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76

        

         외부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화약의 비를 퍼붓고 있었다면, 방에는 깨진 유리의 파편이 폭풍이 되어 흩날렸다.

         

         지나친 압력에 의해 뭉툭한 형상으로 부서져야 할 강화 유리가 날카롭고 잘은 조각으로 변해 쏟아졌지만 안에 있는 장내에 있는 누구도 거기에 크게 신경을 할애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응당 이럴 거라 예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해서.

         제로는 통신으로만 설명 들었던 적의 수준을 재빨리 파악하고자.

         마지막으로 민 소위는 새로이 나타난 난입자의 정체를 확인하느라.

         

         어느 쪽이던 대치 상황을 무너트리는 기폭제로서 제로의 등장은 훌륭하게 그 역할을 수행했다.

         

         – …물러나시지 않는다면. 즉각 사살하겠습니다. –

         

         “칫…!”

         

         저게 추적자들을 죽인 놈인가? 엑사테크의 드로이드?

         방해라는 게 명백하다면 세부 소속은 상관없다. 어쨌거나 저게 좁은 출입구를 틀어막고 서버리면 진입이 요원해진다.

         

         그나마 로봇이 목표물을 지키듯이 가로막고 선 덕분에 소녀가 가할 총격은 배제해도 되니까…!

         

         드가가각—!!

         

         내부로 뛰어든 소위의 꽁무니에 폭죽이 달린 것 마냥 불꽃이 튀었다.

         대상의 속력을 역산해 그에 맞춰서 총구를 돌리고 있음에도, 벽과 카펫에 틀어박히는 얼마 남지 않은 탄약 잔량을 본 제로는 사격을 중단.

         

         불규칙적인 스텝과 자유자재로 조절되는 가속, 저 군인은 분명하게 전투 기계를 여러 번 상대해본 경험자인 만큼 단조로운 예측 연산에 의존한 공격으로는 직격시키기 어려우리라는 판단이었다.

         

         그나저나 순순히 경고를 듣고 물러나리라 생각치는 않았으나 외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들다니.

         화려한 착지의 여파로 과열된 내부 완충 관절의 냉각 시간을 벌고자 한 행동이 뼈아픈 낭비가 되었다는 사실에 그의 회로판이 살짝 뜨거워졌다.

         

         더 이상의 실수는 있을 수 없다. 용납되지 않는다. 안 그래도 적의 위치가 예상보다 가까워져서 자칫 그녀가 상처입을 경우의 수가 생겨버린 와중이다.

         

         “잠깐, 너 괜찮아!?”

         

         – 작동하는 데 아무런 이상 없습니다. –

         

         이젠 흉흉한 기세를 감추지도 않은 채로. 건너편에서 전투 의지를 끌어올리고 있는 소위에게 스캐너를 고정한 제로가 아나스타샤의 질문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때 의뢰가 끝난 직후, 에나마 본부 내에서 마사나리와 격전을 치른 후 부품 교체나 수리도 받지 못하고 무한정 대기 상태에 놓여있던 데다가.

         

         방금 빠른 도착을 목표로 격전지를 돌파하면서 새로 생긴 상처와 고화력 관통탄에 의한 파손까지 추가해져 여기저기가 너덜너덜해진 장갑은 한 눈에 봐도 멀쩡해 보이진 않았으나, 드로이드에게 장갑이란 부속품이자 소모품. 일종의 껍데기.

         

         조각난 부스러기가 흐르더라도.

         흉해보일지언정 중요한 회로와 관로(Pipeline)가 무사하다면 제 역할을 다한 것이기에.

         

         더군다나 지금 중요한 건 숨을 고르고 있는 코앞의 적이다.

         

         “후우…….”

         

         눈을 감은 민 소위와 스캐닝 강도를 한층 높인 제로 사이의 공기가 일렁였다.

         

         가정용 로봇의 홀로 스캐너에는 심도(深度; 깊은 정도) 증폭 기능이 없어서 군복 밑에 숨겨진 내용물까지 파악하지는 못했어도, 드러난 두 손끝에서 탐지되는 임플란트만 최소 5~6개.

         과연 전력 증강에 있어서는 양보가 없는 헤이롱의 장교다운 밀집율과 개조율을 자랑하는 걸로 보였다.

         

         반면 민 소위는 각오한 것보다 빈약하고, 너덜너덜해 보이는 제로의 무장을 외려 경계. 과거 겪어본 싸움을 바탕으로 로봇을 가늠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드로이드는 전투 상황이 지속되거나 적대자가 제대로 된 응답을 돌려주지 않으면 경고문이나 안내를 반복해서 송출하는 게 보통.

         하지만 이 검은 기계는 별도의 명령이 없었음에도 최초의 위협 이후 침묵을 선택했다.

         

         능동적인 대처, 유연한 자세 잡기, 거기에 피부를 저릿저릿하게 만드는 살의까지.

         종합적으로 보면, 일반적으로 로봇류에 장착되는 약인공지능의 설계 범위를 명백히 벗어난 이물이다.

         

         설마한들… 특급 위험지역인 폐쇄 도시에서 흘러나온 ‘인류의 적’은 아니겠지만.

         

         거슬릴 게 분명한 전위와 실력 불명의 후위로 진영이 완성되어버린 적을 상대로, 앞을 무시하고 달려드는 전략은 취하기가 애매해졌다. 또 그렇다고 보유한 소총과 권총으로만 제압할 수 있다는 확신도 없었고.

         

         으드득…! 쾅—!!

         

         ……옷 밑에서, 민 소위의 허벅지 힘줄이 한껏 당겨졌으며. 한 쪽 무릎이 굽혀지고 손 또한 반쯤 주먹을 쥐었다. 격전을 대비한 정신 무장도 육체의 준비도 종료.

         

         그렇게, 위험한 다리를 건너야 할 시간이라는 결심과 함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 사람과 한 로봇이 격돌했다.

         

         “아이씨…! 또 그런 식으로 붙어서 싸우면 나보고 어떻게 도우라는 건데!?”

         

         …또 다시 벌어질 게 틀림없는 고속 전투의 예감에 누군가가 분통을 터트리거나 말거나.

         

         “핫…!!”

         – ……! –

         

         자로 잰 것처럼 방 중앙에서 마주친 두 흐름이 정면으로 부딪혔다.

         발사된 화살처럼 튕겨 나온 민 소위의 선택은 비교적 장갑이 얇은 머리를 노린, 셋업조차 없이 낫처럼 휘둘러진 기습적인 하이킥.

         

         그에 맞선 제로의 수는… 방어? 그건 0.02초만에 각하되었다.

         

         날아들기 전에 관측한 외부 전황이라면, 아직 방어하는 카사네 부하들의 전선이 무너지기엔 시기가 일렀다. 게다가 설령 사기가 꺾인 일부가 항복하더라도 이른 시기에 이 여자와 결판을 낸다면 주인의 바람대로 목격자를 최소화한 채 사라질 수 있으니.

         

         그렇다면 내밀어야 할 건 저것에 준하는 강력한 공격. 다행히, 선수를 빼앗겼어도 드로이드의 몸체는 조금만 무리하면 얼마든지 따라잡을 방법이 존재했으니까.

         

         순식간에 가슴 언저리까지 수직으로 솟구친 제로의 무릎이 기묘한 궤적을 그린다.

         골반 구동부와 무릎의 인대 역할을 하는 컴프레셔가 안전 규정을 한참 위반한 강도로 미친듯이 작동했기에, 에너지의 낭비조차 거의 없이 동일한 높이와 속도를 간직한 상태로 내밀어졌다.

         

         유일한 관객이 그 흐느적거리면서도 아찔한 발차기를 알아볼 격투기 지식이 있었다면 이름도 널리 알려진 브라질리언 킥이라는 명칭을 입에 담았으리라.

         

         빠악——!!

         

         “왁!?”

         

         찢어지는 민 소위의 군복 바지, 터져 나가는 제로의 복합 장갑.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양측 정강이가 X자로 교차하며 풍압을 일으켰다.

         바닥에 널린 유리 조각이 싸움터에서 도망치려는 것처럼 구석으로 굴러갔고, 생각보다 훨씬 강한 흔들림에 소녀는 권총과 앞머리를 다잡았다.

         

         모든 기업은 제식에 열중한다.

         자진 퇴사라는 경우가 굉장히 드문 풍조나, 평생 직장에 종신 고용을 생각보다 꽤 잘 챙겨주는 기업들이 많다는 사실도 한몫 했지만.

         

         비록 거시적 관점에서 대체 가능한 소모품일지라도. 확실하게 울타리 안과 울타리 바깥의 인간을 갈라놓는 게 유연한 정치와는 별개로 집단 간 경쟁에 유리하다는 것을 다년간의 역사 공부를 통해 알았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취직 = 입대’의 개념이 적용되는. 골 때리는 군수 기업 헤이롱 코퍼레이션은 엄격한 규율과 규칙을 구성원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물론, 그 질을 여러모로 상향 평준화하는데 힘을 썼다.

         

         다소 지출은 세도 무기와 군수품 시장을 과점한 그들에게는 감당 가능한 투자였으니.

         

         거기엔 임플란트나 장비 개발은 기본, 모든 상황에 대응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교전 원칙(Combat Doctrine)과 병기술. 그리고 상대에 따른 마셜 아츠(Martial Arts; 동양권 비무장 무술의 총칭)마저 포함되어 있었다.

         

         그 결과…….

         

         ‘헤이롱 박투술黑龍 搏鬪術, 6식 Láng yá fěnsuì(狼牙 粉碎; 늑대 이빨 부수기)’.

         

         “흡……!”

         – 동작, 하나하나가! 참으로 기운이 넘치시는군요…! –

         

         쐐액!! 하고 공기 찢는 소음을 발생시키며 맞닿은 두 주먹이 요 앞까지 제로가 버티던 공간을 관통, 대신 그 뒤에 있던 나무 의자에 적중하자 의자는 밀려나거나 날아가는 게 아니라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그대로 산산조각.

         

         격렬한 회피 기동 와중에 답례로 내질러진 제로의 블레이드가 한 줄기 빛처럼 소위의 머리를 노렸으나, 소위가 다리를 찢듯이 자세를 낮춰 아깝게도 그녀의 행사용 정모(Marine Cap)을 쪼개는 선에서 그쳤다.

         

         최초의 공방에서 제로가 다리를 부러트리지 못한 것에 낙담했다면, 소위는 이 간악한 로봇이 격돌하기 직전 영리하게 추가 장갑을 스스로 해제하는 것으로 힘을 분산시킨 것에 내심 혀를 찼다.

         

         강공強攻 다음 강공, 오직 단단한 물체를 파괴하기 위한 목적을 띤 그녀의 맹공은 일견 무식해 보였지만 특정한 절도와 형(型; Style)을 갖추고 있었다.

         

         에나마가 순수한 인간의 한계와 잠재된 육체의 폭력성에 투자했다면, 헤이롱은 기술과 기교.

         

         견제보다는 파괴, 기다리기보단 힘이 남아있을 때 계속해서 먼저 달려들어 대상의 파워를 억제하는 전투 방식. 대 드로이드전 전투의 정석이자.

         서로 다른 극점을 추구하는 두 메가 코프의 진면목을 가까이서 교대로 직관한 아나스타샤의 감상은…… ‘아, 헤이롱 새끼들. 하여간 태생 깡패 아니랄까 봐 근접전 짬도 장난 아니네.’ 였다.

         

         …역시 원거리에서도 근거리에서도 사냥하기 귀찮은 세력(Faction)이라거나, 근접 데미지가 추적자급으로 높게 나오는 이유가 있었다는 중얼거림과 더불어서.

         

         “후우, 지금부터 적극적으로 이것저것 만지작거릴 거야. 최대한 네가 움직이는 거에 맞춰보겠는데… 내 인식보다 빠른 건 못 쫓아가. 준비되면 신호를 줄 테니까, 조심해.”

         

         – 확인했습니다. 백그라운드 서브 루틴 강제 종료. 여유 메모리 전체 활성화, 할당된 영역을 전부 공간 지각력에 재배치합니다…! –

         

         쨍강!!

         분명 옆에서 날아드는 발차기에 제로가 검날을 가져다 댔는데, 순식간에 각도를 틀어서 내리찍듯이 밟는 걸로 한 쪽 처형검을 부러트리는 광경을 본 그녀는 개입하기로 마음먹었다.

         

         정정당당한 대결을 방해하는 게 거슬려서 여태 기다렸다기보단, 되는대로 도와 주려다가 괜히 방해가 되는 건 아닐까 걱정한 결과였지만… 충직한 드로이드가 혼자서 이겨내기 버거운 상대라면 얘기는 전혀 달라진다.

         

         피잉…! 하는 이명과 함께.

         

         “!!”

         

         아래에서 위로, 이걸로 벌써 오늘만 두 번이나.

         드로이드의 옆구리를 빈 공간을 통해 귓가를 스친 예고 없는 탄두에 민 소위가 눈을 사납게 치켜 떴지만.

         

         “큿! ……또 깜찍한 짓거리를!”

         

         “아니, 지가 먼저 사람 죽이러 왔으면서!? 미친 년이 진짜 적반하장이네!”

         

         허망한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의 표출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죽을 뻔한 입장에서 듣기엔 상당히 양심 없는 말이었기에 아나스타샤도 질 수 없다는 듯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걸로 응수.

         

         이걸로 저 또라이 같은 년이 자신의 ‘총’을 조금 더 경계해주기를 바라며, 정말 장기로 삼은 적 따위 없지만 이상하게 잘 먹히는 도발을 마무리했다.

         

         의외성이 넘치는 변칙 공격은 한 번으로 족하다. 왜냐? 한 번만 확실하게 통하면 같은 상대에게 두 번 다시 쓸 일이 없으니까.

         그러니… 다음번에는 절대 끝내도록 제로와 같이 빌드 업을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홈 시스템에 내장된 기능들을 면밀히 살폈다.

         

         반면 거기까지 전투를 자연스럽게 이끌어야 하는 제로는 한탄을 금치 못했다.

         갑작스레 떠안은 책임 때문이 아닌, 자신의 능력이 충분하지 못해서 자꾸만 그녀를 번거롭게 만든다는 자책감에.

         

         아무래도 토대가 가정용 봉사 로봇이다 보니 구태의연한 출력 제한에, 부족한 기초 강도에, 아주 자잘한 문제점들이 많다.

         

         특히나 한계치까지 메모리를 증설했어도.

         전투 상황만 되면 복잡한 탄도나 충격량(Impulse) 계산에 발생하는 오차와 어긋남 탓에 어쩔 도리 없이 입은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투정을 부려도 대체재가 없었으니.

         

         ……더, 더. 조금 더 빠르게, 조금 더 효율적으로. 아나스타샤가 승리로 향하는 길을 열어야 한다.

         

         독특한 세포 형질과 번뜩이는 영감으로, 그 비좁은 연구소나 황량한 사막보다 더 큰 가능성과 세계가 존재함을 가르쳐주고 아낌없이 이름까지 지어 주신 부모님의 면전이 아니던가?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계속 보일 수는……… 부끄러움? 분명 그녀가 자주 내보이는 감정이었다. 전투가 종료되고 나면 이런 때에 느끼는 게 맞는지, 해당하는 과거 기억과 대조하며 가르침을 받도록 하자.

         

         – 냉각수 순환 주기 가속, 오버클럭(Overclock; 중앙 처리 장치의 성능을 원래 연산 속도보다 끌어올리는 행위) 맥스 부스트. –

         

         “크윽…!!”

         

         전투가 새로운 국면(Second Phase)으로 넘어갈 거라고 예고하는 것 마냥 몸에 부착된 램프들이 일제히 붉은 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드로이드를 본 민 소위가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이게 물고 늘어지려는 틈에 도망가려는 속셈?

         아니, 그렇게는 안 된다. 그런 방식으로 멍청하게 임무를 실패하는 건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었다. 허면…!

         

         ‘헤이롱 박투술, 4식 Bǎihé qiēduàn(百合 切斷; 백합 꺾기)’.

         

         드드드드득……!

         

         회전력을 곁들인, 거친 다리 후리기 겸 바닥 쓸기에 잘려 나간 카펫이 비산했다.

         앉은 자세로 깊숙하게 들어온 각법, 만약 이후에 주인을 모시고 이동해야 하는 입장만 아니었다면 기동성 손해를 감수하고 내리찍는 것도 고려해봤을 법한 찬스였지만.

         

         홀몸이 아닌 제로는 차선책을 택했다.

         공중으로 뛰어오른 후에 아껴 놨던 탄창을 전량 비우는 것으로. 그리고 그걸 기다리고 있던 소위는 이를 악물고 사문死門으로 돌진하는 답을 선보였다.

         

         치솟은 바닥재가 사정없이 부딪혔고, 군복을 찢은 탄환들이 위태롭게 피부를 스쳤지만. 기어이 체공 시간 내로 그 밑부분에 도달하는데 성공한 그녀의 전신에 힘줄이 튀어나왔다. 어느샌가 주워 든 동강난 처형검의 날부분을 피가 흐를 정도로 강하게 쥐고.

         

         이 망할 기계가 이동하지 못하는 사이 크게 한 방 먹여주겠다는 듯이.

         

         ‘헤이롱 병기술, 2식 Lónggǔ jiěxī(龍骨 分开; 용 뼈 가르기)’.

         

         “터져라…! 이 부서지기 직전의 고철덩어리가!!”

         

         – 이런. –

         

         바닥에 군화를 틀어박는 것으로 흔들리지 않는 무게 중심을 잡은 팔이 내질러졌다.

         하지만 초승달을 그리며 휘둘러지는 참격을 보고도 제로는 남 일이라는 것처럼 추임새를 넣고 말았다.

         

         깡통이라는 훌륭한 정식 명칭이 있는데도, 한가롭게 소개할 여건이 안 돼서 자꾸 엉뚱한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는 일이 많았기에? 혹은 잔뜩 분위기만 만들어 놓고 허망하게 패배하는 게 웃겨서?

         

         아쉽게도 둘 다 아니었다.

         정답은 잘 짜인 각본처럼, 지금 싸우는 게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서 노는 해커인 줄 모르고 거듭 방의 중앙으로 스스로 돌아오는 소위를 보고 흘린 실소에 가까웠다.

         

         “지랄! 그런 필살기 같은 걸 누가 쓰게 해준대!!”

         

         [ 플로어 타일을 교체합니다! 여사님을 위한 세련된 대리석 바닥은 어떠신가요? ]

         

         “!?”

         

         방 모니터에 떠오른 어처구니없는 시스템 메시지를 제대로 볼 겨를도 없었다.

         괜히 진각을 밟은 탓에, 전략적으로 가장 이동할 공간이 많은 가운데를 점유하려고 고집한 대가로. 정중앙부터 차례차례 뒤로 젖혀지기 시작한 바닥을 피하지 못한 그녀의 자세가 무너졌다.

         

         이런 상태에서 망할 날붙이를 억지로 휘두른다고 무슨 유의미한 결과가 날까? 그럴 리가.

         틀린 길을 골랐다면 빠르게 수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찰칵!!

         타다다다다당—!

         

         그새 피투성이가 된 날을 내던진 소위가 느슨하게 매고 있던 소총을 꺼낸 뒤, 똑바로 견착조차 하지 않고 지향 사격(Hip Shot)을 흩뿌렸다.

         뭣 같은 드로이드를 버려 둔 채 더욱 뭣 같은 개짓거리를 벌인 게 명백한 목표물을 향해.

         

         “으갹?! 왁!? 야 이 씹…!!”

         

         – 감히! –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작품을 감상하던 아나스타샤가 기겁하고는 엄폐.

         거꾸로 천장을 박차고 샹들리에를 붙잡는 것으로 자연 낙하보다 훨씬 빠르게 착지한 제로가 급한대로 리드 샷을 역으로 뒤쫓는 것처럼 따라가며 자신의 장갑으로 탄을 쳐냈다.

         

         덤으로 잡히는 의자 같은 물건들도 견제하듯 집어 던졌고.

         

         재질이 연약한 목조 가구 따위, 백날 휘둘러도 파손되기만 할 뿐. 물리력이 다 전달될 리 만무해서 어느 쪽도 여태 큰 관심을 주지 않았지만 투사체의 운동 에너지를 줄이는 데는 이만한 장애물도 없었으니까.

         

         한 쪽은 쏘고 다른 쪽은 묵묵히 버틴다.

         일방적으로 재미보는 구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팅!! 하고.

         탄창이 비는 소리가 울리자마자 방패 역할을 자처하던, 눈이 말그대로 시뻘개진 케어봇이 돌진했다.

         

         때마침 튄 총알로 인해 스프링쿨러가 터졌는지, 실내에 물이 쏟아지는 걸 윤활유 삼아 미끄러지듯 근처까지 접근.

         승부수를 띄우려는 것처럼 파손되지 않게 감춰 놨던 남은 블레이드를 사출했으니.

         

         그걸 본 소위 또한 쓸모를 다한 라이플을 버리고 패용하던 권총을 뽑아 들었지만.

         화기와 칼날, 그 양 첨단은 정말 아슬아슬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간극을 극복하고 맞닿았다.

         

         까드드득!!

         

         쪼개지는 총구, 그리고 역할을 다하고 금이 가는 블레이드.

         뒤얽힌 양측의 기대와 노림수가 어찌나 결승선에 가까웠는지를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순간 민 소위는 성공을 확신했다.

         

         ‘네놈만 기만술을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판단은 끝났다. 소녀 쪽은 무력하다. 가끔 권총도 쏠 수는 있고 잔재주도 부릴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무력한 일반인 수준.

         

         필연적으로 목표물을 노리면 드로이드가 방해한다.

         다른 말로 하면 탄약을 소모하는 것만으로도 이 고물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

         

         “드디어 잡았…!!”

         

         장갑이 떨어져 나가 상대적으로 연약한 뼈대가 드러난 로봇 다리를 향해 강렬한 로우 킥이 발해졌다.

         

         이대로 한 짝을 부숴버리고, 그대로 넘어가겠다는 판단은 얼핏 나무랄 곳이 없어 보였다.

         다만 그녀의 실수라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수단을 뻗어 주기를 묵묵히 기다리는 사냥꾼도 있었다는 점, 안타깝지만 그것뿐이다.

         

         – 3… 2… 1… 임팩트. –

         

         우드득!!

         

         

         ★ ☆ ★ ☆ ★

         

         

         

         “진짜 사람 걱정시키기는!!”

         

         제로의 손아귀가 물고기를 낚아 올리는 어부처럼 미친 년의 발목과 종아리를 움켜쥐는 걸 보자마자 숨어있던 테이블 밖으로 뛰쳐나왔다.

         

         다급한 상황이 오면 저 이상하리만치 튼튼한 발차기가 무심코 튀어나오리라는 걸 나도 제로도 눈치채고 있었다. 나는 순수하게 관찰할 여유가 있어서 알았다면, 쟤는 전투 도중에도 실시간으로 행동 양식을 분석했다는 차이가 있었지만 어쨌든.

         

         전체적으로 근력은 차고 넘치는 건 그럴 수 있다. 그러라고 있는 임플란트 개조니까.

         그러나 추적자도, 저거너트도 아닌 인간의 몸으로 드로이드의 풀 스윙을 이만큼 견뎌낼 내구성이나 근밀도를 가지는 건 도저히 불가능해야 맞는데 그녀는 어떻게 버틸 수 있던 것일까?

         

         아까 개전을 알린 격돌 시에 장갑을 부수고, 칼날마저 쪼개 버린 저 오른다리만 내골격까지 대체된 의족이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반쯤 확신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총이나 팔이라는 더 유연한 수단을 팽개치고 다짜고짜 발차기를 처박을 논리적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문제라면 그 결정적인, 독이 바싹 오른 움직임을 제로가 읽고 대응할 수 있느냐였는데… 완벽하게 받아내서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만.

         

         진심을 냈다느니, ‘이번 역산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라느니. 전신 반파에 치명적인 부품 수명까지 제 손으로 갉아먹은 바보가 할 말은 절대 아니라 보는데요.

         

         칭찬을 원하면 해주는 건 어렵지 않지. 그런데 애가 너무 너덜너덜 해져서 원.

         

         “크으읏!? 어딜…!”

         

         – 그만, 얌전히, 계시지요. –

         

         괜스레 발악을 일삼고자 하체에 힘을 준 그녀의 몸을 제로가 수직으로 들어올렸고.

         이내 반대편 바닥에 내리쳤다! 어우야.

         

         쾅!! 빠각, 콰앙!

         

         “캬…학!”

         

         아, 효과음이 다양한 이유는 연육 과정을 거치는 것 마냥 연달아서 휘두르는 걸로 깨진 대리석 틈새 웅덩이에 육체를 파묻어버려서 그렇다.

         

         저런 곳에서 인공지능의 냉정함이 빛을 발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멀리 던져버릴 법도 한데, 마무리 일격(killing blow)을 결정지을 수 있는 여건이 아니라고 쓸데없이 거리를 벌리고 정비할 시간을 만들지 않게 무자비한 피해를 누적시키니까.

         

         나라면… 각혈한 시점에서 약간 안심했을지도?

         

         “크아아아앗—!”

         

         발작하듯 주먹을 휘두른 여자가 물웅덩이에 얼굴을 처박았다.

         

         산발이 된 머리카락 사이로, 어느새 거미처럼 천장 조명에 매달린 제로를 한 번.

         살짝 앞으로 나선 이쪽을, 정확히는 대리석 바닥에 흥건한 수면에 양손을 붙인 나를 한 번 노려본 그녀가 이게 대체 무슨 장난질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한 눈에 알아보기 힘든 상황이긴 한다. 책망하지 않는다.

         …그런다고 봐주지는 않을 거였지만.

         

         “……? 독, 이라도. 풀려고?? 헤이롱 군인은, 그런 조잡한 수단에…!”

         

         “알아, 알아. 너네 무슨 독소 분해 임플란트도 박은 거. 그래서 좀 분류가 다른 걸 쓰려고.”

         

         뭐, 굴복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던 참인가? 잘 모르겠다. 말을 그다지 길게 섞고 싶지 않아서 떠오르는 뒷말을 지워버렸다.

         

         예전에 파라다이스 지하 시설에서 헬레나와 의식이 뒤엉켰던 이후로, 남의 임플란트에 함부로 접속하는 건 자제하기로 했지만 지금만은 예외다.

         

         제로 선에서 마무리할 여력이 남아있었다면 자제했겠지만, 그렇게 당하고도 차츰 정신을 차리려는 위험물 주위에 무장도 다 부숴진 애를 접근시킬 수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기껏 얻은 기회를 날릴 수도 없는 셈이니… 원거리에서 안전하게 마무리해야지.

         

         이 총알은, 머리를 뒤흔드는 것 정도로는 못 피하리라.

         

         ……찰박.

         

         “…….”

         

         능력을 준비하면서 이렇게까지 살의를 담은 건 처음이다.

         아니지, 단순하게 머리나 심장을 감전시키고자 출력을 올린 적은 있어도. 코드를 주무르는 단계에서부터 질척거리는 부의 감정을 담은 건 첫 시도라고 말하고 싶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임플란트가 있고, 얼마나 보안이 철저한지. 또 신체에 작용하는 매커니즘이 어떻게 되는지 따위는 모른다.

         

         그런 만큼 더욱 잔인한 의사와 공격성을 부여한다. 이 작은 악마가 적을 반드시 안에서 무너트릴 힘을 가지라는 의도를 담아.

         

         

         가라. 가서 저 오만한 군인을, 너의 주인을 물어뜯어라.

         째지는 신음을 삼키고, 팔다리를 억눌러라.

         무익하게 살을 찢고 고통을 주라는 게 아니다.

         생명을, 삶을, 그 근간을 확실하게 도려내라.

         저 불쌍한 병사가 안락한 밤을 맞이할 수 있도록(May she can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하지만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하더라도, 내가 만들어낸 결과물은 단 한마디로 응축되었고.

         

         “……죽어버려.”

         

         일순간. 하얀 대리석 바닥 전체에 검은 파동이 흐른 것처럼 보였다.

         …상당히 섬뜩한, 반응하기 난처한 환각이다. 역시 담은 이미지가 너무 악했나 싶을 정도로.

         

         “……아?”

         

         바로 조금 전만 해도 경련하고 비척거릴지언정, 어떻게든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고자 발버둥치던 군인에게서 유언치고는 부실한 단말마가 새어 나왔고… 그걸로 끝.

         

         바들바들 떨리던 사지는 발악을 포기하고 늘어졌다.

         불길이 일렁이던 눈동자에서는 유일하게 찬란하던 빛이 소멸. 뿌연 안개가 동공을 메워버렸다.

         

         모두에게 평등한 종착역이란 건 저렇게나 고요하고 평온한 것이다.

         막상 도착해서는 어떤 언질이나 소식조차 전해주지 못할 만큼이나.

         

         그 광경은 묵묵히 지켜보고 있자니.

         결국 이게 다 무슨 지랄이었을까… 하는 허탈함도 있었지만, 나나 제로를 여기까지 고생시킨 대가를 치르게 했다는 후련함도 남았다. …사실 꽤 컸다.

         

         게다가 고통 없는-어디까지나 추정이기는 하지만- 안락사 비슷한 방식으로 장사 지내기도 했으니… 내세에서도 딱히 불만은 없으리라 믿는다. 아니, 있으면 안 되지. 암.

         

         이제 그만 지긋지긋한 에나마 체험 학습을 끝내자는 의미를 담아, 쓰러진 여자를 빤히 쳐다보는 제로를 불러들였다.

         

         뭐, 왜 그렇게 보고 있어. 경고하지 않는 걸 보니 살아있는 건 아닌가 본데.

         익명으로 투숙 가능한 블랙 마켓 쪽 호텔에 가려면 후딱 움직이는 게 좋다고?

         

         “…최대한 눈에 안 띄는, 안전한 길로만 가자. 아, 혹시 오는 길에 카메라에 찍혔어? 그것도 가능하면 다 기록을 만져야 하는데.”

         

         – ……제가 질주하는 걸 본 목격자가 약 150명에서 최대 400명가량 되는 것 같습니다만. 그들이 장비한 바디 캠도 포함하면 되겠습니까? –

         

         “………뭐라고.”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저런, 불합리한 초견 즉사 파동에 노출된 당신은 죽었습니다! 이어하기 기능마저 비활성화 되었습니다. 안타깝네요!

    이제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만 남았네요. 으아아, 길었습니다.
    지금 기절하기 직전인 몸상태를 보면 내일 휴재를 좀 해야 할 것도 같은데, 부디 오늘 분량으로 참아주시면…. 네에.

    항상 재밌게 읽어주시고. 추천 눌러주시고,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요즘 업로드 시간이 들쭉날쭉해서 죄송한 마음에 답글도 못 달고 있습니다. 그… 눈치가 보이더라고요. 헥.

    01/17 22:00 에 누락된 일부 묘사가 추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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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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