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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4

       제국의 3황자 스레도 크라운은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나, 수업이나 행사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이는 그의 입학 목적이 성장과 학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바라는 것은 생존이었다. 정적을 갈아버리며 피바람을 몰고 다니는 1황녀와, 암중에서 인맥을 늘려 지지 기반을 쌓아가는 2황자 사이에서── 그저 살아남고 싶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그러나 도망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혹시나 1황녀나 2황자가 암살자를 보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는 자신에게 접근한 흑마법사 세력과 손을 잡았다. 

       

       그들은 스레도의 이름값이 필요하다고 했고, 스레도는 자신의 몸을 지킬 무력이 필요했으니⋯⋯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거래였다.

       

       물론, 흑마법사들과 손을 잡는 게 가당키나 하냐는 마음의 목소리가 이따금씩 그를 쿡쿡 찔렀으나.

       

       이 거래 하나로 그렇게까지 큰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안일한 마음이 있었다. 황위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난 자의 이름으로 대체 뭘 할 수 있겠는가?

       

       “스레도 님. 이번에 새로 아카데미에 교수가 부임했는데. 그것이──”

       

       그리고, 결국에는 그의 판단이 맞았다.

       

       “그럴, 그럴 줄 알았어⋯⋯. 그럴 줄 알았다고.”

       

       2황자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아카데미에 자탑 마법사 하나를 꽂아 넣었다. 그는 흑마법사를 대거 소탕하고,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획기적인 교육 방법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모양이지만.

       

       과연 그것만이 전부일까. 혹시 2황자로부터 밀명을 받은 것은 아닌가. 예컨대, 기회가 생기면 후환이 없도록 3황자를 지워버리라는──.

       

       흑마법사와 손을 잡지 않았더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겠지. 듣기로는 학생들을 촉수투성이의 미궁에 몰아넣는다던데, 그를 한참이나 헤매게 해서 괴롭힌 다음 죽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손을 잡은 건 잘한 일이다.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아아, 차라리 이런 혈통을 타고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평범한 가정에서 평민으로 태어나, 밭이나 갈면서 살 수 있었더라면.

       

       스레도 크라운은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깨어있는 시간은 싫다. 현실을 살아가면 온갖 괴로운 고민만 하게 된다. 다른 감각기관들이 완전히 퇴화한 듯이, 그는 두려움만을 느낀다.

       

       그래서 다시금 꿈의 세계로 빠져들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아도, 이미 충분한 수면시간을 채운 몸은 잠들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꿈나라로 통하는 대문을 아무리 두드려 봐도, 자물쇠는 굳게 걸어 잠긴 채로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속이기 위해 자는 척을 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눈을 질끈 감아, 이 눈꺼풀의 어둠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고 되뇌었다. 이렇게 있으면 두려움이 조금은 잦아든다.

       

       “⋯⋯⋯⋯.”

       

       하지만 오늘은 날이 아니었던 걸까.

       

       바깥에서 소리가 들린다. 창문 너머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다. 저 방향이라면. 누군가가 대문 앞에서 경비병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아침부터 누가? 그리고 왜?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해도 주의가 쏠린다. 자꾸만 어둡고 무서운 생각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눈으로 직접 확인하자. 그리고 다시 잠에 들자.

       

       스레도 크라운은 엉금엉금 기어가 커튼을 살짝 젖혔다. 그리고 조금 열린 틈새 사이로 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세 명의 아리따운 여인들이었다.

       

       셋 중에서 둘은 아는 얼굴이었다. 스레도가 머무르는 저택에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서큐버스였다.

       

       그녀들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는 / 가능하면 잠에 깊이 들어, 깨어나지 않고 싶은 스레도의 소망을 이루어주기 위해. 간간이 ‘수면 테라피’를 해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다.

       

       자고 일어나면 몹시 피곤하긴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좋다. 좀 더 잠에 빠질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그들 무리에 낀, 나머지 한 사람도 서큐버스인 걸까. 거리가 있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그녀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흑발과 붉은 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던 경비병은 와하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경비병은 아주 완고하고 무뚝뚝해서, 상대방을 주눅 들게 하는 고압적인 남자였는데. 웃을 줄도 알았던 건가.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스레도는 호기심을 품고, 조금 더 커튼을 열었다. 그러자 그 순간, 이쪽을 올려다본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요사스러운 붉은 눈이다.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띄운 채로, 느릿하게 한쪽 눈을 감아 윙크했다.

       

       “⋯⋯⋯⋯!!”

       

       스레도는 다급하게 커튼을 치고 숨었다.

       

       가슴이 뛰었다. 어째서? 그저 윙크를 받았을 뿐인데. 시선을 마주한 것뿐인데 어째서⋯⋯ 이렇게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것 같은 거지.

       

       끼이익.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큐버스가 방문했다는 건, 그리고 지금 들어오고 있다는 건. 가까이서 마주치게 되는 건가. 그녀와.

       

       스레도는 덤벙대다가, 다급히 거울 앞에서 머리를 눌러 정리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어째서 그렇게 움직이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거울 속의 청년은 잔뜩 붉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

       

       경비병을 손쉽게 녹여버리고 정문을 돌파, 우리들은 성공적으로 저택 안으로 숨어들었다.

       

       3황자가 머무르는 저택은 으슥한 곳에 눈에 띄지 않게 숨겨져 있었다. 일부러 위치를 알고 찾아오는 게 아니라면 아카데미에서 생활하면서도 한 번도 못 봤을 것이다.

       

       저택에는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것 같지는 않았다. 관리는 아주 깨끗하지도, 아주 더럽지도 않게 ‘적당히’ 되어 있었고, 사용하지 않는 방이 대부분이었다.

       

       경비병에게 잡담으로 은근슬쩍 대화를 유도한 결과, 3황자는 2층에서 머무르고 있는 것 같았다. 

       

       구체적으로 2층 어디서 머무는지 등, 세부사항을 더 캐물었으면 수상하게 보일 것 같아서 그 이상은 묻지 않았는데. 운이 좋게도 창문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좋아, 이제 그대로 올라가서 어린아이의 사탕을 뺏듯이 제압하면 된다.

       

       구두를 또각거리며 올라가는 나를 보고, 핑발레즈가 물었다.

       

       “⋯⋯어떻게 한 겁니까?”

       

       “뭘?”

       

       “2층에서 본 남자, 금빛의 머리카락을 보면 그가 3황자겠군요. 미친 마법사님의 윙크 한 번으로 거의 죽으려고 하던데⋯⋯ 마법을 쓴 겁니까?”

       

       “마법은 아니고, 이게 다 비법인데⋯⋯.”

       

       내가 뜸을 들이자, 정작 핑발레즈는 가만히 있었는데 까만레즈가 몸을 비틀었다. 쟤도 엄청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는 옆머리를 엘레강트하게 샤라락 넘기면서 『사람 꼬시는 법』 강의를 시작했다.

       

       “기품은 어디서 온다고 생각해?”

       

       “귀족의 피로부터 오지 않겠습니까?”

       

       “유전적 요인도 있긴 하지. 귀티 나게 생겼으면 보너스가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귀족적으로 생겼어도, 쌍놈처럼 행동하면 천하게 보이는 법이거든.”

       

       “그렇다면?”

       

       결국은 정보라는 이야기다.

       

       움직임에서 ‘나는 잘났다’, ‘나는 남들을 턱짓으로 부린다’가 배어 나오면 귀족스럽게 보이는 거고.

       

       ‘나는 지금 몹시 흥분해 있다’, ‘나는 너랑 함 해야겠다’가 배어 나오면 그게 색정적으로 보이는 거다.

       

       그렇다면 역으로, 내가 원하는 정보를 비언어적 표현에 있는 대로 담을 수 있다면⋯⋯ 나는 어떤 분위기라도 연출해 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나는 정보의 달인이다.

       

       “피부가 햇빛을 안 받아서 창백한 걸 보아, 밖으로 자주 나가본 것 같지 않아. 표정이 전체적으로 주눅 들어 있었고, 커튼을 일부만 열어서 내다보는 건 다분히 방어적인 태도지.”

       

       한마디로 히키코모리 같은 느낌이었다.

       

       회화궁에서 있었던 일, 1황자 독살 사건. 그것은 현 세대의 황손들에게 강렬한 정신적 데미지를 입혔다. 아마 그 여파가 아닐까. 제국의 황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쭈구리가 되어 있는 건.

       

       핑발레즈와 까만레즈는 신분 위장을 위해서 우리가 포획한 서큐버스의 이미지를 덧씌운 상태다. 그리고 3황자는 두 사람을 보고 안심했다.

       

       서큐버스가 저택을 정기적으로 방문한다는 뜻이겠고⋯⋯.

       

       “한창때의 청년의 방에 몽마가 정기적으로 방문한다? 침대 프레임이 남아나지 않는 생활을 즐기고 있을 터. 성적 자극에는 상당히 무뎌진 상태겠지. 이와 같은 근거를 바탕으로.”

       

       대상을 신경질적인 망나니 소공자 아키타입으로 간주.

       

       무해하고도 따스한 온화함을 담는다. 뭔가, 도움을 요청하면 망설이지 않고 받아들여 줄 것만 같은 표정. 이건 흑화 전 니오레에게서 따 왔다.

       

       가족애와 포용력을 담는다. 당장이라도 껴안고 세 바퀴쯤 돌 것 같은 느낌. 이건 1황녀 일레인으로부터 가져왔다.

       

       이와 같은 작업으로 마음의 빗장을 풀고 경계심을 낮춘 뒤에.

       

       고압적인 귀족의 프라이드를 베이스로 깐다.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들도록. 이건 로데루스의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 위에, 내가 느꼈던 가장 아찔한 눈빛을 탑재한다. 아까 핑발레즈의 눈에서 휘몰아쳤던 허기를, 차분하게 정제해서 얹었다.

       

       그리고 쏘았다.

       

       그렇게── ‘평소에는 온화하고 따뜻한 누나라서 의지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주지만, 함부로 대하기에는 쉽지 않고 가끔씩 여성으로 강렬하게 의식하게 되는 묘한 분위기의 여인’이 되는 것이다.

       

       정보를 꽉꽉 눌러 담아 펼쳐지는 『눈으로 말하기』.

       

       이게 바로 『하트』의 성공비법이었다.

       

       “⋯⋯⋯⋯.”

       

       “너 표정 왜 그러냐 까만레즈야.”

       

       “⋯⋯좀, 기분 나쁩니다. 남자가 남자를 그렇게 기를 쓰고 유혹하는 게⋯⋯.”

       

       “캐릭터는⋯⋯ 플레이어와 구분된다! 내가 연기하는 서큐버스 ‘리제’가 그런 거지, 내가 그런 게 아니야 인마!”

       

       까만레즈는 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그거 아니냐는 느낌이었다.

       

       다르다. 명백하게 다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내가 사실 센트라라서 2황자랑 연애 중인 거고, 내가 남궁승아라서 남궁청휘에게 마음이 있는 거고, 내가 오혜인이라서 로데루스랑 찐친이라는 이야긴데.

       

       그건 사실이 아니지 않은가. 나는 캐릭터를 만들어서 내보낸 것이지, 내가 곧 캐릭터가 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아, 예.”

       

       “아이씨⋯⋯!”

       

       그래, 참새가 어찌 대붕의 뜻을 이해하리오? 그러나 핑발레즈라면 이해해 줄 터다. 나는 동조해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핑발레즈의 입에서 나온 건 커버가 아니라 딜이었다.

       

       “제 눈빛이 가장 아찔했습니까?”

       

       “⋯⋯제대로 들어놓고 일부러 재확인하지 마!”

       

       나는 툴툴거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하여간, 장난기를 주체를 못 한다니까.

       

       핑발레즈는 그 모습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쓱 하고 팔을 내밀어 팔짱을 껴 왔다. 그녀의 위에는 환상 마법이 덧씌워진 상태였지만, 시전자가 나니까. 내 눈에는 제대로 보인다.

       

       평소대로의 육탄공격인가 싶었는데, 조금 다르다.

       

       유리 랜스터는 내 손을 깍지 껴 잡았다. 그리고 반대 손으로 내 손등을 쓰다듬으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다.

       

       밀어붙여진 가슴보다도 손가락에 주의가 쏠린다. 나는 간질간질한 기분에 짐짓 무심한 척하며 물었다.

       

       “⋯⋯뭐 해?”

       

       “저도 연기를 해 볼까 싶어서.”

       

       “어떤 연기를?”

       

       “당신을 아주 좋아하는 겁니다. 그런 설정으로.”

       

       농담이 짙다. 평소보다 감정의 농도가 다르다. 이런 가벼운 잽은 일상적으로 있어 왔지만, 조금 더 진지하게 말하는 듯한 느낌. 보다 공격적인 느낌.

       

       나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조약 위반이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장난기와 아쉬움이 반짝인다. 곧 떠나게 될 테니까 이 정도는 괜찮지? 하고 말하는 것 같아서.

       

       나는 따져 묻는 대신에 말을 돌렸다.

       

       “⋯⋯말로만 설명해 준 건데 잘 배웠네. 눈으로 말하기.”

       

       “반격, 안 하십니까?”

       

       “⋯⋯⋯⋯.”

       

       유리 랜스터가 조금 더 가슴을 밀어붙였다. 도발이다. 나는 그 어프로치에 가슴이 뛰면서도⋯⋯ 조금 슬펐다.

       

       그런가. 조금 더 놀고 싶은 걸까⋯⋯.

       

       떠날 테니까. 서큐버스 여왕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먼 길을 떠날 테니까. 내가 도와준다면서 그녀의 파티에 합류한다고 하더라도, 그때는 우선순위가 바뀌어 있을 테니까.

       

       빈 시간에. 서로 이렇게 농담 따먹기를 하며 노는 대신에, 그녀는 복수를 위해서 노력하는 시간을 갖게 될 테니까.

       

       전학 가는 친구와, 마지막으로 하루 종일 실컷 놀아서 헤어짐의 아쉬움을 달래는 것처럼. 그녀도 나와 마음껏 놀고 싶은 것 같다.

       

       그럼⋯⋯.

       

       정면승부다, 핑발레즈.

       

       오늘만큼은 빼는 것 없이 상대해 주마.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직후의 마차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서로 양보하는 일 없이 말이다.

       

       나는 깍지 낀 손을 들어 올려, 유리의 손등에 입술을 맞추면서 말했다.

       

       “연기랬지. 설정은?”

       

       “금단의 사랑을 하고 있는 겁니다. 서큐버스는 반대 성별로부터 흡정하는 종족이니, 같은 성별끼리의 사랑은 ‘손해’입니다. 에너지를 얻지 못하니까요. 그런데도 저는 당신을 좋아하는 겁니다.”

       

       완곡한 비유다.

       

       지난 시간, 아카데미에서 떠들며 놀았던 시간은 그녀에게 있어서 손해였다. 그녀의 목적인 복수와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그런데도 그 모든 시간이, 좋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도 화답한다.

       

       “나는 아주 유능한 서큐버스로, 뭇사람들의 마음을 훔칠 수 있었지만. 사실은 진짜 사랑을 몰라. 남에게 베푸는 사랑은 모두 연기와 가식일 뿐이지. 하지만 너를 보면⋯⋯ 조금은 다른 기분이 들어. 의식하기 시작한 거야.”

       

       NPC를 감정의 격동에 몰아넣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나는 그들을 만들기도 했고, 그들의 안에 들어가 직접 연기하기도 했지만. 모두 한 걸음 떨어진 감정들이다.

       

       앞서 말했듯이, 내 머릿속에서 나온 센트라가 이리드를 사랑한다고 한들. 내가 2황자에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유나와 유리 랜스터에게 향하는 마음은, 그들만큼 격정적이지는 않더라도 분명히 본심이다. 내가 느끼는 나의 감정이다.

       

       서로 얼굴을 가까이 붙인다.

       

       “배역이 정해졌군요. 아가씨.”

       

       “그럼, 어떻게 되는지 볼까. 씬이 닫히는 순간은⋯⋯ 이 저택을 벗어날 때까지. 그걸로 오케이?”

       

       “좋습니다.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부끄러울 정도로 해 볼까요. 당신이 도망가지 않는다면⋯⋯.”

       

       “이제까지는 내가 지는 분위기였지만, 오늘은 다를걸⋯⋯.”

       

       얼굴이 바짝 다가온다. 천천히. 그러다가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코끝이 닿을 정도로.

       

       추억이 머릿속을 스친다. 마차에서는 어땠더라.

       

       지기 싫었다. 유나를 약탈해 가려는 사악한 핑발레즈에게서, 기 싸움에서 패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스릴과 긴장감뿐이었던 것 같은데.

       

       그럼, 지금은?

       

       조금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 몇 초 이후를.

       

       “⋯⋯⋯⋯.”

       

       “⋯⋯⋯⋯.”

       

       이러면 장난이 아닌데요. 유리가 눈으로 말했다.

       

       역시 그렇지? 내가 눈으로 말했다.

       

       입술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기 직전에, 우리는 동시에 떨어졌다. 그리고 가볍게 팔짱을 낀 채로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3황자의 방이다.

       

       우리들의 뒤를, 까만레즈가 조용히 쫒았다.

       

       그녀는 이전처럼 선배로부터 떨어지라든가, 붙지 말라든가 불평을 내뱉지 않았다. 그녀도 아는 것이다. 오늘의 장난이 끝나면, 유리 랜스터가 말살대로 돌아가리라는 걸.

       

       그 사실이 내 승부욕을 돋군다. 그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다니. 내가 여기서 핑발레즈의 연기를 박살 낼 정도로 홀려버리면 어쩌려고 그러지?

       

       “⋯⋯⋯⋯으, 으와와.”

       

       아니, 여유를 부리는 게 아니라. 단순히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나.

       

       좋아. 시작이다. 3황자를 홀려 정보를 빼냄과 동시에, 핑발레즈와 승부를 겨룬다. 승리 조건은⋯⋯ 잘 모르겠다.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다.

       

       어조를 바꾸었다. 핑발레즈의 무표정에 나긋한 웃음이 깃들었다. 보여주지 않던 모습에 가슴이 뛴다. 그녀는 다소곳하게 말했다.

       

       “우리, 함께 들어가요. 아가씨.”

       

       이런 목소리도 낼 줄 알았던가, 그녀는.

       

       나는 깍지 껴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불어넣으며 속삭였다.

       

       “응. 내가 넘어지지 않도록, 바람결에 사라지지 않도록, 내 손을 꼭 잡아주렴. 유리.”

       

       “물론이에요. 저는 여기에, 이렇게. 한데 얽힌 뿌리처럼 있을 테니까.”

       

       후후. 하고 웃었다.

       

       나와 유리 랜스터, 둘만의 가면무도회가 막을 올렸다.

       

       ===============================================================

       

       3황자 스레도 크라운, 열성적인 백합지지자가 될 때까지 앞으로 3시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흐흐⋯⋯ 흐흐흐⋯⋯ 가끔 글을 쓸 때 무척 신날 때가 있습니다.
    오늘이 그렇네요. 날씨는 눅눅하고 꿀꿀하지만, 마음이 화창하고 참 좋습니다.
    마이 프렌즈, 여러분도 마음이 맑게 갠 좋은 하루이기를 기원할게요. 내일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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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world TRPG Game Master

Otherworld TRPG Game Master

Another World TRPG Game Master, 이세계 TRPG 게임마스터
Score 8.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wizard of the Illusion Magic School and decided to create a virtual reality with illusion magic to play a tabletop role-playing game (TRPG). It was great to create a virtual reality, but I was in trouble because there were no suitable players. During that time, I received an offer to be the professor from the Royal Academy. The offer was to use illusion magic to fill the students’ lack of practical experience safely. And so, I became a professor at the academy. “Send me back, send me back to that world right now-!” “Outer god, someday an outer god will be our doom, we’ll all die!!” “I am not the bastard of the Redburn Ducal Family. I am the foremost disciple of the Great Namgung Clan, Namgung Qinghui!” But it seems there is a bit of a misunderstanding. This isn’t a spell for dimensional travel, kids. It’s 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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