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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6

       *

         

         

         “에드윈나라고 부르게나.”

         

         

         엘프 여왕은 소박한 귀부인이었다.

         

         

         “인간의 머리로 기억하기엔 여(余)의 이름이 너무 길고 복잡하거든.”

         

         

         정정하자면, ‘엘프 치고는’ 소박한 귀부인이었다고 하겠다.

         

         

         “썩 부담스럽다면, 그래. 에드윈나 이드미르 에일렌덴 에르라스티엔, 알드렌웰 2세라고 불러도 좋네. 절반 정도면 뭐, 예의는 차렸다고 하겠지.”

         “폐하라고 부르겠습니다.”

         “간결한 걸 좋아하는 모양이로군. 인간다워.”

         

         

         여왕은 겸손하게 웃었다. 그녀의 주름진 얼굴에서, 여전히 쾌활하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썩 인상 깊었다.

         

         늙은 엘프라는 것은 다소 생소한 개념이다. 엘프는 임종 직전까지 외형의 변화가 극단적일 정도로 적은 족속이기 때문이다.

         

         노화의 흔적이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음을 준비하는 엘프들에게만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그리고 그런 경우, 대부분의 엘프들은 눈이 먼저 ‘죽는다.’

         

         기나긴 세월 속에서 마모된 감정으로, 퇴적된 지층처럼 굳어가는 것이다. 더 이상 새로운 것도, 즐거운 것도 남지 않아 공허해진다. 점차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서서히 객체로서의 삶을 내려 놓게 된다.

         

         그렇게 나무가 된 엘프는, 여전히 살아있되 객체라 할 수 없다. ‘선조’라고 불리우는 거대한 숲의 일원으로 돌아간다.

         

         

         “보고를 받고 깜짝 놀랐다네. 적적한 차에 재밌는 객이 왔구나 싶었지. 하루빨리 대화를 나누고 싶어 참기 어렵더군. 만일 실례였다면 이해해 주길 바라네.”

         “괜찮습니다.”

         “그래그래. 늦었지만, 칼리온에 온 것을 환영하네. 객이여.”

         

         

         여왕은 흐뭇하게 웃었다. 마치 손자에게 코코아를 건네는 할머니처럼 푸근하게.

         

         그러나 이반은 이세계의 노인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노인이 되면 자연스럽게 공경 받던 21세기의 찬란한 문명 사회와는 달리, 이 미개한 세상의 노인은 ‘살아남은 세월만큼 증명해온 자들’이란 뜻이다.

         

         노동인구의 1/3이 갈려나간 전쟁을 겪은 후에라면 더더욱.

         

         

         “사신을 제외한다면 여와 함께 티타임을 즐긴 인간은 지난 세월 동안… 적어도 두 세기 안에는 없었군. 자, 우리의 예절을 가르쳐줄 생각은 없으니 무례를 괘념치 말고 말해 보시게. 무엇이 필요하여 여의 궁전을 찾았는가?”

         

         

         이반은 조용히 찻잔을 만졌다. 그의 주위엔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근위병 두엇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오직 그에게만 알현 허가가 내려온 상황인 탓이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엘프 여왕의 궁전, 드높은 만년궁의 첨탑 테라스는 따사로운 정오의 햇살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들꽃과 이름 모를 수려한 관목들이 공중정원을 빛내고, 마법공학 장치가 분명한 분수대가 햇살을 산란하며 흐르고 있었다.

         

         그로서도 처음 보는 새들이 노래하듯 지저귀었다.

         

         이 높은 첨탑에서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이드란힐의 모든 거리가 한눈에 보였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새하얀 도심과, 에메랄드 빛 바다 위에 떠있는 수십 척의 군함과 상선들이 보석처럼 보였다.

         

         

         “좋은 곳이군요.”

         “아, 여의 유일한 취미가 관음이라네. 백성들을 굽어 살피는 것 말고는 할 것이 없더군.”

         

         

         군림하되 통치하지 못하는 왕권을 의미했다.

         

         모든 행정권은 추밀원이 지니고 있으니.

         

         크라실로프의 허울 뿐인 입헌군주정과는 달리, 칼리온은 정말 문자 그대로 법률 아래의 왕권을 고수하고 있었다. 오직 상징으로 남은 자리다.

         

         이반은 돌려 말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이런 고위권력자와 정치적인 대화를 나눌 정도로 처세에 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곧 시선을 돌려 여왕을 마주보며 말했다.

         

         

         “마일스톤을 유용하는 집단들이 있습니다. 폐하께서 허락한 일인지요.”

         “관리권한이 여에게 있는 것은 맞네. 하지만 의원들이 결정한다면 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허락 외엔 없다네.”

         “알고 계셨습니까?”

         “그래. 그리고 그대가 진정코 묻고 싶어하는 것도.”

         

         

         여왕은 즐거운 듯 웃었다.

         

         

         “기탄없이 말하게. 칼리온의 고대 유물은 그대의 관심사가 아니지 않나.”

         “본국의 폐세자가 이 나라에 숨어들었다는 첩보가 있었습니다.”

         “아, 그렇지. 이름이… 알렉산드르라 했던가. 그 꼬마가 있었지.”

         “본국은 연합 왕국의 조약에 따라 본국의 죄인을 송환해주시길 청합니다.”

         “그럴 것이었다면 사절을 보내어 공식적인 청원을 하지 그랬나. 그건 여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로군.”

         

         

         본국을 운운할 거라면 공문을 들고 오라.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반이 우묵하게 여왕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즐겁게 반짝이고 있었다.

         

         어디 더 재롱을 부려보거라. 그런 식이었다. 권력 없이 늙어가는 왕의 유희였다.

         

         

         “허면 베올그린 그리켄코스와의 접견을 요청합니다.”

         “호오.”

         

         

         여왕의 눈이 밝게 빛났다.

         

         

         “눈치 챘는가? 크라실로프의 정보력이 상상 이상이로군.”

         “과찬이십니다.”

         

         

         베올그린이 알렉산드르와 손을 잡은 것은 확실하단 말이로군.

         

         애초에, 알렉산드르를 처리하기 위해 크라실로프에 찾아온 것이 아니었단 말이겠고.

         

         하지만….

         

         

         ‘그날 날 죽일 수 있었다.’

         

         

         베올그린이 공중전함의 함장에게 빙의했을 그 당시, 그는 그럴 만한 힘이 있었다. 그가 바랬다면 이반은 그 시점에서 죽었을 것이다.

         

         이 시대에 가장 강력한 마법사다. 근접전을 걸었다고 해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본신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다.

         

         그러나 그때 베올그린은 그를 잠시 시험해본 후 살려주었다. 살려주었다기보단, 차라리 시험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굴었다.

         

         

         ‘당시 알렉산드르의 목적은 크라실로프 왕권의 찬탈 또는 멸망이었다.’

         

         

         알렉산드르와 손을 잡고 싶었다면 깔끔하게 프리첸카야를 폭격했다면 그만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는 뜻은—

         

         

         ‘알렉산드르를… 이용하고 있었나.’

         

         

         그가 지닌 어떤 계획에 알렉산드르가 필요했다는 것.

         

         모종의 계획을 위해 알렉산드르를 칼리온으로 끌어들여 보호해 주었다는 것.

         

         그리고 그건, 지금 그의 눈 앞에 있는 이 늙은 여왕의 인가 아래에 이루어졌다는 것까지.

         

         제 아무리 베올그린이라 하더라도 이 나라에선 일개 추밀의원 중 하나에 불과했다. 엘프는 그가 단순히 용사 파티의 일원이었다 하더라도 무조건적으로 추앙할 정도로 겸손한 민족이 아니었으므로.

         

         반역에 실패한 타국의 왕세자를 품고, 그를 지원해 엘프를 파견하고, 또는 그를 찾기 위해 군함을 대동하는 등의 사태를 용인하기 위해선, 누군가의 지원이 필요했을 것이므로.

         

         여왕은 베올그린의 계획을 알고 있으며,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베올그린 그리켄코스는 고위천문관이었습니다. 폐하의 수족이었으니 추측해볼 따름입니다.”

         “글쎄, 그리켄코스 경이 누군가의 수족이 될 수 있는 사람인가. 후후, 여에게 아직도 손발이 남아 있다 보는가?”

         

         

         의뭉스럽게 웃는 여왕을 보며, 이반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를 하자는 말이다. 베올그린의 위치를 두고.

         

         

         “저는 이 자리에 크라실로프의 군인이 아닌, 일개 객으로 왔습니다.”

         

         

         나는 크라실로프의 군인이다. 제법 높은 직위의.

         

         

         “아국에서는 이런 문화가 있습니다. 가택에 의탁한 객은 다소 불편한 가주의 사소한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 법입니다.”

         

         

         수족이 필요하다면 잠시 어울려 줄 테니,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해라.

         

         이반의 말에 엘프 여왕은 겸손하게 웃으며 물었다.

         

         

         “재밌는 문화로군. 무릇 훌륭한 명가라면 객을 번잡하게 하지 않는 법이 아닌가?”

         

         

         나중에 이걸로 문제를 삼기라도 하려느냐?

         

         이반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호의를 호의로 갚는 일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거래를 확실히 지키기만 한다면 깔끔하게 해결해주마.

         

         이반의 대답에 여왕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크라실로프는 예의를 아는 국가로다.”

         

         

         거래 성립.

         

         이반은 만족스럽게 차를 들이켰다.

         

         

        *

         

         

         “칼춤을 춰달라 하더군.”

         “응…?”

         

         

         이반의 말에 에델은 포크를 내려놓았다.

         

         

         “폐하께서?”

         “그래.”

         “누구에게?”

         “추밀원.”

         

         

         추밀원의 결투대리인(현직 추밀의원, 검각 소유주)가 고개를 모로 꺾었다. 참고로 이곳은 검각 이드란힐 지부의 지부장실이었다.

         

         지부장이 팔짱을 끼고 이반과 에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벨까요?

         

         에델은 고개를 저었다. 아서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칼을 찬 엘프들은 기본적으로 미치광이들이다. 그리고 엘프의 베이스는 미치광이였으므로, 더블 미치광이다. 이반은 이 단순명료한 사실을 어떤 인종차별적 스텐스 없이 인정하며 허릿춤으로 손을 옮겼다.

         

         덤벼들면 바로 도끼를 꺼내 찍을 수 있도록.

         

         

         “정확히 뭐라 하셨는데.”

         “마일스톤을 자기들 멋대로 유용하는 정황을 파악하고, 비리 사실이 확인되면 처분하라 하더군.”

         “그걸 인간— 외국인에게 맡겼다고?”

         “당연히 일단 쑤셔 보란 뜻이지.”

         

         

         엘프 추밀의원들의 본거지는 나무와 같다. 오래된 나무가 그렇듯이 벌집이나 새, 독사처럼 기타 짐승들이 살고 있다는 점에서.

         

         흔들면 뭐가 튀어나올 지 모른다.

         

         21세기의 놀라운 과학기술이 밝혀냈듯이 나무는 뿌리를 통해 서로와 소통하는 생물이다. 어딘가의 나무가 공격 받으면, 다른 나무도 그 사실을 즉각적으로 인지한다고 알려져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엘프 추밀의원들은 나무와 같다.

         

         건드리면 날뛰고, 서로 긴밀하게 소통하며 날뛰고, 더 크게 날뛰기 시작할 것이다.

         

         지난 연금학파의 일과는 다른 문제다. 그건 연금학파 내부의 권력다툼을 베올그린과 검각이 지원한 형태로 끝났으니,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엘프 정치’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번 건은, 엘프 여왕이 외국 ‘인간’을 통해 휘두르는 칼이다.

         

         

         “흐으음.”

         

         

         에델은 가만히 귀를 까딱이며 생각에 잠기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추밀의원들이 여왕에게 날뛰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애초에 실권도 없이 그저 명분만으로 앉아 있는 군주였다. 군주 교체가 그리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녀의 아들이 장성한지 300년이 지났다.

         

         왕위를 교체하고 여왕을 유폐하고 정권을 정리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여왕의 칼자루, 즉 이반은 산산조각이 날 테고.

         

         

         “너는 그걸 받아들였고?”

         “대가를 받고.”

         “대가? 뭔데?”

         “알렉산드르.”

         

         

         베올그린이 알렉산드르와 손을 잡았다면, 베올그린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이번 문제의 절반 이상이 해결된다.

         

         추밀원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다면, 모든 난동이 으레 그렇듯 시야가 축소되기 마련이었다. 화가 난 짐승은 원래 맹목적이기 마련이니까.

         

         그 사이 여왕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쟁취할테고.

         

         이반은 알렉산드르의 신병을 확보해 본국으로 돌아가면 된다.

         

         상호호혜적인 관계다. 이것을 인간들은 ‘거래’라고 부른다.

         

         이반의 설명을 듣고, 에델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치가가 다 됐구나, 욘.”

         

         

         에델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한탄하듯 말했다.

         

         

         “폐하께선 대체 무엇을 바라는 건지 모르겠구나.”

         

         

         이반은 대답 없이 수긍했다.

         

         노화가 시작된 엘프들은 눈이 죽는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모든 감정과 의욕이 마모된 엘프들만 노화를 겪으니까.

         

         그러니, 늙은 엘프가 이토록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꾀하고 있다면 퍽 기이한 일이라 하겠다.

         

         그녀의 눈은 열정과 호기심에 반짝이고 있었으므로.

         

         이반은 엘프들에 대해 정통하지 않았다. 그가 엘프들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것이라곤, 목을 자르면 죽는다는 점과 대단히 성가시다는 점뿐이었다.

         

         그러나 엘프가 아닌, 권력의 입장에서 그는 이런 케이스를 알고 있었다.

         

         늙고 지쳤으며 권력 없는 임금이 무언가에 열정을 보인다는 것은.

         

         대부분 권력을 쟁탈하기 위한 정쟁을 벌일 때 뿐이란 것을.

         

         그러나.

         

         

         “칼리온 내에서의 일이라면 상관 없다.”

         

         

         그것이 크라실로프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아무 상관없었다.

         

         관심조차 없었다. 엘프가 ‘엘프’하겠다는데 무슨 상관이랴.

         

         

         “도와주기 어렵다는 건 알지? 나도 이제 검각을 관리해보긴 해야 해서.”

         “미리 정리해둬라.”

         “세상에, 국정감사를 사전에 고지하기까지 하다니. 이래서 권력이 좋아. 그래서 어디부터 들를 예정이지?”

         

         

         연합국의 대부분 국가들은 이른바, ‘귀족원’과 ‘왕당파’의 경쟁으로 국정을 운영하곤 한다. 굳이 표현하자면 행정부와 입법부의 분립이다. (사법권은 둘 모두가 가지고 있었으므로 분립되지 않았다.)

         

         그러나 칼리온엔 ‘왕당파’라는 것이 없다. 그 어떤 귀족도 왕의 편에 서지 않으니.

         

         따라서 여왕이 추밀원을 들쑤시고 싶다면, 굳이 귀족을 가려 뽑을 필요가 없다. 눈 감고 찍어도 ‘귀족파’란 뜻이다.

         

         

         “생명학파.”

         

         

         그러니 기왕 칼춤을 출 권한을 얻었다면, 의심스러운 녀석 먼저 찍어 봐도 괜찮다는 뜻이겠다.

         

         연금학파에 뒷공작을 벌였다는 정황이 확실한 이상, 지금 상황에서 가장 미심쩍은 자들이 바로 흑마법사들이니까.

         

         이반은 차를 마저 마시고 일어섰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여(余) : 1인칭 인칭대명사, ‘나’로 치환하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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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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