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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2

     

    내의원으로 돌아온 나는 인턴들을 방치해 이 사태를 만든 다른 주치의들을 찾았다.

     

    “군소 파벌에서 가장 힘이 센 자는.”

     

    “게바드 친왕의 주치의, 헤르프요. 그가 내의원의 인사 권한을 쥐고 있소. 신입 치유사의 배치도 물론 담당하오.”

     

    “왜 걔가 하는데요? 알베리치는요?”

     

    “주치의 회의의 투표에서 다수결에 의해 정해졌소. 군소 파벌이 연합을 맺어서 그에게 몰표를 줬소.”

     

    “군소 파벌 연합이라.”

     

    그건 생각 못 했네.

     

    “선생도 아시겠지만 알베리치가 최대파벌을 가지고 있어서 여태 입김이 강했던 것이지, 어쨌든 모든 주치의의 권한은 동등하잖소. 더욱이 알베리치가 선생에게 깨지고 나서는 그를 우습게 여기는 이도 많아진 터라….”

     

    팔켄하인이 정황을 설명해줬다.

     

    “실력 안 되는 인턴은 응급실로 돌리고 전문 치료사 이상을 전부 빼가서 즉시 현장에 투입해 보고서용 실적을 올렸다 이 말이군요. 문서만 보면 저희 월광궁보다 군소 파벌이 기세가 좋네요.”

     

    내가 눈치 못 채게 슬쩍 일을 진행해오다 자리를 비우니 대놓고 개판을 쳐놨다. 음습한 놈 같으니.

     

    “지금 어디 있습니까?”

     

    “슬슬 오후 진료 시간이니 친왕이 있는 궁으로 가지 않았겠소.”

     

    퇴근도 빠르네.

     

    그때 내게 전서구가 한 마리 날아들었다.

     

    나는 내용을 확인하고 서신을 품속에 집어넣은 후, 답신을 적어 날려보냈다.

     

    “어디서 왔소?”

     

    “급한 일은 아닙니다. 그보다 그 헤르프를 쫓아갑시다.”

     

    “지금 당장 말이오?”

     

    팔켄하인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벌써 밤이 다 되었으니 내일 처리하는 게 상식적이긴 했다.

     

    “야간에 응급환자가 또 발생할지 모를 일 아닙니까. 한시라도 빨리 쇼부치고 털죠.”

     

    “음… 일단 알겠소이다.”

     

    나는 그 길로 마차를 타 친왕의 궁으로 향했다.

     

     

    황제의 남동생인 게바드 친왕은 궁보다는 저택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아담한 건물에서 지내고 있었다.

     

    용건을 말하고 입궁을 요청하니 마침 오후 진료가 이뤄지고 있던 참이라, 친왕까지 알현하는 모양새가 됐다.

     

    “아셀라 전하의 주치의로군, 어쩐 일인가.”

     

    황제와 몇 살 차이 안 나는데도 평범한 중년 정도로 보이는 친왕이 접견실에서 나를 맞았다.

     

    주치의 헤르프는 그의 옆에서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일몰이 내신하는 시간의 무례를 윤허하여주신 아량에 황공하옵니다, 전하.”

     

    나는 그에게 예를 표한 후 용건을 꺼냈다.

     

    “다름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헤르프 주치의에게 전할 말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헤르프, 내의원의 일인가.”

     

    “그렇습니다. 윤허해주시면 그와 독대하고자 합니다만.”

     

    “이 자리에서 말해보게. 나도 궁금하군.”

     

    친왕이 내가 찾아온 이유를 어느 정도 눈치챘는지 그를 빼가길 허락하지 않았다.

     

    팔켄하인이 앞으로 나섰다.

     

    “전하, 내의원의 일이옵니다. 주치의끼리 해결할 업무 관련으로, 전하께서 심려하실 건은 아니기에…”

     

    “실적에 관한 이야기라면 내가 헤르프 주치의에게 시켰다네.”

     

    친왕이 먼저 주제를 꺼냈다.

     

    예리하네.

     

    평소 얌전하고 조용히 있어도 황족은 황족, 그 황제의 형제라 이건가.

     

    “그 대답이 듣고 싶었는가, 고트베르크 주치의.”

     

    “듣고 싶진 않았습니다만 뭐, 내의원에 조금 문제가 생겨서 말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게 자네들 주치의의 일 아니겠나. 더욱이 자네는 내의원에 혁신을 가져온 천재적인 신예라지.”

     

    친왕이 헤르프를 돌아보았다.

     

    “헤르프 주치의.”

     

    “예, 전하.”

     

    “자네가 내 곁에서 주치의 일을 한 지 얼마나 되었나?”

     

    “이십사 년입니다, 전하.”

     

    “그간 자네의 파벌은 어떠했나?”

     

    “…조용했습니다.”

     

    “그래, 조용했지.”

     

    친왕이 큭큭 웃고는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여기 있는 헤르프는 평범한 남자라네. 자네나 거기 팔켄하인처럼 천재 과는 아니야. 마찬가지로 황제의 동생이라 눈에 띄어선 안 될 내게 가장 어울리는 주치의라네.”

     

    그가 손짓하니 시종이 궐련을 가져와 커팅해주었다.

    불을 붙인 궐련을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이고는, 방 안을 연기로 채우며 그가 말했다.

     

    “자네들이야 세간의 주목을 받는 걸 당연하게 여길지도 모르지만 말일세. 평범한 이들에게도 활약할 기회는 주어져야 하지 않겠나?”

     

    “전하께서는 실적을 근거로 연무회에 파벌 치유사를 밀어 넣으실 생각이신지요.”

     

    내 지적에 친왕이 불쾌함을 표하며 불 붙은 궐련 끝으로 나를 가리켰다.

     

    “밀어 넣다니 표현이 고약하군. 자만이 아주 하늘을 찔러. 엄연한 근거를 토대로 폐하께 좋게 말씀드릴 생각이네. 자격 있는 이는 당연히 출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와 진짜요.”

     

    “그럼.”

     

    “전하의 깊으신 뜻에 감격하였사옵니다.”

     

    허리를 굽히다가 팍, 고개를 치켜든다.

     

    “헌데, 군소 파벌끼리 연합하려면 다들 이해관계가 맞았어야 할 텐데요.”

     

    “자네가 거기까지 알 필요는 없네.”

     

    “진짜 평범한 젊은이들 기회 줘서 추억 만들기나 하실 생각은 아니실 테고요.”

     

    “어허, 주치의.”

     

    친왕이 나를 향해 미간을 찌푸렸다.

     

    위엄있는 척 폼을 잡아 겁주려는 생각이겠지만 열 받는 게 먼저였다.

     

    당연히 듣기 좋은 말로 포장했을 뿐, 친왕은 자기 치유사를 연무회에 내보내 본인 명예를 드높이는 게 목적이다.

     

    나머지 군소 파벌도 각자 거기서 얻는 이익이 있어 동조한 거고.

     

    이런 분들 덕분에 미래에서 내가 그 개고생을 하게 됐다.

     

    예를 들어 연무회에 제국 치유사 자리가 서른이면, 친왕 같은 사람이 서른 명만 있어도 진짜 유능한 치유사는 아예 용사 파티 후보에 못 올라간다.

     

    그런 스노우볼링이 구르고 굴러 나한테 그 자리가 넘어오고, 용사 파티는 지원이나 보급도 별로 못 받고, 개판이었지.

     

    아셀라도 있었지만, 뭐.

     

    “전하, 덕분에 내의원 응급실은 정상적으로 기능을 못 하고 있습니다.”

     

    “그건 자네 일이니 자네가 해결해야지.”

     

    아, 황족만 아니었어도.

     

    “더 할 말 있는가?”

     

    “하하, 할 말이 많아도 다 입 밖으로 내서야 되겠습니까. 아, 늦은 시간까지 상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전하. 괜찮으시면 저희 월광궁에서 만드는 에너지 드링크인데 한 번 드셔보시죠.”

     

    “흠, 몸에 좋은 물건인가?”

     

    “아이, 그럼요.”

     

    성능 좋아. 8시간은 눈이 말똥말똥해져요.

     

    친왕이 내가 내민 병 음료를 마시고는 힘이 솟는지 신이 나서 허허 웃었다.

     

     

    나는 회중시계를 들어 시간을 체크했다.

     

    흠,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 있어 대문이 소란스러워졌다.

     

    헐레벌떡 접견실로 들어온 인물이 있었다.

     

    “어이쿠, 존안을 뵙습니다, 전하.”

     

    앰브로시아가 짤막한 팔다리로 겨우 예를 표하고는 흐트러진 성의를 고치며 나를 향해 허둥지둥 다가왔다.

     

    “고트베르크 선생!”

     

    “오랜만에 뵙습니다, 자매님.”

     

    “이게 대체 무슨 소리요! 황명을 받들지 못하겠다니?!”

     

    앰브로시아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한 장의 종이를 내 가슴팍에 밀쳤다.

     

    아까 내가 적어 전서구에 날려 보낸 바로 그 문서였다.

     

    “황명이라니?”

     

    그 심각한 단어에 친왕도 눈가를 굳혔다.

     

    나는 가능한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앰브로시아에게 대답했다.

     

    “자매님, 폐하께서 부디 아량을 베풀어주시도록 자매님께서 잘 전달해주십시오.”

     

    “대체 뭘 어떻게 전하란 말이오. 그대가 돌아왔으니 폐하의 용태를 한 번 진료해 달라는 요청이 뭐가 그리 어렵단 말이오?!”

     

    앰브로시아가 울상이 되어서는 내 백의를 양손으로 부둥켜 잡았다.

     

    날아들었던 전서구는 앰브로시아에게서 온 것이었다.

     

    황제는 그 몸으로도 왕국 연무회까지 나갈 생각인지 그 전에 내게서 진료받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래서 천황궁에 들릴 일정을 가능한 빨리 잡으라는 황명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나는 앰브로시아에게 당분간 못 가니 사정을 들으려면 직접 찾아와달라고 답신을 적어 보냈다.

     

    “자매님, 현재 내의원의 응급실에 일손이 부족하여 응급환자를 돌볼 수가 없기에 제가 직접 비상근무에 나서야 합니다.”

     

    “응급실? 응급실에 왜 손이 부족하오? 내의원에 치유사를 얼마나 확충했는데!”

     

    “확충해도 못 가는 건 못 가는 겁니다.”

     

    “이이익!”

     

    “하하, 너무 화내지 마세요. 자세한 건 저기 헤르프 주치의가 설명해줄 겁니다. 아, 폐하께서도 궁금해하신다면야 뭐…”

     

    내가 슬쩍 친왕과 눈을 마주쳤다.

     

    “왜 제가 황명을 어겨야 하는지 더 자세히 설명드릴 수도 있는데요.”

     

    친왕의 명령 때문에 황명을 어기는 신하가 발생한다.

    심지어 황제가 아끼는 의사가 진료를 보러 못 온단다.

     

    그게 무슨 사태로 일어질지 친왕도 모를 리가 없었다.

     

    그가 잠깐 무미건조하게 나를 쳐다보더니 금방 판단을 내렸다.

     

    “헤르프 주치의.”

     

    “예, 전하.”

     

    “명령을 철회하마.”

     

    “예.”

     

     

     

    ***

     

     

     

    친왕의 궁에서 나오며, 나는 앰브로시아와 대화를 나눴다.

     

    “그럼 소녀를 정치싸움에 이용했단 말이오? 선생, 엉덩이 맞고 싶소? 여기까지 뛰어오느라 얼마나 고생한 줄 아시오?”

     

    “아이, 이용이라니요. 자매님의 넓은 바다 같은 아량에 도움받았을 뿐이지요.”

     

    “흠, 소녀가 마음씨가 넓긴 해.”

     

    앰브로시아가 뚜방뚜방 걸으며 흘러내리는 성의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내의원도 내의원이지. 이슈가 있을 때마다 교통정리가 도무지 안 되는구려.”

     

    “허허, 항상 그런 곳이었습니다. 자매님이야 폐하의 곁에서 근무하는 시간이 많으셔서 보실 기회가 적으셨겠지요.”

     

    팔켄하인이 대수로운 일도 아니라는 듯 수염을 매만졌다.

     

    정치 파벌이 내의원의 문화라면 문화지.

     

    “흠.”

     

    도중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파벌이란 거, 이제 굳이 필요합니까?”

     

    “응? 무슨 의미시오?”

     

    앰브로시아가 반문했다.

     

    “자매님이 말씀하신 대로 교통정리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없앨 수가 있겠소? 주치의들이 조수 명목으로 치유사 데려가면서 자연히 생겨나는 것인데.”

     

    “치유사들이 따를 윗사람이 주치의만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지금은 사무실도 분리되어 있죠. 개방하면 분위기도 살지 않겠어요.”

     

    “좋은 생각이 있으시오?”

     

    뭐, 간단히 보자면.

     

    황궁도 여러 궁이 나뉘어있고, 각자 따르는 주군이 있지만 이들은 결국 최고 지도자인 황제를 따른다.

     

    내의원에는 그 한 명의 지도자가 없고 모든 주치의가 서로를 견제한다.

     

    대학병원도 회장이 있긴 하니까.

     

    “막연하긴 합니다만, 주치의를 통제할 상징적인 리더가 있으면 되지 않을까요.”

     

    “음, 그런 인물이 있더라도 자격이나 권한이 문제요.”

     

    앰브로시아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뭐, 지금으로선 폐하의 어의인 자매님이 가장 어울리는 위치에 계시지 않나 싶습니다만.”

     

    “하하, 소녀가 내의원의 상징이 되겠소?”

     

    “동상이라도 세워드릴까요?”

     

    “선생은 늘 농담을 잘 하시외다. 소녀의 아버지도 그랬지. 집안 핏줄이 다 그랬소.”

     

    핏줄이라.

    그러고 보면 네리아랑 같은 핏줄이었지.

     

     

    …흠.

     

    농담이 아닐 수도 있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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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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