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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2

    훌쩍, 훌쩍.

    누군가 훌쩍거리는 소리가 거실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 훌쩍임의 주인공은 물론, 파이리스였다.

    파이리스가 거실에 무릎을 꿇어앉은 채, 화가 난 루크에게 훈계를 듣고 있는 중인 것이다.

     

    “대체 그건 어디서 배워먹은 예의인가!”

     

    루크의 노여움에 가득한 음성.

    그리고 평소와는 다르게 허리춤에 완고하게 얹은 손.

    파이리스에게는 그것이 쉽게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선언처럼 보여왔다.

    파이리스는 여전히 인간어보다는 정령어에 훨씬 익숙한 아이, 따라서 목소리에 담긴 감정은 그 누구보다 확실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허나 그런 정령의 시선으로 보지 않더라도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루크의 목소리엔 분명하고 선명한 ‘분노’라는 감정이 섞여있다.

     

    파이리스는 훌쩍거리며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아직 인간어와 논리에 익숙하지 않은 정령이 자신이 혼나는 이유를 딱 잘라 설명할 수 있을 만 한 말주변이 있을 리가 없다.

     

    “흑, 그. 그치만…….”

    “뚝, 울음은 그치거라. 뭘 잘 했다고 우느냐.”

    “흐끅.”

    “하아…….”

     

    루크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신이 맞았던 꼬리 부분을 살살 문지르며 고통을 달래고 있었다.

    아직도 아릿한 꼬리 윗부분의 감각.

     

    과거에도 이만한 수준의 고통은 쉽게 느끼기가 어려운 축에 속했다.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은 충격, 그것은 마치 고도로 훈련된 격투가가 명치에 장을 때려박은 수준과 비슷하거나 조금 아래인 정도.

     

    루크의 예상보다 꼬리는 감각이 민감한 부분이었고, 갑작스럽고 강렬한 충격은 말 그대로 폭력적인 수준의 통각을 불러왔던 것이다.

    그 감각에 루크는 일전에 루아 에라스트의 꼬리를 움켜줘었던 것을 새삼스레 반성하게 되었다.

     

    ‘휴우, 루아는 도대체 이걸 어떻게 버텨낸 것인지 놀랍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루크가 파이리스를 내려다보고 있자, 파이리스는 물기를 머금은 눈을 한번 올려떴다가 일부러 화난 표정을 지어보이는 루크와 눈이 마주치고는 다시 눈을 아래로 내리고 말았다.

    그 모습에 조금 마음이 약해질 뻔했지만, 루크는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정령이기에 인간의 예절과 행동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이해하나, 그렇다고 그것이 타인에게 마음대로 폭력을 휘둘러도 괜찮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니 루크는 파이리스를 혼낼 수밖에 없다.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고 싶다면,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예절도 있는 법이다.

    본래 예절은 엄격히 가르쳐야 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라면 어린아이라고 해서 체벌을 아껴서는 안된다는 것이 루크의 생각이었기에.

     

    그렇게 대답 없이 눈물만을 삼키고 있는 파이리스를 향해, 루크는 다시 한번 노호성을 터트렸다.

     

    “어서 말을 해보게! 그대도 이토록 맞으면 아파하면서, 어째서 남을 때린 것이지?”

    “흐윽, 흑.”

     

    하지만 파이리스가 훌쩍거리는 것은 비단 엉덩이를 얻어맞은 부위가 아프다는 것 뿐만 아니라, 루크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단 사실이 억울해서였던 것이 컸다.

    그냥 좋아해서 그랬을 뿐인데, 어째서 혼나야 하는걸까.

    파이리스는 그런 감정을 울음소리에 담아 내보냈지만, 루크는 그런 파이리스의 감정을 무시했다.

    원래 마법사들이란 논리가 없다면 쉽게 설득시킬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말을 해보래도?”

     

    계속된 재촉, 파이리스는 훌쩍거리는 숨을 겨우 집어삼키며 입을 열었다.

     

    “루크, 흑, 나, 좋아한다고, 흐끅. 했어, 나도 루크를 흑, 좋아해. 우리는 흐끅. 가족이야.”

     

    “그래. 조금 진정하고 말해보거라.”

     

    이제야 제대로 된 말을 한다고 생각한 루크는 드러내던 화를 조금 줄였다.

    루크의 목소리에 서린 분노가 조금 가라앉은 것을 확인한 파이리스는 안도하며 약간 더 진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서로 좋아하면 신부가 돼.”

     

    “……신부?”

     

    “응.”

     

    파이리스는 설명을 요구하는 듯 한 루크의 표정에 말을 더 이었다.

     

    “그리고 신부는 거칠게 하는 게 좋댔어. 그러면 사랑한다고…….”

     

    그러자 충격을 받은 듯 한 루크의 표정.

    파이리스는 순간 또 자신이 잘못한 것인가하는 두려움에 몸을 움츠러들며 루크의 반응을 기다렸다.

    파이리스에게 루크의 화를 받아내는 것은 말 그대로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었다.

    예전에는 그냥 마력만 갖다 주면 화를 풀어주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해야 화를 거둬들일지 파이리스로서는 감이 오지 않았으니 더욱 참기 어려웠다.

     

    루크는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그건 또 누가 가르쳐준 말이더냐?”

     

    조금 혼란스러운 듯 보이는 루크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파이리스는 곧장 손가락으로 디아나를 가리켰다.

    아무튼 자신은 루크에게 더 혼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식탁위에 놓인 쿠키 옆에서 혼나는 분위기 때문에 하나 집어먹지도 못 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파이리스가 루크에게 혼나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디아나는 난데없는 파이리스의 폭탄 같은 선언에 화들짝 놀란다.

     

    “너, 너어……!”

     

    배신자, 그건 네가 가져왔으면서!

    지나치게 당황하는 디아나를 수상하게 바라보는 루크.

    루크는 디아나를 흘겨보며 물었다.

     

    “디아나, 그게 대체 무슨 뜻이지?”

     

    “어, 언니. 그러니까…….”

     

    자신이 한 거라곤 파이리스가 꺼내온 책의 한 페이지를 소리내서 읽은 것 밖에 없었다.

     

    “나, 나는 책을 읽어달래서 읽어준 거 뿐인……데?”

    “책을 읽었다?”

     

    루크는 머릿속에서 찰칵, 하고 뭔가 들어맞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설마…….”

     

    루크는 곧장 안방으로 들어가, 디아나가 자기전에 들고있었던 책, ‘테일리의 손수건’을 펼쳤다.

     

    ‘맙소사, 이건…….’

     

    여러가지 의미로, 그곳은 신세계였다.

     

    ———-

     

    늦은 밤.

    철컥,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루크는 눈을 번쩍 떴다.

    혹시나 침입자라면 자신이 나서야 할 테니까.

    하지만 잠시 청력에 집중을 해본 바로는 딱히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나 다녀왔어, 루크.”

     

    예르나가 집으로 들어왔다.

    루크는 그런 예르나를 반기고 꽂아둔 뿔마개를 뽑아내며 물었다.

     

    “어서오거라. 음, 그런데 예르나. 오늘은 당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대는 오늘 아침에야 올 줄 알았는데.”

    “아, 그거 말이지.”

     

    사실은 다이튼이 스스로의 순찰범위를 늘려주면서 집으로 돌아가볼 수 있도록 신경을 써 주었던 덕분에 조금 일찍 돌아올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루크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이겠지, 루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니까.

    정말, 이런걸 생각하면 다이튼은 참 믿음직스럽고 고마운 동생이었다.

     

    그 이야기를 했더니, 루크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몇번 끄덕거렸다.

     

    “그래, 오늘 아이들이랑은 별 일 없었고? 힘들지는 않았어?”

    “아. 그거 말이지. 대체적으로는 괜찮았다.”

    “대체적으로는?”

     

    대체적으로 괜찮다는 것은 안 괜찮다는 부분이 있다는 이야긴데.

    역시 힘들었던 모양이다.

    자세히보니 루크의 표정에는 피곤함이 섞여있었으니까.

    아무리 어른스러운 루크라고 해도, 천방지축인 아이 둘을 돌보는 것은 역시 힘에 부쳤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잠시 후, 루크가 진지한 표정을 지어내며 말을 꺼냈다.

     

    “예르나, 할 이야기가 있다네.”

    “응. 뭔데?”

     

    루크는 곧바로 몸을 돌려 식탁 위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한권의 책을 들었다.

    깔끔한 표지의 겉면엔 ‘테이리의 손수건. 2편’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예르나는 루크가 들어서 보여주는 책의 표지를 보며 생각하기 시작했다.

     

    ‘테일리의 손수건? 음, 저게 무슨 책이더라…….’

     

    곰곰히 생각해봐도 딱히 짚이는 부분이 없었다.

    테일리의 손수건이라, 제목을 봐도 대체 무슨 내용인지 알 수도 없다.

    순수 문학인가? 시집?아니야, 시집에 후속편이 나올리가 없지. 그러면 무슨 소설인가?

     

    “어, 그게 재미있었니? 혹시 1편이 없어서?”

    “ㄱ, 그런 게 아니다.”

     

    루크는 살짝 목소리를 높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 책이 뭔데 그래?”

    “예르나, 이건 그대의 방에 있던 책인데 왜 모르는가? 이건 아주 노골적인 색정소설이 아니더냐!”

    “ㅁ,뭐?”

     

    색정소설, 루크의 입에서 나온 그 말에, 예르나는 그 내용이 번뜩 떠올랐다.

     

    정확히는 1편에 해당하는 내용이었지만.

     

    처음 그 소설을 읽은 것은 그게 숲지기 숙소에 놓여져있길래 궁금해서 읽어볼 생각으로 꺼내 들었던 것이었다.

     

    테일리의 손수건 1편은 꽤 정석적인 1대1 순애 로맨스 소설이었다.

    커플의 분위기도 좋고, 묘사도 꽤 달달해서 대리만족용으로는 더할나위 없이 재미있는 로맨스가 일품이었다. 중후반부 두 남녀를 가로막던 갈등들이 서서히 풀려가면서 시작되는 성애묘사도 좋았다.

     

    꽤 만족스러웠다.

     

    그 후, 2편은 없나 하고 생각하다가 언뜻 상점에서 스치듯 발견한 테일리의 손수건 2편, 그리고 떨이로 묶인 수많은 로맨스소설들.

    예전에 그것을 읽어본 경험이 나쁘지 않았던 예르나는 곧장 책들을 구매했었다. 마침 책장에 빈 곳도 많았고.

     

    하지만 테일리의 손수건은 어쩐지 2편부터는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갈등전개와 더불어, 갑갑한 느낌을 자꾸 던져주면서 풀어주지를 않다가, 여주인공이 악역의 계략으로 어딘가에 납치되고 남자가 그것을 자신을 버린 것으로 오해하기 시작한 순간부터는 거의 손을 놔버리고 다른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다른 책들과 비교하니 테일리의 손수건은 꽤나 하드해서 취향이 갈리는 소설이었던 모양이라, 그녀의 입맛에는 오히려 성애묘사가 없거나 적은 다른 소설들이 훨씬 재미있었다.

    그래서 뒷이야기는 전혀 읽어보지 않은 채, 그냥 책장에 방치되듯 던져둔 것이 꽤 오래 전의 일이었는데…….

     

    “그, 그, 그거 혹시 읽어봤니?”

     

    끄덕, 끄덕.

     

    여성은 기본적으로 부드럽게 대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지니고 있던 루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짐승 같은 묘사였다.

    아무렇지 않게 모욕적인 말과 폭력적인 행동을 내뱉는데, 그것으로 행복감을 느끼는 여성의 묘사라니, 그 모순적인 장면은 루크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쩌면 이것도 시대가 변한 탓일까?

     

    그런 내용을 아이들이 보고야 말았으니, 어찌 큰일이 아니겠는가!

    아이들은 그것이 성적 묘사인 줄 몰랐다는 것만이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아이들의 지식에는 성기에 대한 묘사를 받아들일 방법이 없었으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은 슬쩍 넘겨버리고 그저 가학적이고 피학적인 행위 묘사에만 집중해서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면, 서로를 아프게 하는구나’라는 잘못된 생각을 품게 되어버렸던 것.

     

    바로 그게 파이리스가 자신의 엉덩이를 때린 이유였다.

     

    그래서 루크는 꽤 오랫동안 폭력을 휘둘러선 안된다는 설교와 건전한 남녀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했고, 그것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성적 호기심에 관한 질문에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루크의 얼굴에 서린 피곤함에 대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

     

    그렇게 루크가 자신이 본 책의 내용중 충격적이었던 부분을 읊고 있자, 예르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도를 넘은 부끄러움에 예르나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 채, 주전자에서 김이 새는 듯 한 목소리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 그만해…….”

     

    예르나의 애원에 루크는 책의 묘사를 읊는 것을 그만두었다.

    다만 루크는 그 책의 표지를 조용히 내려다보다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내며 예르나를 향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저, 혹시 예르나. 그대는 이것이 취향인 것은 아니겠지?”

    “그, 그럴리가 없잖니?”

     

    탁, 루크의 손에서 낚아채듯 책을 빼앗아간 예르나.

    그녀의 얼굴은 홍조와 식은땀으로 꽤 망가진 상태였다.

     

    “그건 다행이로구나, 나는 그게 많이 걱정이 되어서 말이다. 앞으로는 그런 책이 있다면 아이들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보관하는 것이 좋겠어.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야한건 안된다네! 성에 대한 건전하지 못한 가치관을 심어줄 수 있으니.”

    “아, 아하하하. 그, 그러게.”

     

    예르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잊고 있었을까…….’

     

    루크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

    이런 책에도 손이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생각하고 있어야 했는데…….

    너무나 부끄러웠다.

    엄마한테 야한 책을 들키면 이런 기분이 들까?

    하필이면 읽어도 이런 걸…….

    다른 괜찮은 책들도 많은데…….

     

    아무튼 내일 애들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책장 정리부터 해야겠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침대밑에 야한책 넣어놨다가 부모님한테 들킨 적이 있으신가요?

    전 야한건 아니지만 침대 밑에 몰래 산 BB탄총 넣어놨다가 혼난 적은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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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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