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표국주는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간다는 것을 느꼈는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그런 표국주의 모습을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거래할 생각이 없다면 이곳에 더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대신 후한 보상을 드릴 테니…”
“제 목적은 처음부터 삼보검결이었습니다.”
삼보검결 아니면 할 이유가 없지.
귀찮게 대리 비무를 하면서까지 상승 무공을 얻으려는 건데, 상승 무공을 정작 안 주겠다 하면 내 입장에선 아무런 이득이 없는 셈이 된다.
뭐, 막대한 보상금?
막말로 초절정고수라면 이름을 슬쩍 빌려주는 것만으로도 큰돈을 얻을 수 있는 게 중원이다. 이런 세상에서 금전적으로 날 매수하려고 하는 건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지.
“삼보검결에 대해서 어떻게 아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만은!”
“나중에 뵙시다. 물론 나중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협상! 협상합시다!”
협상이라.
나는 그제야 몸을 돌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뒤이어 급하게 자리에 앉은 표국주가 소매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고는 , 간절한 눈으로 내게 부탁했다.
“삼보검결을 제외한 어떤 것이라도 드릴 테니…안 되겠습니까?”
“삼보검결은 왜 안 되는 겁니까?”
니들이 그거 가지고 있다고 무공을 온전히 쓸 수 있지도 않을 텐데.
상승 무공이 왜 상승 무공인데.
평범한 사람은 봐도 이해 못 할 정도의 복잡한 무리를 담고 있기에 상승 무리라고 불리는 것.
비교적 직설적이고 실전적으로 가르치는 서양조차 상급 아츠를 배우는 데에는 큰 노력이 필요했다.
특히, 상승 무공은 스승이 없으면 제대로 익힐 수 없다.
복잡한 무리를 풀어서 설명해줄 사람이 없으면 무공을 잘못 익힐 가능성이 한없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마스터인 나나 칠성검왕이라면야 상관이 없겠지만, 우리보다 아래인 무인이 삼보검결을 얻어봤자 약간의 성취를 빼고는 큰 이득을 보기 힘드리라.
무협지 속의 주인공처럼 불합리할 정도의 오성으로 무공을 독학으로 익힐 수는 없을 테니.
“…아버지께서 삼보검결만은 집안의 무공으로 삼아서 세가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하시곤 하셨습니다.”
“상승 무공은 이해하기 쉽지 않을 텐데, 익힐 수는 있습니까?”
“…시간과 노력과 돈을 들이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돈으로 해결하긴 힘들 겁니다. 금괴 백 개보다 비급이 더 가치가 있을 테니 말입니다. 보아하니 아직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은데, 손을 떼는 게 나을 겁니다.”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표국주를 향해 경고를 던졌다.
괜히 고집부리다 큰 화를 입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기 떄문이었다. 누군가는 쓸데없는 오지랖이라고 하겠지만, 그래도 기사였던 자로서 뻔히 보이는 미래를 두고 참견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사자겁협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이니 필히 진실이겠지요. 하지만 상단의 굴레를 넘어 세가로 발돋움할 기회를 위해 아버지께서 그리 노력하셨는데, 어찌 제가 팔아넘길 수 있겠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침울해졌다.
가족.
가족이라.
“하나만 묻겠습니다. 삼보검결의 비급은 어디에 있습니까?”
“검결은 제가, 벽력삼보는 형님이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긴 쪽이 모든 것을 가진다는 건가.
내 입장에서야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이 인간은 어떻게든 삼보검결을 보상에서 빼고 싶은 모양이니 조금 다른 방법을 써야겠네.
“그런 거래 내용을 조금 바꿉시다.”
“거래 내용을…말입니까?”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표정이 격렬하게 바뀌네.
말 몇 마디에 희로애락이 오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었다.
“당신도, 저도 원하는 것이 있으니 둘 다 이득을 보는 방향으로 계약을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어떻게 말입니까? 삼보검결은-”
“제게 열람권을 주면 됩니다.”
“열람권이라 하면…”
표국주는 알아듣긴 했지만 이해하기 힘들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한 걸음 물러났다는 사실이 이상한 걸까.
하지만 이 협상은 처음부터 내가 휘두르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판.
어차피 비급은 몇 번 읽어보면 내용을 기억하는 건 어렵지 않으니, 비급을 가져가지 않는 대신 뜯어먹는 것도 고려해 봐야지.
하오문에 맡긴 돈도 언제 떨어질지 가늠하기 어려우니까.
“어차피 그대로 두면 빼앗길 것이 뻔한데, 저와 거래해 열람권과 추가 보수를 건네주는 선에서 계약할 수 있다면 이득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잘 생각해보십시오. 표국주님. 표국주님은…선택권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잃느냐, 출혈을 감수하고 저를 고용할 것이냐. 하나만 선택하십시오. 어차피 반쪽짜리 비급 아닙니까?”
“그, 그걸 어떻게!”
“제가 어떻게 성천상단에 삼보검결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왔겠습니까?”
나는 품속에서 삼보검결 하권을 꺼내 들었다.
그들이 애타게 찾고 있었을, 하지만 절대 찾지 못할 하권의 등장에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성천상단이 예전에 찾으려다 지반 붕괴로 끝내 얻지 못한 하권입니다. 삼보검결의 후반부 초식과 상승 무리가 적혀 있는 서책이니, 이것이 있어야 삼보검결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스승이 없다면 말짱 도루묵이겠지만, 그건 내가 신경 쓸 거리가 아니다. 언젠가 상단에서 천재가 태어나면 해석할 수 있을 테니.
아니면…주석본을 써주는 대가로 더 뜯어먹거나.
성천상단이 중원에서도 꽤 이름이 알려진 거대상단이니, 작정하고 뜯어먹으면 삼대가 먹고 살 정도의 재산 정도는 얻을 수 있으리라.
“…진품이 맞다면…되려 우리 쪽에서 거래를 시도해야 할 것 같구려.”
“어차피 저는 닳도록 읽어서 내용을 전부 알고 있으니, 어차피 그쪽이 가진다 한들 큰 타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걸 거저 넘길 수는 없으니, 거래 내용을 바꿔봅시다.
만약 제가 이겨서 성천상단의 주인이 된다면 저는 이 서책을 성천상단에 팔겠습니다.
성천상단은 어차피 이 책을 얻지 못하면 반쪽짜리 무공을 가지고 있어야 할 뿐이니, 이 서책을 꼭 얻어야만 하겠지요. 물론 헐값에 팔 생각은 없습니다.”
“사, 상승 무공을 헐값에 사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암…”
표국주가 어색한 얼굴로 맞장구를 치며 내 눈치를 보았다. 이미 거래의 주도권이 온전히 내게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긴, 그것도 못 하면 상단주 될 생각은 접었어야지.
“그러니 저는 승리의 대가와 이 책의 판매에 대한 대가로 열람권과 제가 원하는 물건 3개를 구해주시면 됩니다.”
내 요구에 표국주는 고뇌에 찬 얼굴로 표두를 쳐다보았다. 표두는 자기는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3개라니…”
3개.
이 얼마나 애매모호한 요구인가.
내가 무엇을 요구할지에 따라 거래의 대가는 하늘을 뚫을 수도, 거저 얻는 수준이 될 수도 있으리라.
“…과하다고 생각하신다면 거래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칠성검왕과 맞설만한 무인이 상단에 올지는 모르겠군요.”
할래?
안 할래?
나는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그가 대답하길 기다렸다.
그가 대답을 꺼낸 것은 내가 차를 전부 마셨을 즈음이었다.
“알았네! 거래함세!”
“훌륭한 선택입니다.”
이제 평생 일 안 해도 돈 펑펑 쓰면서 먹고살 돈이 생겼구나.
물론 이겨야 얻는 돈이지만.
“위 대협,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이었구려…”
“무림에 발을 들이게 되면 그런 생각은 전부 사라질 겁니다.”
나처럼 양심 있고 신사적인 사람이 어딨다고.
나는 유려한 글씨체로 작성되어가는 계약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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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참. 이런 귀찮은 절차는 왜 하는지. 그냥 다 때려 부수면…”
‘초절정고수만 아니었어도…’
성천상단의 부단주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앞을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흘겨보고 싶었지만, 저 눈치 빠른 인간이 그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으니까.
“곧 어르신께서 원하는 것을 얻으실 수 있을 것이니 조금만 인내심을 가져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그래. 알고 있으니 말 안 해도 된다.”
대리 비무 사흘 전.
서로의 대리인을 데리고 오기로 약속한 그는 칠성검왕을 데리고 왔지만, 그의 적수이자 동생인 표국주가 나타나지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
‘이놈이 왜 안 오는 거지? 설마?’
그의 미간이 한층 더 찌푸려질 찰나, 성천상단의 대문이 열리고 표국주와 함께 삿갓을 쓴 거구의 무인이 들어왔다.
“하! 어디서 사람을 구해오긴 했나 보군. 아우야, 내가 아직 자비롭게 널 대할 수 있을 때 항복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형님이야말로 지금 비시는 게 어떻습니까!”
두 사람을 견원지간처럼 서로를 노려보며 신경전을 펼쳤다.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윌리엄은 둘의 신경전이 계속되자 삿갓을 벗었다.
그것만으로도,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윌리엄에게로 집중되었다.
“거구의 색목인 검객이라면…사자검협!”
“맹주와도 대등하게 겨루었다는 그 검객 아니오!”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상단 측 사람들이 혼란에 휩싸였다.
사자검협이라니, 소문대로라면 칠성검왕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 아닌가.
서로의 나이 차가 두 배에 가까울지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대, 그것이 사자검협.
윌리엄은 그런 분위기에도 아무렇지 않게 포권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본인은 위리엄이라 하오. 세간에서는 사자검협이라 불리고 있소.”
‘슬슬 지루하던 차였는데, 아주 재밌겠군!’
예상치 못한 비무 상대에 칠성검왕의 얼굴이 환희에 물들었다.
벌써 3월이 끝나가네요.
시간이 너무 빠릅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