹!

     

     

    어느새 깨달은 건, 시엔이 내 어깨에 바짝 달라붙어있었다는 점이다.

     

    새를 보다 유심히 보기 위한 그녀의 행동인 듯 했다.

     

     

    나는 새를 쓰다듬다, 시엔을 바라보았다.

     

    시엔도 새를 보며 미소를 짓다, 내 눈길을 깨달았다.

     

    “…아.”

     

    파르르 눈가를 떨며 굳는 그녀.

     

    우리는 한참이나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어내지 않았다.

     

    긴 시간, 눈을 마주했다.

     

     

    그러다, 시엔은 목을 풀며 고개를 돌렸다.

     

    부끄러운 듯 머리를 매만진 그녀가 말한다.

     

    “베…벨, 오늘 축제를 열기로 했다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같이 시간…보낼래?”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나는 잠시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목에서부터 귀까지 전부다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익숙한 꽃향기까지 풍겨져오기 시작했다.

     

    7년전 기억하던 그 모습 그대로.

     

     

    내가 답을 하지 않자, 시엔은 무언가가 생각난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 미안. 실언-”

     

    “-그러자.”

     

    그런 그녀에게 내가 답했다.

     

     

    “…어…?”

     

    그대로 굳어버리는 시엔.

     

    나는 다시금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고.”

     

    “……………..”

     

     

    시엔의 표정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눈물까지 글썽이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짹! 짹!

     

    무릎에 앉은 새는 계속해서 지저귀고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Combatpioneer님! 2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큰 힘이 됩니다!

    연참기원10년차님! 10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노코멘트 하겠습니다ㅋㅋㅋ. 그래도 좋아해주셔서 기쁘네요.

    연휴동안 연재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연재주기를 비정기로 체크해둔 게 힘을 발휘할 때가 되었군요. 컴퓨터는 가져갈거라 어쩌면 몇 편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단 한편도 올리지 못할수도 있을것 같아요. 가능한 최대한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다음화 보기


           


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IW 섞일 수 없는 이종족 아내들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Polygamy is abolished.

We don’t have to force ourselves to live together any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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