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76

    약속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바로 딜런트, 그가 자신을 찾아오기로 한 시간이.

    불안감과 초조함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아직 안심할 구석이 남아있다.

     

    그녀가, 자신을 도와주기로 했으니 말이다.

     

    “이보게 서드, 하루동안 별 일 없었는가? 어깨는 어떤가?”

     

    “아, 스승님. 오셨…….”

     

    이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반응하던 그는 동행한 여성을 보고 급격히 굳어버렸다.

     

     

    “아, 안녕하세요.”

     

    금발 자안의 숲지기. 그녀가 살짝 쑥쓰럽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 순간, 서드는 생각했다.

     

    숲지기? 숲지기라니, 설마. 스승님께서는 내게 ‘자수’를 통해 목숨을 부지하라는 의미로……?

     

    믿을 수 없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 적은 없었으니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자신은 서클러, 숲지기에게 그 사실을 들켰다면 꼼짝없이 체포되고 만다.

     

    그건 해결이 아니지 않은가?

    자신의 범죄경력을 그대로 읊는다면 아마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나올 수 없을 것이므로 딜런트에게 넘어가는 것과 동일한 일이다.

     

    서드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녀는 대체?”

     

    “아, 그게 말일세.”

     

    루크는 태연히 웃으며 설명했다.

     

    “아무래도 나는 어린 아이의 몸이다 보니까, 누군가를 ‘설득’ 하기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못하지 않겠는가?”

     

    루크는 자신의 몸이 남들이 보기에 어리게 보이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고, 어린 아이의 몸은 부탁이나 호의를 받아내기엔 확실히 유리하지만, 반대로 누군가를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데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 믿을 만한 어른을 데려온 것일세.”

     

    “믿을 만한 어른……. 이라고요?”

     

    “그래, 그녀는 내 ‘보호자’니까.”

     

    루크는 장담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그 모습에 서드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생각이 있었다.

     

    그동안 숲지기가 그녀의 보호자라는 것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만약에 그녀의 조직이 ‘숲지기’와 결탁한 상태라면 말이 충분히 되었다.

    과연, 공권력마저 자신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인가?

    과거에는 그런 결탁이 흔했지만, 몇번의 커다란 사건과 폭로가 터진 지금은 공무원 감찰시스템과 각종 법률의 개정으로 그러한 결탁이 거의 끊어진 것이 작금의 현실인데, 그녀는 숲지기마저 자신의 편으로서, 마치 수족처럼 부린다는 것이다.

     

    서드는 이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능력을 생각해보면 딱히 이상하지도 않지.

     

    예르나는 서드가 금방 표정이 밝아지는 것을 보니 지금 그렇게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던 모양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씨익 웃었다.

    왠지 보람찬 일을 하는 것 같아서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제가 반드시 서드한테 해가 가지 않도록 잘 이야기해줄게요.”

    “이야기……말입니까?”

    “네, 이야기요. 상황에 따라선 다른 방식으로 설득해야 할 지도 모르겠지만.”

    “흐음…….”

     

    예르나가 의욕에 불타는 듯 주먹을 들어올리자, 서드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루크를 향해 귓속말로 물었다.

     

    “저기, 그녀가 지금 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게 맞습니까?”

    “물론이지, 내가 이미 충분히 설명을 해 두었다네.”

     

    루크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반응과 그에 대응하는 논리까지 어젯밤 몇시간동안 주고받았다.

    그녀라면 아마 잘 해주겠지.

    제대로 이야기했다면 저 해맑은 표정과 활기찬 행동은 자신감의 표출이 되리라.

    하지만 서드는 아직 미묘한 표정을 지은 채다.

     

    “하지만, 그녀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까요?”

    “그야 그럴게다. 아마도 내가 직접 나서서 입을 열 필요도 없을 테지. 그녀도 나름대로 많은 경험을 가진 여성이니까.”

     

    현대의 사회경험은 당연히 예르나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분야다.

    또 누군가를 설득하는 데에는 그것 만한 무기가 없으니, 자신의 도움은 딱히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제가 할 말은 없습니다만…….”

     

    하긴, 그녀는 혼자서 프로이튼의 뒤를 캐고도 아직까지 멀쩡한 숲지기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경험이 많다’는 것은 그만한 무게를 지니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스승님의 인정까지 받았으니 뭐…….

     

    “그러니, 그대는 안심하고 있게나.”

    “알겠습니다.”

     

    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아니, 하지만 제가 가지 않으면…….”

     

    예르나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서드를 눌러 앉히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그냥 쉬고 있으라니까요.”

    “그래, 그녀의 말이 맞다. 넌 걱정할 게 없으니 안심하고 기다리고 있거라.”

    “그래도, 제가 필요할 겁니다!”

    “꼭 그렇지는 않아요.”

     

    아무리 그래도 영구 근속이라니, 그건 애초에 잘못된 고용방식으로 위법이기 때문에 굳이 당사자인 서드가 자리에 갈 필요는 없고, 실수를 했다는 것도 서클 등 사고로 기억을 잃은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합의금으로 끝날 문제다.

    하지만 서드는 반드시 자신이 가야만 한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라, 필요하면 전화로하면 된다고 안심시키고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래요, 잘 생각했어요. 혹시 배고프면 냉장고에서 아무거나 꺼내먹어도 좋아요.”

    “예…….”

     

    끈질긴 실랑이 끝에, 서드는 ‘자신이 도움이 되지 않음’을 납득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하긴, 숲지기라는 공권력을 행사하는 현장에 자신 같은 반푼이 서클러는 마력흔으로 현장을 어지럽힐 뿐이겠지.

    자신은 스승처럼 자유자재로 마력흔마저 남기지 않을 정도의 정밀한 마법은 사용하지 못하니까.

    지금의 그는 자신의 약함에 한탄할 수 밖에 없었다.

     

    찰칵, 문이 닫히고 이제는 덩그러니 혼자만 남게 된 서드.

    그는 그녀들이 사라진 문을 한동안 바라보고만 있다가, 이내 몸을 바닥에 드러누웠다.

     

    “이 모든 건 내가 약한 탓이다.”

     

    힘이 필요하다.

    스승님처럼 압도적인 힘이.

     

    그렇게 쥔 그의 주먹은, 의욕으로 불타며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꼬르륵…….

     

    “아.”

     

    그러고보니,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것이 언제였더라.

    최근엔 신경을 써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그만.

     

    “……냉장고라.”

     

    분명 아무거나 꺼내 먹으라고 했었지…….

     

    염치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식사를 하지 않으면 사람은 죽는다.

    그렇게 마지못해 냉장고를 열어보니, 가지런하게 만들어진 도시락이 하나 있었다.

    ‘맛있게 먹게나!’ 라고 고풍스럽게 쓰여진 메모가 붙은 채로.

     

    “…….”

     

    대체 뭐지 이건.

     

    ——

     

    그렇게 서드는 예르나의 집에 두었다.

    혹여나 그들이 자신의 거처로 찾아올 것을 두려워하는 것 때문에, 이야기를 할 동안 잠시 자신의 집이 아닌 예르나의 집에 두기로 한 것이다.

     

    그걸 보면 첫인상보다 마음이 여린 사람이구나 싶었다.

    처음의 그 까칠한 반응이 마치 연기라도 되었던 것처럼…….

     

    하긴, 루크랑 비슷한 성장과정을 겪었다면 그런 식으로 소극적으로 변하는 것이 보통이겠지.

    어린 시절부터 실험에 이용당하고, 기억을 잃고, 사회의 악의에 노출된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될 것이다.

    씩씩하게 극복해낸 루크가 굉장히 특별한 것이다.

     

    ‘에휴, 어쩌다 그런 블랙기업에…….’

     

    예르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서드가 건넨 ‘만날 장소’가 적힌 종이를 펼쳐들었다.

     

    “음, 리엔느 숲이라.”

    “거기는 어떤 곳이지?”

    “평범한 숲이야. 하지만 몬스터들은 근처의 루크숲으로 몰리는 덕분에 상대적으로 안전해. 그래서 숲의 마나를 사용하기 위해 꽤 많은 연구시설이나 개인저택이 들어서 있지.”

    “그렇군.”

     

    숲의 저택이나 연구시설이라, 도시가 아닌 숲에 지어지는 시설들은 어떤 형태로 생겼을까?

    루크는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차에 올랐다.

     

    ———

     

    그렇게 도착한 곳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바로 ‘성벽’이었다.

     

    높이는 약 10~12미터정도일까, 원기둥형태의 탑을 벽으로 잇는 전통적인 건축양식을 답습한 형태.

    루크는 그 모습에 살짝 실망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했다.

    옛날에 자신이 기거하던 영주성에 사용된 형태와 비슷한 성벽이었기에.

     

    “이거 꽤 튼튼해 보이는구나.”

     

    “그러게.”

     

    성벽의 구조와 재질을 살피던 예르나는 생각했다.

     

    ‘이 정도면 MF급은 되겠네.’

     

    숲에 지어지는 모든 시설은 몬스터를 대비해야하는데, 현대사회에서는 그 대비를 위해 건물에 내충 설계를 집어넣는다.

     

    그 단위는 일반적인 수준의 MA단계에서부터 시작해, MB, MC, MD등급으로 올라가는데, MF등급이라고 하면 웬만한 몬스터 웨이브에는 끄덕도 없는 수준이라는 의미였다.

    구체적으로는, 오우거나 사이클롭스가 단일개체로 전력을 다해도 무너트리기 어려운 성능이라는 것.

    이건 이미 연구시설이 아니라 벙커라고 불려도 문제가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런 숲에는 조금 과한데.”

     

    일반적인 연구시설에 이만한 방어력은 필요가 없을 터다.

    뭔가 꺼림칙한데…….

    여기가 정말 그냥 제약시설의 사무실이 맞는 걸까?

     

    그런데, 루크는 이미 성벽에 다가가 벽면을 손으로 쓸며 감회에 젖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쩐지, 조금 슬퍼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에 예르나는 루크에게 조심히 다가가 물었다.

     

    “루크, 왜 그러니?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떠올랐어?”

     

    루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좋은 기억이라면 안 좋은 것이 맞으니.

     

    “이토록 단단한 성벽을 보니 처음으로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꼈던 때가 떠올라서 그랬다. 나도 옛날에는 이런 단단한 성벽 뒤에 살았었지.”

     

    루크는 여전히 성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아마 겨울이었나. 식량이 부족해져서 어른, 아이, 노예, 가축할 것 없이 모두가 굶주리던 때가 있었다.”

     

    마왕과 마계의 영향이었던가, 한번 유래없는 대기근이 있었다.

     

    식량이 부족해진 영지는 곧바로 끔찍한 상황으로 변했다.

    전체적으로 양식이 부족하니 동물도 굶어 죽고, 먹을 것이 도저히 없으니 종국에는 식인마저 횡행했다.

    어미가 아이를 잡아먹고, 바로 옆에서 굶어죽은 시체를 뜯어먹는다.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

     

    “나는 그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고자 연구를 계속했지만……. 결국은 답이 없었어.”

     

    아무리 많은 마법으로도 없는 식량을 허공에서 거저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어린 시절의 루크는 지식도 지금처럼 많이 쌓이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모든 실험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수많은 생명이 가축처럼 죽어야만 했지. 어린 날의 나는 그토록 무력했다. 그것이, 내가 처음으로 느낀 슬픔이었어.”

     

    그 사건으로부터 루크는 무력감과 슬픔을 배웠다.

     

    “하하, 기억이 난다. 그때 아마 처음으로 울었던가.”

     

    무력함이 분했고, 지옥이 된 현실이 슬펐다.

    감수성이 풍부한 시기가 겹쳐서일지도 모르겠으나, 루크는 그날 처음으로 차가운 심장을 지녔음에도 눈물을 흘렸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악착같이 노력했던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그 일이 없었다면 그저 오만으로 똘똘 뭉쳐져, 재능만을 믿고 별다른 노력은 하지 않는 삼류 마법사나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그 비극으로 지금의 자신이 만들어졌을 거라 생각하면 약간이나마 씁쓸한 기분도 들었다.

     

    “뭐, 지금은 그것도 다 그냥 지난 추억 같은 것이지.”

     

    이기적이고 오만하며 냉철한 마법사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레니에와 케일의 영향이 분명했으니까.

    그때의 기억과 감정은 루크에게는 분명 추억이었다.

     

     

    그러나 일련의 이야기를 들은 예르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굶주림에 굳이 노예와 가축을 언급한 것, 계속된 실험에 대한 언급, 그리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슬펐던 기억…….

    예르나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장면이 떠오르는 듯 했다.

     

    ‘노예처럼 길러지며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매일같이 실험을 당하며 살았던 건가.’

     

    “루우…….”

     

    그런 기억을 품고 있으면서도, 루크는 어떻게 저렇게 의연하게 미소지을 수 있는 것일까?

     

     

     

     

     

    -예르나가 이상해.

     

    루크의 곁에서 파이가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정말 잔혹한 부분은 일부러 설명하지 않았건만.”

     

    원래 마음이 여린 예르나를 위해 이야기에서 일부러 인륜을 저버린 식인과 인체실험, 흑마법과 언데드, 몬스터의 살육과 끊임없는 전쟁 같은 정말 슬픈 이야기는 언급도 않았다.

    그래서 그렇게 아무런 느낌도 없는 사실만을 입 밖으로 내었을 뿐인데, 그런 것으로 눈물을 삼키고 있다니…….

     

    아무래도 예르나는 자신의 생각보다 더 마음이 여린 것 같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예르나 : 서드는 루크랑 비슷한 처지의 친구니까…
    서드 : 예르나는 스승님의 보호자… 그런 거였나?
    루크 : 그냥 아무 생각 없음
    다음화 보기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