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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2

       9월 6일은 레카체프의 개강일이었다.

         

       기적궁 앞 교정은 색색의 체육복들을 입은 학생들로 가득했다.

         

       레카체프는 기수마다 배정된 체육복 색이 달랐다.

       8가지 색이 8년에 걸쳐서 로테이션을 돌았다.

       같은 색이 돌아오는 주기는 학교의 최대 재적 기한보다 길었기에 재학 중에 누가 선후배인지 헷갈리는 일은 없었다.

         

       이번 청강생들의 체육복에도 역시 색이 배정되었다.

       기존의 8가지에는 없는 색이었다.

         

       물빛과 같은 탁한 푸른색의 체육복을 입은 학생들이 표지를 따라 교정 구석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그들과 같은 색의 옷을 입은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모두 청강생이었다.

         

       그 수는 30명이 조금 넘었다.

       그들은 오늘 오전동안 상급생의 인도에 따라 학교 내부를 견학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들 앞에 놓인 단상 위로 단정한 정장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올랐다.

         

       정장 교복은 모두 하얀색이었지만, 옷 가장자리를 처리한 색과 펜던트 등의 장식으로 그 기수를 구분할 수 있었다.

       그들은 현재 정상적인 커리큘럼을 밟았으면 최고학년에 해당하는 기수였다.

         

       그중 대표자로 푸른색 머리카락의 여학생이 앞으로 나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손님 여러분. 레카체프를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오늘 안내를 맡게 된 줄타기 전공의 클라라라고 합니다.”

         

       그녀의 눈빛은 선한 기운을 풍겼고 목소리는 차분했다.

       부드러우면서도 동시에 또박또박한 그녀의 발음은 이지적인 모범생의 것이었다.

         

       청강생들은 그녀를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클라라?”

       “들어 본 적 있어. 현 최고학년 수석 아냐?”

       “와, 그런 사람이 우리 안내를?”

         

       클라라의 이름은 제법 알려진 편이었다.

         

       레카체프의 학년 수석 정도 되면 같은 나이대에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실력자였다.

       잡지 인터뷰에도 자주 오르내리고, 유망한 신인으로 주목받는 게 당연했다.

         

       평상시였다면 명성 역시 레이나에게 밀리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업계의 모든 초점이 서커스 그랑프리로 향한 터라, 그녀에 대한 주목도가 덜한 편이었다.

         

       그래서 청강생의 절반 정도는 그녀가 이름을 말하고 나서야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교외에서의 명성과 별개로 학교 내에서 그녀의 입지는 탄탄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씨로 인망이 높았다.

         

       그녀는 1년만 있으면 소수 정예의 초엘리트 서커스단인 ‘레카체프 25’에 입단하기로 되어 있었다.

         

       레카체프 25는 20년 전, 레카체프의 1기 수석 졸업생부터 5기 수석 졸업생까지 5명이 모여서 결성한 곳이었다.

         

       시작할 때만 해도 그곳의 이름은 레카체프 5였다.

       한 명, 한 명 단원이 추가되다 보니 숫자가 늘어난 것이다.

         

       그곳은 매년 오직 1명, 레카체프의 수석 졸업생만을 단원으로 받아들였다.

         

       클라라가 내년에 예정대로 수석으로 졸업하게 된다면, 레카체프 25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동으로 서커스 그랑프리 본선에 나가게 되는 거나 다름없었다.

       설마 레카체프 25가 예선에서 탈락할 리는 없을 테니까.

         

       그녀보다 한 기수 앞선 수석 졸업생 찰리는 레카체프 25에 입단하는 것을 포기했다.

       덕분에 클라라는 재학생 중 유일하게 서커스 그랑프리 본선 진출을 보장받는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청강생들을 둘러봤다.

         

       “너무 긴장들 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은 이미 현역에서 활동 중이잖아요. 사회에서라면 오히려 저희가 선배라 불렀을지도 모를 분들인데요?”

         

       청강생들은 자신들에게 사근사근하게 구는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다.

         

       레카체프라고 하면 엘리트 집단으로 이름난 학교였다.

       자기네들끼리 ‘레카체프 식’이라고 해서 몸에 밴 미세한 동작들로 사회에서 동문을 구분하는 것은 유명했다.

         

       그곳의 학년 수석이라면 끝없이 오만한 인간일 줄 알았다.

       실제로 클라라 뒤에 서 있는 상급생들은 청강생들을 깔아보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그런데 그녀는 조금도 거드름 피우는 것 없이 친절한 태도로 그들을 맞았다.

       사람들은 과연 수석은 뭔가 다르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그녀가 주목받는 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교정 입구에서 큰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학생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의 소녀가 물결치는 긴 금발을 어깨 뒤로 넘기며 교정을 가로질러왔다.

       체육복 위로 도드라진 그녀의 몸매는 단상 위에서 오만한 표정을 짓고 서 있던 상급생들도 침을 꿀꺽 삼키며 바라볼 정도였다.

         

       그녀의 주변에는 그녀를 호위하듯 따르는 일군의 청강생 무리가 있었다.

         

       클라라는 그들의 면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레이나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이름을 알린 10대 곡예사들이었다.

         

       예테린푸르크에 모인 서커스단에서 자랑하는 신인들.

       그들이 대형을 이루며 이곳으로 다가왔다.

         

       학교 측은 이미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이 제출한 수업 시간표가 모두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고학년 실기 수업을 신청했다.

         

       클라라는 그들의 목적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입학시험에서 그랬던 것처럼 실기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보임으로써 레카체프 엘리트들의 콧대를 누를 생각인 것이다.

         

       클라라 곁에 선 상급생들이 웅성거렸다.

       레이나도 레이나지만 그녀 곁에 선 이들도 만만치 않았다.

       저들은 단상 앞에 선 떨거지들과 달리 레카체프 재학생 정도의 실력은 갖춘 이들이었다.

         

       클라라는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남학생들에게 눈치를 줬다.

       입을 허 벌리고 있던 그들은 그제야 화들짝 놀라서 레이나에게서 눈을 뗐다.

         

       ‘레이나, 저 계집애…….’

         

       클라라는 사람들의 선망 어린 시선을 받으며 한 몸에 받으며 걸어오는 레이나를 바라봤다.

         

       흥. 도도한 척하기는.

       사람들 앞에서 오줌이나 지리는 한심한 년 주제에.

       찰리 선배는 쟤를 지금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제 대놓고 좋아한다고 말하기 민망하겠지?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과 범인으로 지목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던 클라라는 없었다.

         

       그것은 이미 3주 전의 일이었다.

       사람은 얼마든지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동안 자신을 그렇게 만든 레이나에 대한 미움을 더 키웠다.

         

       그러나 그녀는 가슴 속에 품은 증오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여전히 ‘착한 클라라’를 연기하며 소란스러운 장내를 부드럽게 다독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교정이 시끌벅적해졌다.

       또 한 명의 입학시험 스타가 들어온 것이다.

         

       검은 머리칼의 소녀가 자신감 있는 발걸음으로 교문을 통과했다.

       원더스타인 서커스의 엘라였다.

         

       그녀도 주변에 한 무리의 아이들을 이끌고 있었다.

         

       클라라는 그들이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들은 이번 입학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드래프트로 서커스단에 입단한 아이들이었다.

         

       “아, 안녕? 나 입학시험에서 8위를 했었는데 기억 안 나?”

       “나는 11위를 했어. 레카체프 입학 권리가 아깝긴 했지만, 그래도 서커스 그랑프리의 본선에 오른다면 그게 더 대단할 거니까.”

       “네 시간표 어떻게 돼? 우리가 너한테 맞출게.”

         

       엘라는 아이들이 몰려드는 것에 난감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특유의 친화력으로 무리를 잘 조율해나갔다.

         

       드래프트로 선발된 아이들은 어려운 시험을 통과했다는 자부심 덕분인지 동지의식을 발휘해 잘 뭉쳤다.

       그녀는 교문에서 단상 앞까지 걸어오는 동안 순식간에 자신을 중심으로 한 그룹을 형성했다.

         

       이러다 보니 청강생은 자연스럽게 세 무리로 나뉘었다.

         

       레이나를 중심으로 한 엘리트 파벌과 엘라를 중심으로 한 신예 파벌, 그리고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쪽이었다.

         

       3번째 그룹은 실력으로나 명성으로나 클라라의 분류로 ‘떨거지’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엘라는 몰려든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면서도 3번째 그룹에 속한 친구의 존재를 살폈다.

         

       마야.

       그녀는 홀로 멍하니 기적궁의 탑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학교 입구에서부터 따로 행동했다.

         

       마야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학교생활을 도와주겠다는 엘라의 권유를 뿌리치고 혼자 쌩하니 가버렸다.

         

       엘라는 미처 그녀를 붙잡기도 전에 교문 근처에 서 있던 청강생들에게 둘러싸였다.

         

       기억을 잃기 전에도 두 사람은 살가운 관계가 아니었다.

       둘의 성격이 너무 다른 것도 있었지만, 원더스타인과 엮인 일에서 의견 충돌이 컸다.

         

       마야는 단장님을 함부로 대하는 그녀가 거슬리면서도, 단장님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 그녀를 질투했다.

         

       엘라는 원더스타인에 대해 존경심을 표하는 그녀가 거슬리면서도, 정작 서커스단 자체에는 무심한 그녀가 못마땅했다.

         

       둘의 사이는 엘라가 기억을 잃으면서 더 멀어졌다.

       작게나마 서로 진심을 나누기도 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의 두 사람 사이는 찬 바람이 쌩쌩 날렸다.

         

       엘라는 그것이 아쉬웠다.

       서커스단 내에서 하나뿐인 또래였다.

         

       어째 갈수록 사이가 더 벌어지는 느낌이었다.

         

       애초에 마야는 인간관계에 관심이 없는 타입이니 자신이 노력한다고 해서 뭘 어쩔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때였다.

       학교 입구에서 수십 명이 동시에 내지르는 우렁찬 함성이 들렸다.

         

       “파파엘! 파파엘!”

       “파파엘의 미소녀 곡예사!”

       “미소녀! 곡예사!”

       “미소녀!”

       “카렌! 카렌! 카렌!”

       “카레에엔!”

         

       갑작스러운 굉음에 놀라 교문을 돌아본 학생들은 순간 같은 생각을 했다.

         

       ‘검은색 체육복이 있던가?’

         

       전신을 새까맣게 뒤덮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로 어깨동무하고 몸을 젖혔다 구부렸다 흔들었다 파도를 치며 위와 같은 구호를 반복해서 외치고 있었다.

         

       그들이 이루는 인간 벽 사이로 거칠게 뻗친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교문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녀의 뒤로 검은색 쫄쫄이를 입은 재주꾼들이 환호와 박수를 쏟아부었다.

         

       카렌은 교문 앞에서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기며 그들을 돌아봤다.

         

       “쪽팔린 짓거리도 정도껏 해야지! 이게 뭐 하는 짓들이야!”

         

       그녀가 그들을 향해 삿대질하며 욕을 퍼부었다.

       그러나 검은 쫄쫄이를 입은 남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 큰 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파파엘, 서커스, 곡예사 같은 단어는 사라지고 두 단어만 남았다.

         

       “미소녀!”

       “카렌!”

       “미소녀!”

       “카렌!”

         

       쫄쫄이들 무리 뒤에서는 단장 제복을 입은 홉스가 나팔을 불었다.

         

       그를 비롯하여 파파엘 서커스의 재주꾼들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단원들은 이제 홉스의 나팔 소리에 맞춰 율동을 깃들이며 미소녀 카렌을 노랫가락에 맞춰 열창했다.

         

       카렌은 빌어먹을 오빠와 동료들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날려주고는 서둘러 교정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무리 이목을 끌어달라는 후원자의 부탁이 있었다지만 이게 뭐람!’

         

       “저 애가 그 파파엘 서커스의 홍일점?”

       “미소녀라니, 푸흐흐.”

       “파파엘은 좀 더 재미없는 분위기인 줄 알았는데.”

         

       카렌은 그런 아이들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뭘 봐. 안 꺼져.”

         

       그녀는 자신을 향해 수군거리는 아이들을 향해 온갖 음성 언어와 몸짓 언어를 다 동원해 욕을 날렸다.

         

       그녀는 그렇게 성질을 부려대며 교정을 성큼성큼 걸었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카렌.”

       “왜 불러 시발.”

         

       그녀는 자신을 부른 인물을 향해서 성난 눈빛을 쏘아 보냈다.

       그러나 그녀는 상대를 확인하고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는 말았다.

         

       “어, 어, 마, 마야?”

         

       새하얀 소녀가 붉은 눈동자를 깜빡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렌의 얼굴이 그녀의 머리카락만큼이나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두 사람은 며칠간 테트로미노 광장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카렌은 그녀 앞에서 내숭을 떨었다.

       최대한 남자애 같은 말투를 자제하며 달짝지근하게 굴었다.

         

       파파엘 서커스의 동료 단원들이 봤다면 자지러질 정도로 낯간지러운 말투를 썼다.

         

       사내애처럼 굴었다가 경원시 당했던 옛날의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 저 빌어먹을 바보 같은 인간들 때문에 그녀의 진짜 모습을 그녀가 목격하고 말았다.

         

       “저, 저기 있지……방금 내가 한 말은…….”

         

       카렌이 말을 더듬었다.

       마야가 자신을 뭐라고 생각할지 두려웠다.

         

       그러나 마야는 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안녕.”

       “으, 으응, 아, 안녕, 마야…….”

         

       카렌이 어색하게 손을 들어 보였다.

       그녀의 시선을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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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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