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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3


    그녀는 떨리는 시선으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피를 쏟아내는 제 아버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떨리는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그의 가슴팍을 향했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검이 어째서인지 그의 가슴팍에 꽂혀있었다.
    ​
    ​
    그는 검에 생명을 빼앗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빠르게 말라가기 시작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마왕이 검을 뽑아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
    ​
    “아, 안돼! 밖에! 밖에 아무도 없느냐!”
    ​
    ​
    검을 잡고 있는 손조차 떨어지지 않아 마왕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
    ​
    “이… 무슨 말도 안 되는…커흑, 분명 굴레는 제대로 -…”
    ​
    ​
    전대 마왕은 죽음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도 있는 건지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음에도 일절 신경 쓰지 않은 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다가 이내 마왕의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
    ​
    “실패, 실패했다. 나는 실패했어! 끄으윽..콜록콜록! 아… 안돼 이대로는…!”
    ​
    ​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목소리는 이내 두서없는 말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
    ​
    “마왕..과 용사의 싸움은, 마계… 와 인간계의 싸움은 끔찍한 굴레에 묶여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난 그 굴레를 쿨럭,커어억…헉, 헉.. 버, 벗어났다고 생각… 했지만, 아니었어. 전혀 아니 -…”
    ​
    ​
    그의 말은 이내 고장 난 라디오 소리처럼 치지직거리기 시작했다. 무어라 말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들리지 않았다.
    ​
    ​
    “아버지..?”
    ​
    ​
    마왕은 공허한 공간에 제 아버지를 찾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
    ​
    “아무것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요. 제발 다시 -..”
    “사랑하는 내 딸아.”
    ​
    ​
    그 순간 기적처럼 전대 마왕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
    ​
    “자유를… 평화를 주겠단 약속을 지키지 못해 정말… 미안하구나. 단 한 번도 널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었단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사실을 잊지 말렴.”
    “아빠..?”
    ​
    ​
    나이가 든 이후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애칭이 입 밖으로 흘러나온 순간 전대 마왕의 몸이 허물어졌다. 
    ​
    ​
    퍼석.
    ​
    ​
    모든 기력이 빨리기라도 한 것처럼 한 줌의 먼지가 된 전대 마왕의 시체가 바닥을 뒹굴었다. 
    ​
    ​
    “아..빠, 아빠..?”
    ​
    ​
    그녀는 연신 먼지가 되어버린 제 아빠를 찾으며 먼지 더미를 헤집었지만 죽어버린 그가 돌아올 리 없었다. 
    ​
    ​
    쿠웅!
    ​
    ​
    그녀가 제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소름이 끼치는 압박감이 홀을 가득 채웠다. 마왕은 신음조차 내뱉지 못한 채 박제된 동물처럼 그대로 굳어버렸다.
    ​
    ​
    쿠구구궁!
    ​
    ​
    그녀의 머리 위로 거대한 무언가가 제 존재를 드러냈다.
    ​
    ​
    ‘어, 이 기운은?’
    ​
    ​
    리안은 속으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무언가를 깨닫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이내 어딘가로 몸이 튕겨 나가는 듯한 반발감을 느꼈다.
    ​
    ​
    [ 방금 그건… ]
    ​
    ​
    정신을 차렸을 땐 검게 물든 구슬을 든 마왕 앞에 멍한 얼굴로 둥둥 뜬 상태였다. 마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 섞인 시선으로 검게 변한 수정구를 내려다보는 것 보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
    ​
    [ 내 예상이 맞다면… 그 녀석이 최종 보스겠지. ]
    ​
    ​
    지금까지 모든 시련을 가볍게 정리해왔던 마검조차 벨 수 없다 말하던 존재이자, 개그 권능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진 자.
    ​
    ​
    다른 이들이 ‘그분’이라 불리는 존재가 최종 보스라는 걸 리안은 확신했다.
    ​
    ​
    [ 그렇다면 목표도 바뀌겠네. 마왕 토벌이 아닌 외신 토벌로. ]
    ​
    ​
    과거 리안에게 정보를 토해냈던 외신은 마왕과 ‘그분’이라 불리는 외신이 손을 잡았다고 말했었다. 
    ​
    ​
    인간이 악마와 계약하여 막강한 힘을 얻어내는 것처럼, 마왕 또한 외신과 계약하여 엄청난 힘을 얻어냈을 거라 막연히 예상하고 최종 보스를 마왕이라 단정 지었었다.
    ​
    ​
    하지만 제대로 까보니 마왕은 그저 피해자에 불과했다. 물론, 마왕의 모든 기억을 들여다본 건 아니었기에 확신하는 건 섣부른 행동처럼 보일 수 있었지만, 근거 없는 확신은 아니었다.
    ​
    ​
    [ ‘기억이 아니더라도 주변 환경만 봐도 답은 나오지.’ ]
    ​
    ​
    ‘그 분’을 모시는 것을 영광으로 알라며 틀딱 짓을 반복하는 검은 로브 무리, 눈물을 흘리며 제 몸을 끔찍하게 상처 입히는 마왕.
    ​
    ​
    만약 ‘그 분’이라 불리는 외신이 마왕을 아꼈다면, ‘그 분’을 추종하는 검은 로브 무리가 마왕을 홀대할 리 없었다. 
    ​
    ​
    반대로 마왕이 ‘그 분’을 추종하거나 동료라 생각했다면 굳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리안을 맹목적으로 따를 리 없었다. 
    ​
    ​
    머리에 켜켜이 쌓인 정보들이 한 가지 의문에 답을 찾아내자, 새로운 의문이 머릿속을 차지했다.
    ​
    ​
    [ 그보다 전대 마왕이 말했던 말이 신경 쓰이는데… 용사와 마왕이 서로 다툼을 이어온 건 의도된 게 아니라고 했었지? ]
    ​
    ​
    이에 대해 들은 정보가 없었기에 절로 고개가 갸웃거리게 되었다.
    ​
    ​
    [ 끄으응…! 전대 마왕이 뭔가 말하기 전에 사라져버려서… 마왕도 아는 게 없을 것 같긴 한데.. 전대 용사도 죽어버렸고.. ]
    ​
    ​
    답이 나오지 않는 현실에 끙끙거리며 머리를 부여잡다가 이내 고개를 휙 돌려 마왕의 선물 더미를 바라보았다.
    ​
    ​
    [ ‘아까처럼 유용한 물건을 발견하면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
    ​
    ​
    눈을 반짝거리며 물건 더미를 뒤적거리기 시작했고… 아까와 같은 투명한 수정구를 발견하곤 덥석 붙잡았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다시 눈을 떴을 땐 말랑말랑한 검은색 슬라임이 되어있었다. 
    ​
    ​
    다시 현재로 돌아와, 따끈한 욕탕에 흐물흐물 떠 있던 슬라임 리안은 멍한 상태로 생각했다.
    ​
    ​
    ‘몸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게 좋긴 하지만 -… ’
    ​
    ​
    리안이 머릿속에 떠오른 심각한 문제를 직시하려는 순간.
    ​
    ​
    “물 온도는 괜찮아요?”
    “…!”
    ​
    ​
    언제나 듣기 좋다고 생각했던 목소리가 다정함을 한껏 품은 채 말을 걸어왔다. 리안은 화들짝 놀란 나머지 버둥거리다가 그대로 물속에 퐁하고 가라앉고 말았다.
    ​
    ​
    슬라임이기에 딱히 숨 막히진 않았지만, 반사적으로 하찮기 짝이 없는 작은 손으로 허우적거리며 물 밖으로 빠져나오려 했다. 그럴수록 몸이 더욱 아래로 가라앉았다.
    ​
    ​
    차라리 바닥까지 가라앉은 후 욕탕 바닥을 차고 튕겨 올라가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 라는 생각을 하는 것과 동시에 리안의 몸이 유려한 손에 덥석 붙잡혔다.
    ​
    ​
    촤아악.
    ​
    ​
    물 밖으로 끄집어내지는 것과 동시에 리안은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수건 한 장 걸치지 않은 새하얀 몸이 눈앞을 가득 채운 탓이었다.
    ​
    ​
    개그 필터가 열심히 일해 준 탓인지 찰랑거리는 머리카락과 수증기가 중요한 부분을 전부 가려주고 있었지만, 곱고 부드러운 피부와 잘록한 허리까지 가려주는 건 아니었다.
    ​
    ​
    “괜찮아요?”
    “괘, 괜찮아요!”
    ​
    ​
    평소 리안의 목소리와 다른, 좀 더 가늘고 귀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이가 어려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아이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초코볼을 콕콕 박아놓은 것 같은 눈동자가 눈 둘 곳을 모르겠다는 듯 굴러다녔지만, 몸이 검은색이라 티 나지 않았다.
    ​
    ​
    리안은 5cm밖에 되지 않는 말랑한 손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
    ​
    “이제 괜찮으니까 내려 주실래요..?”
    “또 빠질 수도 있어요.”
   “그…! 추워서! 추워서 빨리 탕에 들어가고 싶어서 그래요! 하하하!”
    ​
    ​
    슬라임의 몸 위로 축축한 액체가 연신 흘러내렸다. 땀처럼 보였지만 그저 슬라임 몸을 이루고 있는 물 같은 액체일 뿐이었다.
    ​
    ​
    “그럼 같이 들어가요.”
    “ㅔㄴ?”
    ​
    ​
    곧이어 마왕은 말랑한 슬라임을 제 가슴에 껴안은 채 욕탕 안에 몸을 담갔다.
    ​
    ​
    촤아아악.
    ​
    ​
    욕조 밖으로 물이 넘치는 소리를 들으며 리안은 얌전히 고장 난 상태로 안겨있었다.
    ​
    ​
    “후우…”
    ​
    ​
    따뜻한 물 속에 몸을 담그는 게 기분이 좋은지 마왕의 뜨거운 숨결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마치 귓가에 숨을 불어넣은 것 같은 자극에 리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
    ​
    “아직도 추워요?”
   “…헉..!”
    ​
    ​
    마왕은 말없이 리안을 더욱 끌어안았고… 그게 리안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
    ​
    몇 시간이 흐른 후, 겨우 정신을 차린 리안은 실크 재질의 부드러운 잠옷을 입은 마왕의 품에 갇혀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
    ​
    등 뒤에서 말랑한 무언가가 리안의 몸을 짓누르고, 머리 위로 향기로운 숨결이 쏟아졌다. 막 씻고 나온 탓인지 좋은 향기가 그녀의 몸에서 풀풀 풍겨 나왔다. 머리 위로 마왕의 입술이 닿을 듯 말듯 가까워진 것까지 느껴지자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
    ​
    ‘이대로는…! 이대로는 진짜 주, 죽는다… 죽고 말 거야…!’
    ​
    ​
    인간의 육체가 아닌 탓에 코피를 쏟아내진 않겠지만 그 대신 슬라임 몸을 채우고 있는 액체가 전부 쏟아져 나와 쯔꿀쯔굴한 가죽만 남기고 그대로 죽어버릴 터였다.
    ​
    ​
    그만큼 마왕의 스킨쉽은 치명적이었다.
    ​
    ​
    마왕은 그런 리안의 상태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애착 인형 마냥 리안을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
    ​
    “저, 저기…”
    “가만히 있어요.”
    “넵..”
    ​
    ​
    제 부하에게 명령을 내리듯 단호하면서도 차가운 목소리에 리안은 쭈구리가 되어 얌전히 품에 안겨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포상이… 아니, 무시무시한 공격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
    ​
    꾸욱.
    ​
    ​
    마왕이 아름다운 얼굴을 리안의 머리 위로 파묻은 것이다. 부드러운 입술과 오뚝한 코, 긴 속눈썹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
    ​
    ‘아, 이대로 죽는구나.’
    ​
    ​
    그나마 얻었던 슬라임 몸에서 영체가 주르륵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에 죽음을 직감한 순간 마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몸이 안 좋으면 안 좋다고 말해줬어야죠. 그렇게 쓰러져버리면 어떡해요?”
    ​
    ​
    나무라는 목소리 속엔 숨기지 못한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진지한 대화에 흘러나갔던 영혼이 제자리를 찾고 이성이 바짝 돌아왔다.
    ​
    ​
    미안하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른 순간.
    ​
    ​
    부비적.
    ​
    ​
    “흐약..!”
    ​
    ​
    마왕이 베개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것처럼 리안의 몸을 끌어안고 제 얼굴을 문질렀다. 결국 미안하다는 말 대신 뱉어진 건 애처로운 슬라임의 비명뿐이었다.
    ​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Ilham Senjaya님 오늘도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3

의도치 않게 암살(?)시도를 반복하는 마왕.

추천과 선작은 사랑입니다.다음화 보기

그녀는 떨리는 시선으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피를 쏟아내는 제 아버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떨리는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그의 가슴팍을 향했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검이 어째서인지 그의 가슴팍에 꽂혀있었다.

그는 검에 생명을 빼앗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빠르게 말라가기 시작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마왕이 검을 뽑아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 안돼! 밖에! 밖에 아무도 없느냐!”

검을 잡고 있는 손조차 떨어지지 않아 마왕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커흑, 분명 굴레는 제대로 -…”

전대 마왕은 죽음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도 있는 건지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음에도 일절 신경 쓰지 않은 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다가 이내 마왕의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실패, 실패했다. 나는 실패했어! 끄으윽..콜록콜록! 아… 안돼 이대로는…!”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목소리는 이내 두서없는 말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마왕..과 용사의 싸움은, 마계… 와 인간계의 싸움은 끔찍한 굴레에 묶여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난 그 굴레를 쿨럭,커어억…헉, 헉.. 버, 벗어났다고 생각… 했지만, 아니었어. 전혀 아니 -…”

그의 말은 이내 고장 난 라디오 소리처럼 치지직거리기 시작했다. 무어라 말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

마왕은 공허한 공간에 제 아버지를 찾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요. 제발 다시 -..”

“사랑하는 내 딸아.”

그 순간 기적처럼 전대 마왕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자유를… 평화를 주겠단 약속을 지키지 못해 정말… 미안하구나. 단 한 번도 널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었단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사실을 잊지 말렴.”

“아빠..?”

나이가 든 이후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애칭이 입 밖으로 흘러나온 순간 전대 마왕의 몸이 허물어졌다.

퍼석.

모든 기력이 빨리기라도 한 것처럼 한 줌의 먼지가 된 전대 마왕의 시체가 바닥을 뒹굴었다.

“아..빠, 아빠..?”

그녀는 연신 먼지가 되어버린 제 아빠를 찾으며 먼지 더미를 헤집었지만 죽어버린 그가 돌아올 리 없었다.

쿠웅!

그녀가 제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소름이 끼치는 압박감이 홀을 가득 채웠다. 마왕은 신음조차 내뱉지 못한 채 박제된 동물처럼 그대로 굳어버렸다.

쿠구구궁!

그녀의 머리 위로 거대한 무언가가 제 존재를 드러냈다.

‘어, 이 기운은?’

리안은 속으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무언가를 깨닫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이내 어딘가로 몸이 튕겨 나가는 듯한 반발감을 느꼈다.

[ 방금 그건… ]

정신을 차렸을 땐 검게 물든 구슬을 든 마왕 앞에 멍한 얼굴로 둥둥 뜬 상태였다. 마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 섞인 시선으로 검게 변한 수정구를 내려다보는 것 보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 내 예상이 맞다면… 그 녀석이 최종 보스겠지. ]

지금까지 모든 시련을 가볍게 정리해왔던 마검조차 벨 수 없다 말하던 존재이자, 개그 권능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진 자.

다른 이들이 ‘그분’이라 불리는 존재가 최종 보스라는 걸 리안은 확신했다.

[ 그렇다면 목표도 바뀌겠네. 마왕 토벌이 아닌 외신 토벌로. ]

과거 리안에게 정보를 토해냈던 외신은 마왕과 ‘그분’이라 불리는 외신이 손을 잡았다고 말했었다.

인간이 악마와 계약하여 막강한 힘을 얻어내는 것처럼, 마왕 또한 외신과 계약하여 엄청난 힘을 얻어냈을 거라 막연히 예상하고 최종 보스를 마왕이라 단정 지었었다.

하지만 제대로 까보니 마왕은 그저 피해자에 불과했다. 물론, 마왕의 모든 기억을 들여다본 건 아니었기에 확신하는 건 섣부른 행동처럼 보일 수 있었지만, 근거 없는 확신은 아니었다.

[ ‘기억이 아니더라도 주변 환경만 봐도 답은 나오지.’ ]

‘그 분’을 모시는 것을 영광으로 알라며 틀딱 짓을 반복하는 검은 로브 무리, 눈물을 흘리며 제 몸을 끔찍하게 상처 입히는 마왕.

만약 ‘그 분’이라 불리는 외신이 마왕을 아꼈다면, ‘그 분’을 추종하는 검은 로브 무리가 마왕을 홀대할 리 없었다.

반대로 마왕이 ‘그 분’을 추종하거나 동료라 생각했다면 굳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리안을 맹목적으로 따를 리 없었다.

머리에 켜켜이 쌓인 정보들이 한 가지 의문에 답을 찾아내자, 새로운 의문이 머릿속을 차지했다.

[ 그보다 전대 마왕이 말했던 말이 신경 쓰이는데… 용사와 마왕이 서로 다툼을 이어온 건 의도된 게 아니라고 했었지? ]

이에 대해 들은 정보가 없었기에 절로 고개가 갸웃거리게 되었다.

[ 끄으응…! 전대 마왕이 뭔가 말하기 전에 사라져버려서… 마왕도 아는 게 없을 것 같긴 한데.. 전대 용사도 죽어버렸고.. ]

답이 나오지 않는 현실에 끙끙거리며 머리를 부여잡다가 이내 고개를 휙 돌려 마왕의 선물 더미를 바라보았다.

[ ‘아까처럼 유용한 물건을 발견하면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

눈을 반짝거리며 물건 더미를 뒤적거리기 시작했고… 아까와 같은 투명한 수정구를 발견하곤 덥석 붙잡았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말랑말랑한 검은색 슬라임이 되어있었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따끈한 욕탕에 흐물흐물 떠 있던 슬라임 리안은 멍한 상태로 생각했다.

‘몸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게 좋긴 하지만 -… ’

리안이 머릿속에 떠오른 심각한 문제를 직시하려는 순간.

“물 온도는 괜찮아요?”

“…!”

언제나 듣기 좋다고 생각했던 목소리가 다정함을 한껏 품은 채 말을 걸어왔다. 리안은 화들짝 놀란 나머지 버둥거리다가 그대로 물속에 퐁하고 가라앉고 말았다.

슬라임이기에 딱히 숨 막히진 않았지만, 반사적으로 하찮기 짝이 없는 작은 손으로 허우적거리며 물 밖으로 빠져나오려 했다. 그럴수록 몸이 더욱 아래로 가라앉았다.

차라리 바닥까지 가라앉은 후 욕탕 바닥을 차고 튕겨 올라가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 라는 생각을 하는 것과 동시에 리안의 몸이 유려한 손에 덥석 붙잡혔다.

촤아악.

물 밖으로 끄집어내지는 것과 동시에 리안은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수건 한 장 걸치지 않은 새하얀 몸이 눈앞을 가득 채운 탓이었다.

개그 필터가 열심히 일해 준 탓인지 찰랑거리는 머리카락과 수증기가 중요한 부분을 전부 가려주고 있었지만, 곱고 부드러운 피부와 잘록한 허리까지 가려주는 건 아니었다.

“괜찮아요?”

“괘, 괜찮아요!”

평소 리안의 목소리와 다른, 좀 더 가늘고 귀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이가 어려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아이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초코볼을 콕콕 박아놓은 것 같은 눈동자가 눈 둘 곳을 모르겠다는 듯 굴러다녔지만, 몸이 검은색이라 티 나지 않았다.

리안은 5cm밖에 되지 않는 말랑한 손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괜찮으니까 내려 주실래요..?”

“또 빠질 수도 있어요.”

“그…! 추워서! 추워서 빨리 탕에 들어가고 싶어서 그래요! 하하하!”

슬라임의 몸 위로 축축한 액체가 연신 흘러내렸다. 땀처럼 보였지만 그저 슬라임 몸을 이루고 있는 물 같은 액체일 뿐이었다.

“그럼 같이 들어가요.”

“ㅔㄴ?”

곧이어 마왕은 말랑한 슬라임을 제 가슴에 껴안은 채 욕탕 안에 몸을 담갔다.

촤아아악.

욕조 밖으로 물이 넘치는 소리를 들으며 리안은 얌전히 고장 난 상태로 안겨있었다.

“후우…”

따뜻한 물 속에 몸을 담그는 게 기분이 좋은지 마왕의 뜨거운 숨결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마치 귓가에 숨을 불어넣은 것 같은 자극에 리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직도 추워요?”

“…헉..!”

마왕은 말없이 리안을 더욱 끌어안았고… 그게 리안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몇 시간이 흐른 후, 겨우 정신을 차린 리안은 실크 재질의 부드러운 잠옷을 입은 마왕의 품에 갇혀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등 뒤에서 말랑한 무언가가 리안의 몸을 짓누르고, 머리 위로 향기로운 숨결이 쏟아졌다. 막 씻고 나온 탓인지 좋은 향기가 그녀의 몸에서 풀풀 풍겨 나왔다. 머리 위로 마왕의 입술이 닿을 듯 말듯 가까워진 것까지 느껴지자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이대로는…! 이대로는 진짜 주, 죽는다… 죽고 말 거야…!’

인간의 육체가 아닌 탓에 코피를 쏟아내진 않겠지만 그 대신 슬라임 몸을 채우고 있는 액체가 전부 쏟아져 나와 쯔꿀쯔굴한 가죽만 남기고 그대로 죽어버릴 터였다.

그만큼 마왕의 스킨쉽은 치명적이었다.

마왕은 그런 리안의 상태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애착 인형 마냥 리안을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저, 저기…”

“가만히 있어요.”

“넵..”

제 부하에게 명령을 내리듯 단호하면서도 차가운 목소리에 리안은 쭈구리가 되어 얌전히 품에 안겨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포상이… 아니, 무시무시한 공격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꾸욱.

마왕이 아름다운 얼굴을 리안의 머리 위로 파묻은 것이다. 부드러운 입술과 오뚝한 코, 긴 속눈썹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아, 이대로 죽는구나.’

그나마 얻었던 슬라임 몸에서 영체가 주르륵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에 죽음을 직감한 순간 마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안 좋으면 안 좋다고 말해줬어야죠. 그렇게 쓰러져버리면 어떡해요?”

나무라는 목소리 속엔 숨기지 못한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진지한 대화에 흘러나갔던 영혼이 제자리를 찾고 이성이 바짝 돌아왔다.

미안하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른 순간.

부비적.

“흐약..!”

마왕이 베개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것처럼 리안의 몸을 끌어안고 제 얼굴을 문질렀다. 결국 미안하다는 말 대신 뱉어진 건 애처로운 슬라임의 비명뿐이었다.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나 혼자 장르가 다르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n the world of comedy anime, I was living an ordinary life until I became possessed by a dark fantasy novel I was reading before falling asleep. ‘Hahaha! Don’t hold a grudge -..!’ ‘Ugh, cough cough…seriously…my clothes are ruined.’ ‘…!?’ Though I was stabbed in the stomach, I calmly stood up and pulled out the spear. Originally, residents of the comedy world are a race that can be torn into 100 pieces and still come back to life the next day. ‘Stop it! Stop now! How long do you plan to sacrifice me?’ ‘No…I mean..’ ‘I’ve become strong to protect you…what have I become?’ Residents in the comedy world are just a race that vomits blood even if they stub their toe. I never made any sacrifices..but my delusion deepens and my obsession grows. One day, while I was half-imprisoned and taking care of some pitiful kids… ‘Are you the boss?’ ‘Excuse me?’ Before I knew it, I had become the behind-the-scenes boss of a huge underworld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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