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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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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멍한 얼굴로 물에 둥둥 뜬 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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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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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자 새하얀 수증기가 주변을 뿌옇게 물들이고 있는 게 보였다. 오로지 ‘마왕’만이 사용할 수 있는 욕실답게 내부 공간은 우아하고 사치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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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캔들 홀더에선 마법으로 만들어진 빛이 넘실거렸고, 여성이 커다란 병을 기울이고 있는 조각상에선 뜨거운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물이 흐르는 소리는 멍한 머릿속을 더욱 멍해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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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실 천장엔 화려한 그림이 새겨져 있었는데, 예술에 대해 잘 모르는 그가 보아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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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실 한가운데 자리 잡은 욕탕은 섬세한 문양이 우아한 선을 그리며 조각되어 있었다. 고귀한 핏줄을 가진 이들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욕탕 안에 검은색 슬라임이 둥둥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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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도와주려고 한 거뿐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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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에 둥둥 떠 있던 리안 -.. 아니 이젠 슬라임이 되어버린 리안이 멍한 얼굴로 제 기억을 반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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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먼저 떠오른 기억은 엉망이 된 회의실이었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검은 로브 무리와 멍한 얼굴을 한 마왕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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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리안은 마왕에게 적이 아니라는 뜻을 전하고 싶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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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이야 그저 마왕을 조금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쇠 국자를 빼 든 거지만, 마왕의 입장에선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보이지 않는 공격으로 아군을 쓸어버리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 겁을 먹거나, 낯선 침입자에게 분노할 거라 생각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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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격할 때와 달리 다시 약해진 영력으로 인해 글자 따위를 써서 의견을 전달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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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쩔 수 없이 근처 화병에 꽂혀있던 새하얀 꽃을 마왕의 앞에 살포시 내려놓는 것으로 적의가 없다는 뜻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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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흡사 하얀 깃발을 흔드는 것과 다름없는 행동이었지만 마왕에겐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는지, 마왕은 제 앞에 떨어진 새하얀 꽃을 손에 꼭 쥔 채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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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모습이 집에 두고 온 아이리스와 제스를 떠올리게 해 좀 더 정이 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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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을 기점으로 리안은 마왕의 주변을 맴돌며 그녀를 괴롭히려는 이들을 쇠 국자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마왕을 괴롭힐 만한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 종일 붙어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하니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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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에는 ‘실수’라 생각했던 시종들의 행동이 의도적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정말 사소한 것들, 간혹 이가 나간 잔을 굳이 마왕에게 건네준다거나 떫은 차를 마시게 한다거나 덜 마른 수건을 방에 채워놓는다거나 하는… 질 낮은 괴롭힘이 눈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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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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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는 그저 죽기 위해 몸부림치는 멍청한 시종들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왕은 시종들은 지적하지도 죽이지도 않았다.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처럼 내버려 둘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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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뭔 일인가 싶어 시종들의 뒤를 따라가 보니 검은 로브 무리와 연결된 시종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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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놈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마왕을 끝없이 괴롭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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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허.. 아직 매가 부족하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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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이 쇠 국자를 꺼내 들기 충분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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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이하게도 마왕을 도우려 할 때마다 영력이 강해져, 뒤에서 시시덕거리는 검은 로브들의 머리를 내려치는 건 일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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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넘기는 것조차 힘겨워하던 와중에 얻게 된 강대한 힘은 리안을 중독시켰고, 어느 순간부터 동정뿐 아니라 제 즐거움을 위해 마왕을 위협하는 이들의 머리를 내려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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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나날이 일주일 정도 이어지자 시종들은 학을 떼며 더 이상 마왕의 물건에 손을 대거나 쓰레기 짓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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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로브 놈들도 어느 순간부턴 리안을 ‘그분’이라 착각하여 머리를 처박은 채 연신 죄송하다 빌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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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황이 이쯤 되자 마왕도 수호천사 같은 존재가 제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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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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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떨리는 목소리가 허공을 울려 퍼졌다. 리안은 딱히 제 존재를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최종 보스가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서로 적이 될지도 모르는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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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놓고 엮이는 건 피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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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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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리안의 마음을 마왕은 단 한마디로 가볍게 뒤흔들어버렸다. 아이리스를 돌볼 때부터 딸 가진 아빠와 자신을 비교했던 리안의 모습을 보면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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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이를 가진 적도 없으면서 부성애가 넘쳐난다는 사실이다. 개그 세계에서 생활하는 내내 제 어머니를 부양해왔던 탓인지 챙겨줘야 할 것 같은 여린 사람들에게 너무나 약했다. 특히 그게 미녀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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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으윽… 이,이러면 안 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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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카리스마 넘치는 성숙한 여인이 애처롭게 아빠를 찾으며 필사적으로 희망을 갈구하는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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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마왕이 회의실에서 가져와 방 한쪽에 놓인 화병에 꽂혀있던 하얀 꽃을 그녀의 앞으로 가져가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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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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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왕은 말없이 하얀 꽃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듣는 사람이 더 마음 아플 정도로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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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지의 존재가 제 곁을 맴돌고 있다는 걸 확신한 이후부턴 그녀는 우는 것도, 자해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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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신 매일 같이 리안이 제 곁에 있는지 확인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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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계세요?”
    “옆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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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심한 얼굴과 달리 외로움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를 리안은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그녀의 방 안을 뒹굴고 있는 낡은 인형을 조종해 품에 안기게 해준다거나, 울려고 할 때마다 손수건을 안겨주는 것으로 그녀의 곁에 자신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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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는 자신을 아빠라고 오해하는 건 아닌가 했는데, ‘천사님’이라 부르는 걸 보면 제 아빠가 아니라는 건 아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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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런데.. 마왕이 천사라고 하는 건 욕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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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리안 또한 마왕에게 익숙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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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왕의 정신 상태가 안정되어가는 만큼 리안은 조금씩 초조해졌다. 제국 쪽에 있는 일행이 걱정되기도 했고, 최종 보스에 관한 정보도 그다지 얻지 못한 상태라 불안감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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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고 마왕의 곁을 떠나 정보 조사에 집중하자니, 리안이 그녀의 곁을 떠날 때마다 마왕은 극심한 불안감을 보여 쉽사리 떠나기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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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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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의 위에 자리하는 게 당연한 존재, 태어날 때부터 군주로서 태어난 포식자의 핏줄, 이유 있는 오만함과 카리스마 넘치는 매력적인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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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그러한 존재를 직접 빚은 것 같은 존재가 그녀였다. 그녀의 성격은 결코 연약하지도 수줍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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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곁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본 성격이 어떠한지 알게 된 리안은 자연스럽게 온갖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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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과거에 어떤 일을 겪었기에 자신을 해할 정도로 정신이 망가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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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의문이 해소된 건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나기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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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곁을 떠날 수 없는 만큼, 방 안에 쌓인 마왕의 물건을 뒤적거리는 시간이 많았다. 리안이 책을 빼내 읽거나 물건을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하는 등의 행동을 하면 마왕은 도리어 안심하는 편이었기에 스스럼없이 물건들을 뒤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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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 신기한 거 엄청 많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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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이 주로 뒤적거리는 물건들은 마족들이 마왕에게 바친 선물이라는 이름의 뇌물들이었다. 받는 족족 쌓아두기만 할 뿐 신경조차 쓰지 않다 보니 마족들은 마왕의 눈이 더럽게 높아 귀한 선물이 아니면 눈길조차 안준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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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덕분에 온갖 물건들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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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건들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중 통신 수정구처럼 생긴 물건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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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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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통신구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수정구를 들어 올렸지만 영력이 약해 들어 올리다가 그대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위쪽에 놓여있던 수정구는 그대로 아래로 굴러가 마왕의 발치까지 굴러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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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털실 덩어리를 쫒는 고양이처럼 수정구의 뒤를 쫓아오던 리안은 눈앞에서 마왕이 수정구를 들어 올리자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수정구를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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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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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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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순간 시야가 뒤집어지더니 낯선 장면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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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닥에 깔린 레드 카펫과 계단 위에 자리한 화려한 왕좌, 마왕을 따라다니며 몇 번이고 본 적 있는 왕의 홀이 눈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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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이 당황하며 주변을 휘휘 둘러보려 했지만 시선이 고정되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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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 하하하!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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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광기 섞인 웃음소리가 홀 안을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고정된 시선이 왕좌 앞에 선 이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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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 저거 원작 마왕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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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페인트로 칠해놓은 것처럼 얼굴이 검게 칠해져 있긴 했지만, 옷차림이 워낙 눈에 띄어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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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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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간 귓속을 파고드는 익숙한 마왕의 목소리에 몸이 굳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시야의 주인이 마왕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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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이건… 마왕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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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닫기 무섭게 마왕의 떨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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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이상 마족과 인간이 싸우지 않는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용사..와 이야기를 나눠보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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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얀 손이 잠시 시야를 가렸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얼굴을 쓸어내린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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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째서 용사를 죽이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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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와 배신감이 뒤섞인 목소리가 실성한 듯 웃고 있는 전대 마왕을 향했다. 그러자 깔깔 웃음을 흘리던 전대 마왕이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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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단다.”
    “그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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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각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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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단을 느릿하게 밟고 내려온 전대 마왕은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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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이제 말해줄 때가 되었구나. 어째서 용사와 마왕의 싸움이 영원히 반복되고 있는지 -….커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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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피를 왈칵 토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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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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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Ilham Senjaya님 오늘도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3

중간에 끊기 애매해서 바로 다음편 업로드 하겠습니다.

추천과 선작은 사랑입니다.다음화 보기

리안은 멍한 얼굴로 물에 둥둥 뜬 채 생각했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자 새하얀 수증기가 주변을 뿌옇게 물들이고 있는 게 보였다. 오로지 ‘마왕’만이 사용할 수 있는 욕실답게 내부 공간은 우아하고 사치스러웠다.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캔들 홀더에선 마법으로 만들어진 빛이 넘실거렸고, 여성이 커다란 병을 기울이고 있는 조각상에선 뜨거운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물이 흐르는 소리는 멍한 머릿속을 더욱 멍해지게 했다.

욕실 천장엔 화려한 그림이 새겨져 있었는데, 예술에 대해 잘 모르는 그가 보아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욕실 한가운데 자리 잡은 욕탕은 섬세한 문양이 우아한 선을 그리며 조각되어 있었다. 고귀한 핏줄을 가진 이들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욕탕 안에 검은색 슬라임이 둥둥 떠 있었다.

‘조금 도와주려고 한 거뿐이었는데…’

물에 둥둥 떠 있던 리안 -.. 아니 이젠 슬라임이 되어버린 리안이 멍한 얼굴로 제 기억을 반추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기억은 엉망이 된 회의실이었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검은 로브 무리와 멍한 얼굴을 한 마왕의 얼굴.

당시 리안은 마왕에게 적이 아니라는 뜻을 전하고 싶어 했다.

리안이야 그저 마왕을 조금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쇠 국자를 빼 든 거지만, 마왕의 입장에선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보이지 않는 공격으로 아군을 쓸어버리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 겁을 먹거나, 낯선 침입자에게 분노할 거라 생각한 탓이다.

공격할 때와 달리 다시 약해진 영력으로 인해 글자 따위를 써서 의견을 전달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근처 화병에 꽂혀있던 새하얀 꽃을 마왕의 앞에 살포시 내려놓는 것으로 적의가 없다는 뜻을 전했다.

흡사 하얀 깃발을 흔드는 것과 다름없는 행동이었지만 마왕에겐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는지, 마왕은 제 앞에 떨어진 새하얀 꽃을 손에 꼭 쥔 채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 모습이 집에 두고 온 아이리스와 제스를 떠올리게 해 좀 더 정이 들고 말았다.

그날을 기점으로 리안은 마왕의 주변을 맴돌며 그녀를 괴롭히려는 이들을 쇠 국자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마왕을 괴롭힐 만한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 종일 붙어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하니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에는 ‘실수’라 생각했던 시종들의 행동이 의도적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정말 사소한 것들, 간혹 이가 나간 잔을 굳이 마왕에게 건네준다거나 떫은 차를 마시게 한다거나 덜 마른 수건을 방에 채워놓는다거나 하는… 질 낮은 괴롭힘이 눈에 보였다.

[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

처음에는 그저 죽기 위해 몸부림치는 멍청한 시종들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왕은 시종들은 지적하지도 죽이지도 않았다.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처럼 내버려 둘 뿐이었다.

이게 뭔 일인가 싶어 시종들의 뒤를 따라가 보니 검은 로브 무리와 연결된 시종들이었다.

놈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마왕을 끝없이 괴롭히고 있었다.

[ 어허.. 아직 매가 부족하구나? ]

리안이 쇠 국자를 꺼내 들기 충분한 이유였다.

기이하게도 마왕을 도우려 할 때마다 영력이 강해져, 뒤에서 시시덕거리는 검은 로브들의 머리를 내려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책을 넘기는 것조차 힘겨워하던 와중에 얻게 된 강대한 힘은 리안을 중독시켰고, 어느 순간부터 동정뿐 아니라 제 즐거움을 위해 마왕을 위협하는 이들의 머리를 내려치곤 했다.

그런 나날이 일주일 정도 이어지자 시종들은 학을 떼며 더 이상 마왕의 물건에 손을 대거나 쓰레기 짓을 하지 않았다.

검은 로브 놈들도 어느 순간부턴 리안을 ‘그분’이라 착각하여 머리를 처박은 채 연신 죄송하다 빌어왔다.

상황이 이쯤 되자 마왕도 수호천사 같은 존재가 제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여기… 있습니까?”

떨리는 목소리가 허공을 울려 퍼졌다. 리안은 딱히 제 존재를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최종 보스가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서로 적이 될지도 모르는 사이였다.

대놓고 엮이는 건 피하고 싶었다.

“아빠..?”

그런 리안의 마음을 마왕은 단 한마디로 가볍게 뒤흔들어버렸다. 아이리스를 돌볼 때부터 딸 가진 아빠와 자신을 비교했던 리안의 모습을 보면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게 있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이를 가진 적도 없으면서 부성애가 넘쳐난다는 사실이다. 개그 세계에서 생활하는 내내 제 어머니를 부양해왔던 탓인지 챙겨줘야 할 것 같은 여린 사람들에게 너무나 약했다. 특히 그게 미녀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 으윽… 이,이러면 안 되는데..! ]

리안은 카리스마 넘치는 성숙한 여인이 애처롭게 아빠를 찾으며 필사적으로 희망을 갈구하는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결국, 마왕이 회의실에서 가져와 방 한쪽에 놓인 화병에 꽂혀있던 하얀 꽃을 그녀의 앞으로 가져가 내려놓았다.

“…”

마왕은 말없이 하얀 꽃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듣는 사람이 더 마음 아플 정도로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미지의 존재가 제 곁을 맴돌고 있다는 걸 확신한 이후부턴 그녀는 우는 것도, 자해도 멈췄다.

대신 매일 같이 리안이 제 곁에 있는지 확인하려 했다.

“여기 계세요?”

“옆에 있어요?”

무심한 얼굴과 달리 외로움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를 리안은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그녀의 방 안을 뒹굴고 있는 낡은 인형을 조종해 품에 안기게 해준다거나, 울려고 할 때마다 손수건을 안겨주는 것으로 그녀의 곁에 자신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아빠라고 오해하는 건 아닌가 했는데, ‘천사님’이라 부르는 걸 보면 제 아빠가 아니라는 건 아는 듯했다.

[ ‘그런데.. 마왕이 천사라고 하는 건 욕 아닌가?’ ]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리안 또한 마왕에게 익숙해져 갔다.

마왕의 정신 상태가 안정되어가는 만큼 리안은 조금씩 초조해졌다. 제국 쪽에 있는 일행이 걱정되기도 했고, 최종 보스에 관한 정보도 그다지 얻지 못한 상태라 불안감이 커졌다.

그렇다고 마왕의 곁을 떠나 정보 조사에 집중하자니, 리안이 그녀의 곁을 떠날 때마다 마왕은 극심한 불안감을 보여 쉽사리 떠나기 쉽지 않았다.

[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

누군가의 위에 자리하는 게 당연한 존재, 태어날 때부터 군주로서 태어난 포식자의 핏줄, 이유 있는 오만함과 카리스마 넘치는 매력적인 왕.

마치 그러한 존재를 직접 빚은 것 같은 존재가 그녀였다. 그녀의 성격은 결코 연약하지도 수줍지도 않았다.

그녀의 곁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본 성격이 어떠한지 알게 된 리안은 자연스럽게 온갖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과거에 어떤 일을 겪었기에 자신을 해할 정도로 정신이 망가진 거지?

그런 의문이 해소된 건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나기 전이었다.

그녀의 곁을 떠날 수 없는 만큼, 방 안에 쌓인 마왕의 물건을 뒤적거리는 시간이 많았다. 리안이 책을 빼내 읽거나 물건을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하는 등의 행동을 하면 마왕은 도리어 안심하는 편이었기에 스스럼없이 물건들을 뒤적거렸다.

[ 이야, 신기한 거 엄청 많네. ]

리안이 주로 뒤적거리는 물건들은 마족들이 마왕에게 바친 선물이라는 이름의 뇌물들이었다. 받는 족족 쌓아두기만 할 뿐 신경조차 쓰지 않다 보니 마족들은 마왕의 눈이 더럽게 높아 귀한 선물이 아니면 눈길조차 안준다고 생각했다.

그 덕분에 온갖 물건들이 가득했다.

물건들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중 통신 수정구처럼 생긴 물건을 발견했다.

[ …! ]

진짜 통신구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수정구를 들어 올렸지만 영력이 약해 들어 올리다가 그대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위쪽에 놓여있던 수정구는 그대로 아래로 굴러가 마왕의 발치까지 굴러가 버렸다.

털실 덩어리를 쫒는 고양이처럼 수정구의 뒤를 쫓아오던 리안은 눈앞에서 마왕이 수정구를 들어 올리자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수정구를 붙잡았다.

구웅..!

[ …헉! ]

그 순간 시야가 뒤집어지더니 낯선 장면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바닥에 깔린 레드 카펫과 계단 위에 자리한 화려한 왕좌, 마왕을 따라다니며 몇 번이고 본 적 있는 왕의 홀이 눈앞에 펼쳐졌다.

리안이 당황하며 주변을 휘휘 둘러보려 했지만 시선이 고정되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

그때 광기 섞인 웃음소리가 홀 안을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고정된 시선이 왕좌 앞에 선 이를 향했다.

‘억…! 저거 원작 마왕 아니야?’

누군가 페인트로 칠해놓은 것처럼 얼굴이 검게 칠해져 있긴 했지만, 옷차림이 워낙 눈에 띄어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도대체… 왜?”

순간 귓속을 파고드는 익숙한 마왕의 목소리에 몸이 굳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시야의 주인이 마왕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럼 이건… 마왕의 기억?’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닫기 무섭게 마왕의 떨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더 이상 마족과 인간이 싸우지 않는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용사..와 이야기를 나눠보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하얀 손이 잠시 시야를 가렸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얼굴을 쓸어내린 듯했다.

“어째서 용사를 죽이신 겁니까!?”

분노와 배신감이 뒤섞인 목소리가 실성한 듯 웃고 있는 전대 마왕을 향했다. 그러자 깔깔 웃음을 흘리던 전대 마왕이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단다.”

“그게 무슨…”

또각또각.

계단을 느릿하게 밟고 내려온 전대 마왕은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채 말했다.

“그래, 이제 말해줄 때가 되었구나. 어째서 용사와 마왕의 싸움이 영원히 반복되고 있는지 -….커헉!”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피를 왈칵 토해내기 시작했다.

“아..버지?”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나 혼자 장르가 다르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n the world of comedy anime, I was living an ordinary life until I became possessed by a dark fantasy novel I was reading before falling asleep. ‘Hahaha! Don’t hold a grudge -..!’ ‘Ugh, cough cough…seriously…my clothes are ruined.’ ‘…!?’ Though I was stabbed in the stomach, I calmly stood up and pulled out the spear. Originally, residents of the comedy world are a race that can be torn into 100 pieces and still come back to life the next day. ‘Stop it! Stop now! How long do you plan to sacrifice me?’ ‘No…I mean..’ ‘I’ve become strong to protect you…what have I become?’ Residents in the comedy world are just a race that vomits blood even if they stub their toe. I never made any sacrifices..but my delusion deepens and my obsession grows. One day, while I was half-imprisoned and taking care of some pitiful kids… ‘Are you the boss?’ ‘Excuse me?’ Before I knew it, I had become the behind-the-scenes boss of a huge underworld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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