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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6

       

       

       

       

       

       내 눈앞에 서 있는 건, 찬란한 금발을 지닌 건장한 기사였다. 

       

       실비아와 같은 금발이지만, 실비아가 비교적 짙은 톤의 금발이라면 이 기사는 좀 더 반짝반짝 빛나는 밝은 톤의 금발이라고 할까.

       

       그뿐 아니라 얼굴도 훤칠한 미남에 표정에는 선한 정의감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이마에 ‘정의’라고 쓰여 있는, 누가 봐도 주인공 재질인 젊은 기사. 

       

       ‘아니, 레키온이 왜 여기에 있어?’

       

       비록 「레키온 사가」가 그래픽이 구져서 인게임에서 얼굴만 보고 누구인지 한 번에 알아 맞추는 게 어렵다고는 해도, 간판 일러스트까지 나왔던 주인공 레키온을 내가 못 알아볼 수는 없었다.

       

       ‘실물로 보니까 진짜 포스가 장난 아니네. 여러 모로.’

       

       일단 내 예상대로 하무트교를 잡으면서 폭풍 레벨업 및 신성력 스탯을 얻은 듯, 기존 스토리 시점보다 훨씬 강해 보였다.

       

       ‘거기다 주인공 특유의, 정의로 이루어진 인간 같은 분위기까지.’

       

       누구라도 저 선한 웃음에는 경계를 풀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고 보니 고유 특성 중에 ‘매력 만점’도 있었지.’

       

       어쩐지, 벌써부터 내 마음 속 경계심이 사르르 녹고 있는 이유가 있었다. 

       

       ‘근데 진짜 레키온이 왜 여깄지?’

       

       설마 이게 바로 진짜 ‘엄청난 우연’인가? 이럴 수가 있나?

       

       “저기요?”

       

       놀라서 벙찐 나에게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아아, 네. 죄송한데 누구시죠?”

       

       나는 최대한 신속하게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일부러 조금 경계하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데 얼굴만 보고 알아본 것처럼 놀라는 것도 이상하니까.’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상황 자체는 나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었다. 

       

       파메라 성에 근무하는 기사단장을 어떻게 만나야 할지 막막한 상황에서, 바로 당사자가 눈앞에 나타났으니까 말이다. 

       

       내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경계하는 척을 하자, 레키온은 놀라지 마시라는 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아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제 소개부터 드리도록 하지요. 저는 지금 파메라 성에서 작은 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는 레키온이라고 합니다.”

       

       레키온의 말에 실비아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서, 설마 그 용사 레키온 말씀이세요?”

       

       나이스, 실비아 씨! 연기 좋고.

       

       레키온에 대해서는 이미 실비아와 아르에게 설명을 해 준 적이 있었지만, 역시 눈치 빠른 실비아는 내 스탠스에 잘 맞춰 주었다. 

       

       “하하하. 용사라…. 다들 절 그렇게 불러 주시더군요. 아직 저에게는 과분한 칭호입니다만, 그에 걸맞은 기사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역시 주인공다운 대사다.

       

       “여튼, 타지에서 오신 분들 같은데 제 이름을 듣고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파메라 성과 베나콘이 가깝다 보니 가끔 들르곤 하는데, 마침 제가 가지고 있는 인형과 똑같이 생긴 귀여운 사역마를 안고 계시기에 저도 모르게 말을 걸어 버렸네요.”

       “인형이요…?”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르를 모델로 만든 인형은 지금도 아르가 틈날 때 아공간에서 꺼내 안고 잔 다음 안 쓸 때는 다시 고이 아공간에 모셔 놓는데.

       지금도 당연히 아공간에 있을 거고.

       

       그런데 인형이라니, 다른 데서 우연히 아르랑 닮은 와이번 인형이라도 만든….

       

       “……!”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레키온이 자신의 뒤에 있던 기사가 들고 있는 가방에서 꺼낸 인형을 보고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그 인형은…?”

       

       레키온이 들고 있는 인형은 다름 아닌 ‘마글렛의 인형 가게’에서 주문 제작한 인형과 똑같은 인형이었다. 

       

       착각일 리가 없다. 

       원단 가격만 50실버쯤 되는 고급 원단으로, 거기다 이렇게 정교한 솜씨로 아르 인형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현재 마글렛 씨밖에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내가 놀란 반응을 보이자 레키온이 허허 웃었다. 

       

       “제 절친의 할머니께서 인형 가게를 운영하고 계시거든요. 얼마 전에 그 친구가 할머니 댁에 휴가를 갔다가 제 선물로 이 인형을 사 왔습니다. 너무 마음에 들고 귀여워서 항상 가지고 다닐 정도인데…. 오늘 우연히 똑같이 생긴 사역마를 발견한 거죠. 안 그래도 이 인형도 실제 사역마를 모델로 만들어졌다던데…. 이름이 아르라고 했던가?”

       “쀼우…!”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내 품에 안겨 있던 아르가 반응했다. 

       

       “오! 반응했어요! 설마 진짜로…?”

       

       레키온의 표정이 단박에 밝아졌다. 이러다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그는 기대에 찬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맞아요. 얘가 아르입니다. 얼마 전에 마글렛 인형 가게에 들렀던 것도 사실이고요.”

       

       나는 대답을 하면서 머리를 굴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했다.

       

       ‘레키온의 절친이라고 하면 알렉스랑 데보라밖에 없을 텐데…. 알렉스는 내가 알기로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한 번도 없었고. 그러고 보니 데보라가 가끔 할머니 보러 간다고 했던 기억이 나는 것 같은데. 그럼….’

       

       나는 그제야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이 하나씩 맞춰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스토리에서 잠깐 언급됐었던 데보라의 할머니가 설마 ‘마글렛의 인형 가게’를 운영하고 있던 그 할머니였던 건가? 와…. 이런 우연이?’

       

       「레키온 사가」의 스토리는 거의 대부분 서사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중간 중간 서브 스토리처럼 인물들끼리 대화를 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비중이 그리 크지 않았다. 

       

       ‘애초에 「레키온 사가」라는 게임의 진면목은 고루한 메인 스토리가 아니라 랜덤 캐릭터 스타트로 볼 수 있는 다양한 진행 방식과 캐릭터 육성 자유도에 있었으니까.’

       

       「레키온 사가」의 메인 스토리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영웅담으로, 이미 판타지 장르의 게임을 많이 해 본 사람이라면 그냥 대화창에서 스페이스바만 눌러도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물론 난 그래도 1회차 때까진 대사를 대부분 스킵하지 않고 읽었었다.

       

       ‘그래서 데보라가 할머니 얘기를 했던 게 기억 나는 거고.’

       

       그마저도 사실 비중이 적어서 간신히 기억이 난 거긴 하지만….

       

       어쨌거나 우리가 갔던 인형 가게가 알고 보니 데보라의 할머니의 가게였고, 거기서 할머니가 시범으로 만들어 진열해 두었던 걸 데보라가 휴가 때 사서 레키온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면 이 상황이 이해가 되기는 했다. 

       

       “와!! 진짜…. 제가 실물 모델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중에 한 번 꼭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이런 우연이 있네요! 혹시 초면에 죄송하지만 아르랑 악수 한 번만 해 봐도 될까요?”

       “아르만 좋다면 전 상관없습니다.”

       

       레키온은 그 말에 뛸 듯이 기뻐하며 아르에게 물었다. 

       

       “저, 아르야. 안녕? 혹시 악수 한 번 해 줄 수 있겠니?”

       

       레키온은 혹시라도 아르가 거절할까 봐 마음을 졸이는 듯,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쀼우!”

       

       아르는 활짝 웃으며 손을 뻗어 레키온의 손을 잡아 주었다. 

       

       “우와…! 말랑말랑해…. 진짜 살아 움직이는 아르라니….”

       

       뭔가 우리 입장에선 어감이 이상하긴 했지만, 지금껏 인형만 보다가 진짜 귀여운 우리 아르를 보니 감회가 남다른 모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좋아, 아르야. 호응 좋았다.’

       

       아르 역시 이번 여정의 목적이 레키온과 만나는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인지, 평소보다 더 잘 호응을 해 준 듯했다. 

       

       아르의 말랑말랑한 젤리를 손가락으로 눌러 보던 레키온은 곧 정신을 차리고 나에게 웃어 보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어디로 급히 가시는 중이었던 것 같은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하하, 괜찮습니다. 베나콘에 처음 온 김에 저 앞 용병 길드에 잠깐 들르려고 했던 거라서요.”

       

       괜찮고말고. 이게 다 레키온 당신 만나려고 하던 짓인데.

       

       ‘일단 어떻게 만나긴 했는데, 이 다음이 중요해.’

       

       내가 뭐라고 덧붙이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용병 길드! 좋지요. 저도 베나콘에 찾아올 때 종종 들르곤 하는데, 같이 가시지 않겠습니까? 이것도 인연인데 말이죠.”

       “어, 음. 좋죠!”

       “그럼 가시죠!”

       

       오히려 레키온 쪽에서 먼저 동행을 제안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나는 아르를 안고 그대로 레키온과 함께 용병 길드에 들어갔고. 

       

       “어엇! 저 분은!”

       “레키온 단장님이잖아?”

       “용사다, 용사!”

       “옆엔 누구지?”

       “용사님의 지인 분들인가 봐!”

       

       레키온을 알아본 용병들은 뭔가 레키온과 친해 보이는 우리를 매우 환대해 주었다. 

       

       “아이고, 단장님!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

       “하하, 길드장님. 또 뵙습니다. 여긴 제 지인 분들인데, 용병 길드에 들르신다고 하셔서 같이 와 봤지요.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요, 그럼요! 당연히 부족함 없이 모셔야지요!”

       

       베나콘의 용병 길드장까지 나서서 우리에게 꾸벅 인사를 할 정도였으니, 용사의 위상이 대륙 동부에서 어느 정도인지 피부에 와 닿는 것 같았다. 

       

       용병 길드에서 가장 넓은 수련장 무제한 대여, 원하는 의뢰 선점 등의 대우를 보장받은 우리는 다소 얼떨떨한 기분으로 밖으로 나왔다. 

       

       “감사합니다, 레키온 단장님.”

       “뭘 이 정도 가지고요. 아, 그리고….”

       

       심지어 레키온은 뭐가 더 남았는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작은 큐브 같은 걸 하나 내밀었다.

       

       “저희 기사단이 지금 일이 많아 손이 조금 부족한데, 혹시 괜찮으시면 저희 일도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레키온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보수는 섭섭지 않게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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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Picked Up a Hatch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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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츨링을 주웠다
Status: Ongoing Author:
But this guy is just too c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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