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74


    ​
    장난스럽게 투덜거린 것에 비해 마왕은 리안이 욕탕에서 기절했을 때 낭떠러지에서 떠밀리는 것 같은 아찔한 충격을 맛봐야 했다. 
    ​
    ​
    조금 전까지 제 몸을 감싸주던 온탕의 따스한 온기가 단숨에 얼어붙어 버린 것만 같았다. 마치 계란 흰자처럼 축 늘어져 미동조차 하지 않는 리안의 모습에 그녀의 마기가 갈무리되지 못한 채 마구 요동쳐 욕실 벽면을 후려쳤다.
    ​
    ​
    콰드득,쿠궁!
    ​
    ​
     리안이 감탄하던 화려한 장식들이 바닥을 뒹굴고 아름다운 그림이 새겨진 천장이 쩌적하고 갈라졌다. 거대한 짐승이 벽면을 할퀴기라도 한 것처럼 거대한 흉터가 욕실에 새겨졌다.
    ​
    ​
    마왕은 물기도 닦지 않은 채 욕실 밖으로 뛰쳐나와 숨만 붙어있다면 사지가 잘려 나간 자도 살려낸다는 엘릭서를 꺼내 슬라임의 몸에 부어버렸다. 
    ​
    ​
    에르보안이 보았다면 체통을 잊고 뒷목을 잡을 만한 장면이었다. 
    ​
    ​
    엘릭서의 효과 덕분인지 흐물흐물 늘어져 있던 슬라임의 몸은 금세 동그란 형태를 찾았다.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고롱고롱 작은 소리를 내며 작게 흔들리는 슬라임의 모습에 마왕은 허물어지듯 주저앉아 말랑한 슬라임을 끌어안았다.
    ​
    ​
    “다시는… 잃을 수 없어.”
    ​
    ​
    그녀의 눈동자 속에 다 낫지 못한 깊은 상처가 어른거렸다. 
    ​
    ​
    얼마 뒤 겨우 정신을 추스른 마왕은 슬라임 리안을 데리고 엉망이 된 욕실에서 요령껏 몸을 씻었다. 목소리도 형태도 워낙 무해하다 보니 마왕은 스스럼없이 리안을 제 무릎 위에 올려놓고 씻겨주었다.
    ​
    ​
    만약 리안이 이때 깨어났다면 곧바로 육체를 잃고 말았을 것이다. 개그 주민을 향한 암살 시도라 봐도 무방했다.
    ​
    ​
    다행히 리안은 부드러운 수건에 몸이 굴려질 때까지도 깨어나지 않았다. 그 덕분에 하얀 다리에 검은 속옷이 스쳐 올라가는.. 마왕의 치명적인 암살 시도를 피할 수 있었다.
    ​
    ​
    마왕은 리안이 깨어날 때까지 애착 베개처럼 말랑한 몸을 끌어안은 채 만지작거리길 반복했다. 말랑말랑하니 만지는 맛이 있어 자신도 모르게 계속 만지작거리게 되었다.
    ​
    ​
    슬라임이 아니라 골렘이나 요정 따위의 몸을 가지게 되었다면 누리지 못했을 호사였다.
    ​
    ​
    제 무해한 육체로 인해 행복한 포상 -… 아니 암살 시도를 당한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리안은 오늘도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해야 했다.
    ​
    ​
    ‘흑흑… 이러다 죽을 거야… 죽을 거라고…’
    ​
    ​
    아침부터 마왕에게 몇 번의 입맞춤을 당한 리안은 행복과 두려움 사이에서 오들오들 몸을 떨었다. 동그란 슬라임이 몸을 떠는 모습이 꽤 귀여워 보였는지 옷을 갈아입고 나온 마왕이 리안을 들어 올려 제 볼을 문질러댔다. 
    ​
    ​
    몸이 온통 동글 말랑한 탓에 머리나 몸통의 구분이 따로 없어 온몸을 자극받는 것 같았다.
    ​
    ​
    오늘도 어김없이 흐물흐물 반쯤 녹아내린 리안은 마왕에게 안긴 채 그녀와 함께 출근하게 되었다.
    ​
    ​
    “도대체 마왕님께선 슬라임 따위를 계속 끼고 다니시는 거지?”
    “간부 중 한명이 폴리모프한거 아니야?”
    “허, 그거 말이 되는군.”
    “그렇다면 마왕님께 저리 사랑받는 간부가 있다는 말 아닌가?”
    “어쩌면 마왕님께서 직접 명령을 내리신 걸지도 몰라.”
   “뭐? 어째서 그런 짓을..?”
    “데리고 다니기 편할 테니까.”
    “허어억…! 그런 무시무시한…”
   
    ​
    마왕이 리안을 종일 보라는 듯 옆에 끼고 다니자 온갖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
    “당장이라도 소문의 진원지를 찾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내버려 둬.”
   “하지만…”
   “두번 말하게 하지 마라, 에르보안.”
    “예, 죄송합니다.”
    ​
    ​
    에르보안이 리안을 흘긋거리며 저런 쓸데없는 건 어서 가져다 버리라는 눈치를 주자 마왕이 칼같이 그의 말을 잘라냈다. 
    ​
    ​
    ‘우읏… 나는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안될까?’
    ​
    ​
    절로 고개가 숙여질 정도의 위엄이 넘치는 태도와 달리 그녀의 손은 분주하게 리안을 더듬거렸다. 이쯤부턴 반쯤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여 리안은 그녀의 말랑이 생활에 익숙해졌다.
    ​
    ​
    언뜻 보면 단점만 있을 것 같은 생활이지만 의외로 장점이 많았다.
    ​
    ​
    ‘역시 몸이 있는 게 낫긴 하네.’
    ​
    ​
    짧은 손이긴 하지만 존재는 하기에 책을 빠르게 넘겨볼 수 있게 되었다.
    ​
    ​
    꿀렁 -..
    ​
    ​
    거기다 몸이 액체나 다를 바 없다 보니 어느 틈이든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
    ​
    “헉..! 야, 야 저기!”
    “..! 아, 안녕하십니까!”
    “어, 수고.”
    ​
    ​
    마왕에게 사랑받는 간부라고 알려져서 그런지 몰래 외출할 때마다 각이 잡힌 인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
    ​
    상대가 순진한 아이거나 선한 사람이었다면 땀을 뻘뻘 흘리며 오해라고 설명했겠지만, 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마족이나 지성을 가진 몬스터, 타락한 인간들은 전부 손에 피를 묻혀본 이들이었기에 죄책감 없이 권력을 즐길 수 있었다.
    ​
    ​
    ‘여기였던가?’
    ​
    ​
    책을 촤르륵 넘겨볼 수 있게 되면서 책이 보관된 작은 서재를 하나씩 조사하고 있었다. 영체이던 때 발견했던 서재의 위치를 기억해뒀기에 헤매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니, 평소였다면 그랬을 것이다.
    ​
    ​
    꾸울렁.
    ​
    ​
    리안은 서재로 추정되는 곳의 문 아래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뒷부분이 부풀어 오르고 앞이 납작하게 눌렸다. 익숙하게 힘을 줘 안으로 몸을 밀어 넣자 얼마 지나지 않아 뿅! 하는 소리와 함께 문 안쪽에 통! 하고 떨어졌다.
    ​
    ​
    ‘어? 여긴 서재가 아닌 거 같은데?’
    ​
    ​
    밤하늘이 수놓아진 러그가 벽에 걸려있었고 방 가운데에는 보라색 천으로 덮인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그 위에는 은색으로 된 얇은 받침대와 주먹 두 개를 합친 것만 한 수정구슬이 놓여있었다.
    ​
    ​
    ‘이런 곳이 있었던가?’
    ​
    ​
    서재를 찾겠다며 벽을 마구 통과하고 다녔을 땐 발견하지 못한 장소였다. 리안은 조심스럽게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방 안을 기웃거렸다.
    ​
    ​
    ‘책이 있긴 한데…’
    ​
    ​
    [ 천체를 읽어 미래를 예지하는 것이 불러올 대가. ]
    ​
    ​
    쌓여있는 세권 정도의 책 중 가장 위에 놓인 책 제목을 읽어보았다. 꽤 흥미 있는 제목이었지만 중요한 정보가 담겨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마음에 책을 넘겨보았다가 10초도 되지 않아 닫았다.
    ​
    ​
    ‘응, 하나도 모르겠다.’
    ​
    ​
    조금만 더 읽었다면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대로 잠들었다면 그녀가 깨어나기 전에 방으로 돌아간다는 계획이 무너질 테고… 
    ​
    ​
    ‘으으… 다시 유리병에 갇힐지도 몰라.’
    ​
    ​
    액체나 다름없는 모을 가져서 그런지, 마왕은 리안을 묶어두고 싶을 때 목줄이나 수갑이 아닌 커다란 유리병에 넣어두곤 했다. 꽤 안정적인 느낌으로 몸을 받쳐줘 기분은 좋았지만, 자유를 완전히 포기해야 했기에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
    ​
    ‘우선… 더 이상 살펴볼 건 없는 것 같으니까. 이만 나가 -…’
    ​
    ​
    리안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
    ​
    “이런 귀한 손님이 오셨군요.”
    “흐악!”
    ​
    ​
    뒤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리안은 휘청거리다가 그대로 바닥을 뒹굴었다. 몸이 슬라임이라 그런지 가볍게 통통 튀었다.
    ​
    ​
    “호호호. 이런, 죄송합니다. 손님은 오랜만인지라.”
    ​
    ​
    리안은 고개를 들어 어느새 책상 뒤쪽 의자에 앉아있는 노파를 올려다보았다. 주름진 손이 입가를 막은 채 가볍게 웃음 짓는 노파는 굉장히 유해 보였다.
    ​
    ​
    “어디 한 번 운명을 들여다보시겠습니까?”
    “우, 운명이요?”
    ​
    ​
    아래로 휜 부드러운 눈꼬리가 가볍게 날갯짓했다. 노파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리안의 대답을 기다렸다. 
    ​
    ​
    ‘잠깐… 이거 어디서 본 장면인데?’
    ​
    ​
    노파를 보고 있자니 묘한 기시감이 느껴져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 들었다.
    ​
    ​
    ‘장면뿐만이 아니라 저 대사도 익숙해.’
    ​
    ​
    열심히 머리를 굴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답이 툭하고 떠올랐다.
    ​
    ​
    “아! 수수께끼의 점술가!”
    “호호… 비밀이란 점술과 떼어놓을 수 없는 짝이죠.”
    ​
    ​
    리안의 갑작스러운 외침에도 노파는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왔지만, 그보다 호기심이 더 강했다.
    ​
    ​
    ‘점술가는 분명.. 마왕성을 헤매고 있던 용사 파티 앞에 홀연히 나타나 과거를 들여다보고 미래를 위한 조언을 해줬었지.’
    ​
    ​
    리안은 곧바로 몸을 퉁퉁! 튕겨 보라색 테이블 위로 올라갔다. 
    ​
    ​
    “좋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
    ​
    ​
    우웅.
    ​
    ​
    “당신의 운명을 살펴보도록 하죠.”
    ​
    ​
    투명한 수정구 안쪽이 보라색 연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
    ​
    “오오…”
    ​
    ​
    리안의 눈이 호기심을 마구 반짝거렸다. 물론 몸과 눈 모두 검은색이라 딱히 티는 나지 않았다.
    ​
    ​
    “으음…”
    ​
    ​
    점술가는 어느새 수정구 안을 가득 채운 보라색 연기를 들여다보며 작게 침음을 흘렸다.
    ​
    ​
    “이거… 제가 대단한 분을 몰라봤군요.”
    “네?”
   “이 정도로 거대한 권능을 가진 분이라면 분명… 호호호… 노인네가 나이가 드니 입이 가벼워지고 말았네요. 다른 걸 살펴보도록 하죠.”
    ​
    ​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린 노파가 수정구 위로 가볍게 손짓하자 보라색 연기가 하얀색으로 바뀌었다. 다른걸 살펴보려는 듯 했다.
    ​
    ​
    “어디…”
    “…!”
    ​
    ​
    점차 수정구 안쪽 연기가 희미해지더니 익숙한 사람의 얼굴을 비춰주었다.
    ​
    ​
    “아이리스!”
   
    ​
    리안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요동치며 소리치자 점술가가 습관적으로 짓고 있던 미소를 흐리며 말했다.
    ​
    ​
    “이거… 위험하네요.”
    ​
    ​
    노파의 말대로 수정구 안쪽에 비친 아이리스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비틀거리며 이동하고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것으로 보이기도 했고, 몽유병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
    ​
    “서, 선생님 뭐가 위험하다는 것인지…?”
    ​
    ​
    마치 심각한 표정으로 X레이 사진을 들여다보는 의사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묻자 노파가 수정구를 툭 두드렸다.
    ​
    ​
    후우웅!
    ​
    ​
    조금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검은 먹구름 같은 게 아이리스의 몸을 집어삼키고 있는 게 보였다.
    ​
    ​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Ilham Senjaya님 오늘도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3

리안이 슬라임이 된 이유는… 그래야 마왕이 서슴없이 암살시도(스킨쉽)을 하기 때문입니다.

추천과 선작은 사랑입니다.다음화 보기

장난스럽게 투덜거린 것에 비해 마왕은 리안이 욕탕에서 기절했을 때 낭떠러지에서 떠밀리는 것 같은 아찔한 충격을 맛봐야 했다.

조금 전까지 제 몸을 감싸주던 온탕의 따스한 온기가 단숨에 얼어붙어 버린 것만 같았다. 마치 계란 흰자처럼 축 늘어져 미동조차 하지 않는 리안의 모습에 그녀의 마기가 갈무리되지 못한 채 마구 요동쳐 욕실 벽면을 후려쳤다.

콰드득,쿠궁!

리안이 감탄하던 화려한 장식들이 바닥을 뒹굴고 아름다운 그림이 새겨진 천장이 쩌적하고 갈라졌다. 거대한 짐승이 벽면을 할퀴기라도 한 것처럼 거대한 흉터가 욕실에 새겨졌다.

마왕은 물기도 닦지 않은 채 욕실 밖으로 뛰쳐나와 숨만 붙어있다면 사지가 잘려 나간 자도 살려낸다는 엘릭서를 꺼내 슬라임의 몸에 부어버렸다.

에르보안이 보았다면 체통을 잊고 뒷목을 잡을 만한 장면이었다.

엘릭서의 효과 덕분인지 흐물흐물 늘어져 있던 슬라임의 몸은 금세 동그란 형태를 찾았다.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고롱고롱 작은 소리를 내며 작게 흔들리는 슬라임의 모습에 마왕은 허물어지듯 주저앉아 말랑한 슬라임을 끌어안았다.

“다시는… 잃을 수 없어.”

그녀의 눈동자 속에 다 낫지 못한 깊은 상처가 어른거렸다.

얼마 뒤 겨우 정신을 추스른 마왕은 슬라임 리안을 데리고 엉망이 된 욕실에서 요령껏 몸을 씻었다. 목소리도 형태도 워낙 무해하다 보니 마왕은 스스럼없이 리안을 제 무릎 위에 올려놓고 씻겨주었다.

만약 리안이 이때 깨어났다면 곧바로 육체를 잃고 말았을 것이다. 개그 주민을 향한 암살 시도라 봐도 무방했다.

다행히 리안은 부드러운 수건에 몸이 굴려질 때까지도 깨어나지 않았다. 그 덕분에 하얀 다리에 검은 속옷이 스쳐 올라가는.. 마왕의 치명적인 암살 시도를 피할 수 있었다.

마왕은 리안이 깨어날 때까지 애착 베개처럼 말랑한 몸을 끌어안은 채 만지작거리길 반복했다. 말랑말랑하니 만지는 맛이 있어 자신도 모르게 계속 만지작거리게 되었다.

슬라임이 아니라 골렘이나 요정 따위의 몸을 가지게 되었다면 누리지 못했을 호사였다.

제 무해한 육체로 인해 행복한 포상 -… 아니 암살 시도를 당한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리안은 오늘도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해야 했다.

‘흑흑… 이러다 죽을 거야… 죽을 거라고…’

아침부터 마왕에게 몇 번의 입맞춤을 당한 리안은 행복과 두려움 사이에서 오들오들 몸을 떨었다. 동그란 슬라임이 몸을 떠는 모습이 꽤 귀여워 보였는지 옷을 갈아입고 나온 마왕이 리안을 들어 올려 제 볼을 문질러댔다.

몸이 온통 동글 말랑한 탓에 머리나 몸통의 구분이 따로 없어 온몸을 자극받는 것 같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흐물흐물 반쯤 녹아내린 리안은 마왕에게 안긴 채 그녀와 함께 출근하게 되었다.

“도대체 마왕님께선 슬라임 따위를 계속 끼고 다니시는 거지?”

“간부 중 한명이 폴리모프한거 아니야?”

“허, 그거 말이 되는군.”

“그렇다면 마왕님께 저리 사랑받는 간부가 있다는 말 아닌가?”

“어쩌면 마왕님께서 직접 명령을 내리신 걸지도 몰라.”

“뭐? 어째서 그런 짓을..?”

“데리고 다니기 편할 테니까.”

“허어억…! 그런 무시무시한…”

마왕이 리안을 종일 보라는 듯 옆에 끼고 다니자 온갖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소문의 진원지를 찾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내버려 둬.”

“하지만…”

“두번 말하게 하지 마라, 에르보안.”

“예, 죄송합니다.”

에르보안이 리안을 흘긋거리며 저런 쓸데없는 건 어서 가져다 버리라는 눈치를 주자 마왕이 칼같이 그의 말을 잘라냈다.

‘우읏… 나는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안될까?’

절로 고개가 숙여질 정도의 위엄이 넘치는 태도와 달리 그녀의 손은 분주하게 리안을 더듬거렸다. 이쯤부턴 반쯤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여 리안은 그녀의 말랑이 생활에 익숙해졌다.

언뜻 보면 단점만 있을 것 같은 생활이지만 의외로 장점이 많았다.

‘역시 몸이 있는 게 낫긴 하네.’

짧은 손이긴 하지만 존재는 하기에 책을 빠르게 넘겨볼 수 있게 되었다.

꿀렁 -..

거기다 몸이 액체나 다를 바 없다 보니 어느 틈이든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헉..! 야, 야 저기!”

“..! 아, 안녕하십니까!”

“어, 수고.”

마왕에게 사랑받는 간부라고 알려져서 그런지 몰래 외출할 때마다 각이 잡힌 인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상대가 순진한 아이거나 선한 사람이었다면 땀을 뻘뻘 흘리며 오해라고 설명했겠지만, 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마족이나 지성을 가진 몬스터, 타락한 인간들은 전부 손에 피를 묻혀본 이들이었기에 죄책감 없이 권력을 즐길 수 있었다.

‘여기였던가?’

책을 촤르륵 넘겨볼 수 있게 되면서 책이 보관된 작은 서재를 하나씩 조사하고 있었다. 영체이던 때 발견했던 서재의 위치를 기억해뒀기에 헤매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니, 평소였다면 그랬을 것이다.

꾸울렁.

리안은 서재로 추정되는 곳의 문 아래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뒷부분이 부풀어 오르고 앞이 납작하게 눌렸다. 익숙하게 힘을 줘 안으로 몸을 밀어 넣자 얼마 지나지 않아 뿅! 하는 소리와 함께 문 안쪽에 통! 하고 떨어졌다.

‘어? 여긴 서재가 아닌 거 같은데?’

밤하늘이 수놓아진 러그가 벽에 걸려있었고 방 가운데에는 보라색 천으로 덮인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그 위에는 은색으로 된 얇은 받침대와 주먹 두 개를 합친 것만 한 수정구슬이 놓여있었다.

‘이런 곳이 있었던가?’

서재를 찾겠다며 벽을 마구 통과하고 다녔을 땐 발견하지 못한 장소였다. 리안은 조심스럽게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방 안을 기웃거렸다.

‘책이 있긴 한데…’

[ 천체를 읽어 미래를 예지하는 것이 불러올 대가. ]

쌓여있는 세권 정도의 책 중 가장 위에 놓인 책 제목을 읽어보았다. 꽤 흥미 있는 제목이었지만 중요한 정보가 담겨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마음에 책을 넘겨보았다가 10초도 되지 않아 닫았다.

‘응, 하나도 모르겠다.’

조금만 더 읽었다면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대로 잠들었다면 그녀가 깨어나기 전에 방으로 돌아간다는 계획이 무너질 테고…

‘으으… 다시 유리병에 갇힐지도 몰라.’

액체나 다름없는 모을 가져서 그런지, 마왕은 리안을 묶어두고 싶을 때 목줄이나 수갑이 아닌 커다란 유리병에 넣어두곤 했다. 꽤 안정적인 느낌으로 몸을 받쳐줘 기분은 좋았지만, 자유를 완전히 포기해야 했기에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우선… 더 이상 살펴볼 건 없는 것 같으니까. 이만 나가 -…’

리안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이런 귀한 손님이 오셨군요.”

“흐악!”

뒤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리안은 휘청거리다가 그대로 바닥을 뒹굴었다. 몸이 슬라임이라 그런지 가볍게 통통 튀었다.

“호호호. 이런, 죄송합니다. 손님은 오랜만인지라.”

리안은 고개를 들어 어느새 책상 뒤쪽 의자에 앉아있는 노파를 올려다보았다. 주름진 손이 입가를 막은 채 가볍게 웃음 짓는 노파는 굉장히 유해 보였다.

“어디 한 번 운명을 들여다보시겠습니까?”

“우, 운명이요?”

아래로 휜 부드러운 눈꼬리가 가볍게 날갯짓했다. 노파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리안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깐… 이거 어디서 본 장면인데?’

노파를 보고 있자니 묘한 기시감이 느껴져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 들었다.

‘장면뿐만이 아니라 저 대사도 익숙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답이 툭하고 떠올랐다.

“아! 수수께끼의 점술가!”

“호호… 비밀이란 점술과 떼어놓을 수 없는 짝이죠.”

리안의 갑작스러운 외침에도 노파는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왔지만, 그보다 호기심이 더 강했다.

‘점술가는 분명.. 마왕성을 헤매고 있던 용사 파티 앞에 홀연히 나타나 과거를 들여다보고 미래를 위한 조언을 해줬었지.’

리안은 곧바로 몸을 퉁퉁! 튕겨 보라색 테이블 위로 올라갔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

우웅.

“당신의 운명을 살펴보도록 하죠.”

투명한 수정구 안쪽이 보라색 연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오오…”

리안의 눈이 호기심을 마구 반짝거렸다. 물론 몸과 눈 모두 검은색이라 딱히 티는 나지 않았다.

“으음…”

점술가는 어느새 수정구 안을 가득 채운 보라색 연기를 들여다보며 작게 침음을 흘렸다.

“이거… 제가 대단한 분을 몰라봤군요.”

“네?”

“이 정도로 거대한 권능을 가진 분이라면 분명… 호호호… 노인네가 나이가 드니 입이 가벼워지고 말았네요. 다른 걸 살펴보도록 하죠.”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린 노파가 수정구 위로 가볍게 손짓하자 보라색 연기가 하얀색으로 바뀌었다. 다른걸 살펴보려는 듯 했다.

“어디…”

“…!”

점차 수정구 안쪽 연기가 희미해지더니 익숙한 사람의 얼굴을 비춰주었다.

“아이리스!”

리안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요동치며 소리치자 점술가가 습관적으로 짓고 있던 미소를 흐리며 말했다.

“이거… 위험하네요.”

노파의 말대로 수정구 안쪽에 비친 아이리스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비틀거리며 이동하고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것으로 보이기도 했고, 몽유병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서, 선생님 뭐가 위험하다는 것인지…?”

마치 심각한 표정으로 X레이 사진을 들여다보는 의사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묻자 노파가 수정구를 툭 두드렸다.

후우웅!

조금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검은 먹구름 같은 게 아이리스의 몸을 집어삼키고 있는 게 보였다.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나 혼자 장르가 다르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n the world of comedy anime, I was living an ordinary life until I became possessed by a dark fantasy novel I was reading before falling asleep. ‘Hahaha! Don’t hold a grudge -..!’ ‘Ugh, cough cough…seriously…my clothes are ruined.’ ‘…!?’ Though I was stabbed in the stomach, I calmly stood up and pulled out the spear. Originally, residents of the comedy world are a race that can be torn into 100 pieces and still come back to life the next day. ‘Stop it! Stop now! How long do you plan to sacrifice me?’ ‘No…I mean..’ ‘I’ve become strong to protect you…what have I become?’ Residents in the comedy world are just a race that vomits blood even if they stub their toe. I never made any sacrifices..but my delusion deepens and my obsession grows. One day, while I was half-imprisoned and taking care of some pitiful kids… ‘Are you the boss?’ ‘Excuse me?’ Before I knew it, I had become the behind-the-scenes boss of a huge underworld organization.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