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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6

        “빚 보증을 서 달라는 말인가?”

       

        에테르의 부탁을 들은 순간부터 레너윌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완전히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든 것이다.

       

        에테르는 웃으며 답변했다.

       

        “보증에도 여러 종류가 있기 마련이지요.”

        “돈이 아니라 다른 보증이라고?”

        “만약 빚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레너윌은 대답 대신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제국이라는 대국의 공작에게 건네기에는 조심스럽고, 또 무례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하스펠트 공작의 눈동자에서는 노기보다는 당혹감을 읽을 수 있었다.

       

        그 당혹감조차도 ‘보증’이라는 단어에 꽂혀 있지 않았다. 레너윌은 공작답게 질문의 의도를 추측하려 하고 있었다.

       

        “일단 액수를 물어보겠지.”

        “거절은 안 하시네요.”

        “자네니까 특별히 하는 말이네.”

       

        특별히?

       

        특별히라니.

       

        “저희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러세요.”

        “클라이스가 3년간 자네를 봐 왔겠지.”

        “…….”

       

        에테르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내 딸이 자네에게 지은 죄는 말일세, 자네는 물론 하스펠트 가문의 명예까지 더럽히고 말았네. 그것을 조금이라도 회복하게 하려고 딸을 북방으로 보내긴 했다만….”

       

        뚝, 하고 레너윌의 말은 거기서 끊겼다.

       

        잠시 정적.

       

        “……아니, 조금 전은 사족일세.”

        “계속 듣고 싶습니다.”

        “여하튼, 그대에겐 우리 집안이 빚을 지니고 있다는 거야. 자네가 말한 것과는 반대로, 이쪽에서 말이지.”

        “…….”

        “그러니까 보증을 선다면 액수부터 묻는 게 올바른 절차네.”

       

        에테르는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이 사람, 생각보다 계산적이다.

       

        일반적으로 보증 서 달라는 얘기를 들으면 자리를 회피하거나 허탈한 웃음만 짓기 마련이다. 경우에 따라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보증이란 그런 존재다. 제아무리 친한 친구나 가족 사이라도 드잡이질하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 한순간에 신용을 박살 내는 요술의 단어!

       

        에테르는 신용을 중요시하는 편이었다. 그녀는…… 그는 어른이 된 이후로는 누군가를 쉽게 믿어 본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에게 신용을 얻으려면 돈이 있어야 했다. 돈만이 사람과 사람을 신뢰로 이어주는 매개체라고 받아들인 것이다.

       

        하스펠트 공작은 그런 에테르의 생각을 내시경처럼 훤히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에테르의 체면을 세워줌과 동시에, 제 딸과 가문의 명예까지 보호해냈다.

       

        씨익.

       

        에테르의 입가에 옅은 호선이 그려진다.

       

        “감당하지 못할 수준일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이길래?”

        “저도 장담은 못 합니다.”

       

        하스펠트의 눈빛이 태양광에 반사된 루비처럼 빛났다.

       

        무언가를 알아차린 모양이다.

       

        “돈이 아니군.”

        “예.”

        “돈이 아니라면 뭐지?”

        “신원입니다.”

       

        이제야 제대로 된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겠다.

       

        “제 신분을 보증해 주십쇼.”

       

       

        **

       

       

        “그럼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에테르는 학교 수업 때문에 먼저 자리를 떴다. 레너윌은 조금 전까지 소녀가 앉아있었던 자리를 응시하며 식당 의자에 몸을 기댔다.

       

        ‘신분을 보증해 달라니….’

       

        레너윌로서는 아직도 그 말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신분.

       

        신분이라.

       

        앞으로 삼 년이면 틸레트를 졸업하고 귀족이 될 아이가 뭣 하러 공작에게 신분을 보증해 달라는 말을 하는 것일까.

       

        “흐음.”

       

        레너윌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생각에 잠겼다.

       

        에테르가 아까 한 말을 머릿속으로 복기했다.

       

        – 제 현재 신분은 불안합니다. 사상누각이지요.

       

        – 단순히 이전에 노예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잘난 체로 보일 수 있겠으나, 담담하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틸레트를 수석으로 졸업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 말이 맞다. 에테르는 곧 작위를 받을 예정이다.

       

        귀족의 신분은 보증해주나 마나다. 애당초 신분 증명은 공작이 아니라 황실에서 해 주는 것이기도 하고.

       

        그걸 그 소녀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신분 증명이라….”

       

        레너윌은 계속해서 기억을 되짚어갔다.

       

        – 제 구체적인 신분은 아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탄로나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만약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 경우에…….

       

        – 제국 사람 전부가 절 등 돌리려 해도, 공작님께서 절 변호해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겠습니다.

       

        거기까지 복기했을 때 레너윌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가 하나 존재했다.

       

        인간형 마수.

       

        탄로나서도 안 되고, 탄로나면 모든 사람이 등 돌릴 만한 신분은 그것뿐이었다.

       

        실로 합리적인 추론이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지.”

       

        레너윌은 고개를 내저었다.

       

        인간형 마수는 전부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 한다.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 행동하려 하는 게 그들이다. 

       

        그에 비하면 에테르의 태도는 엉성하다. 마치 ‘나 괴물인 거 들켰을 때 도움 좀 달라’라는 말 아닌가.

       

        인간형 마수는 그렇게까지 멍청하지 않다.

       

        “살인하고 망명이라도 했나? 아니면….”

       

        그나마 그 정도가 떠올릴 수 있는 최대한의 추측이다.

       

        ‘이렇게 앉아있어 봐야 뭐 나오는 것도 아니지.’

       

        레너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대에서 제 값을 치르고 나왔다. 아카데미 교정 뒤편에 자리한 오솔길을 산보하며 쓸데없는 정보와 핵심적인 정보를 나누어 정리했다.

       

        ‘그때 소녀의 표정이 어땠지?’

       

        결연했다.

       

        마치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얼굴.

       

        레너윌은 그런 얼굴을 한 사람들을 질릴 정도로 봤었다.

       

        ‘북방 전선에서 근무하는 이들.’

       

        그들의 눈빛에는 하나같이 각오가 서려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 에테르는 그들과 비슷한 눈동자로 레너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당시 레너윌이 정신을 차렸을 땐 그녀의 진정성에 감화되어 고개를 끄덕인 뒤였다.

       

        – 정말 괜찮겠습니까?

       

        – 감사드립니다.

       

        – 언약일 뿐입니다. 계약서 같은 건 없어도 됩니다. 보증금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절 한 번이라도 믿어주시기만 한다면 그만일 뿐입니다.

       

        – 마지막입니다. 저도 공작님을 믿고 있겠습니다.

       

        이것이 최후의 대화.

       

        레너윌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믿는다. 에테르는 그 마지막 말을 몇 번이고 강조했다. 마치 다른 사람에게는 여러 번 뒤통수를 맞아보았다는 듯이.

       

        신뢰라는 건 돈으로 쌓아올리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것을, 레너윌은 알고 있었다. 에테르도 이를 모르진 않을 터였다.

       

        ‘그런데도 언약으로만 끝낸 이유가…….’

       

        그 순간.

       

        본능적으로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왜인지는 모른다. 그것은 하나의 ‘직감’이었다. 수십 년간 정치 인생을 보내며 몸에 쌓인 데이터가 보낸, 중추적인 직감.

       

        척.

       

        산책을 마친 레너윌의 머리에는 한 가지 생각만이 남았다.

       

        소녀와 한 약속.

       

        지키지 않으면, 하스펠트 가문은…….

       

       

        **

       

       

        학교 수업이 끝난 후.

       

        나는 여느 때처럼 마력수를 들이키고 연성마법을 준비했다.

       

        “공작님과는 어땠어?”

        “그럭저럭 괜찮았어.”

       

        로테에게는 잘 해결했다는 말만 전했다.

       

        생각해 보니 꽤 만족스러운 대화였다. 하스펠트 공작은 첫인상과는 달리 상상 이상으로 말이 잘 통하는 상대였다.

       

        아직 믿을 만한 사람인지는 모른다. 다만, 클라이스보다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걸 확인했을 뿐이다.

       

        아무튼, 이걸로 ‘안전장치’는 최소 네 개가 됐다.

       

        “야호, 얘들아! 나 퇴원했어!”

        “저, 저기…. 들어가도 되나요?”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다. 막 퇴원한 에리카와 메릴다가 구부정한 몸을 이끌고 부실로 들어왔다.

       

        “어라. 우리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안 거야?”

       

        프레이가 물었다.

       

        “로멜 군이 알려줬어요. 에테르 양이 자기 병문안 왔을 때 연성부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다고…. 혹시 아닌가요?”

        “맞아. 얘기했었지.”

       

        나는 자연스럽게 구라를 쳤다.

       

        “그런데 뭐 만들고 있었어?”

       

        에리카가 질문했다. 그러나 그녀의 물음에 우리가 친절하게 답변해주지 않아도 됐었다. 

       

        “어, 어…?”

       

        에리카와 메릴다의 표정이 멍청해졌다.

       

        “너, 너희 대체 뭘 만드는 거야.”

        “이거?”

       

        나는 쇳덩이를 탕탕 두들기며 에리카의 말을 받아냈다.

       

        “폭탄.”

        “폭, 탄이라고.”

        “어, 폭탄.”

       

        잘못 듣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다시 한번 말했다.

       

        “보통 크기가 아닌데요?”

        “폭탄을 이런 데서 왜 만드는 건데…?”

        “예술제에 출품하려고.”

       

        두 엘프의 얼굴이 경악과 당혹으로 물들었다.

       

        먼저 생각을 포기한 건 메릴다였다.

       

        “그건 폭탄의 어느 부위인데요?”

        “지금 건 폭탄은 아니고.”

       

        마력수를 마신 나와 로테는 하스펠트 공작이 보낸 철판을 이리저리 변형하며 싱크로트론의 겉모양을 만드는 중이었다.

       

        확실히. 수천 번 연성한 성과가 있었다. 이제 간단한 틀 연성은 눈 감고도 하는 수준이었다.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럼 뭔가요?”

        “폭탄 만드는 걸 도와주는 장치.”

        “마력초도 없이 계속 연성하시는 건가요?”

        “슬슬 피울 때 되기는 했지.”

       

        나와 로테는 품에서 마력초를 꺼내 물었다. 동아리방이 순식간에 흡연장으로 변했다.

       

        조각. 소조. 조각. 소조.

       

        어제보다 더 무겁고 복잡한 걸 연성해야 하다 보니 수시로 뜯어고쳐야 했다. 당연히 그만큼 마력이 빠르게 소진되었다.

       

        몸에 미미한 탈력감이 돈다. 금안족이라 그런지 필요 이상으로 마력을 사용했을 때 다른 종족보다 신체에 무리가 빨리 왔다. 어제오늘 피곤해 죽을 것 같다.

       

        “너흰 뭐 하러 왔어?”

        “아, 저희는 당신 보려고요….”

        “왜. 다시 결투 신청하게?”

       

        에리카와 메릴다는 동시에 손사래를 쳤다.

       

        “아, 아뇨!”

        “우리가 미쳤다고 너한테 재대결을 신청하겠어?”

        “그럼?”

        “그냥, 이 학교 수석은 방과후를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했어.”

        “마, 맞아요.”

       

        얘네 참 거짓말 못 하네.

       

        그런데, 잠깐만.

       

        “…….”

        “왜, 왜요? 뭘 그리 빤히 쳐다보시는 건데요?”

        “그쪽은 이름이 메릴다라고 했지?”

        “네? 네….”

        “내가 마력초도 없이 마법 쓸 수 있는 원리가 궁금하다고 했잖아. 맞아?”

       

        그녀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고 여기 교환학생으로 온 엘프라면 누구나가 궁금해할 거예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혹시 대련에서 이기는 것 말고도 다른 방법으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메릴다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녀는 나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들어왔다. 그만큼 의욕이 넘친다는 뜻이었다. 붕붕. 그녀가 손을 흔들며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좋아. 의욕이 넘쳐서 나쁠 거 없지.

       

        나는 머리에 물음표를 띄우는 메릴다를 의자에 앉혔다.

       

        전투에서 이 친구가 보여준 능력이 어떤 건지는 벌써 외웠다. 로즈마리처럼 음악으로 팀원에게 버프를 걸어주는 기술. 그게 이 소녀가 가진 능력이었다.

       

        “혹시 마력 회복 효율을 늘리거나 하는 연주도 할 수 있어?”

        “네. 못할 건 없어요.”

        “그거 잘됐네.”

       

        터억. 그녀의 양 어깨에 내 손이 얹어졌다.

       

        나는 입꼬리를 끝까지 올렸다. 뭔가 잘못됨을 감지했는지, 메릴다의 동공이 좁아졌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낌새를 눈치챈 에리카는 이동속도를 높이는 마법을 써가면서까지 도망쳤고, 때문에 이곳에 남은 엘프는 메릴다 뿐이었다.

       

        “아? 에, 에리카! 어디 간 거예요!”

       

        안타깝구나. 둘이 절친인 것 같던데.

       

        아니다, 나한테는 상관없는 일이겠구나.

       

        “우리 랩실에 온 걸 환영한다, 엘프 친구.”

       

        메릴다는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

       

       

        퇴원한 메릴다와 만나고 여덟 시간이 경과했다.

       

        – 딩, 딩기, 딩….

       

        [현재 ‘마력 회복의 가락(고속)’ 연주를 듣고 있습니다.]

        [음악이 끝날 때까지 다음 버프를 받습니다.]

       

        [마력 회복량 증가(+120%)]

        [마력량 증가(+20%)]

        [피로도 감소 효과(+35%)]

       

        “흐윽, 흑……. 손가락이 너무 아파…….”

       

        그녀가 들려주는 통기타 소리는, 정말이지.

       

        “흐으, 흐아아아악……!”

       

        듣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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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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