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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5

       똑똑똑.

       

       노크와 함께 여인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황자님, 저희가 왔답니다. 평소와도 같은 익숙함에 곁들여 새로운 만남을 모시고 왔어요.”

       

       새로운 만남. 그것은, 창가에서 마주쳤던 그녀를 의미하는 말이리라. 잠깐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그의 심장을 들었다 놓았던.

       

       3황자 스레도는 전신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는 긴장하고 있었다.

       

       먼 눈짓으로도 그러하였는데 가까이에서 보게 된다면. 그는 과연 냉철한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두근대는 설렘 뒤로 약간의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문밖의 그녀들을 무를 수도 없었다. 잠에 들기 위해서는 그녀들이 필요했으니까. 스레도는 목소리의 떨림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말했다.

       

       “⋯⋯들어, 들어와.”

       

       대답하기가 무섭게, 끼익. 하고 가볍게 문이 열렸다.

       

       서큐버스 한 명이 정중하게 자세를 낮추며 예를 취했다. 그것은 스레도를 향한 예가 아니었다. 뒤따르는 검은 머리카락의 여인을 드높이기 위한 것이다.

       

       여인은 섬김받는 것이 익숙하다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모든 색을 빨아들이는 것 같은 흑발이 찰랑이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스레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자태를 무어라 형용할 수 있을까?

       

       눈빛, 걸음걸이, 그녀의 모든 부분이 아름답다. 고귀하고도 매혹적이다. 남성의 본능을 자극하지만 천박하지 않다. 거장이 세심하게 깎아 낸 조각상을 보는 듯하다.

       

       한 차원 너머의 존재를 보는 듯하다.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녀의 입이 열리고, 꾀꼬리 같은 맑은 음색이 흘러나온다.

       

       “처음 뵙겠습니다, 3황자. 저를 공녀라고 불러도 좋아요.”

       

       “⋯⋯고, 공녀.”

       

       그제야 스레도는, 저 멀리서 보았던 여인이 아주 가까이에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시야가 트이고. 공녀와 그를 추종하는 서큐버스 사이에서 묘한 눈길이 오가는 모습을 보고 나면.

       

       “아가씨. 3황자 스레도 님이세요.”

       

       “내가 마음이 너무 급했네⋯⋯ 소개해 주는 걸 기다렸어야 했는데. 네 역할을 빼앗은 나를 용서해 줄래? 유리.”

       

       “얼마든지요. 앞으로도 더 봉사하게 해주신다면.”

       

       “그건 내가 바라마지않는 일이란다.”

       

       둘은,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울리는구나.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

       

       선수 입장이다.

       

       이번 씬의 목표는 3황자로부터 정보를 캐내고 유사시에는 제압까지 하는 것이다. 

       

       지금 바로 체어샷을 날리고 강제로 정보를 뽑을 수도 있겠지만⋯⋯ 일레인과 이리드에게는 내적 친밀감이 있다. 기왕이면 이 녀석의 정신머리를 멀쩡하게 고쳐서 배송해 주고 싶었다.

       

       자, 대화의 물꼬를 트자.

       

       3황자와 안면이 있는 서큐버스로 변장한 핑발레즈와 까만레즈, 그리고 TS환상마법만 켠 나.

       

       내가 ‘서큐버스 공녀’를 연기하며 무대에 새로운 배역을 등장시킨 이유는, 초면임을 방패 삼아서 여러 어색한 부분을 어물쩍 넘길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이렇게.

       

       “제국의 황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기에, 궁금증이 들어서 찾아와버렸어요. 혹시 제 방문이 실례가 되었을까요?”

       

       “아니, 아니야. 시, 실례 같은 건⋯⋯. 평소에도 도움을 받고 있으니까.”

       

       3황자는 쭈뼛거리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방 안을 두리번거리더니, 찬장에 정리되어 있는 찻잔에 시선을 두었다.

       

       직접 꺼내올까 말까를 망설이는 것 같았다. 마약 거래에 손을 대고 있다기에 되바라진 쪽을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소탈한가.

       

       “아⋯⋯ 어떤 도움인가요?”

       

       “수면 테라피를 받고 있지. 잠에 들기가 어려워서⋯⋯.”

       

       정기적으로 방문하던 서큐버스가 ‘황자님 이제 우리 뭐함?’ 하고 물으면 뭘 어떻게 봐도 수상하다. 치매라도 걸리지 않고서야 까먹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뉴페이스 방패를 내세우면 이렇게나 편하다.

       

       옆에서 유리 랜스터가 동조한다.

       

       “네, 아가씨. 저희는 황자님이 좋은 꿈을 꾸도록 노력하고 있었답니다. 수면은 피부미용에 정말로 중요한걸요.”

       

       “어머, 그러니? 그렇다면, 유리 너는 몽유병이 있는 걸까.”

       

       “꿈속에서도 공녀님을 생각하고 있으니, 큰 차이는 없을지도 몰라요?”

       

       “우리는 매일 밤 같은 꿈을 꾸었구나?”

       

       가벼운 공수교환.

       

       나는 눈동자를 움직여 가볍게 방 내부를 훑었다. 테이블과 의자가 있다. 내가 그쪽으로 나아가자, 유리는 한발 앞서 움직여 의자를 빼 주었다.

       

       유리의 시중을 받으며 다소곳하게 앉아, 호기심 넘치는 눈동자로 3황자를 바라본다.

       

       “앉아서 얘기하실까요?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답니다. 소문의 3황자님이 과연 어떤 남자인지도 포함해서.”

       

       “공녀님께서는 밖에 잘 나가지 않으세요. 그래서 호기심도 많고요. 부디 이해해주세요 황자님.”

       

       유리의 어시스트다. 방에 틀어박힌 3황자와 나 사이의 유사성을 만들어, 약간이나마 친밀감을 더하려는 무브먼트. 영리하군.

       

       “그, 그런가? 그렇군. 그건 나와 같아⋯⋯.”

       

       “와아, 확실히 그렇네요! 당신의 피부와 제 피부색, 비슷한 것 같아요. 이렇게 나란히 두면⋯⋯.”

       

       손을 뻗어서 3황자의 손을 잡아 가볍게 끌어당기고 나란히 둔다. 교묘하게 환상 마법을 덧씌워 피부색을 더욱 비슷하게 조정한다.

       

       “그, 그렇군. 확실히 그래.”

       

       “아, 가슴팍에 점이 있으시네요. 저도 그런데. 벌써 닮은 점을 두 개나 발견했네요. 그렇죠?”

       

       “⋯⋯⋯⋯.”

       

       “어쩌면, 우리에겐 공통점이 더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이렇게나 닮았는걸요? 바쁘시지 않다면, 좀 더 알아가보고 싶은데.”

       

       끌어당긴 손에 살짝 더 힘을 불어넣는다. 그러면, 3황자는 송골매에게 낚아채진 생쥐처럼 굳은 채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때, 유리가 내 손을 잡고 조용히 가져갔다. 그녀의 눈동자에 옅은 질투가 스친다. 그녀는 조용히 소곤거렸다.

       

       “황자님이 곤란해하세요, 아가씨. 그렇게 손을 잡으시면.”

       

       “아, 미안. 조금 신났을지도⋯⋯.”

       

       나는 멋쩍은 듯 웃으면서도, 질투해 주는 것이 기쁘다는 마냥. 눈동자에 아슬아슬한 짓궂음과 희열을 담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을 조심스레 간질이며, 은근히 물었다.

       

       “그렇네. 스스럼없이 손을 잡아 오는 건,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안 되겠지⋯⋯?”

       

       “네, 아가씨. 연인처럼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흐응⋯⋯.”

       

       손을 움직여, 유리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내 손가락을 밀어 넣는다. 벌어진 틈 하나 없도록,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마주 잡고 흔든다.

       

       이러면, 우리가 연인이냐는 듯이.

       

       그러하면 유리는 부끄러운 듯이 웃었다. 짝사랑을 하는 설정이니까.

       

       나는 충분히 느긋하게, 타인의 시선으로 봐도 상당히 길게 손을 잡고 있다가, 나비가 날갯짓하듯 가볍게 떨어졌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스치는 손가락에는 일말의 아쉬움을 담았다.

       

       사람은 얻었다가 빼앗겼을 때, 보다 강렬하게 갈구한다.

       

       아리따운 미소녀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상황을, 유리가 개입하여 빼앗는다. 관심의 방향을 자신에게 돌린다.

       

       3황자가 유리에게 불쾌감을 느끼고, 내게 보다 깊이 빠지게끔 하는 설계다. 좀 더 나아가서, 유리는 3황자가 평소 만나던 서큐버스의 모습으로 위장 중이 아니던가.

       

       이는 ‘기존의 서큐버스 세력’에 대한 적대감을 높이려는 거다.

       

       이 타이밍에 ‘나는 저들과 다르다’는 느낌을 준다면, 3황자는 내가 연기하는 캐릭터에게 보다 깊이 몰입하겠지.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서도 이렇게나 합을 맞출 수 있다. 나는 테이블 아래의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유리의 허벅지를 툭 두드렸다. 꽤 하잖냐, 라는 뜻으로.

       

       유리는 발을 움직여서 내 구두를 툭 차며, 별말씀을, 이라고 답했다.

       

       자, 그러면 3황자의 리액션을 보고 다음 행동을 결정하자. 유리에 대한 헤이트 수치가 크게 올랐다면 마음에 균열을 심고, 내게 푹 빠지는 쪽이라면 속내를 끌어내는 쪽으로⋯⋯.

       

       “⋯⋯⋯⋯.”

       

       뭐지.

       

       저새끼 표정이 묘한데. 무슨 감정이지, 저건.

       

       3황자의 표정이 아리까리하다.

       

       판단할 수 없다. 호의는 맞는데, 동경까지는 아니고, 헷갈린다. 정보가 더 필요하다. 

       

       유리 랜스터 또한 판단이 헷갈렸던 모양인지,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하고 내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뭘까요, 미친 마법사님.”

       

       “몰라 나도⋯⋯ 우후후, 유리도 차암. 그런 건 굳이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데. 응, 예쁘게 다듬어 주렴. 누구라도 반할 정도로.”

       

       “네. 저라도 반할 정도로 아름답게 다듬어 드릴게요. 머리카락.”

       

       “응,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대뜸 던진 대사에 맞춰 유리는 머리 손질을 시작했다. 애정이 어린 터치에는 묘한 분위기가 담기는 법이다. 탐닉하는 손길에 담긴 욕망을 세심하게 느낄 수 있다.

       

       나는 간지럽다는 듯이 키득대면서 몸을 살짝 떨었다. 그러면, 유리는 일부러 묘한 손놀림으로 쓸어내렸다.

       

       “얘는, 간지럽잖아.”

       

       “간지러운 거 좋아하시잖아요. 아가씨는.”

       

       “너도 간지럽히는 거 좋아하는 거 알아. 용서해 줄 테니까 마음껏 해도 돼.”

       

       거기까지 말하곤, 슬쩍 3황자를 살핀다. 표정이, 그러니까⋯⋯ 커플링 응원하는 유나랑 비슷한데 저거. 유리도 그걸 눈치챈 것 같다.

       

       검증해 볼까. 그러죠.

       

       유리가 보란 듯이, 일부러 내 목선을 타고 내려가 간질이면, 나는 흣, 하고 아슬아슬한 숨을 내뱉는다. 살짝 더 노골적인 사인이다.

       

       “⋯⋯⋯⋯.”

       

       왜⋯⋯ 왜 유리랑 꽁냥거리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지?

       

       좀 울컥한다. 내가 이렇게 미소녀 캐릭터를 만들어 와서 여러 기예를 펼치고 있는데, 사내라는 놈이 왜 내 캐릭터한테 관심을 안 가지고 백합에⋯⋯!!

       

       진정하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카스트 저 꼭대기에 있는 여자애한테는 고백할 엄두도 못 내는 것처럼, 너무 강렬한 캐릭터성이 벽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저 옆의 여자애를 치우고 내가 쟁취해야지, 가 아니라, 그냥 보기가 참 좋구나⋯⋯ 그렇게 포기부터 해 버렸을 수 있다.

       

       아니면 그냥 태생부터 백합을 좋아했든가.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 그러면 유혹이 아니라 다른 방면으로 커브를 틀어야 한다. 동질감과 친밀함을 코어로 잡고 드리프트를 하자.

       

       “황자님은, 평소 무엇을 즐기시나요?”

       

       “잠을⋯⋯ 자는 편이야.”

       

       “⋯⋯그것 뿐?”

       

       “⋯⋯⋯⋯.”

       

       회한과 슬픔, 답답함. 3황자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다.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로 방에 틀어박혀서 하루 종일 자는 것 같은데.

       

       우선은 후크를 건다.

       

       “또 하나, 공통점이 늘었네요.”

       

       “⋯⋯고, 공녀도. 잠을?”

       

       “네. 꿈속에서 해야 할 일이 무척 많거든요. 제가 있어야만 한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이런 산책도 정말 오랜만이에요.”

       

       “아가씨⋯⋯.”

       

       유리가 애잔한 표정을 짓는다. 칼 같은 타이밍에 서포트가 들어왔다. 나는 보조에 힘입어 애써 덤덤한 것처럼, 눈꺼풀에 체념에 가까운 슬픔을 살짝 담는다. 애잔하게.

       

       둘이서 초상집 분위기를 잡고 있으면, 나머지 하나도 물들기 마련.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쓰고 거의 반쯤 유폐되어 있다고 읽게 만든다. 이 공녀라는 여인은, 뭔가 어떤 슬픈 사정 때문에 인생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거다.

       

       이렇게 여지만 주면 된다. 나머지 디테일은 3황자의 머릿속에서 알아서 생각해 줄 거다. 중요한 건 이 다음이다.

       

       “⋯⋯황자님은? 황자님도 무언가를 짊어지고 있나요?”

       

       “나는. 그러니까⋯⋯.”

       

       나는 비밀 얘기를 했으니 너도 까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그러나 표정은 거꾸로, 불편하다면 이야기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배려와 상냥함을 담는다.

       

       그러면 보통은 입이 열린다.

       

       “⋯⋯나는, 저주받았어. 뭘 해도 잘 풀리지 않아. 그래서 자는 거야.”

       

       “서로 고생이네요. 우리는.”

       

       “⋯⋯⋯⋯.”

       

       “우리,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친구가 되는 건 어떨까요? 제게는 다행히도 유리가 있지만, 황자님은 무척이나 외로워 보여서.”

       

       친구 선언까지 들어갔다. 3황자는 지난 시간을 떠올리는 듯 훌쩍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열렸다. 천천히 풀어가도록 하자. 이제 살살 돌리면 옛날의 기구한 인생사부터 시작해서, 최근 근황까지 모조리 털어놓을 터다. 생각보다 심성이 유약하군. 쉽다.

       

       뒤에서 어벙하게 서 있던 까만레즈가 중얼거렸다.

       

       “⋯⋯혹시 제가 모르는 사이에 둘이 짰.”

       

       유리가 보이지 않는 교묘한 각도로 까만레즈의 정강이를 깠다. 변수통제도 성공적이었다.

       

       ===============================================================

       

       그는 결국에는 제 손으로 직접 찻잔을 들고 왔다. 마도구로 차를 내리고, 따른다. 그는 네 잔을 준비했다. 여기서 시종의 위치에 가까운 유리와 까만레즈에게도 차를 대접한 셈이다.

       

       이리드가 세션을 겪고 나서야 성격이 좋아졌던 걸 생각하면, 3황자는 애초에 성격 초기값이 상냥한 쪽인지도.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3황자의 인생은 작위적인 불운의 연속이었다.

       

       황제 알현의 날에서, 3황자 스레도는 황제로부터 애틋한 염려를 읽고 마음을 다잡았었다. 그리고 결의했다.

       

       자신은 강해져야만 한다. 어떠한 장애물도 뛰어넘을 수 있는 초인이 된다면, 정 붙인 사람들을 빼앗기지 않아도 될 것이리라고.

       

       초인이 되어서, 온 가족이 행복했던 때로 돌아가겠노라고. 자신이 그렇게 만들겠노라고.

       

       그렇게 수련광이 되어, 강해지기 위해서 모든 시간을 불태웠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아카데미에 도착하고 나서부터는 모든 게 이상해졌다.

       

       일이 도저히 풀리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비참하게 떠나갔고, 자신을 추종하던 이들도 하나둘 거리를 두었다. 대련을 하면 예기치 않은 사고로 부상을 입었고, 경지는 늘지 않는다.

       

       마치 운명 자체가 그에게 고통과 실패를 강요하는 듯한 상황.

       

       어릴적 회화궁에서 겪었던 끔찍한 불운이 끊기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 같은. 그러한 감각.

       

       그는 학습된 무기력에 의해 방구석에 틀어박혔다. 뭘 해도 되지 않는다. 자신이 이룰 수 있는 것은 없다. 노력에 대한 보상이 따라오지 않으면, 사람은 무너진다.

       

       여기까지 들은 뒤, 나는 2황자에게서 온 보고서의 내용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로데루스, 엔버스, 김루루가 투입되었던 빨간맛 공작가 비밀시설 공략 작전. 그곳에서 그들은 ‘운명적인 불운’을 느꼈다고 했다.

       

       마법소녀 오대수의 추측에 따르면, 빨간맛 공작의 우화(羽化)는 운명에 작용하는 쪽이다. 만약, 흑마법사 세력이 작정하고 3황자를 조지려고 들었다면 이야기에 맥락이 잡힌다.

       

       최면세뇌 석상까지 만든 놈들이었으니, 환상 마법으로 정신을 쪼아대는 법은 당연히 알고 있을 터.

       

       여기에 서큐버스를 투입해서 정신을 흔들어 놓은 뒤에.

       

       운명적인 불운으로 세상의 억까를 몰아 주고.

       

       내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잘만 작동하고 있었던 아카데미의 마법진을 통해, 절망을 부추긴다.

       

       작정하고 한놈의 인생을 조지는 연계 공격이다. 

       

       ⋯⋯GM이 증오를 품고 돌리는, 불쾌한 TRPG와 닮아 있다고 느꼈다.

       

       ===============================================================

       

       3황자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나, 나는, 가족들이 사이좋게 지냈으면 했어. 하지만 일레인과 이리드는, 황위를 두고 싸우고 있고, 나까지 노리고 있지. 이룰 수 없는 꿈이니까, 나는 잠들 수밖에⋯⋯.”

       

       “많이 아팠겠네요⋯⋯.”

       

       “그, 그래서.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은, 부럽네. 네게⋯⋯ 그런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야.”

       

       “⋯⋯⋯⋯.”

       

       그런가. 사이좋게 지내는 사람들에 대한 동경 같은 거였나. 그렇다면 딱히 백합을 보고 좋아했던 게 아니라, 정다운 자매 같은 느낌으로 보고 있었는지도.

       

       그렇다면. 이런 상황이라면. 이대로 엎어도 되겠는데.

       

       좋아, 뒤집자.

       

       “⋯⋯3황자님. 그게 만약, 전부 누군가의 음모로 인해 빚어진 거라면⋯⋯ 어떨 것 같나요?”

       

       “아가씨! 그건⋯⋯!!”

       

       내가 운을 떼자마자 유리가 따라붙었다. 내가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단번에 이해한 거다. 3황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허둥댔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아가씨, 안 돼요. 아무리 3황자가 불쌍하다고 해도, 그건 여왕님에 대한 배신이에요⋯⋯!!”

       

       “하지만, 하지만 유리. 이래서는 안 되는 거야. 어머니는 잘못 된 길을 가고 계셔. 알잖아⋯⋯?”

       

       “그게 진짜 무슨 소리입니끅.”

       

       이번엔 내가 까만레즈의 정강이를 깠다.

       

       즉석 설정이다.

       

       나는 서큐버스 여왕의 딸이고, 그녀에게 협력하고 있었지만, 사실 여왕이 그렇게 사악한 일을 벌이고 있는 줄 모른 채로 이용당하고 있었다. 혹은 알고 있었으나 줄곧 외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기회로 3황자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더는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내부고발자가 되려 한다.

       

       “⋯⋯잘 들어요, 황자님. 1황녀님과 2황자님은⋯⋯ 화해하셨어요. 당신에게 암살자를 보내지도 않았고, 원한을 품고 있지도 않아요.”

       

       “뭐, 뭐⋯⋯?”

       

       “정말이에요. 제가 꿈을 엿보고 얻은 정보이고, 거짓은 없어요.”

       

       “아가씨⋯⋯.”

       

       유리가 내 팔에 애절하게 매달린다. 그녀도 아는 것이다. 서큐버스 여왕에게 거스르면 어떤 말로를 맞이하게 될지.

       

       그러나 그녀는 공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공녀가 위험한 길을 가더라도 차마 말릴 수는 없어서⋯⋯ 번민할 뿐이다. 그런 설정이다.

       

       유리의 표정에 한가득 당황이 담긴다. 반면, 나는 다부진 결의를 눈빛에 담았다. 그리고 순수함 한 스푼도 담았다. 신뢰할 수 있는 느낌을 주도록.

       

       3황자는 오가는 대화를 듣고 그제야 상황(아님)을 짐작한 것 같았다.

       

       “⋯⋯나, 나는 속고 있었던 건가. 나는, 하지만. 그 사실을 어째서 내게⋯⋯.”

       

       “우린,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꿈속에서 갇혀 있어야 하는 고통은,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게 얼마나 괴로운지, 알고 있으니까.”

       

       “⋯⋯⋯⋯.”

       

       “⋯⋯이용당하지 말아요, 황자님. 악몽에서 깨어날 때가 온 거예요.”

       

       그래, 3황자도 느끼고 있었겠지. 흑마법사들이 어째서 흑마법사겠는가. 그들은 사람 영혼을 으깨서 쓰는 잔인한 녀석들이다.

       

       순전히 호의만으로 3황자를 도울 이유는 조금도 없음을,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외면하고 있었을 뿐.

       

       “⋯⋯그,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제가 여기서 나가게 해 드릴게요. 그리고, 아카데미에는⋯⋯ 현재 방위국 요원이 와 있는 상태에요. 그들에게 가서, 접촉하세요.”

       

       “하, 하지만. 혹시라도, 일레인과 이리드가 나를.”

       

       “믿어주세요. 그분들은⋯⋯ 정말로, 당신을 해칠 생각이 없으세요. 자, 일어나요!”

       

       3황자의 손을 잡고 일으킨다. 그는 망설이고 휘청이면서도, 내가 이끄는 방향대로 끌려왔다. 이 기세로 날치기를 해야겠다.

       

       분위기로 못을 박는다. 긴장감과 불안, 그럼에도 옳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의⋯⋯ 눈빛. 그래, 초창기 니오레의 눈빛을 빌려다 쓴다.

       

       각오는 불과 같아서, 그 빛을 쬐고 있으면 옆으로도 번지는 법이다. 3황자 또한 용기를 내었는지, 도중부터는 스스로 걷기 시작했다.

       

       그를 이끌고 저택을 벗어나려 하자, 경비병이 가로막았다.

       

       “정지! 3황자는 왜 끌고 나오는 거요?”

       

       “급한 시술이 필요해서⋯⋯ 이 저택의 설비로는 불가능해요. 보다 나은 곳으로 가야겠어요.”

       

       “뭐? 저번에는 분명 저택에 있을 게 다 있다고⋯⋯ 어엇!”

       

       나는 온몸으로 경비병을 밀치고, 3황자에게 외쳤다.

       

       “도망가요! 교수가 있는 곳으로!”

       

       “⋯⋯하, 하지만. 너는!”

       

       “저는 어머니, 여왕님의 딸이니까. 크게 혼이 나겠지만 죽지는 않을 거예요. 걱정 말고, 빨리!”

       

       “이게 무슨, 배신이다! 3황자가 빠져나간다!”

       

       “꺗!”

       

       나는 경비병에 의해 밀쳐진다. 3황자는 머뭇거리다가,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용기 있는 서큐버스가 희생해가면서 만들어 준 기회다. 헛되이 할 수는 없었다.

       

       3황자는 용기를 냈다. 저들은 그냥, 3황자가 그저 그렇게 살아가도록 내버려 둘 수도 있었는데, 마음 속의 양심에 따라서 그를 도왔다.

       

       그러니 방에 틀어박혀 움직이지 않아 잔뜩 쇠약해진 몸이라도, 필사적으로 달렸다. 그리고 그는 외쳤다.

       

       “사, 사람을 불러 올 테니까. 내가, 사람을!”

       

       “⋯⋯⋯⋯.”

       

       그런가. 증원을 불러서 구하러 오겠다고 말하는 건가. 나는 내심 흡족했다. 은혜를 입으면 제대로 되돌려주려는 인간이구나.

       

       3황자의 고함을 들은 경비병은 크게 외쳤다.

       

       “쫓아!”

       

       “그렇게 둘 수는 없어요! 『방향 상실』!”

       

       저택의 경비를 서는 녀석들에게 환상 마법을 건다. 그들은 우왕좌왕하며 엉뚱한 곳으로 달려나갔다. 경비병은 울그락불그락한 얼굴로 칼을 뽑아 들었다.

       

       주저앉은 나를, 유리가 감싸듯이 끌어안는다. 

       

       “⋯⋯아가씨.”

       

       “⋯⋯유리, 미안해. 내 고집 때문에. 하지만,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어.”

       

       “아니에요. 아가씨 성격을 뻔히 아는데, 막지 못한 제 잘못이에요. 바깥을 구경하고 싶다며 조를 때, 딱 잘라서 거절했어야 했나 봐요⋯⋯.”

       

       “나를 잡아 가, 유리. 다 내 독단적인 결정이었으니까, 네가 벌을 받을 필요는 없어.”

       

       애절하게, 서로를 위안한다. 힘 없는 정의란 이렇게나 슬퍼지는 법이다. 내 눈동자는 죄책감으로 물든다.

       

       그러자 유리는 괜찮다는 듯이 다독이면서⋯⋯.

       

       “⋯⋯컷?”

       

       “컷.”

       

       씬이 끝났다.

       

       “지금 뭐라고 떠들고 있── 컥, 으악!”

       

       내가 경비병의 다리를 걸어 무게중심을 흩어놓고, 열린 가드의 틈으로 핑발레즈가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꽂아 넣는다.

       

       그 모습을 보고 까만레즈가 질린 표정으로 채찍을 꺼내 들었다.

       

       “⋯⋯이제 연기 다 끝났습니까?”

       

       “어, 끝났다.”

       

       “미친 마법사님. 3황자를 원래 모습으로 만나려면⋯⋯ 이것들 빠르게 정리하고, 그보다 먼저 연구실에 도착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맞지. 얼른 처리해야지.”

       

       나는 기지개를 쭉 켜면서 변신을 풀었다. 아리따운 여인은 어디가고 우중충한 흑발적안 남캐가 모습을 드러내자, 명치를 맞고 컥컥대던 경비병의 표정이 휘둥그레졌다.

       

       하늘이 갑자기 무너진다고 해도 저런 표정은 안 나올 텐데.

       

       “키스씬까지 못 찍은 건 좀 아쉽습니다. 미친 마법사님.”

       

       “주역이 3황자였는데 어떻게 너랑 키스를 갈겨. 애만 태우고 끝날 거, 서로 알고 있던 거 아니었어?”

       

       “알았죠. 그럼에도, 개연성이 없어도 좋으니 해주기를 바랬던 겁니다.”

       

       “말은 청산유수지 아주.”

       

       아쉽다. 시원섭섭한 기분이었다. 

       

       나는 입맛을 다시면서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환상 마법에 빙빙 돌던 병력들이 하나 둘 제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몇몇 놈들은 영혼 꺼낼 준비를 하는 걸 보니 흑마법사로 보였다.

       

       빨리 끝내고 돌아가야 하니, 처음부터 전력을 내보일 생각이다. 

       

       파심현전 빼고. 흑마 자폭사건 이후로, 그건 때와 장소를 가려가며 쓰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손가락을 튕겨, 호령한다. 

       

       “정보의 바다로부터 나오너라, 『천마 / 악신』.”

       

       ===============================================================

       

       쿠웅!

       

       “나, 나는⋯⋯ 허억. 나는 제국의 3황자, 스레도 크라운이다. 도움, 도움이 필요하다!”

       

       3황자는 필사적으로 달린 끝에, 핏기 없이 창백한 몰골로 헐떡이면서 증원을 요청했다. 그를 구해 준 은인을 살려야 했으니까.

       

       이에, 식별명 미친 마법사는 후드를 뒤집어 쓴 채로 차분하게 말했다.

       

       “3황자라⋯⋯ 2황자님에게도 이야기를 익히 들었죠. 그분께서는 혹시라도 당신이 도움을 청하거든, 자신이 대금을 지불할 테니 도우라 하셨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런가. 이리드는, 정말로 나를 염려하고 있었구나. 암살자를 보낸 것은 그가 아니었구나. 그녀들이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실로 은인이 맞았다.

       

       그렇다면.

       

       3황자는 가슴께를 그러쥐면서 간신히 폐를 짜내어 말했다.

       

       “나를, 나를 탈출시킨⋯⋯ 여인들이, 위기에 빠져 있어. 그녀들을 구해야 해. 하는데⋯⋯?”

       

       3황자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법사와, 그 뒤에 서 있는 정장 차림의 여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들은 땀에 흠뻑 젖은 채로, 티 안 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먼 거리에서 열심히 달려 온 사람처럼.

       

       두 사람은 3황자가 묻기도 전에 변명했다.

       

       “⋯⋯아, 좀 더워가지고요. 그, 신경 쓰지 마십쇼.”

       

       “⋯⋯예. 저희가 원래 땀이 좀 많습니다.”

       

       세 사람은 왔던 길로 다시 뛰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좀 오래 걸렸으나⋯⋯ 하지만 저는 쪼끔 당당합니다! 많이 썼으니깐⋯⋯!
    이건 사실상 연참입니다. 저는⋯⋯ 저는 이걸 반으로 쪼갤 수 있었어요!
    그럼, 내일 또 만납시다 마이 프렌즈. 내일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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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world TRPG Game Master

Otherworld TRPG Game Master

Another World TRPG Game Master, 이세계 TRPG 게임마스터
Score 8.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wizard of the Illusion Magic School and decided to create a virtual reality with illusion magic to play a tabletop role-playing game (TRPG). It was great to create a virtual reality, but I was in trouble because there were no suitable players. During that time, I received an offer to be the professor from the Royal Academy. The offer was to use illusion magic to fill the students’ lack of practical experience safely. And so, I became a professor at the academy. “Send me back, send me back to that world right now-!” “Outer god, someday an outer god will be our doom, we’ll all die!!” “I am not the bastard of the Redburn Ducal Family. I am the foremost disciple of the Great Namgung Clan, Namgung Qinghui!” But it seems there is a bit of a misunderstanding. This isn’t a spell for dimensional travel, kids. It’s 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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