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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2

     2학기가 되었다.

     

     그 동안 바뀐 거라고는 테르시안 제국의 황제가 합스베르크로 바뀌었다는 것 하나.

     문제는 이 변화가 테르시안 한 곳 뿐만 아니라, 노스트럼과 오로솔 아카데미에도 큰 지각변동을 일으킬 변화라는 것.

     “축하드립니다, 테르시안 제국의 차기 황제 폐하.”

     오랜만에 만난 학생회장, 나리아 지오 노스트럼이 이사장실에서 독대를 하자마자 가볍게 인사했다.

     “식탁에 아무리 맛있는 음식 차려놔야 레스토랑에서 먹을 생각 없고 집밥 먹을 생각밖에 없는 사람한테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당신이 월계관 케이크를 먹기 싫다고 하더라도, 테르시안 셰프는 강제로라도 케이크를 입에 쑤셔넣을 생각인 것 같더군요.”

     “예, 예. 감사합니다. 노스트럼의 차기 여왕 전하.”

     딱히 사이가 나쁜 건 아니다.

     그저 우리의 대화는 서로의 정치적 위치를 상대의 시각을 통해 확인하고자 하는 교류일 뿐.

     “부르는 사람이 많아서 어떻게, 1학기 때랑 달리 바쁘시겠군요.”

     “지금 비꼬는 겁니까?”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하는 것 뿐입니다. 실제로 오늘의 만남이 있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지 않습니까?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시간을 좀처럼 내기 어려울 정도로.”

     “테르시안 제국의 황위 계승자 내정자라고 온 나라가 떠들썩한데, 노스트럼의 차기 국왕 전하와 만난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별거 있겠습니까? 자기들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겠죠. 충신들은 지브롤터를 질타하고, 간신들은 지브롤터에 비비려고 하고. 그 뿐입니다.”

     나리아는 신랄한 말투로 범인(凡人)들의 사고를 일축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본론부터 들어가겠습니다. 그레이 지브롤터 협곡재단 이사장. 당신은 오늘부터 노스트럼의 제 0호 경호대상입니다.”

     “…늦은 거 아닙니까?”

     “왜요. 제국에서는 벌써 언제 어디에든 붙어있는 상급 기사를 호위로 붙여주기라도 했습니까?”

     “비슷하긴 비슷하지만, 벌써 합스베르크 황제가 즉위한지 3주가 지났습니다.”

     2학기가 시작되고도 어느덧 3주가 지났다는 말.

     “노스트럼의 행정 처리는 상당히 늦군요. 아니면 지금까지 그레이 지브롤터-혹은 지브롤터 일가 전체가 테르시안 제국으로 넘어갈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에 판단이 늦었다거나?”

     “그런 거 아닙니다. 어머니도 대공도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돌아오자마자 즉각 호위를 편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셨죠.”

     “그런데, 왜?”

     “노스트럼의 행정 체계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지연이 일어나는 경우는 하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나리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차를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무능왕이 옥새를 들고 튀었습니다.”

     “…아니.”

     내용이 어처구니없어서 헛웃음이 나온 게 아니다.

     “그래도 아버지인데.”

     “아버지, 바꾸시겠습니까?”

     “그건 사양하도록 하죠.”

     나리아가 이제는 자신의 친부이자 국왕인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을 무능왕이라고 대놓고 멸칭으로 부르는 것이 헛웃음이 흘러나왔을 뿐이다.

     “하긴. 그레이 지브롤터에게 분노하여 결재도장을 들고 잠적해버린 국왕을 아버지로 삼고 싶지는 않겠죠.”

     “잠적이었습니까? 마도자동선을 타고 도망을 다닌 게 아니라?”

     “마도자동선이 아무리 마석의 양만큼 오래 땅을 달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흑장미기사단의 용기병을 떨쳐낼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대공께서 직접 몰고 날아간 용기병이라면 더더욱.”

     “그러니까….”

     “마도자동선을 타고 도망간 게 아니라, 그냥 몸을 숨겼습니다. 옥새를 들고.”

     “하.”

     세상에 이런 자가 왕일 수 있는가.

     이미 바닥을 봤다고 생각을 했는데, 아무래도 나는 심연보다도 더 깊은 바닥이 더 있다는 것을 무능왕을 통해 새롭게 깨닫게 된 모양이다.

     “정말이지, 뭐라고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미친 작자로군요. 저 때문에 옥새를 들고 잠적한 겁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죠. 자기가 암살하려고 했던 그레이 지브롤터가 이제는 테르시안 제국의 차기 황제로 언급되고 있으니, 사람 잘못 건드렸구나 싶어서 도망친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오히려 더 대범하게 ‘그레이 지브롤터의 호위를 늘려라’라면서 도장을 콱 찍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인간이었으면 애초에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지도 않았을 겁니다.”

     “…….”

     반박할 의리도 생각도 없다.

     그저, 나리아가 하는 말이 예상이 아니라 그의 속내에 대한 정확한 추론이니.

     “어제가 되어서야 간신히 도장을 받아내서 찍은 겁니다.”

     “어쩐지 총장께서 요 며칠 장기 출장이라면서 영지에 가셨더니, 영지가 아니라 잠적한 국왕을 찾으러 나선 것이로군요.”

     “예. 어디가서 말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술 퍼마시느라 옥좌를 비우는 건 항상 있는 일이지만, 옥새가 왕궁을 벗어났다고 하면 백성들이 크게 동요하게 될 테니.”

     옥새는 노스트럼의 전통과 역사가 깃들어있는 아티팩트-매직아이템이다.

     전설에 따르면 드래곤의 이빨을 깎아서 만들었다고 하며, 노스트럼 왕가의 권위와 전통, 그리고 혈통의 고귀함을 상징한다.

     그 고귀한 상징을 대신 들고 쾅쾅 찍어댔을 카르멘 모르가니아의 첫 심정이 어땠을지는 본인만 알겠지만, 아마 충심으로 반역을 저지른다는 생각으로 도장을 찍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도망을 쳤답니까? 세이레네 백작령?”

     “렘부르 군터.”

     “…….”

     “당신의 외가입니다.”

     이게 나리아의 본론인 걸까.

     “조심하세요. 슬슬, 거머리들이 꼬이기 시작할 겁니다.”

     “거머리들이라…. 이미 이전부터 떡밥은 뿌려뒀는데, 제대로 몰리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레이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이미 ‘크비슬링스’를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구축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죠. 그렇긴 한데, 워낙 하는 행동들이 추하고 불쾌한 자들이 많아서.”

     더러운 자들을 하나로 몰아서 한꺼번에 처리하겠다고 생각은 해왔지만, 막상 다시 보니 역겹고 추하기 짝이 없어서 대하기 좀 껄끄러워졌다.

     “왜요. 아스타시아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고 좋은 것만 들려주고 싶은데, 그 쓰레기들이 손님으로 찾아오면 부정탈까봐 걱정되십니까?”

     “…….”

     “그렇다면 더더욱 확실하게 나서야 할 겁니다. 당신이 확실하게 힘을 보여줘야, 구더기들이 함부로 달라붙을 생각을 하지 못하죠. 그것이 무력이든, 재력이든, 아니면 또다른 무언가든.”

     나리아는 원하고 있다.

     “오로솔 아카데미는 작은 대륙이며, 이 작은 대륙에는 새로운 바람이 필요합니다. 그레이 지브롤터가 아스타시아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모두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무언가가.”

     

     내가 전면에 나서기를.

     “이거, 승인 났습니다.”

     “…….”

     “아쉽게도 ‘도박’은 공식적으로 ‘돈’을 걸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만, 건전한 수준에서의 속도 경쟁은….”

     “나리아.”

     나는 노스트럼의 도장이 찍힌 사업 계획서를 받은 뒤, 가볍게 계획서를 흔들었다.

     “도박이라는 건 말입니다. 공식적으로 판을 깔아주지 않아도 열리는 게 노름판입니다.”

     “…….”

     “분명히 알아두십시오. 나리아. 뒷주머니 좀 불리고 싶다면.”

     나는 계획서의 중간, 경룡들의 대결 장면이 삽화로 그려진 그림을 가리켰다.

     “무조건 지브롤터에게 올인하십시오.”

     2학기.

     경룡장이 열렸다.

     * * *

     경룡.

     

     제국어로 조금 돌려서 말하자면, 드래곤 레이스.

     제국에서는 말이 땅을 달렸다면, 노스트럼에서는 드래곤이 달리며 경주한다.

     ‘미래와는 달라졌네.’

     

     회귀 전의 드래곤들은 날개가 꺾인 채 땅을 기어야만 했다.

     비쩍 굶은 상태에서, 이겨야만이 제대로 음식을 받고는 했다.

     몰락 전에는 같은 부대에 소속된 용기병으로서 함께 장난도 치고 그랬지만, 몰락 이후에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동료였던 이의 꼬리를 뒤에서 물어뜯고 다리를 망가뜨리려고 아귀다툼을 벌였다.

     점차 경룡은 야만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했고, 그게 많은 이들의 인기를 끌어 대륙 전체가 열광하는 스포츠가 되었다.

     ‘그냥 투견에 가까웠지.’

     속도 경쟁이라는 명목으로 벌이는 용기병들의, 야생 짐승들의 유혈이 난자하는 대결.

     돈 벌이 수단으로서는 확실하지만, 그런 야만적이고 폭력적인-합스베르크의 음습한 욕망이 담긴 경룡을 만들 생각은 없다.

     그래서 계획서를 구상할 때, 아예 새로운 형태로 만들었다.

     바로 지금처럼.

     “오로솔 아카데미 외곽 전체를 트랙으로 삼겠다는 발상에 동조를 하게 되다니.”

     자신의 비룡에 올라탄 윈체스터 대공이 허탈하게 웃으며 고삐를 움켜쥔다.

     “하지만 좋으시지 않습니까? 트랙의 길이만 거의 10km는 되는데.”

     “비룡이 날 수 있는 환경의 도로를 구축하는 게 또 돈이 들어가지 않나.”

     “대공 각하. 언젠가는 마도자동선 열차처럼, 비룡도 하늘을 날아가는 하늘길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니드호그의 발목을 잡고 윈체스터 대공과 함께 하늘을, 경룡장에 해당하는 트랙을 돌며 우리는 주변 장애물을 훑었다.

     “저기 있는 나무는 베어내야겠군요. 다음에 아카데미 관리인들에게 지시를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재단 이사장께서 월권행위가 참 굉장하시군.”

     “그만큼 경룡에 진심이라는 거죠.”

     “…도박에 진심이 아니고?”

     윈체스터 대공이 여전히 미덥잖다는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음성적으로 열리는 도박 경기를 통해 얼마나 큰 돈을 벌려고 그러시는가, 미래의 테르시안 제국 황제 폐하.”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국 중앙은행의 총재가 은행 돈을 탈탈털어 배팅을 할 만큼 크게 사업을 키워 그 수수료를 벌어들일 생각입니다. 그리고 테르시안 제국 황제 아닙니다.”

     당사자가 들으면 기함할 소리.

     ‘차기 합스베르크 제국 황제라고 하면 당사자는 기뻐하겠네.’

     물론, 테르시안 제국 황제라는 의미에서.

     “나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구나. 그나마 네가 말한 부분이 정말로 도움이 된다면….”

     “노스트럼의 공군, 용기병 꿈나무들이 미리미리 자신의 재능을 확인하는 장소를 마련한 것 만으로도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트랙이 만들어진 주 목적은 경룡이지만, 마냥 경룡으로만 활용할 생각은 없다.

     “이 트랙에서 용기병들이 정기적으로 비행 훈련을 하고, 중간중간 장애물을 설치하여 그에 대한 대처방향을 연구하는 걸로 충분히 용기병들의 훈련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으음….”

     “실전은 훈련처럼. 훈련은 실전처럼.”

     “이거 참. 이러다가….”

     윈체스터 대공은 경계하고 있다.

     “어디 갑자기 하늘을 나는 배라도 뛰쳐나오면, 훈련 중이던 용기병들에게 그걸 공략하라는 훈련도 나오게 생기겠군.”

     “천마가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마차를 끄는 것도 아니고, 배가 날개를 펄럭이면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겁니까? 하하.”

     “자네가 생각해도 우스운 말이지? 하하.”

     “예. 용기병들이 들으면 지금 우리보고 장난치냐고 할 소리죠. 그 말을 한 사람이 대공각하여도 말입니다.”

     “무엇보다, 제국에서 견제를 하겠지. 우리는 해군을 해체했는데, 지금 노스트럼은 테르시안 제국의 트라우마와도 같은 용기병들을 훈련시키는 거냐고.”

     지브롤터 다음 가는 소위 발작 스위치, 용기병의 훈련으로 비칠까봐.

     

     “그러니까, 훈련이 아니라 ‘스포츠’라는 거죠. 어디까지나 ‘교육’의 일환으로서.”

     이곳은 군사훈련용 비행장이 아니다.

     “아카데미 아닙니까. 아카데미에서 미성년자들이 비룡을 타고 서로 달리는 속도 경쟁을 할 뿐인데, 그게 무슨 공군 훈련이 된단 말입니까? 하하.”

     “그래. 그런 목적만 있다면 모르겠는데, 우리 지브롤터 이사장께서는 친 제국파의 일원을 데려다가 사설도박판을….”

     “꺄아아ㅡㅡㅡ!!”

     오로솔 아카데미, 성벽처럼 높게 솟은 장벽 위.

     “멋져요ㅡㅡㅡ!!”

     백발의 제복 여인이, 우리를 향해 마구 손을 흔들고 있었다.

     “훗.”

     나는 여인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드는 걸로 답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고개를 돌려, 한 손을 정장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좀 더 빠르게 달려볼까요, 대공 각하? 이렇게 함께 비룡을 타고 달려주는 외손자 또 없습니다.”

     “너.”

     윈체스터 대공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도박이고 뭐고 나발이고, 혹시 저 아이한테 멋진 모습 보여주고 싶어서 경룡이니 뭐니 하겠다는 건 아니지?”

     “예?”

     “아니, 딱 그런 꼴 같은데?”

     윈체스터 대공은 너무나도 진지한 얼굴로.

     “어떻게 하면 멋지게 비룡을 타고 다닐 수 있는지 연구라도 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꼴을 보아하니, 딱 여자한테 잘 보이려고 경룡이랍시고 지금 도입하는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저, 모두에게 공평한 비행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경룡을 도입하고자 할 뿐입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올 한 해
    일을 작년보다 2/3정도 했더라고요

    오늘부터 다시 태어나기로 했습니다
    2022년만큼, 그 때보다 더 열심히 하기로 했습니다

    2024년
    다작라떼가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신작이 몇 개 나왔고, 앞으로도 더 나올 예정이니 많은 관심바랍니다(홍보)

    개인적인 일정이 끝난 관계로, 매국명가는 오늘부로 다시 1일 2편 0시12시 템포로 갑니다.

    다음화 보기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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