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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2

       

       

       

       

       

       172화. 북부 원정대 ( 2 )

       

       

       

       

       

       솨아아아ㅡ

       

       끝을 모르고 불어오는 바람에 풀이 가볍게 허리를 굽혔다가 일으킨다. 초록빛의 물결이 여울치며 끝도 없이 파도친다.

       

       우우우하고 손을 잡고 일제히 달려오다가, 작은 발에 가로막혀 턱하니 멈췄다.

       

       작고 꼬물거리는 하얀 발.

       엘프들의 대족장 알랜시아의 발이다.

       

       나막신을 벗어 던진 감촉은 매우 신비했다. 발바닥에 닿는 것은 부드럽고, 풀이 발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미묘하게 간지럽힌다.

       

       “…이게, 풀.”

       

       그간 손으로 만져보기만 했지, 이렇게 맨발도 땅을 밟는 날이 올 줄이야.

       

       살짝 촉촉한 흙의 습기, 발바닥의 아치형을 따라 눌린 풀의 감촉, 도톰한 발가락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잔풀의 흔들림.

       

       알랜시아에게는, 그리고 엘프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 새로운 순간을 만끽하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맨발로 초원을 내달렸고, 데굴데굴 구르기도 하였고, 그저 멍하니 발밑을 내려보기도 했다.

       

       알랜시아는 가장 마지막의 경우였다.

       

       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저 자기 발을 바라보았다.

       

       꼬물꼬물.

       

       앙증맞도록 귀여운 발가락이 풀 사이로 꼬물거린다.

       

       그들이 이렇게 땅에 내려오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수백 년? 그 이상? 어쩌면 저 하늘의 해와 달마저 깜빡 잊었을 정도의 까무룩한 시간이 흘렀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도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한 적은 없을 테지. 

       

       “삐익. 삑, 삐이익?”

       

       서리빛이 감도는 작은 용이 날아와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머리와 몸통의 크기가 비슷하여 언뜻 보기에는 커다란 인형이라 착각할 생김새. 

       

       그 누가 이 귀여운 모습을 보고, 무시무시한 서리용이라 떠올릴 수 있을까.

       

       알랜시아는 고개를 들이미는 이베르의 콧잔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건… 아까의 그 하얀 안개 덕분인가.”

       

       엘프들이 모여 지내는 황금 나무의 주변에 돌연 생겨나더니, 하얗게 퍼져나간 정체 모를 안개. 그것은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종류의 것이었다.

       

       바람이 불어와도 안개는 제 형상에서 흩어지지 않았고, 꾸준하게 영역을 넓혀가며 뿌연 몸속으로 모든 것을 집어넣었으니.

       

       계속해서 퍼져 나가던 안개는 모든 엘프를 제 몸에 집어삼키고 나서야 멈춰 섰고, 눈 한번 깜빡할 시간에 사라져버렸다.

       

       마치 새벽의 이슬처럼, 백일몽처럼 흔적도 없이.

       

       “기적… 이구나.”

       

       안개는 덧없이 사라졌다. 엘프들의 족쇄와도 같았던 것들을 품에 머금고 사라졌다.

       

       이것을 기적이라 부르지 않으면 그 무엇이 기적일까.

       

       알래시아가 떨리는 눈으로 하늘과 땅을 번갈아가며 바라볼 때, 저 멀리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규칙적이고 힘이 실린 발걸음 소리, 키가 작은 사람 특유의 보폭.

       

       드워프 3형제 중에서 셋째, 트리비우스 팔락이다.

       

       “으음? 하하! 이게 어쩐 일이야? 아가씨네 식구들이 전부 맨발이잖아?”

       

       방금까지 한 잔 마시고 있던 걸까. 코끝이 조금 빨갛고, 입에서는 약간의 술 냄새가 풍겨온다.

       

       “오늘은 어쩐 일로 나무로 만든 신발을 안 신고… 그 신발 이름이 뭐더라?”

       

       “나막신이요.”

       

       “아 맞아! 나막신을 안 신고 죄다 맨발로 저러고 있는 거요?”

       

       트리비우스 팔락이 의문스럽게 말하며 초원을 바라봤다. 과연 맨발로 초원을 만끽하는 엘프들은 앞뒤 사정을 모르고 바라본다면 조금 괴상하게 보일 법했다.

       

       초원을 달리고 뒹구는 엘프들 모두 크게 웃으며 행복하다는 듯 미소 짓고 있었으니까. 

       

       알랜시아는 맨발로 초원을 질주하는 엘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환하게 웃었다.

       

       “오늘은 기쁜 날이거든요. 저희를 얽매던 나막신에서 벗어난 기적의 날.”

       

       마땅히 기쁜 날이다.

       

       오랜 세월 나무 위에 묶여 있던 그들의 족쇄가 녹슬어 떨어진 날이고, 저주로 전락한 은총에 다시 한번 빛이 트인 날이다.

       

       지긋지긋한 나막신에서 벗어나, 온전한 두 발로 지상을 거닐 수 있음에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으음…? 그런가? 하하하! 나야 뭔 일인지 잘 모르지만, 아무튼 기쁜 날이라니까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전부 여섯 번째 신의 은혜로움 덕분이죠.”

       

       “그럼 그럼! 하하하!”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린 트리비우스 팔락. 문득 떠올랐다는 듯 알랜시아에게 물었다.

       

       “아! 나막신에서 벗어났다면, 이제 그 신발은 안 신고 다니는 건가? 따각거리는 소리가 은근히 듣기 좋았는데 말이야.”

       

       “글쎄요?”

       

       알랜시아가 잠시 갸웃했다. 이제 나막신을 신지 않아도 되는 만큼, 다른 편한 것을 신어도 되지만…

       

       엘프들은 세월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의 길고 긴 시간 동안 나막신을 신었다. 그것도 그들만의 좁은 영역 안에서 외부와의 교류 없이.

       

       평생 나막신을 신어 온 엘프가 대부분이고, 알랜시아 또한 그러했다.

       

       “…아마 당분간은 신지 않을까요?”

       

       오랜 세월 뿌리내린 관습은 한순간에 바꾸기 어려운 법이다. 한동안은 나막신을 신고 다니지 않겠는가?

       

       알랜시아는 이렇게 말하며 머쓱하게 웃었다.

       

       따각- 따각-

       

       그리고 알랜시아의 말처럼, 얼마간 맨발로 다니던 엘프들은 다시금 나막신을 따각거리며 돌아다녔다.

       

       허전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

       

       

       

       

       

       푸르륵ㅡ

       

       길게 늘어선 행렬.

       

       규칙적인 간격을 유지하며 늘어선 병사들 사이로 날카로운 창이 높게 솟아올랐다. 길고 긴 행렬의 선두에 내걸린 깃대가 바람에 펄럭이며 제 몸을 펼쳐 보였다.

       

       북부 원정대.

       

       성기사와 사도 부대, 제국의 기사들이 연합한 북부 원정대는 거침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북쪽으로, 북부를 향해서!

       

       촤악!

       

       강철의 군화가 진창을 밟고 지나가며 진흙이 튀었고, 그걸 본 유니콘이 기겁하며 물러섰다.

       

       푸히힝ㅡ!

       

       거칠게 투레질하는 녀석. 하얀 털과 어울리게 깔끔을 떨었다. 연신 뒷걸음질 치는 유니콘을 한스가 막아섰다.

       

       “이 녀석, 자꾸 그러면 다시 용사님이나 프리가 공녀님한테 보내버린다.”

       

       《주인이여,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어떻게 이런 고귀한 몸을 한낱 짐 말처럼 쓸 수가 있냔 말이야!》

       

       유니콘의 등, 옆구리에는 커다란 짐이 가득 묶여 있었다.

       

       평범한 말이라면 채 하루를 못 가고 쓰러졌을 양이지만, 유니콘은 신수라는 이름처럼 거뜬하게 버텨냈다. 유니콘이 처음으로 밥값을 하는 순간이었다.

       

       스스로는 이를 매우 싫어했지만.

       

       “다시 공녀님한테 욕먹고 싶다고?”

       

       《…인생의 무게란 심오하지. 나는 이따금 그걸 실감하기 위해 짐을 짊어진다네.》

       

       잠시 이를 갈더니 유니콘이 한발 뒤로 물러났다. 한스는 정신적 쾌감을 느꼈다. 이 빌어먹을 말이 이렇게나 얌전해지다니! 이건 엘프라는 종족의 에스텔이라는 여인의 공이 컸다.

       

       설마 유니콘이 처녀의 경멸과 매도에 약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한스가 힐끗 고개를 돌려 행렬의 끝을 바라봤다. 사람이 좁쌀보다 작게 보일 정도로 멀지만, 한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에스텔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의 몸이 범상치 않게 변한 것도 있겠지만, 에스텔이라는 여인의 미모가 더욱 비범한 까닭이다.

       

       까만 닭들 사이에 있는 하얀 토끼와도 같은 자태.

       

       그야말로 빛을 발하는 미모.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얼굴이란 에스텔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외모였다.

       

       ‘진짜 나랑 같은 눈, 코, 입이 맞는 건가?’

       

       볼 때마다 느껴지는 것은 신기함 절반, 감탄이 절반.

       

       생명체가 아니라 조각상을 보는 듯한 이질감마저 느껴질 지경이라, 감히 다른 마음을 품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

       

       조금씩 고개를 돌려 에스텔의 얼굴을 구경하느라 바빴던 한스. 하여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조금 뚱한 표정의 케니스가 팔짱을 끼고선 한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 것이 옷을 걸어도 충분해 보였다.

       

       프리가가 심통이 가득 담긴 케니스의 옆으로 슬쩍 따라붙었다.

       

       “야, 뭐해. 그렇게 보지 말고, 가서 화를 내든가 하지?”

       

       “제가 왜요? 저 화 안 났어요.”

       

       “아ㅡ 그래? 그럼 튀어나온 입이나 좀 집어넣고 말하지 그래?”

       

       “읏!”

       

       그제야 허둥지둥 제 입을 가리는 케니스. 프리가가 약간의 한심함이 담긴 눈빛으로 케니스를 바라봤다.

       

       “야, 너 진짜 화 안 난 거 맞아? 누가 봐도 삐진 얼굴인데.”

       

       “화 안 났다니까요! 제가 화날 이유가 뭐가 있다고 화를 내요!”

       

       케니스가 보기 드물게 버럭 성질을 부리더니, 걸음 속도를 높여 앞서갔다. 반응을 보아하니 자신이 왜 심통 났는지도 모르는 게 분명하다.

       

       “꼴값을 떨어라 아주. 그치?”

       

       “아뇨, 뭐. 꼴값이라고 말할 것까지는….”

       

       프리가는 그 꼴사나운 모습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언제쯤이면 철이 들련지.

       

       그렇게 혀를 차다가 이스칼을 힐끗 바라봤다. 늘 그렇듯, 커다란 직사각형의 방패를 등에 짊어진 이스칼은 묵묵히 그녀의 옆에서 걷는 중이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프리가가 구태여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흠, 흠. 야 이스칼. 너 그 뭐냐. 북부에 도착하면 내가 추천하는 맛집이 있거든. 거기서 밥이나 같이 먹을래?”

       

       “오? 좋죠. 어떤 음식이 있습니까?”

       

       “음식이야 많지! 뭐 좋아해? 노루 허벅다리 통구이부터 몬테그로스 특제 만두, 송송버섯 스튜까지 있는 곳이거든? 거기서 그냥 마음에 드는 걸로 말하면 돼.”

       

       “이야, 말만 들어도 군침이 나옵니다.”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장소가 프리가의 집, 공작가일 뿐이지.

       

       ‘난 거짓말한 적 없어. 진짜 우리 집에서 다 만들어 주는데 뭐가 거짓말이야.’

       

       이스칼은 공작가에 프리가와 함께 저녁을 먹게 될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 루샨 공작과 함께.

       

       씨익.

       

       아무것도 모르고 뭘 먹을지 열심히 고민하는 이스칼을 보며 프리가는 눈을 빛냈다.

       

       그동안 너무 방심했다. 설마 이 모지리한테 관심을 가지는 년이 나타날 줄 모르고, 지나칠 정도로 안일하게 굴었다.

       

       프리가는 이를 반성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사냥하듯 임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스칼은 사냥감이다. 프리가는 사냥꾼이고.

       

       ‘훌륭한 사냥꾼은 사냥감을 추적하지 않아. 준비한 곳으로 유도하지.’

       

       꼴 보기 싫은 도둑고양이 셀리나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이상 분명 수작질을 부릴 것이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대처하지 않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

       

       그 전에, 프리가는 이스칼을 사냥할 것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과 추천은 항상 감사하게 받고 있습니다.

    – ‘신선우’님!!! 곡물 오트밀처럼 고소하고 달달한 후원!!! 감사합니다!!! 방치형 이모티콘 mk2…!! 언젠가는… 언젠가는 나오지 않을?까요??? 응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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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형 무기 만들기 게
Status: Ongoing Author:
Out of boredom, I downloaded an idle weapon crafting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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