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74

    시엔과 난, 과거 그랬던 것처럼 빠른 속도로 다시금 친해지기 시작했다.

     

     

    원점으로 돌아온 우리는 이제 서로의 존재밖에 남아있질 않았다.

     

     

    나는 모두를 잃은 상태였고.

     

    시엔은 성녀직을 내려놓으며, 따라올 모든 힘과 명예를 버렸다.

     

    위치에서 오는 힘과 연줄을 모두 하나같이 끊어낸 그녀였다.

     

     

    그 선택 뒤에 존재하는 어마어마한 감정의 깊이를 나도 이해하고 있었다.

     

    이제는 굳이 그 마음을 등한시하지 않아도 되는 나였다.

     

     

    축제날의 포옹 이후 우리는 과거의 모습들을 차례로 찾아갔다.

     

     

    손을 잡고 걸어다닐 때도 많았고, 서로에게 어깨를 기댈 때도 많았다.

     

    평원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낼때도, 같이 식사를 이어갈 때도 있었다.

     

     

    한걸음씩 한걸음씩, 천천히 서로에게 다가갔다.

     

    누구 하나 억지로 속도를 내지 않았다.

     

    우리만의 보폭으로 간극을 메워나갔다.

     

     

    그렇게 또 수십일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게일과 함께 영지를 챙기지 않는 시간에는 시엔과 함께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가벼운 장난을 치고…때로는 아담 형도 만나러 갔다.

     

    뒤죽박죽 섞여 엉망이었던 감정들도 그렇게 하나 둘 가라앉혀 가는 듯 했다.

     

     

    네르, 그리고 아르윈과 이별한지도 이제는 한 달이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네르에게서는 더 이상 편지가 오지 않았다.

     

    그녀에게 받은 편지만 해도 쉰 통이 넘어갈 것이다.

     

    다 하나 같이 두껍고 무거운 편지들.

     

    일일이 확인하면 감정적으로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아 전부 서랍안에 넣어두었던 나였다.

     

     

    그녀의 불우했던 유년기에 대해서는 나도 알고 있었다.

     

    나만이 자신의 편이라던 애원 또한 잊지 않았다.

     

    네르와 나누었던 시간도, 같이 하며 행복했던 기억들도 여전히 남아 가슴 속에 앉아있었다.

     

     

    그러니 편지를 읽으며 어쭙잖은 후회를 하기 전에, 모두 하나같이 치워둔 것 뿐이다.

     

    그녀를 동정하기 전에 감정들을 가둬두었다.

     

     

    어찌되었든 그녀에게서 편지가 오지 않는 건 좋은 신호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도 나를 잊으려고 이제는 애쓰는 걸지도 몰랐다.

     

    네르와 아르윈을 떼어내며 마음에도 없는 많은 말들을 내뱉었지만, 하나만큼은 진실이었다.

     

     

    우리는 섞일 수 없던 걸지도 모른다고.

     

     

    이종간 혼인을 이어가기보단, 서로가 서로의 종족 안에서 짝을 찾는게 옳을지도 몰랐다.

     

    뭐가 됐든 서로 순결한채로 이별을 한 우리들이다.

     

    새로운 미래를 찾아가는데 장애물은 없을것이었다.

     

    전쟁통에 발생한 하나의 인연이었다 생각하며 넘기는게 옳을지도 모른다.

     

     

    하루는 블랙우드의 가신들이 깁슨의 명령하에 우리를 찾아왔다.

     

    새로운 가문을 차린 우리를 위해, 필요한 게 있으면 지원을 해주겠다는 명목이었다.

     

    그게 다른 귀족과의 연줄일수도 있었고, 의료지식과도 같은 추상적인 지원도 가능하다 했다.

     

     

    나는 당장에는 필요한게 없던만큼 블랙우드의 가신을 하룻밤 묵도록 조치한뒤 그들을 돌려보냈다.

     

    나는 지속적으로 블랙우드와 거리를 벌리는 중이었다.

     

    네르의 흔적을 지우려고 애썼다.

     

     

    아르윈은 그나마 네르보다는 쉽게 묻어두고 있었다.

     

    아르윈 쪽은 그나마 잠잠했으니.

     

    편지를 받은적도, 셀레브리엔 가문이 우리를 찾아온적도 딱히 없었다.

     

     

    이별 이후 그녀의 소식은 들어본적 없었다.

     

     

    결국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올바른 판단을 내린게 아닐까 하는게 나의 추측이었다.

     

    단명종인 나와 아르윈이 엮여, 그녀에게 이점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에는 자유를 얻게 된 아르윈이었다.

     

    세상을 여행하며 점차 이별 또한 추스르고 있지 않을까.

     

    나의 곁에 머무르는 것보다, 그렇게 하고 싶어했던 여행을 하며 행복히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

    .

    .

     

     

    -쿵! 쿵!

     

    홍염단은 이제 검을 내려놓고 장비를 손에 들었다.

     

    끝없이 펼쳐졌던 숲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나무를 자르고 무너트려, 농사할 기반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다음 봄이 오기 전까지는 끝내야만하는 작업이었다.

     

     

    “넘어간다!!”

     

    나는 바란의 외침에 따라 무너지는 나무를 바라보았다.

     

    지나온 길을 보면 이미 많은 나무를 꺾은 뒤였다.

     

    땅에 내렸던 깊은 나무들의 뿌리를 뽑아내는 작업마저 진행중이었다.

     

     

    자른 나무들은 우리의 마을 발전을 위한 기반이 되어갔다.

     

    땅을 원하는대로 주무를 수 있는만큼 우리는 마을의 크기를 늘려갔다.

     

    집을 원하는 대원들에게는 집을 만들어주었고, 마을의 기반시설을 다시금 다잡고 있었다.

     

    상인들도 스탁핀의 영지에 점차 찾아왔으며, 소식을 들은 인족들도 우리의 마을로 모여들고 있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발전해가고 있었다.

     

    “식사들 해요!”

     

    그렇게 일을 이어가고 있으면 마을의 여인들이 나타나 우리를 위한 식사를 가져왔다.

     

    빵과 고기. 가벼운 술.

     

    목숨이 걸려있는 작업이 아닌만큼, 또 이렇게 같이 성장해나가는 걸 느끼는만큼 웃음소리가 가득 피어났다.

     

    나도 교류를 이어가는 마을 주민들을 보면 미소가 지어졌다.

     

    아담 형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었다.

     

     

    “벨!”

     

    시엔도 당연히 그런 내 곁에 함께하고 있었다.

     

    그녀는 과거의 표정을 되찾아 자주 웃게 되었다.

     

    내가 좋아했던 그 표정을 이제는 너무나도 쉽게 지어보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면 나도 그녀의 표정에 따라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었고.

     

     

    “자, 이리와 앉아 벨. 좀 쉬면서 해. 땀 많이 흘렸네.”

     

    마른천으로 내 땀을 닦아내주며 그녀가 말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근처에 자리잡고 앉았다.

     

     

    시엔이 전 성녀였다는 사실은 이제 마을에 천천히 퍼진 듯 했다.

     

    그리고 그녀와 내가 소꿉친구였다는 사실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의 구경거리가 되어 있었다.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풀려나가는지 기대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시엔도 그런 시선을 느낀 듯 했지만, 그건 아무런 걸림돌도 아니라는 듯 내게 다가왔다.

     

     

    “물 마셔.”

     

    그녀는 물주머니를 내 입에 대고 꺾어주었다.

     

    나는 그녀의 손길을 거부하며 말했다.

     

    “내가 할게.”

     

    “씁…!”

     

    그러자 표정을 장난스럽게 찌푸리는 시엔.

     

    그 반응에 피식 웃자, 그녀도 다시 미소를 지으며 나 대신 물주머니를 들어주었다.

     

     

    나는 그저 입만 열고 그녀가 넘겨주는 물을 받아먹는다.

     

     

     

    다음으로 그녀는 가져온 빵을 내게 건네며 말했다.

     

    “이거 내가 만든거야, 벨.”

     

    “네가?”

     

    “응. 아주머니들의 도움을 따라 만들었는데…헤헤. 한 번 먹어봐.”

     

     

    나는 미약한 놀라움을 느끼며 시엔의 빵을 받았다.

     

    그녀가 만든 음식을 먹게되는 날이 올거라 생각이나 했을까?

     

    성녀직에 올랐던 그녀라지만, 여전히 소박하기도 한 그녀였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오랜 추억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오후의 작업을 위해 시엔이 건네온 빵을 입에 넣었다.

     

    -카각…

     

    “…?”

     

    그러다, 나는 잠시 주위를 바라보았다.

     

    “…어때?”

     

    그런 내 시선을 모르고 묻는 시엔.

     

    “…”

     

    나는 빵이 원래도 이렇게 딱딱한가 싶었다.

     

    주변의 대원들은 하나같이 부드러운 빵을 입에 넣고 있었다.

     

     

    “…어, 어때 벨?”

     

    “…그게…”

     

    내가 잠시 망설이자, 시엔은 이내 무언가를 느낀 듯 눈을 깜빡이며 빵을 뺏으려 들었다.

     

     

    “마…맛없구나. 처…첫 시도여서 이상했나봐. 이리 줘, 벨. 머..먹지마.”

     

    그런 그녀의 행동에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

     

     

    “…아니야. 놀라서 그런거였어.”

     

    “….노…놀랐다니?”

     

    나는 당황한 시엔의 반응을 즐기며 답했다.

     

    “맛있길래.”

     

    그리고는 억지로 빵을 뜯어먹으며 식사를 이어갔다.

     

    시엔은 힘을 과하게 넣는 나의 모습을 보며 뒤늦게 빵이 딱딱하다는 걸 알아차리고 나를 말리려 했지만,

     

    “딱…딱딱하구나…! 아…안되겠어. 미, 미안 벨. 먹지 말고 기다려. 내가 다른-”

     

    “-아니야.”

     

    나는 그녀가 다른 말은 못하도록 단호히 말을 끊어내며 식사를 이어갔다.

     

     

    “이게 좋아.”

     

     

    시엔도 그런 내 반응에 뒤늦게 조용해졌다. 한참이나 그렇게 딱딱하고 질긴 빵을 먹고 있자니, 옆에서 훌쩍이는 소리마저 울려왔다.

     

    시엔이 옆에서 눈물을 흘리려 하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난 시엔을 보며 물었다.

     

    “…울어?”

     

    뭔가 섭섭한거라도 있었던 걸까. 그렇게까지 미안했던걸까 그녀를 바라보니, 이내 시엔은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행복해서.”

     

    “…”

     

    “이런 삶이…내게 주어질거라고 상상하지도 못했어. 전쟁터에서 했던 그 어떠한 상상보다…훨씬 행복해.”

     

    “…”

     

    “네 덕분이야, 벨. 고마워…”

     

     

    시엔은 너무나도 감격한 듯,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목소리 속에 담긴 진정성이 느껴진다.

     

     

    나는 그 모습에 미소가 나왔다.

     

    최근에는 시엔 덕에 나도…천천히 미소를 되찾고 있었다.

     

    나는 시엔을 대신하여 그녀의 눈물을 닦아내주었다.

     

     

    시엔이 그 손길에 배시시 웃음마저 흘렸다.

     

     

    “…엇.”

     

    나는 뒤늦게 나의 손길에 시엔의 얼굴을 더럽혔음을 깨닫는다.

     

    지저분한 내 손이 그녀의 얼굴에 흔적을 남긴다.

     

    흑칠이 된 얼굴.

     

     

    그 모습이 웃겨 나는 한참이나 홀로 웃어야 했다.

     

     

    “왜 웃어, 벨?”

     

    시엔이 그런 내 웃음에 되물었지만.

     

     

    “몰라도 돼.”

     

    나는 끝까지 그녀에게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와 가까워지는 일상이 이어졌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연참입니다.
    다음화 보기


           


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IW 섞일 수 없는 이종족 아내들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Polygamy is abolished.

We don’t have to force ourselves to live together anymore…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