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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7

       프란체의 말에 라자는 크게 뜬 눈을 연신 끔뻑이며 물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니, 그대와 진 바렌베르크는 주종관계가 아닌가?”

       “주종관계도 맞고 연인도 맞습니다. 이번 해방식이 끝나면 바로 혼인을 발표할 거고요.”

         

       이러한 우리의 관계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입을 벌린 채 이마를 부여잡았다.

         

       “맙소사, 전혀 생각하지 못했군…. 그래서 그때 그렇게…….”

         

       라자가 저리 당황하는 이유. 명백한 신분 차이다.

         

       아무리 내가 전 왕족이었어도, 대륙의 최강이라 불리오는 초월자여도 전쟁에서 패배한 포로이자 노예라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반면 프란체는 제국 최고위 귀족.

         

       비록 이번 해방식으로 후작위를 받을 예정이라지만, 사회에서 보는 눈은 다를 거다. 관계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겠지.

         

       “해방식 이후 바로 혼인을 발표하면 그대들의 관계로 사교계가 떠들썩해질 터인데? 시답잖은 얘기가 나도는 건 곤란하지 않겠나?”

         

       그래, 라자가 말한 대로다.

         

       아무리 프란체가 드높은 데카르트 공작의 자리를 가지고 있다지만, 어딜 가나 물어 뜯는 것들은 존재하는 법이다.

         

       “상관없습니다. 만들어둔 계획도 있으니까요.”

         

       프란체는 호흡을 차분하게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우선 약혼을 진행할 겁니다. 저널리스트들을 이용해 얘기를 조금 바꿀 생각이고요.”

         

       라자는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계속 말하게.”하곤 고개를 주억였다.

         

       “제게 안 좋은 말은 돌겠지만, ‘데카르트 공작이 진 바렌베르크라는 힘을 놓치지 않기 위해 혼인을 진행했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퍼트릴 겁니다.”

         

       확실히. 그거라면 명분이 충분하다. 나는 지금까지 프란체의 소유였으니까.

         

       “…내 이런 일에는 끼어들고 싶지 않아 공작의 의견은 존중하겠네만.”

         

       라자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미간을 주물렀다. 뭔가 따로 이유가 있는 건가? 일단 지켜보는 게 나을 거 같아 침묵을 유지했다.

         

       “실은, 제3 황녀 레일리아가 진 바렌베르크를 많이 탐내고 있네. 내 동생에게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책임없는 권력을 원하는 양심없는 녀석이니까.”

         

       그러니까, 한 마디로 황녀는 나와 혼인을 함으로써 아무런 제약없이 권력만 가지고 싶다는 거 아닌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유행에 민감하고 사교계의 영향력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니 이상하진 않나? 납득이 가는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말씀하고 싶으신 게 무엇인지요?”

         

       얌전히 듣고 있던 프란체가 물었다.

         

       “그대와 레일리아가 따로 만나서 얘기를 나누는 게 좋아보이네.”

         

       귀찮아 보이니 빠지겠다는 거 아닌가. 얘기를 들은 프란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제국의 헌법이 정략혼을 제안하면 누구도 거절할 수 없지. 그게 공작이라도 말일세.”

         

       라자는 하지만, 하며 말을 이었다.

         

       “현재 페델리안에 있어서 데카르트 공작은 중요한 인물이니 관계가 틀어지고 싶지 않네. 그러니 그대가 직접 얘기해서 레일리아를 설득해줬으면 좋겠군.”

         

       자신이 설득할 순 없는 건가? 라자에게 물었다.

         

       “폐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까?”

       “녀석은 내 말을 듣지도 않을 걸세. 그리고 나도 아직 위치가 확고하지 않아서 말이지.”

         

       위치가 확고하지 않다니? 전대 황제, 레제프 보다는 훨씬 유능하고 머리가 좋아보이는데.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의문을 참지 못하고 이유를 물으니 라자는 거리낌없이 현재 황실 상황을 말해주었다.

         

       “근래 황권이 갑작스럽게 교체된 것도 모자라 불미스러운 일이 많지 않았나? 나는 제국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황위를 가져온 것이고.”

         

       나와 프란체는 조용히 얘기를 들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황권 교체가 두 번이나 일어났네. 그것도 짧은 시간 내에. 역사적으로도 찾아볼 수 없는 이례적인 일이지.”

         

       그렇긴 하다. 황제가 죽고 황태자가 이어받은 황위가 또 제2 황자에게 넘어갔으니.

         

       “게다가 나는 정식적으로 황위를 이어받는 게 아닌, 전대미문의 사태에서 멋대로 가져온 거니 이 점을 관료들이 인정해주지 않지.”

         

       라자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군주의 교육을 받지 않은 정통 후계자가 아니라는 점도 있지만, 관료들은 나이가 있는 만큼 전통을 중요시하네. 꽉 막힌 자들이야.”

         

       역사가 깊은 만큼 전통을 중요시하는 건 알겠다마는, 라자가 황위를 이어서 혼란이 잠재워지고 있는 게 아닌가? 그들의 생각이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는 라자도 마찬가지였는지 포도주를 들이키곤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데카르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시는 거였군요. 폐하의 부족한 입지를 위해서요.”

         

       프란체가 조용히 말하자 라자는 살짝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했다.

         

       “그것도 있지만, 제국을 위해서가 크네. 고귀한 황족의 피를 이은 자, 누리는 권리만큼 그 핏줄에 대한 의무를 져야 한다. 이게 내 좌우명일세. 나는 내 철학대로 움직이는 것뿐이지.”

         

       내가 보기엔 레제프 같은 놈보다 훨씬 현명하고 좋은 군주가 될 거 같은데.

         

       의무감과 책임감도 있고, 일 처리도 괜찮고.

         

       “…폐하의 사정은 잘 알겠습니다. 괜한 이야기와 스캔들이 나돌기 전에 제 직접 황녀 전하와 얘기를 나누고 일을 정리하겠습니다.”

         

       그제야 라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히 미소를 지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나와 제국의 일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그대에겐 늘 신세만 지고 있어.”

         

       이거로 황제와의 관계가 틀어질 일은 없을 거 같고, 우위도 가져왔다.

         

       ‘사실상 데카르트가 페델리안의 실세가 되었군.’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만, 정말 이렇게 될 줄이야.

         

       “분위기가 갑자기 늘어졌군. 다시 즐거운 만찬의 시간으로 돌아가지.”

         

       이후 나눈 대화는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다. 해방식과 관련된 사소한 얘기와 잡담 정도.

         

       그리하여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만찬의 시간이 끝나고.

         

       “이만 일어나도록 하지. 그대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즐거웠네.”

         

       웃으며 라자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 우리도 이만 가자.”

       “예.”

         

       황궁에서 일하는 하인의 안내를 받아 손님방을 배정받고, 프란체가 말했다.

         

       “그럼 나는 황녀 전하를 만나고 올게.”

       “혼자서 만나시게요?”

       “피곤하잖아? 편히 쉬고 있어.”

         

       그녀는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꼬옥 안았다.

         

       “사랑해, 진. 편히 쉬고 있으렴.”

       “예. 일이 좀 귀찮거나 어렵다 싶으시면 바로 말씀해주세요. 저는 항상 프란체의 아군이니까요.”

         

       그렇게 간단한 입맞춤까지 끝내고, 프란체는 황녀를 만나러 자리를 비웠다.

         

       ‘프란체의 말대로 쉬고 있자.’

         

       나는 배정받은 손님방의 침실로 들어와 대자로 뻗었다.

         

       정기를 너무 빨려서 회복 시간이 많이 필요해…….

         

         

       * * *

         

         

       자리를 옮긴 프란체는 하인장에게 말해 레일리아와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망할 황녀가 쓸데없는 생각을 못 하도록 만들어주리라.

         

       덜컥.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제3 황녀 레일리아가 걸어들어왔다.

         

       급히 준비한 것인지 프란체가 알던 화려한 모습은 아니었다.

         

       “파티장에서 만난 뒤 처음이군요.”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레일리아는 가벼운 인사를 마친 뒤 우아하게 소파에 앉았다.

         

       “저와 만나고 싶으시다 한 이유는 무엇인지요?”

         

       하인이 준비한 찻잔을 들고 묻는 레일리아. 돌아갈 필요도 없지, 프란체는 바로 얘기를 꺼냈다.

         

       “폐하께 들었습니다. 황녀 전하께서 진 바렌베르크와의 정략혼을 원하신다고.”

         

       레일리아의 눈썹이 들썩였다.

         

       “알고 계셨군요. 말 그대로입니다.”

       “…….”

         

       프란체의 낯빛에 그늘이 졌다. 저 여자가 그저 권력과 호기심을 위해 자신의 남자를 탐낸다는 게 괘씸했다.

         

       “…표정이 좋지 않으신데,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요?”

       “네. 아주 많습니다. 머리를 쥐어뜯고 싶을 정도로요.”

       “…네?”

         

       공격적인 어조의 프란체. 레일리아의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그녀의 당혹감이 드러났다.

         

       “저와 진은 연인 관계입니다. 이번 해방식도 그와 혼인하기 위해 진행한 것이고요. 그런데 이 사이에 끼어들려는 여우가 있다는 소식을 제가 들은 게 아니겠습니까?”

         

       레일리아는 연신 눈을 끔뻑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여, 여우요…?”

       “네. 여우입니다.”

       “허, 허? 데카르트 공작님? 대체 무슨 소리를…….”

       “남의 남자를 중간에서 가로채는 게 여우가 아니면 뭔가요?”

         

       더욱 미간을 구기며 말을 이어가는 프란체.

         

       “진을 원하는 이유도 들었습니다. 페델리안의 보석안, 백금발과 진의 금안이 조합되는 게 궁금하시다고 하셨잖아요?”

         

       레일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마, 맞는데요…?”

       “그리고 진에게서 오는 권력을 원하셨죠.”

       “…….”

         

       침묵 상태가 되어버린 레일리아.

         

       고귀한 제국의 황족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되는 사람은 없지만, 데카르트 공작인 프란체는 예외다.

         

       지금 제국은 그녀에게 의존한 상태니까.

         

       “…제안을 철회해 달라는 얘기인가요?”

       “해달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철회하세요.”

       “…….”

         

       레일리아는 눈썹을 좁힌 채 손익 계산에 들어갔다.

         

       ‘진 바렌베르크도 이제 제국의 일원이야.’

         

       제국의 헌법으로 정해져 거절할 수 없는 황족의 정략혼으로 진 바렌베르크와 이어진다면 얻는 이익이 매우 크다.

         

       우선 현재 제국에서 대체할 수 없는 그의 무력으로 확고한 입지를 만들 수 있고, 이번에 해방될 바렌베르크 세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또한, 어중간한 귀족 남자와 결혼하는 것보다 확실한 능력과 좋은 외모를 가진 자와 이어질 수 있다.

         

       ‘흠.’

         

       다만, 그와 연인 사이인 데카르트 공작과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게 된다.

         

       무엇이 이득일까? 황족으로서 제국의 사회를 위한다면 당연히 후자가 맞다.

         

       하지만 전자도 레일리아 개인의 힘이 강해지기에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다.

         

       진 바렌베르크의 부인이라는 확고한 위치는 데카르트 공작이라도 횡포를 부릴 수 없을 터.

         

       “데카르트 공작님, 정말 죄송하지만 제가 제안을 철회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네요.”

         

       레일리아는 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황족이긴 하지만, 제국의 정무와는 거리가 멀어 개인의 힘이 이득이라 판단했다.

         

       “…정말 그렇게 나오실 건가요?”

       “네. 그렇게 나올 겁니다.”

       “제 말이 말 같지 않았나 보군요?”

       “어머, 제게 그리 말씀하셔도 되나요?”

         

       입을 가리며 눈으로 호선을 그리는 레일리아. 그녀의 표정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제가 그를 포기해도 괜찮은 조건이 있다면 제안을 철회할게요.”

         

       프란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 여자는 애초부터 진을 권력의 도구로만 보고 있다.

         

       자신의 남자를 빼앗으려 하는 것도 모자라 도구로 취급하는 게 그녀로선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망할 년이…….’

         

       분노가 몰려온 프란체의 눈에 흉흉한 살기가 깃들었다. 무력이 전혀 없는 레일리아도 느낄 수 있는 지독한 살기였다.

         

       “뭐, 뭔가요?”

         

       황족에게 살기를 띤다는 것은 판옵티콘으로 들어갈 만한 대역죄다. 그러나 프란체는 예외였다.

         

       대체 불가능한 위치와 압도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가다간 쓸데없는 얘기로 늘어질 거 같군요.”

         

       고개를 내젓는 프란체. 눈을 부릅뜨며 레일리아를 응시했다.

         

       “황녀 전하, 이 문제는 국정을 떠나 남녀의 관계이니 딱 말씀드리겠습니다.”

         

       여전히 당혹감에 빠진 레일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프란체는 자신의 아랫배를 매만지며 입꼬리를 올렸다.

         

       “저는 이미 진에게 안겨서 아이까지 임신했는데, 이래도 정략혼을 진행하실 생각이신가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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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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