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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6

     

    숨이 멎은 줄만 알았다.

     

    아니, 실제로 아셀라의 심장은 몇 초간 잠시 멈췄을지도 몰랐다.

     

    아득해진 정신이 천리안을 놓아버리기 전에 콱, 주문을 동여맨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라스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익숙한 시점이다. 자신의 시야가 틀림없었다. 가빠지는 호흡과 두근거리는 고동이 그 증거였다.

     

    자신이 입을 열었다.

     

    “라스, 뭐라고.”

     

    “주치의 직에서 사퇴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왜?”

     

    아셀라의 애원하는 목소리는 대답을 바라는 질문이 아니었다.

     

    부디 그 발언이 실수이거나 착각이기를.

    염원을 담은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1초도 안 되어, 라스의 확고한 대답에 의해 와르르 무너진다.

     

    “저는 황궁을 떠나야 합니다.”

     

     

    ―화악!

     

    아셀라의 의식이 튕겨 나갔다.

     

    어느새 그녀는 다시 시간선의 나무 앞에 서 있었다.

     

    “하아, 하아.”

     

    그 장면을 보기 싫다고 무의식에 생각해버린 탓일까, 정신이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관찰을 중단해버렸다.

     

    흥분한 가슴을 부여잡고 가쁘게 숨을 몰아쉰다.

     

    …라스가 왜?

     

    주치의도 그만두고, 궁을 떠난다니.

    그것도 머지않은 미래에.

     

    “…알아. 진짜가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라고.

     

    몇 번을 자신에게 안심시키듯 반복하는 아셀라.

     

    천리안으로 본 건 눈앞의 무수하게 뻗은 시간의 나뭇가지 중 하나일 뿐.

    반드시 찾아올 미래가 아니다.

     

    “그래도… 뭔가 달랐어.”

     

    지금까지는 제대로 시간대를 지정하지 못하기도 했고, 무작위로 장면이 나타나는 게 대부분이었다.

     

    확연하게 달랐다.

     

    여태 본 아셀라는 보통, 황제의 자리에 앉아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지금 본 장면에서 라스는 백의를 입은 의사였다.

     

    여태 봐온 후작가의 망나니나 용사파티의 치유사가 아니라.

     

    현재에서 이어진 미래임이 분명했다.

     

    “하, 그럴 리가 없잖아.”

     

    이미 아셀라는 라스가 없는 삶 따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오늘 자기 전에 그를 만나고, 내일 눈을 뜨면 그를 만난다.

     

    당연한 일상처럼, 라스는 아셀라의 삶에 녹아있었다.

     

    그런 그가 하루아침에 예고도 없이 자신을 떠나겠다고 통보하다니.

     

    심지어 요즘은… 알게 모르게 라스와 묘한 기류도 느껴졌다.

     

    조금만 있으면 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 차오르던 중이었다.

     

    갑자기 왜?

     

    인과가 말이 안 됐다.

     

     

    “…윽.”

     

    다시 한 번 그 시간을 관찰하려 손을 가져가지만 번개가 치듯 마나가 불똥을 튀겼다.

     

    자신이 그 장면을 보고 싶지 않다는 방증이었다.

     

    괴로우니까.

     

    본능이 거부하는데 억지로 마력회로를 가동해서야 주문이 파기될 뿐이다.

     

    “원인을 찾아야 해.”

     

    적어도 라스가 궁을 떠나려 하는 이유라도 찾아야 한다.

     

    분명 자신 때문일 리는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라스다. 하루아침에 주군을 등지고 궁을 떠날 리가 없잖는가.

     

    또 귀찮은 일에 휘말린 게 틀림없다고, 아셀라는 속으로 단정 지었다.

     

     

    방금 보았던 시간보다 조금 밑.

     

    큰 갈림길이 하나 눈에 띄었다.

     

    시간선의 굵은 줄기가 분기하는 장소다.

     

    그곳에 단서가 있으리라 확신한 아셀라는 망설임 없이 갈라진 틈새로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화아악!

     

    다시 한 번 바뀌는 시야.

     

     

    ‘…여긴 어디야.’

     

    아셀라는 자신이 선 장소가 어디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사방에 불똥이 튀고, 건물이 무너져 잔해가 된 벽돌이 나뒹굴고, 마물인지 뭔지 모를 것의 피가 바닥에 흥건하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어느 시내.

     

    그 한복판에 라스가 서 있다.

     

    ‘어쩌다 이런 일이…?’

     

    아셀라는 라스를 먼발치에서 숨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왜인지 그를 향해 한 걸음, 내딛지도 못하고 그저 지켜만 본다.

     

    라스의 바로 앞에는, 아셀라가 아니라 다른 여자가 서 있다.

     

    갑주를 입은 당당한 모습.

     

    용사.

     

    리셰다.

     

    “고트베르크 선생님.”

     

    한창 격렬한 전투가 있었는지, 얼굴에 잔뜩 검댕이를 묻힌 채로 리셰가 라스를 향해 말을 걸었다.

     

    “저와 함께 가요.”

     

    라스를 향해 손을 내미는 리셰.

     

    그녀의 당당한 미소를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아셀라는 라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틀어 달리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만.’

     

    라스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궁금한데.

    중요해. 네가 들어야지 왜 도망쳐.

     

    하지만 그런 바람에 응답하지도 않고, 이미 아셀라는 귀를 틀어막아 버렸다.

     

    …두통이 인다.

     

     

    ―쿵!

     

    정신만이 하늘에서 추락이라도 한 듯, 커다란 충격을 받으며 아셀라는 풀밭에 주저앉았다.

     

    “읏, 하아…”

     

    동기화 마법의 부작용인지 팔다리가 저렸다. 한참을 제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어깨가 떨리는 건, 아마 아파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용사.”

     

    황금빛 눈동자에 차오르는 차가운 분노.

     

    아셀라는 이유를 충분히 파악했다.

     

    “네가 꼬셨구나.”

     

    그 능글거리는 라스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몰라도, 용사가 라스를 자신의 파티에 치유사로서 섭외한 게 틀림없었다.

     

    보이지 않으면 충돌할 일도 없다.

     

    그간은 용사에 대한 화를 삭히고 있던 아셀라였다.

     

    바로 이 순간, 겨우 눈을 감았던 그녀의 마음 속 질투의 마수가 다시 눈을 뜨며 이빨을 드러냈다.

     

    눈치도 없는 미련한 여자 같으니.

     

    라스의 몸 상태가 어떤지 짐작조차 못 하고 있구나.

     

    용사 파티 따위에서 활동하면 지금도 위태로운 라스가 결코 살아남을 리가 없는데.

     

    라스도 라스지. 평생의 숙원인지, 스승의 유언인지 뭔지는 몰라도 대의를 위해서 그런 여자를 쫄래쫄래 따라갈 생각을 하다니.

     

    그런 위험한 일은 아랫사람을 시켜야 한다.

    적임자를 찾아 올바른 위치에 배치한다.

    그게 지배자의 역할이다.

    라스는 구분을 못 하고 있다.

     

    “간단하네.”

     

    아셀라는 심호흡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확정된 미래가 아니야. 라스가 안 가게 만들면 돼.”

     

    아셀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막겠어.

     

    라스는 어디에도 안 가.

     

    라스는 평생 내 주치의로 남아야 해.

     

    그리고…

     

    …남편으로도.

     

    “루시, 주치의를 호출해.”

     

    아셀라는 그 길로 라스를 찾아갔다.

     

     

     

    ***

     

     

     

    “황녀님, 부르셨는지요.”

     

    아셀라가 라스를 만난 건 해가 다 저물어가는 저녁이었다.

     

    일단 그가 눈앞에 있으니 아셀라는 놀랐던 가슴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저녁놀에 빨갛게 물든 그의 백의가 어쩐지 조금 전에 봤던 그 광경과 비슷해만 보여서, 스멀스멀 불안이 피어올랐다.

     

    그 붉은 색이라도 당장 눈앞에서 치우고 싶어, 아셀라는 인사도 하지 않고 그의 손목을 붙잡아 가까운 방으로 데리고 가 신경질적으로 문을 쾅 닫았다.

     

    “무슨 일이신지요.”

     

    라스는 아셀라의 갑작스런 태도에도 그다지 당황하진 않았다.

    그녀가 이상하게 구는 게 여태 없었던 일도 아니고, 그냥 그러겠거니 오히려 여유마저 부렸다.

     

    “라스, 하나 물어보겠는데.”

     

    주치의 직을 관둘 생각이 있니, 주제를 꺼내려던 아셀라는 말을 멈추었다.

     

    너무 흥분했다.

     

    그런 미래가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아셀라밖에 모른다.

     

    괜히 얘기를 꺼냈다가 진짜 현실이 되어버릴 것만 같아서, 공포가 엄습했다.

     

    “예, 어떤 질문이신지요.”

     

    “음… 뭐 하고 있었어?”

     

    “용사의 부상을 잠깐 진료했습니다.”

     

    용사. 그 단어에 아셀라가 눈을 번뜩 떴다.

    그녀의 홍채에서 분노 가득한 마나가 파문을 일으켰다.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전투의 부상만 잠깐 봤어요. 황녀님 말씀대로 자주 교류하다가 용사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생각은 없으니 걱정 마세요.”

     

    “걔가 너한테 해를 끼치니까 그렇지!”

     

    “아이, 용사가 저한테 무슨 해를…”

     

    라스는 아셀라가 가벼운 질투가 아니라 무거운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고 깨달았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어? 아니…”

     

    아셀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라스가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오자 무심코 뒷걸음질을 치며 도망갈 곳을 찾았다.

     

    그제야 아셀라는 좁아진 시야 때문에 라스만 보다가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잡품 창고에 들어와 사방이 빡빡해서 움직일 구석이 없었다.

     

    아셀라에게 가까이 다가간 라스는 그녀가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팔을 올려 등을 슥 쓰다듬어주었다.

     

    “…흡.”

     

    아셀라는 자기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가 나오는 걸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톡, 이마가 그의 가슴팍에 닿아버린다.

     

    “등을 쓰다듬으면 중추신경을 활성화해서 기분이 안정되는 효과가 있어요.”

     

    “…하아.”

     

    라스와 함께 있으면 어느새 안심해버린다.

     

    그도 당연하지.

     

    자신의 몸을 자신보다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남자 아닌가.

     

    “…악몽을 꿨어.”

     

    아셀라는 그렇게 돌려 말했다.

     

    “악몽이군요. 낮잠을 주무신 건 드문 일이네요.”

     

    잠시 고민하던 아셀라는 고민하던 끝에 그의 팔을 슬며시 잡았다.

     

    사락, 서로의 옷자락이 스친다.

     

    “라스, 너라면 어쩔래? 그 악몽이 너무 생생해서 진짜 같으면. 예지몽 같아서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 없으면. 너라면 단순한 꿈으로 치부하고 넘길 수 있겠어?”

     

    뜬구름 잡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 아셀라의 말에, 라스는 짐작 가는 곳이 있는 듯 진지하게 가정해보는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공감받는 것만 같아서 아셀라는 안심이 되었다.

     

    “못 넘기죠. 비슷한 상황은 어떻게든 피해 보려고 할 겁니다.”

     

    “그렇지?”

     

    역시 내가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야.

     

    확신한 아셀라는 라스에게 중요한 사실을 확인하고자 했다.

     

    “라스, 나중 이야기인데.”

     

    “예.”

     

    “혹시 내의원에서 은퇴한다든가, 하면 어떤 일을 하고 싶니?”

     

    아셀라의 빙 돌아간 질문에 라스가 실없이 웃었다.

     

    “하하, 심한 악몽을 꾸셨나 보네요. 평소면 관심도 없으실 질문을 하시는 걸 보면 아직 정신이 온전치 않으신가 보군요.”

     

    라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가볍게 대답했다.

     

    “의사를 그만둘 생각은 없습니다. 후작가에 돌아가 개인병원을 차릴 생각이에요.”

     

    “그런 생각이 있었어?”

     

    “예. 꽤 오래됐어요.”

     

    “다른 장래희망은 없어?”

     

    “없는데요.”

     

    아셀라는 순진하기까지 한 그의 표정을 보고 안심했다.

     

    적어도 용사 파티에서 직접 싸우겠다는 발상은 없다.

     

    “대답으로 기분이 풀리셨을까요?”

     

    “응? 아, 응… 됐어.”

     

    아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방금 대화에서 한 가지.

     

    두 사람 사이에 커다란 인식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셀라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말한 은퇴한 ‘나중’은 적어도 수십 년 후의 이야기.

     

    라스에게는 당장 내후년이라도, 리셰의 배드엔딩이 사라지면 결행할 가까운 시일이라는 온도 차이였다.

     

     

    ‘…그럼 역시 그 여자가 문제야.’

     

    아셀라가 까드득 손톱을 깨물었다.

     

    라스에게 손을 내밀던 용사를 생각하니 다시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라스는 절대 안 줘.’

     

    본능이 떠올리는 문장을 척수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황녀님?”

     

    어느새 아셀라는 라스의 허리를 양팔로 부서질 듯 끌어안고는, 하나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있는 힘껏 그의 체취를 빨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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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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