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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3

     

    헤이케와 회담을 마친 아셀라는 월광궁으로 돌아와 뒤뜰로 나섰다.

     

    “자리를 비우렴.”

     

    시종과 기사를 모두 물리고는 온연히 혼자가 되어 자리에 선 아셀라.

     

    지금부터 할 작업엔 집중이 필요했다.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마법.

     

    시모어에게 배운 대가의 지불법을 실험해볼 생각이었다.

     

    누구에게 보여줄 수 있는 모습도 아니었다.

     

     

    선선한 바람이 사라락 풀밭을 스치며 불어온다.

    시원하다. 오랜 회담으로 지쳤던 정신이 맑아졌다.

     

    손에 든 지팡이 한 자루의 감촉만을 느끼며 아셀라는 명상하듯 눈을 감았다.

     

    ‘계획대로 되고 있어.’

     

    몇 달 후 개최될 연무회의 대비는 착실하게 진행됐다. 아셀라로서도 윤곽만 있던 그림이 점점 명확해졌다.

     

    그녀에게 연무회는 중요했다. 승계전의 새 쟁점이 될 마왕 토벌전. 이건 그 전초전이나 마찬가지다.

     

    연합군 소속 수많은 국가의 실력자들이 참가할 자리다. 아셀라조차 내용을 다 파악할 수 없을 숫자의 이해관계가 얽혔다.

     

    제국에서 나갈 자리도 한정되어 있었다. 헤이케와 타협은 필수였다. 라우가는 진즉 참전하지 않겠다 하였으나 복귀한 게오르크는 기회를 노릴 게 분명했다.

     

    연합군의 지휘와 마왕 토벌의 영광은 제국이 독식한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권을 얼마나 손에 넣을 수 있는가.

     

    최근 황제는 자식들의 궁으로 하나둘 국정 업무를 넘기고 있다. 연무회는 황제의 생전에 그에게 어필할 사실상 마지막 찬스다.

     

    ‘라스도 적극적이고.’

     

    아셀라는 그 점이 꽤 의외였지만.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그는 평범한 주치의는 아니었다. 때때로 전략전술에 능통하고 정치적 감각도 밝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가 예전부터 세상을 위한 대의에 관심이 많았다면 충분히 보일 수 있는 모습이라고 아셀라는 생각했다.

     

    용사 파티의 편성 전략을 벌써 고려하고 있기도 하고.

    그 덕에 연무회에서 어필할 구체적인 방향성도 잡혔다.

     

    ‘어라.’

     

    문득, 아셀라는 자신이 라스가 가진 관심이나 취향 같은 건 그다지 잘 모르지 않나,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찰랑거리는 금발이 사르륵 뺨을 타고 흘러내릴 때까지 골똘히 라스에 대해 생각해본다.

     

    ―하하하, 황녀님도 참. 그렇게 보채셔도 버블티는 더 없어요. 어이쿠, 레시피를 저 말고 누가 알까요?

     

    얄미워라.

     

    라스는 자신이 좋아하는 게 뭔지 하나부터 열까지 꿰고 약점으로 이용해온다.

     

    역으로 공격할 방법이 없는 아셀라는 괜히 분해져서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평생을 황녀로 살았던 그녀는 타인의 관심 분야 따위는 알 필요가 없었기에, 당연한 태도기도 했다.

     

    자신은 관심을 받아야 할 존재다. 혈통이 다르다.

     

     

    생각이 꼬리를 물던 끝에 어떤 가정에 도달했다.

     

    아셀라는 무심코 어깨에 흘러내린 금발을 손가락으로 빙글 꼬아보았다.

     

    ‘…혹시 라스는 금발을 싫어하려나?’

     

    무지는 곧 공포라고 했던가.

     

    라스의 취향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셀라는 덜컥 겁이 났다.

     

    좋아하는 여성의 키는? 얼굴형은? 눈동자 색깔은?

     

    아니, 물론 나는… 아름답지만.

     

    누구나 우러러볼 정도로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지만.

     

    누구나 북부의 소고기를 맛있다고 하는데 난 별로였는걸.

     

    애당초 고기를 안 좋아한단 말이야.

     

    라스도 혹시나 그럴 수도 있으니까.

     

    특이 취향이란 거….

     

    …촌스러운 시골 애가 더 좋다든지.

     

    설마.

     

     

    아셀라는 고개를 붕붕 젓고는 심호흡했다.

     

    정신이 흐트러졌다. 애초에 중요한 마법 연습을 하러 나와서 또 라스 생각만 하고 있지 않았나.

     

    “라스의 취향은 안 중요해.”

     

    주변에 설득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음에도, 아셀라는 번뜩 눈을 뜨며 홀로 결론지었다.

     

    “나는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야. 맘에 안 드는 요소가 있을지언정, 라스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면 돼.”

     

    빵이 없다면 풀을 뜯어 먹어라.

    먹기 싫다면 풀을 좋아하게 되어라.

     

    실로 폭군에 어울리는 그녀다운 발상이었다. 그것이 아셀라가 가진 행동력의 근원이기도 했다.

     

    “…적당한 마법이 있어.”

     

    아셀라는 다시 한 번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슬쩍 마법서를 꺼냈다.

     

    사실 찾아둔 적은 있었다.

     

    매혹 마법.

    정신조작 계통의 마법으로, 마물 서큐버스가 인간 남성을 홀리는 원리를 분석해서 만들어졌다고 했다.

     

    타인의 뇌를 헤집는 건 자체로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기본적으로 4위계나 되는 난이도 높은 마법이었다.

     

    ‘위계가 올라가면 진짜 마인드컨트롤이 되는 위험한 마법이지만.’

     

    매혹 자체는 대상이 술자에게 이성적인 매력을 느끼게 하는 정도의 효과만 있으므로, 사실상 실전성은 없다.

     

    마인드컨트롤의 기초가 되는 기반 마법으로, 정신조작 계통을 평생 연구할 게 아니라면 거들떠볼 이유가 없기도 했다.

     

    ‘지금 내 상태로는 이 정도도 버거워.’

     

    재능을 하나 잃은 아셀라는 이미 특기인 5위계 천리안도 쓰지 못했다.

     

    ‘스승님께 배운 방법엔 단계가 있었어.’

     

    시모어가 알려준 메커니즘에서 대가인 수명을 바치는 과정은 가장 마지막이다.

     

    그 이전 단계까지 작동이 순조로운지 아셀라는 테스트해보고 싶었다.

     

    자신이 써보지 않았던 4위계 마법은 적당한 테스트가 되어주겠지.

     

    “해보자.”

     

    아셀라가 호흡을 정돈하며 자세를 고쳤다.

     

    양손으로 가볍게 든 지팡이를 축으로 삼아 마나를 흘려 넣는다.

     

    “순서를 반대로. 작성은 2진부터.”

     

    매혹 마법의 2, 3, 4진을 유려하게 그려나가는 아셀라.

     

    외곽에는 아직 압축하지 않은 유혹의 문장을 써내려 본다.

     

    …혼자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걸 라스가 읽었다면 분명 혀를 깨물고 죽고 싶어졌으리라.

     

    “이제 기본의 1진.”

     

    별안간, 아셀라가 지팡이 끝을 아슬아슬하게 잡는 기묘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심장께로 가져가 가볍게 콕, 두드린다.

     

    불쾌한 감각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아셀라만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다.

     

    그녀의 심장 표면을 따라, 주춧돌이 될 제1진이 그려지고 있었다.

     

    “후우.”

     

    진 작성을 끝내고 주문 발동이 완료되자, 아셀라를 감싸던 불쾌함과 긴장감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몸이 둥실 떠오르는 기묘한 감각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와.”

     

    마치 마법진이 몸의 일부가 된 마냥, 마나의 흐름을 전부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시모어가 알려준 대가의 지불법.

    그 준비과정.

    주문과 생명력의 동기화다.

     

    아셀라는 확신했다.

     

    지금 시전으로 이어가면, 이 매혹 주문은 여태 자신이 썼던 어떤 마법보다도 강렬한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고.

     

    “…써볼까.”

     

    4위계는 이미 아셀라가 도달한 경지다.

     

    문을 열기 위한 추가 대가, 수명을 바치는 마지막 과정까지는 필요 없었다.

    그건 한계보다 높은 경지를 도달할 때만 필요하다고 시모어가 말했다.

     

     

    힘차게 마나를 불어넣고, 아셀라의 마법진이 싱그러운 황금빛으로 번쩍였다.

     

    ―화아악!

     

    대상이 없어 금방 증발해버리는 매혹.

     

    하지만 아셀라는 확신했다. 방금 이 마법은 분명 어마어마한 효과로 대성공했다.

     

    “…우후후.”

     

    아셀라는 어느 때보다도 만족스러워서 웃음을 흘렸다.

     

    살짝 빈혈이 온 듯 머리가 핑 어지러웠지만 기분이 너무 좋았다.

     

    마법, 마법이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마법을 다시 온전하게 쓸 수 있게 됐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강해졌을지도 몰랐다. 마력회로가 열심히 일해 마나를 대량으로 소모한 걸 보면.

     

    아셀라는 라스가 줬던 음료를 꺼냈다.

     

    “시큼해.”

     

    한 모금 마시니 절로 눈을 찡그리게 된다.

    그래도 순식간에 원기가 도는 기분이다.

     

    시모어도 그가 없었으면 만나지 못했으리라.

     

    라스가 얼마나 자신에게 필요한 존재인지, 이제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보충 음료 덕분에 마나도 재충전한 아셀라는 다음 단계를 시도해볼까, 지팡이를 다시 들었다.

     

    물론 그간 막혔던 5위계의 벽에 다시 도전하는 것이었다.

     

    ‘여기부턴… 수명을 바쳐야 해.’

     

    당연히 진작 각오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실전에 들어서려 하니 살짝 겁이 났다.

     

    아직 미숙한 마법사라는 증거일까.

     

    지팡이를 들고 조금 고민하던 아셀라는, 결국 오늘은 매혹 마법만 한 번 더 테스트하기로 결정했다.

     

    “정말 성공했는지는 대상한테 직접 써봐야겠지.”

     

    어차피 효과는 길어야 한 시간 정도밖에 가지 않는다.

     

    라스의 재미있는 모습을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아셀라는 악마 같이 키득댔다.

     

     

    아셀라는 시녀장을 찾아 라스가 돌아오면 자신에게 보내라고 해두었다.

     

    “황녀님.”

     

    얼마 지나지 않아 내의원에서 돌아온 라스가 그녀를 찾아왔다.

     

    “이리 와서 서.”

     

    “식사도 거르시고 마법 연습을 하고 계셨다 들었습니다. 몰입하시는 모습도 멋지십니다만, 루틴을 깨는 건 좋지 않아요.”

     

    “아이 정말, 잔소리 좀 그만해.”

     

    “주치의잖아요.”

     

    “너도 늦게 와 놓고는. 퇴근 시간 진작 지났잖아.”

     

    “좀 바빴어요.”

     

    앰브로시아와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고 후일을 기약하고 온 라스였다.

     

    “괜찮으시면 주무시기 전 오후 진료를…”

     

    “거기 똑바로 서 있어.”

     

    아셀라가 지팡이를 라스에게 겨누었다.

     

    라스는 목숨만 살려줍쇼, 하는 반응으로 펄쩍 뛰며 양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었다.

     

    개구리 같은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한 아셀라는 아까 연습했던 대로 매혹 마법을 시전했다.

     

    ―파아앗!

     

    깔끔하게 시전된 주문.

     

    아셀라는 이번에도 완벽, 그 이상의 결과가 나왔다고 확신하며 지팡이를 내렸다.

     

    “기분이 어떻니?”

     

    아셀라가 생긋 웃으며 라스에게 물었다.

     

    라스는 제자리에 딱딱하게 굳어서는 간신히 한숨을 내쉬었다.

     

    “황녀님, 다음부터는 제게 마법을 쓰실 땐 간단한 예고라도 한 마디 해 주세요. 진짜 심장 떨어질 뻔했어요.”

     

    “알았어. 기분이 어떻냐니까.”

     

    “기분은 뭐… 내의원 일 때문에 좀 짜증 났다가, 겨우 월광궁에 돌아와서 좀 편해졌다가, 황녀님이 지팡이 들이밀어서 심연의 공포를 느꼈습니다.”

     

    “말고, 지금 말이야.”

     

    아셀라가 성큼성큼 다가가 라스에게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이래도 대답 안 해? 하는 식으로.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라스는 평소와 전혀 다를 것 없는 표정이었다.

     

    “지금은 흠, 빨리 진료 보고 자러 가고 싶은데요.”

     

    “아니, 하고 싶은 거 말고 기분…”

     

    진짜 못 살겠어. 아셀라가 한숨을 꾹 참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하하, 뭔진 몰라도 쓰신 마법의 효과를 측정하고 싶으셨나 보죠.”

     

    “어, 응. 맞아.”

     

    역시 눈치가 빠른 라스였다.

     

    혹시 매혹 마법을 맞았다고 깨닫고 아닌 척하는 걸까.

     

    의지로 참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닐 텐데.

     

    “약도 임상실험을 할 땐 투약 전 환자의 상태를 정밀하게 측정해요. 대조군도 많이 필요하고요. 정말 유의미한 변화가 있었는지 알아야 하니까요.”

     

    “무슨 말이야?”

     

    “이를테면 이미 혈당이 정상인 환자에게 혈당을 정상화하는 약을 투약해도, 효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잖아요.”

     

    “그럼 뭐야. 나는 지금 대상이 너 하나였고 이전 상태를 확인 안 했으니까, 변화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게 됐단 뜻이야?”

     

    “그렇죠.”

     

    “하….”

     

    아셀라는 철벽같은 라스의 반응에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매혹 마법이 가짜였나, 의문이 들었다가.

     

    ‘잠깐만.’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마법을 써서 변화가 없었다는 건.

     

    …이미 좋아한다는 뜻 아니야?

     

    “황녀님? 왜 고개를 돌리고 계신지요. 용건이 끝나셨으면 진료를 할까 하는데요.”

     

    “안 해. 들어가.”

     

    “저도 일 마쳐야 퇴근하죠.”

     

    “들어가라니까.”

     

    라스는 또 얘가 뭔가 켕기는 게 있구나, 눈치채고는 아셀라에게 가까이 붙어 그녀와 눈을 마주치려 능글거렸다.

     

    “왜요, 뭔데요.”

     

    “아, 진짜아.”

     

    아셀라는 끝까지 표정을 라스에게 숨긴 채, 빠른 걸음으로 뒤뜰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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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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