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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4

        문 앞에 놓인 마력수 상자를 보고 표정이 멍해졌다.

       

        “열, 스물, 삼십…… 백?”

       

        미친, 뭐 이리 많아.

       

        “뭔 일이래?”

       

        로테가 뒤늦게 다가오며 물었다. 그러나 내가 답변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하자.

       

        정황상 이런 짓을 할 사람은 둘뿐이다.

       

        버멜, 그리고 로즈마리.

       

        일단 로즈마리는 아니다. 그녀는 지금 정령 눈치를 보느라 바쁘다. 스코프를 켤 여유 따위는 없었다.

       

        심지어 마력수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마력수를 한 병이라도 얻으려면 엘프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로즈마리 성격상 정령 앞에서 고개를 숙일 리가 없지.

       

        그렇다고 부정한 방법으로 얻어낸다? 제국과 카우렐리아의 상호 감시체계가 얼마나 삼엄한지는 말하면 입 아플 정도다.

       

        “흐음.”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뿐인데…….

       

        “나 잠깐 병문안 다녀올게.”

       

        로테와 프레이에게는 그리 말해두고 복지관으로 향했다. 양호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여전히 미라처럼 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잠들어 있는 버멜이 보였다.

       

        그는 내가 문을 여닫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어, 또 왜.”

        “우리 부실 문 앞에 마력수 가져다 놓은 게 너냐?”

        “…그건 또 뭔 소리야?”

       

        버멜은 붕대가 감긴 제 팔을 가리키며 투덜거렸다.

       

        “얻어터진 지 이제 이틀째거든? 내가 하긴 뭘 한다고.”

       

        생각해 보니 그러네.

       

        “그리고 방금 마력수라고 했어?”

        “응.”

        “그거 나도 쉽게 못 구해. 마력수를 구매하려면 엘프국에서도 인정한 공인이어야 하거든? 근데 지금 내가 그게 되겠어?”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상한 일이다. 버멜도 로즈마리도 아니라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마땅한 단서를 찾지 못한 채 동아리방으로 돌아왔다. 로테와 프레이는 마력수를 꺼내 돌려보며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어때? 진품인 것 같아?”

        “진짜야, 진짜!”

       

        둥근 플라스크에 담긴 물에서 성스러운 기운이 느껴진다.

       

        [마력수]

       

        [사대정령의 축복을 모두 받은 성스러운 물이다. 복용할 시 일시적으로 모든 계통의 마도를 스크롤 없이 다루게 된다.]

       

        혹시 몰라 양장본을 꺼내 사용했더니 진품이라는 판정이 나왔다.

       

        “나 진짜 마력수는 처음 봐!”

        “이걸 누가 가져다 놓은 걸까?”

        “엄청 비쌀 텐데!”

        “어느 정도로?”

        “한 병에 금화 1천 장 정도? 자세히는 몰라!”

       

        프레이의 말은 적당히 걸러 들을 필요가 있다. 지계마도 말고는 완전 숙맥이니까. 오죽하면 식당 갈 때마다 금전 감각 상실했다는 생각을 내가 다 할까.

       

        어쨌거나 엄청 비싸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재력, 명예, 그리고 신뢰까지. 마력수를 구매하기 위한 조건 세 가지를 모두 충족하는 공인은 제국에서 그리 많지 않다.

       

        진짜 누구지…?

       

        “여기 봐! 가장 안쪽에 쪽지가 있는데?”

        “진짜?”

       

        프레이가 건넨 쪽지를 받아 읽어보았다.

       

        [연성부 동아리 학생들에게 드립니다.]

       

        딱 이것 말고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다. 

       

        정갈한 필체로 보아하니 꽤 배우신 분이 선물해 준 것이 틀림없다.

       

        “…마음대로 써도 되는 건가?”

        “그런가 봐!”

       

        나는 마력초를 물고 마력수까지 들이켰다. 그러자 몸이 스키장 리프트를 타는 것처럼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스크롤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상한선이 사라집니다.]

       

        [지속 시간 : 6시간]

       

        “맛은 어때?”

        “레몬 푼 물에 식초까지 담근 맛이야.”

       

        한 마디로 엄청나게 시다.

       

        “으엑. 난 안 마실래.”

       

        프레이는 세차게 도리질을 치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어차피 쟤는 마실 필요도 없다. 지계마도사가 아니라도 연성 기술을 사용하려고 필요했던 게 마력수인데.

       

        나를 따라 로테도 마력수를 들이켰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으윽, 하고 떫은 소리를 냈다.

       

        “진짜 시네.”

        “이제 작업하자.”

       

        시간은 많지 않다.

       

        한 병에 6시간?

       

        18시간 작업한다 치면 하루에 여섯 병씩 소모된다.

       

        최상급 지계마도인 ‘자유연성’을 익히려면 진짜 죽을 각오로 연성만을 반복해야 한다. 화계마도와는 달리 지계마도는 숙련도로 마법 습득 여부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니 마력수 100병은 결코 많은 양이 아니었다.

       

        “그래서 뭐부터 만들어?”

        “비품실에 납이랑 라돈 시료 있지? 그것 좀 가져와 줘.”

       

        우선 양전하를 띠는 고에너지 입자부터 만들어야 한다. 이 고에너지 입자를 표적에 때려 맞춰 중성자를 얻을 계획이다.

       

        “여기 가져왔어.”

        “좋아.”

       

        재료들을 모아 만들고자 하는 것의 청사진을 떠올렸다. 금안족의 머리를 가지고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반복적으로 작업하다 보면 언젠가는 되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던 참이었다.

       

        “아,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프레이가 혀를 쯧쯧 차며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세세한 부분부터 깎으려고 하면 안 돼. 처음부터 그러면 어려워서 힘들어.”

        “그러면 뭐 어떻게 해야 하는데?”

       

        프레이는 허리춤에 손을 척, 하고 얹었다.

       

        “연성은 그림을 그리는 일과 같아! 직육면체나 원기둥, 구를 가지고 만들고자 하는 물체의 구조부터 잘 분석하는 거지! 그런 식으로 깎아나가듯이 물체를 해석하는 게 중요해.”

       

        두루뭉술한 말이었다. 그래서 뭐 어떻게 하라는 건지.

       

        “자, 예시를 들어줄 테니까 잘 봐봐.”

       

        프레이가 커다란 납 조각을 양손으로 들었다. 낑낑거리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끄응차! 자, 집중해 집중!”

       

        프레이는 울퉁불퉁한 납 시료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모든 부분이 잘려 나가고 직육면체 형태의 결정이 나타났다.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나와 로테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직육면체를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것 정도야 누구나 하니까.

       

        “이제 여기서 조금씩 깎아나가는 거야.”

       

        프레이는 칼로 자르듯이 납덩어리를 다루었다. 직육면체로 재단되어 있던 납은 조각가가 조각하는 것처럼 점점 깎여나갔다. 

       

        이윽고 프레이는 학 모양으로 납을 빚어냈다.

       

        “우와.”

       

        보통 정교함이 아니었다.

       

        얘가 지계마도 시간에 처자는 이유가 있었구나.

       

        “자유분방한 연성의 끝은 이게 다가 아니야. 조각을 했으면 거꾸로 소조를 하는 일도 할 줄 알아야 하지.”

       

        이번에는 떨어져 나간 납을 다시 학에 붙여가면서 직육면체를 만들었다. 깨진 접시를 완벽하게 이어 붙인 것처럼 균열 하나 없었다.

       

        “조각과 소조, 이 두 가지가 연성술의 기본이야.”

       

        그렇군. 이제야 이해가 간다.

       

        실제 연성술을 배울 때 교수가 프레이처럼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연성술은 지계마도의 한 갈래로, 복잡한 이론과 수식을 동원하여 머릿속에서 공식을 반복적으로 외워 적용해야 하는 암기의 학문이었다. 정확히는,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림처럼 직관적인 비유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야 그렇겠지. 누가 마법을 예술이라고 생각하겠는가.

       

        “결국 공간감이 뛰어나야 한다는 소리구나.”

        “그래서 내가 얘기했잖아. 그냥 많이 연성하면 된다고.”

       

        정론이었다. 그림을 잘 그리고 싶으면 일단 많이 그려봐야지.

       

        이대로라면 마력수가 부족하게 생겼다. 시간도 한정되어 있으니 중간고사 기간이 지나가 버리기 전에는 어떻게든 계획했던 것을 채워야 한다.

       

        어쩔 수 없지.

       

        “로테.”

        “으, 응?”

        “당분간은 노가다 좀 해야겠다.”

       

        연성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았을 때 대처법.

       

        그냥 닥치는 대로 많이 연습한다.

       

        프레이의 말대로였다.

       

       

        **

       

       

        그렇게 열두 시간이 지나갔다.

       

        그동안 만든 실패작이 1천 개에 이르렀다.

       

        마력수를 들이킨 상태에서 마력초를 빨고 물건을 연성. 아닌 것 같으면 소조했다가 다시 분해. 재료가 못 쓰게 될 정도로 균열이 생겼으면 버리고 다른 걸로 갈아타기.

       

        몸에서 너무 많은 마력이 들락거렸다. 밥 먹고 토하기를 반복한 것처럼 위장이 쓰려왔다.

       

        그래도 하긴 했다.

       

        “허어…….”

        “드, 드디어 성공했다…….”

       

        납으로 된 공동 하나 완성하는 데 한나절이 걸렸다.

       

        좆됐다. 나중에 폭축렌즈 같은 것도 만들어야 하는데.

       

        이래서야 어느 세월에 끝내냐.

       

        어쨌거나 기본적인 조각과 소조는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증거로 납으로 된 공동에 라돈을 넣고 각도를 잘 조절했을 때 만족스러운 양만큼 알파 입자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제 이걸 시료에 부딪히게 해서 중성자인가 뭔가 하는 입자를 얻어내기만 하면 된다 이거지?”

       

        로테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안타깝지만 그냥은 안 돼.”

        “왜?”

        “에너지가 충분히 높아야 중성자가 만들어질 거야.”

       

        알파 입자…… 헬륨 원자핵을 어떻게든 집적하는 기구를 만들어내긴 했다. 이제 이렇게 나온 입자를 어떻게 가속하느냐의 문제인데.

       

        간단하다. 가속기를 쓰면 되지.

       

        [팔정도 제3식 ]

        [테슬라(Tesla)]

       

        헬륨 원자핵은 양으로 대전된 입자다. 전자기장으로 충분히 가속할 수 있다.

       

        이 가속된 입자를 어떻게 제어할지가 관건인데.

       

        “아무래도 싱크로트론을 만들어야 할 것 같아.”

       

        나는 재빨리 청사진을 그려 로테에게 보여주었다.

       

        마음 같아선 프레이에게 부탁하고 싶었지만, 나와 로테도 연성술을 연습해야 실력이 는다. 

       

        무엇보다.

       

        “흐아아…….”

       

        여우 꼬맹이는 12시간 풀타임 격무로 인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미안해, 프레이. 나중에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그런데 여기 설계도에 나온 대로라면 광물이랑 마석이 엄청 많이 필요할 텐데?”

        “비품실에 많지 않아?”

        “거의 다 썼어.”

       

        연성 연습하느라 재고를 대부분 써 버린 모양이었다.

       

        이런. 이사장에게 또 부탁해야 하나.

       

       

        **

       

       

        그러나 다음 날.

       

        “시발, 진짜 뭔데.”

       

        이번에는 문 앞에 막대한 양의 철광석과 여러 마석이 놓여있었다. 하도 많아서 부실로 향하는 문이 막힐 정도였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한 번은 우연일지 몰라도, 두 번부터는 필연이다.

       

        [요긴하게 쓰시길 바랍니다.]

       

        똑같은 사람이 쓴 글씨.

       

        틀림없다. 누군가가 우리 연구를 지켜보고 있다.

       

        로즈마리의 스코프 기술이라도 가지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걸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모르면 알아내면 될 뿐.

       

        “폴리스티렌이 필요해.”

       

        일단 되는대로 씨불이고 그날 밤까지 기다렸다.

       

        예상은 들어맞았다. 어두운 밤, 연성부 동아리 부실에 인기척이 드리웠다.

       

        한 명이 아니었다. 로테에게 밤늦게까지 부실에서 있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나는 숨을 죽인 채 세 사람의 그림자를 살폈다. 체구를 보니 로즈마리도, 버멜도 아니었다.

       

        “오늘 주문한 건 가벼워서 좋네.”

        “가주님도 참, 금안족 애를 왜 이리 신경 쓰시는지 몰라.”

        “됐어. 꼭 영입하고 싶으시다잖… 끄아악!”

       

        투쾅!

       

        내 몸이 포탄처럼 내쏘아졌다.

       

        “꺄아악!”

        “어억!”

        “크학…!”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모두들 해피 뉴 이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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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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