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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2

        엘프의 신체는 인간보다 내구성이 좋다. 그런 의미에서, 버멜을 포함한 교환학생 네 명이 느닷없이 양호실 신세를 지게 된 것은 장안의 화제였다.

       

        “첫날부터 이게 무슨 일이래?”

        “대련을 벌였는데 우리 쪽에서 한 명이 전부 때려눕혔다나 봐.”

        “진짜? 누군데?”

       

        에테르는 쑥덕거리는 학생들을 지나쳐 복지관으로 향했다. 그녀의 손에는 과일 꾸러미가 들려있었다.

       

        – 선생님이 첫날부터 싸우지 말라고 얘기했어, 안 했어?

       

        “시발, 병문안 안 갈 수도 없고.”

       

        어제 헤를라인에게 된통 혼났다. 제아무리 대련이라지만 다치게 한 정도가 지나쳤다면서.

       

        [그러게 살살 하셨어야죠.]

       

        “살살 한 건데.”

       

        어떻게 한 대씩 맞고 나가떨어지냐. 

       

        에테르는 쩝 입맛을 다시며 양호실 문을 열어젖혔다.

       

        “…….”

       

        나머지 엘프들은 다른 병실이었다.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는 오직 버멜만이 누워있었다.

       

        동향 사람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여기가 대한민국이었더라면 특수폭행죄로 콩밥을 먹었겠지.

       

        “야, 괜찮냐?”

        “넌 이게 괜찮아 보여?”

       

        버멜은 소리를 지르려다가 애꿏은 신음만 내고 말았다. 뼈마디가 쑤셔서 도저히 큰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아무튼, 마침 잘 왔다.”

       

        그가 마음속으로 상태창을 외치자 에테르에 관한 정보가 띄워졌다.

       

        체력? 공격력? 그런 단편적인 정보들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버멜은 침음을 삼키며 손을 위아래로 휘휘 내저었다. 허공에 띄워진 스테이터스 창이 아래로 쭉쭉 내려간다.

       

        [스트레스 수치 – 35(보통)]

       

        버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꽤 많이 내렸구나.

       

        “내가 몇 대 맞았더라?”

        “한 일고여덟 대?”

        “많이도 처맞았네.”

        “난 아직 부족한데.”

       

        에테르는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소맷단 사이로 스태프를 꺼냈다. 버멜은 질겁하며 침대 끝으로 도망쳤다.

       

        그의 안색이 새파래지는 걸 보고 나서야 서릿발처럼 차갑던 에테르의 표정이 풀어졌다.

       

        “농이야, 농.”

        “…진짜 너 때문에 못 살겠다.”

        “너 없는 동안에는 내가 못 사는 줄 알았거든?”

       

        버멜의 입에서 다시 한번 신음이 새어 나왔다.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기껏해야 한 달 남짓한 시간. 그 짧은 시간에 에테르의 수치는 붕괴 직전까지 갔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본래 인격에 잡아먹히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했다.

       

        “알았어, 내가 미안하다니까. 그래도 이걸로 퉁쳐 주면 안 되냐? 이 이상 맞을 자신 없는데.”

        “그러지 뭐.”

       

        에테르도 병자를 때리는 가학적인 취미는 없다.

       

        “그리고, 사람 간담 서늘하게 만들지 좀 마. 이러다가 심장마비 오겠어.”

       

        진심 어린 얼굴로 충고해도 에테르는 이죽거릴 뿐이다. 버멜은 목구멍에서 날숨을 연달아 토해냈다.

       

        이상하다. 대학원을 나왔거나 혹은 다니고 있는 애들은 보통 마조히스트 기질이 있다고 들었는데…. 

       

        얘는 왜 이리 반대인지 모르겠다.

       

        설마.

       

        혹시?

       

        “…얘가 교수가 될 상인가?”

        “뭔 소리야.”

        “아무 말 안 했어.”

       

        탁. 에테르는 과일 바구니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의자에 앉으며 책을 펼쳤다. 문안 인사를 와서까지 공부를 할 셈인 모양이다. 버멜은 질린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세계에 와서도 저렇게나 공부하고 싶을까?

       

        “사과 까줘.”

        “니가 까서 쳐드세요.”

       

        에테르는 툴툴거리면서도 바구니에서 사과를 꺼내 캘리퍼스 날로 깎기 시작했다.

       

        ‘저걸로 저게 되나…?’

       

        익숙하지 않은 손놀림이었다. 왜 그리 못 깎냐고 물어보니 ‘나는 통째로 먹는 스타일이다’ 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사각, 사각.

       

        “그나저나 내가 여기 와서 너랑 이렇게 대화 나눠도 되냐?”

        “문제없어.”

        “왜?”

        “지금 시기엔 로즈마리도 스코프를 못 켜거든.”

        “뭔 일이래.”

       

        에테르는 조금 놀란 눈으로 사과를 건넸다. 그 와중에 반쪽은 자기 입으로 넣었다.

       

        나쁜 새끼. 여덟 대나 후려쳤으면 사과 하나 정도는 온전히 줘도 되는 거 아닌가.

       

        버멜은 입에 사과를 넣고 다 씹을 때까지 생각을 정리했다. 아삭아삭한 감촉이 미뢰를 자극한다.

       

        꿀꺽.

       

        “걔 지금 더럽게 바쁘거든.”

        “로드스톤 때문에?”

        “그것도 있고, 여기 사방이 다 교환학생이잖아.”

       

        지금 틸레트에 온 엘프가 300명 남짓. 이중 대다수는 중급 이상의 정령을 사역하는 기감의 소유자다.

       

        “작정하고 악의를 내비친다면 걸리겠지. 스코프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고.”

        “스코프 쓰는 거랑 악의 가지는 거랑 뭔 상관인데?”

        “관음이잖아.”

        “…그게 그렇게 되나?”

       

        생각해 보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누군가를 훔쳐보는 행위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이니까.

       

        로즈마리는 버멜이 정령을 가지고 있다 착각했다. 그래서 한 명뿐일 때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실제로는 없었지만.

       

        “나한테도 정령이 있었으면 한결 수월하게 일이 풀릴 텐데.”

       

        버멜은 푸욱 한숨을 내뱉었다. 일종의 탄식이었다.

       

        “너한텐 정령이 안 나타나?”

        “안 나타나더라. 원래 인간이어서 그런가?”

        “명색이 빙의자인데 뭐 뾰족한 수 없어? 편법으로 불러들인다든지.”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에테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면서 왜 안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아.”

        “그 방법이 뭔데 그래?”

        “쉽게 말하자면, 나를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거야.”

       

        정령을 편법으로 불러들이는 방법은 이러했다. 우선 극복하기 어려운 시련에 부딫힌다. 그것을 통해 좌절하고, 그럼에도 꺾이지 않는 의지를 보여준다. 그러면 감복을 받은 정령이 눈앞에 나타나 계약을 제안할 것이다.

       

        핵심은 ‘어려운 상황에서 보여주는 영웅적인 기상과 신념’.

       

        그것이 정령이 추구하는 선함의 조건이다.

       

        “나한테 그런 상황이 닥쳐오면 일단 이 세계는 답이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을 거야.”

        “얼씨구. 구원자 납셨네.”

       

        에테르는 깐족거리면서도 버멜의 말을 끝까지 경청했다. 그의 낯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칙칙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읽던 책의 책장을 넘기며 으음, 하는 비음을 흘렸다.

       

        “그런데 말이야. 로테가 요즘 이상한데.”

       

        에테르는 화제를 전환하는 길을 택했다. 버멜은 그 말을 듣고는 ‘아’, 하는 탄식을 흘렸다.

       

        “맞아. 스트레스 터졌더라.”

       

        <다키스트 아카데미아>에는 스트레스 기능이 있다.

       

        메인 캐릭터…… 그러니까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전부 이 스트레스 수치를 가진다. 

       

        각 캐릭터의 스트레스가 85 이상이 되면 ‘붕괴’ 혹은 ‘타락’이 진행된다. 다만 붕괴는 타락보다 더디게 진행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럼 로테는 붕괴에 빠진 거네.”

        “그렇지.”

       

        버멜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갔다.

       

        “집착의 경우 치료법은 간단해. 붕괴를 일으킨 대상과 당분간 떨어져 지내는 거지.”

        “로즈마리 말이야?”

        “너도 마찬가지야.”

       

        버멜은 끄응, 하고 신음을 앓았다. 에테르는 그런 버멜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왜?”

        “단짝처럼 붙어 다니던데 최근에 뭐 잘못한 거 없어?”

        “기숙사에 늦게 들어갔다가 한 번 크게 혼났지.”

        “……그거네.”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버멜은 하릴없이 설명을 이어갔다.

       

        “잘 들어. 로테 살리에르는 닼아의 모든 캐릭터를 통틀어서 개인 기감이 가장 뛰어나. 오죽하면 정령 없이도 마수의 악의를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뭐야. 그게 돼?”

        “천성이 워낙 선하면 그렇게 돼. 로테같은 사람들이 나중에 죽으면 여신에게 불려가는 거고.”

       

        인간이 정령으로 환생하는 건가? 에테르는 그리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로즈마리가 누구인지도 어렴풋이 눈치챘겠지. 그리고, 너도.”

       

        순간 소름이 돋았다. 다른 게 아닌, 빙의자의 말이라서 그렇다.

       

        “그래도 로테는 널 믿고 있어. 아직은 말이야.”

        “아직은…?”

       

        여름방학 때 로테와 술잔을 나누었던 기록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로테는 한때 아카샤를 보고 에테르까지 의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지막에 의심 대신 신뢰를 선택했다.

       

        “이전까지 네가 보여준 행적이 긍정적이었다는 뜻이지. 하지만 붕괴가 심해지면 그 생각이 다르게 변할지도 몰라.”

        “허어.”

       

        로테가 보인 집착은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로즈마리가 에테르를 빼앗아 가려는 걸 막기 위한 그녀 나름의 수단.

       

        그러나 에테르가 계속 로즈마리의 편을 들어준다면.

       

        그녀는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당장 로테와 거리를 두는 건 무리야. 다른 방법 없나?”

        “간단해. 로즈마리를 멀리하고, 걔가 좋아할 만한 일을 해주면 되지.”

       

        로테가 좋아할 만한 일이라.

       

        아.

       

        그제야 깨닫고 말았다.

       

        살리에르 가문과 함께하기로 한 원자폭탄 개발. 

       

        여태껏 백야니 뭐니 하면서 뜬구름 잡는 것만 가르쳤다. 프레이는 열심히 폭탄 외형을 만들고 있었는데, 로테에겐 지루한 일만 시킨 것이다.

       

        어떻게 보면 부정계약이었다. 정작 하기로 약속한 걸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았다.

       

        “땡큐. 뭘 해야 할지 알겠다.”

       

        시간은 많지 않았다. 에테르는 버멜에게 손을 흔들어 준 뒤 곧장 중앙 분수대로 나왔다. 

       

        슬슬 모든 일에 속도를 낼 때였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일도, 마왕 머리통을 날려버릴 무기를 만드는 일도.

       

       

        **

       

       

        교환학생이 오고 나서 맞이하는 첫 주말.

       

        터억!

       

        부실 책상 위에 커다란 가방이 올려진다.

       

        에테르가 종종 메고 다니던 후줄근한 가방이었다. 등산용처럼 품이 꽤나 넓었다.

       

        에테르는 가방에서 마석들을 조심스레 꺼냈다. 프레이는 두근거리는 눈빛으로 그 광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로테도 부실에 와 있었다. 그녀는 백야의 이론부를 거의 다 완성해가고 있었다. 에테르의 도움을 받았긴 했지만, 그녀 또한 스크롤 해석에는 나름대로 재능이 넘쳤다.

       

        입에선 하품이 나왔다. 그래, 이것도 재미있긴 한데.

       

        뭔가 부족하다. 

       

        단짝과 붙어있으면 배우는 게 많긴 하다.

       

        하지만.

       

        ‘이걸 어느 세월에 실전에서 써먹어 볼 수 있을까….’

       

        최근에 이론만 주구장창 파는 건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로테는 기분도 전환할 겸 부실 한가운데로 나왔다.

       

        동아리 부실 중앙에는 구조물 하나가 있었다. 예술제에 출품하기 위한, 크고 두꺼운 철제 구조물이었다.

       

        로테는 공허한 눈빛으로 그 구조물을 더듬었다. 이성과는 관계없는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에테르가 눈에 익은 마석을 테이블에 하나씩 올려놓는 걸 보았다.

       

        그녀와 에테르의 눈이 마주쳤다. 에테르는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손을 까딱였다.

       

        “로테, 이리로 와 봐.”

        “아….”

        “예전에 약속했던 거 만들자.”

       

        그 순간부터, 소녀의 심장은 예전과 같은 활력을 내기 시작했다.

       

        드디어.

       

        [─ SYSTEM : 개체명 ‘로테 살리에르’의 스트레스 수치가 하향 조정됩니다.]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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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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