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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7

     

    평소처럼 아셀라를 오전 진찰하고 월광궁을 나서려니 둥둥둥, 요란한 북소리가 울려 정문을 나가보았다.

     

    “하하하! 역시 고트베르크. 귀인의 풍채를 본능적으로 느끼고 찾아왔는가. 암, 그 정도는 해야 내가 인정한 사내답지.”

     

    게오르크가 어디서 구했는지 휘황찬란한 금장식을 한 코끼리에 타고 관악대를 이끌며 행차하고 있었다.

     

    저거 동물학대 아닌가?

     

    “평안해 보이시는군요, 전하.”

     

    “평안하고말고. 내 새로 일으킨 사업으로 전성기 시절의 부와 명예를 단숨에 되찾았다네. 음. 솔직히 명예와 신하는 아직이지만. 비서장과 시종장, 주치의도 못 찾았어. 아, 선물은 열어보았나?”

     

    “그때 주셨던 펜네 파스타 말이죠. 맛있게 요리해 먹었습니다. 저희 황녀님도 좋아하셨지요.”

     

    게오르크가 자신만만해하며 껄껄 웃었다.

     

    “하하하. 기발한 아이디어 아닌가? 밀 반죽에 칼집을 내서 상품화한 것만으로 식감과 재미를 살렸지. 밀은 모든 제국민이 먹지 않는가. 큰돈은 이렇게 버는 것일세.”

     

    게오르크는 무슨 마술을 썼는지 그새 파스타 공장을 차려서 대박을 냈다. 확실히 재주가 남다르다.

     

    “내 무엇을 숨기겠나. 발상은 그대의 제약공장에서 따왔다네.”

     

    “그래요?”

     

    “저렴한 원재료, 그리고 민중 누구나 소비해야만 하는 품목. 닥터 파우스트가 아니었으면 목숨을 구할 수도 없었을뿐더러 다시 그대에 대해 고찰할 일도 없었겠지. 이것이야말로 인연의 힘 아니겠나, 고트베르크!”

     

    흠.

     

    다 좋은데 밖에서 무슨 오페라 공연을 보고 심하게 꽂혀서 돌아온 모양이다. 대사 하나하나가 과한데.

     

    얘는 뇌혈관 MRI를 좀 떠봐야겠다.

     

    “다름이 아니라 토진궁이 없어졌잖는가.”

     

    “가루가 되었죠.”

     

    “재건축은 시간이나 비용이나 비효율적이라서 화량궁으로 이사하기로 했다네. 마침 경사가 있었지. 용사께서 큰 공적을 세우고 귀환하시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화량궁을 소개도 할 겸, 공적을 축하하는 의미로 정찬 자리를 마련할까 하네. 큰 파티는 아니야. 승계권자끼리 용사와 담소라도 나누고자 하는 취지라네.”

     

    “당장 오늘 저녁 말입니까?”

     

    “헤이케는 이미 오기로 했다네. 자네와 아셀라도 참석했으면 좋겠군.”

     

    게오르크가 찡긋 윙크를 했다.

     

    귀찮은 일거리를 늘려줬다.

    원, 리셰야 그렇다 쳐도 아셀라랑 동행하면 그만큼 퇴근이 늦어지니 싫은데.

     

    “흠. 요즘 저희 황녀님이 좀 바쁘셔서 받아들이실지 모르겠군요.”

     

    “어허, 그렇게 튕기지 말고. 선물도 잔뜩 준비해놨으니까. 자네가 꼭 와줬으면 한단 말일세.”

     

    어째 질척질척한 게오르크의 태도였다.

    남자에게 받는 데이트 신청은 썩 기쁘진 않았다.

     

    선물이라.

    토진궁이 박살나긴 했어도 저 게오르크니까 황궁 여기저기에 숨겨놓은 비자금이나 재보는 얼마든지 있었을 터다.

     

    돌아온 지금은 그걸 온전히 되찾아서 저렇게 당당한 태도인 게 아닐까.

     

    상태창을 열어 [연금술]을 확인한다.

     

    ―――――――――――

    · 엘릭서 = ??? + ??? + 세계수의 가지

    [랭크 부족]

    ―――――――――――

     

     

    엘릭서를 만들기 위해서 연금술의 랭크는 어차피 계속 올려 나가야 한다.

    희귀한 재료는 다루면 다룰수록 좋다.

     

    ‘지금 경험치가 많이 오를 포션은.’

     

     

    ―――――――――――

    · 체공 포션 = 와이번 날개 + 활력 포션

    ―――――――――――

     

     

    공중에서의 체류시간을 늘려주는 포션이다.

    타냐나 발렌에게 빌려주면 연무회에서 써먹을 데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와이번은 드래곤의 하위 마물로 상당한 희소종이라 사체를 구하기 어렵다.

     

    게오르크라면 가지고 있겠지.

     

    “혹시 마물의 전리품도 모으십니까?”

     

    “마물이라. 자네가 그런 것에도 관심이 있는지 몰랐군. 강한 마물의 전리품은 무엇보다도 훌륭한 기사단과 재력의 상징이지. 내 왕년에는 경매장을 많이 돌아다녔거든. 무엇을 선물해주면 정찬에 와주겠나?”

     

    “제가 북부를 모험하면서 드래곤을 본 적이 있었는데요.”

     

    “드래곤이라니, 사룡이나 와이번 같은 아류가 아니라 진짜 신수 드래곤 말인가?”

     

    “예.”

     

    “허어.”

     

    신수급 마물의 이름까지 나오리라곤 예상치 못했는지 게오르크가 살짝 당황했다.

     

    그가 자신이 타고 있는 코끼리를 툭툭 두드렸다.

     

    “대신 이걸론 안 되겠나?”

     

    “거기 살던 맘모스는 이 녀석의 다섯 배는 컸습니다.”

     

    “하하하, 역시 고트베르크. 쉽지 않은 남자로군.”

     

    게오르크는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내 드래곤의 비늘까지는 없어도 와이번이라면 조금 가지고 있다네. 어떻겠나?”

     

    “흠… 와이번 말씀이시군요.”

     

    “물론 자네가 본 드래곤보다야 급이 안 되겠지만, 그게 다란 말일세. 응? 어떻겠나.”

     

    나는 한참 고민하는 척하다가 슬그머니 눈을 흘기며 그에게 물었다.

     

    “날개도 있습니까?”

     

    “아, 있지. 있고말고.”

     

    나는 그 정도면 납득해주지, 하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님께 말씀은 드려보지요. 어쩌실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하! 자네가 온다면야 아셀라야 당연히 동행하지 않겠나. 그럼 기다리고 있겠네!”

     

    게오르크가 신호하자 관악대가 다시 신나는 연주를 시작했다.

     

    그가 황궁을 이리저리 휘젓는 뒷모습을 마저 구경하고, 나는 아셀라에게 보고를 올리러 발걸음을 돌렸다.

     

     

     

    ***

     

     

     

    “바로 오늘 저녁이라니. 게오르크, 여전히 예의가 없어.”

     

    아셀라는 투덜대며 시녀장에게 일정을 조율시키고 곧장 정찬을 대비했다.

     

    아직 여유는 있지만 모든 승계권자가 용사와 함께 모이는 자리다.

     

    어떤 정치적인 발언이 오갈지 알 수 없었기에 참석은 필수였다.

     

    지금은 특히나 헤이케와 게오르크가 동맹을 맺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일도 중요하니.

     

    “남자들은 저녁 약속에 5분이면 나갈 수 있는 줄 아는 모양이지.”

     

    아셀라가 연신 불평을 쏟아냈다.

     

    빠르게 정찬에서 나올 법한 주제와 관련된 대응 시나리오를 체크한다.

     

    군주의 위엄있는 화술은 철저한 준비 아래에서 완성되는 것.

    헤이케와의 회담에서도 완전히 결론을 보지 못했었다. 연무회의 주도권에 관해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용사의 관리를 다른 궁에 넘겨야 해.’

     

    아셀라는 진즉 리셰를 라스에게서 떨어트릴 생각이 가득했다.

     

    어디까지나 이쪽에 유리한 거래로 성립시켜야 한다. 용사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다고 들켜서는 안 됐다.

     

    차기 황제로 유력한 헤이케는 논외이니 거래 상대는 비교적 세력이 약해진 게오르크가 나았다.

     

    이익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멍청하게 빈손으로 적진에 걸어 들어갈 순 없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의도한 연출을 과시하여 첫인상부터 상대를 제압한다. 그게 아셀라의 방식이었다.

     

     

    약속되어있던 귀족의 알현도 연기시키고 급히 작전을 짜낸 아셀라는 정찬에 입을 옷을 고르던 중 혀를 찼다.

     

    “드레스코드가 안 맞는데. 벌써 초여름이잖아. 왜 무거운 옷밖에 없어?”

     

    시녀장이 쩔쩔매며 상황을 설명했다.

     

    아셀라의 신체가 눈에 띄게 성장했기에 작년 옷은 입을 수 없어서 이미 파기했다는 것이었다.

     

    새 드레스는 다음 파티 시즌에 맞추어 주문을 완료했으나 올해는 여름이 빨랐다.

     

    “이 날씨에 이런 걸 입으면 둔해 보이잖아. 비웃음을 살 게 뻔해.”

     

    무엇보다 라스도 함께하는 자리다.

    아니, 라스만 함께한다면 모르겠다.

     

    리셰도 있다.

     

    용사의 앞에서 아셀라는 결코 개미가 지나갈 만한 빈틈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당장 가게를 대절해.”

     

    그 길로 아셀라는 마차를 타고 제도 광장 상점가의 명품 거리로 나섰다.

     

    황실에서 주로 이용하는 명인의 옷가게가 있었다.

     

    그곳이라면 당장 오늘 입을 만족스러운 드레스 한 벌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것이었다.

     

     

     

    “존안을 뵙습니다.”

     

    주인의 인사를 들은 체 만 체 아셀라는 바로 옷 고르기에 들어갔다.

     

    여기저기 둘러보며 옷감을 만지던 아셀라는 금방 고민에 빠졌다.

     

    ‘…선택지가 별로 없어.’

     

    카리스마를 연출하자니 그녀의 사이즈에 맞지 않고, 가벼운 수선으로 입을 수 있을 정도로 타협하자니 라우가가 입을 정도로 노출이 심했다.

     

    다 요즘들어 너무 커진 흉부 때문이었다.

     

    아셀라는 귀찮다고 생각하며 일단 색감부터 정하자고 정했다.

     

    현 황제의 상징은 붉은색.

     

    반면 월광궁은 검정색이다.

     

    아셀라는 황제의 의지를 잇겠다는 의사표현으로 평소 붉은색을 선호했다.

     

    ‘…아니지.’

     

    오늘은 승계권자가 모이는 자리다. 황제에게 보여줄 옷이 아니다.

    그들에게 자신의 독립성을 어필할 필요가 있다.

     

    문득, 본능처럼 사고가 흘러갔다.

     

    ‘라스가 좋아하는 색.’

     

    물어본 적은 없었지만, 당연히 이쪽이겠거니 생각하며 아셀라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와 처음 만났던, 만개한 노란 장미밭.

     

    황금 장미꽃을 한 송이 들고 있는 라스를 떠올리며, 아셀라는 자신의 머리와 같은 색의 드레스를 집어 들었다.

     

    가벼운 재질이다. 직접 보니 노출이 과하지 않으면서도 기품이 넘친다.

     

    정확하게 골랐다고 생각했을 때.

     

    “아.”

     

    드레스의 반대쪽 팔 부분을 잡아끄는 손이 있었다.

     

    이건 뭐야?

     

    아셀라가 홱 고개를 돌렸다.

     

    순식간에 그녀의 표정이 매서워졌다.

     

    같은 드레스를 집어든 건 다름아닌 용사, 리셰였기 때문이었다.

     

    “하.”

     

    아셀라는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치고는 오물이라도 마주한 듯 고개를 홱 돌렸다.

     

    “주인장.”

     

    싸늘한 그녀의 목소리.

     

    “부르셨습니까, 황녀님.”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 내가 가게를 대절하지 않았는가?”

     

    “그, 그것이…”

     

    당혹스러워하는 옷가게의 장인.

    리셰가 그런 그의 앞에 섰다.

     

    “아, 황녀님. 저도 잘은 모르겠는데… 저녁에 약속이 있다고 2황자님께서 말씀하셨거든요.”

     

    “그래서?”

     

    “그게, 드레스를 입어야 한대서 이 가게로 보내셨어요. 주인아저씨는 잘못 없으셔요.”

     

    더블 부킹이었다.

    어느 쪽도 황족의 명령이니 명인으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입장이긴 했다.

     

    아셀라는 상황을 이해했지만 이미 머리끝까지 차오른 짜증은 어찌할 수도 없었다.

     

    “후우.”

     

    그래, 한 번만 참자.

     

    게오르크에게 이 여자를 보내면 당분간 마주칠 일도 없어.

     

    라스도 오늘 이후로 못 만나게 철저하게 관리하면 돼.

     

    아셀라가 그리 생각하고 리셰를 무시한 채 다시 드레스에 손을 뻗었다.

     

    “앗, 저, 황녀님.”

     

    아직도 용건이 남았단 말이야?

     

    아셀라가 리셰를 재릿 노려보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거기에서 그녀의 위압감에 눌려 기가 죽기 마련이건만, 리셰는 천진난만하게 미소지으며 아셀라에게 말했다.

     

    “에헷, 그게요… 호옥시 괜찮으시면 그 옷, 저도 봐도 될까요? 마음에 들어서…”

     

    아셀라가 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마음에 들었니?”

     

    “네? 아, 별다른 이유는 아니고요. 언니가 알려줬는데 좋아할 거라고… 아, 아뇨. 이상한 소리였죠. 죄송해요, 잊어주세요.”

     

    멍청한 표정으로 배시시 웃는 리셰를 보며 아셀라는 확신했다.

     

    가만히 내버려 뒀다간 라스가 이 여자 때문에 황궁을 떠나게 될 게 틀림없다고.

     

    또각, 그녀가 리셰의 앞에 섰다.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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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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