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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7

       다음 날 아침.

       

       “안녕하세요! 아라 씨!”

       

       엔리는 예고했던 대로 내 집에 찾아왔다.

       

       얼굴을 보자마자 쫓아내고 싶단 생각이 들었지만 그간의 정이 있어 차마 그러진 못했다.

       

       내 집에 찾아온 것이 처음인 엔리는 동물 우리를 구경하듯 이곳저곳을 살피다 웃음을 흘렸다.

       

       “왜 그러시나요?”

       “사람 사는 곳 같지가 않아서요.”

       

       엔리는 내가 사는 집이 살풍경하다고 말했다.

       

       가구도 장식도 뭣도 없는데 인형만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다며.

       

       늦은 밤에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오면 인형이 움직일 것 같아 무서운 방이라고 이야길 했다.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이 집에 인형 이외에 무언가를 들여 놓은 적이 없었으니까.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사세요?”

       “게임하고 방송하죠.”

       “그거 말고는?”

       

       그거 말고?

       

       글쎄. 식사를 하고 마이튜브를 좀 하는 것 이외에는 따로 하는 일이 없지 아마?

       

       내 대답을 들은 엔리는 그럴 줄 알았다면서 자신의 손에 들린 종이가방을 내게 내밀었다.

       

       “이건 뭔가요?”

       “비밀이에요. 그건 나중에 열어보시고 빨리 옷장으로 안내해 주시죠!”

       

       쯧. 최대한 다른 화제를 입에 담으며 시간을 끌 수작이었거늘 그조차 용납하지 않는가.

       

       본인을 인형으로 삼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구나.

       

       나는 사형장에 끌려가는 죄수의 심정으로 엔리를 옷장 앞으로 데려갔다.

       

       옷장의 문을 연 엔리는 그 안에 있는 다양한 종류의 옷을 보고는 탄성을 내질렀다.

       

       “뭐에요! 아라 씨 옷 엄청 많잖아요!”

       “많기는 하죠.”

       “근데 왜 안 입어요! 아깝게!”

       “제가 산 게 아니니까요.”

       

       저 중에서 내가 산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은 털이 부드럽다는 것 이외의 장점을 알 수 없는 백호 녀석이 집어넣어 준 것이니까.

       

       입을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버리기도 아까워서 남겨둔 게 악수가 되었구나.

       

       “선물 받은 거라면 더더욱 입어야죠!”

       “그런가요?”

       “설마 제가 선물해 준 것도 처박아 놓은 건… 아라 씨!”

       

       엔리에게 선물을 받고 난 후 종이상자 채로 옷장 한켠에 보관해준 옷을 들킨 나는 다급히 시선을 피했다.

       

       저걸 꺼내둔다는 걸 완전히 잊고 있었군.

       

       최소한 엔리가 오기 전에는 꺼내서 옷걸이에 걸어두기라도 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다신 입을 일이 없다 생각해 처박아 둔 채로 내버려 둔 게 문제를 일으켰구나.

       

       엔리는 아래에서 항의가 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과장스레 발소리를 내며 내 앞까지 걸어오더니 빼액 소리를 쳤다.

       

       “너무해요! 어떻게 제 성의를 이렇게 처박아 둘 수가 있어요!”

       “미안해요.”

       “사과로 해결될 거라면 법은 왜 있나요!”

       

       지금 이 상황이 법에 관해 논의될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더냐?

       

       분노와 서운함이 가득 실린 엔리의 눈빛을 본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속으로 생각하기만 했다.

       

       이걸 입 밖으로 꺼내버리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될 것 같았으니까.

       

       “죄송합니다.”

       “진짜 너무해요!

       “할 말이 없습니다.”

       

       기이한 일이다.

       

       다른 이들에겐 당당히 내로남불을 펼칠 수 있다만 어찌하여 엔리의 앞에 서면 그러기가 어려운 것인지.

       

       그녀에게 받은 은혜가 너무 많아서 그런 걸까.

       

       내가 계속해서 고갤 숙이니 엔리는 화를 내던 것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더니 한참 뜸을 들인 후에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 그렇게까지 아라 씨를 괴롭힐 생각은 없었어요. 아라씨가 장난감 취급받는 걸 싫어한단 걸 알고 있었으니까.”

       

       솔직히 말해서라는 단어는 지금 그리 좋은 단어가 아니었다.

       

       분을 참고 있는 목소리로 튀어 나오는 솔직히라는 단어는 반드시 그 뒤에 반전을 품고 있기 마련이니까.

       

       “그치만 안 되겠어요. 나가죠.”

       “…네?”

       “어차피 뭘 입혀놔도 한 번밖에 안 입을 거라면 온갖 옷을 다 입혀본 후에 제 마음에 드는 걸 입히고 말겠어요.”

       

       대체 그것은 어떠한 방식의 논리 전개더냐.

       

       보통 자신의 선물을 구석탱이에 박아 넣은 것을 본다면 선물할 보람이 없다고 생각을 하는 게 일반적인 사고방식 아니더냐?

       

       허나 나에게는 불평을 할 권리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이 나에게 있었으니까.

       

       오히려 하루 인형노릇을 하는 것으로 엔리의 서운함을 달랠 수 있다면 싸게 치이는 셈이었다.

       

       이로써 나의 사형장은 집이 아닌 외부의 장소로 바뀌게 되었다.

       

       *

       

       뒷풀이를 위해 잡은 객실에 도착한 나비린은 가장 먼저 와서는 스마트폰을 붙잡고 있던 배민황을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아저씨. 또 씹덕겜 해요?”

       “씹적씹이냐? 너도 이거 하잖아.”

       “그치만 아저씨처럼 빡세겐 안해요.”

       “게임 하면 다 똑같은 거지. 그리고 나 아저씨 아니다.”

       “마흔이 다 되어 가면서 아저씨가 아니긴 무슨. 아저씨가 일찍 결혼했으면 벌써 애가.”

       “아. 시끄러워. 안 그래도 매일 전화로 잔소리 듣고 있으니까 적당히 해라.”

       “와. 아저씨 그 나이 먹고도 엄마한테 잔소리 들어요?”

       “너라고 다를 거 같냐?”

       

       나비린이 배민황과 투닥거리며 자리를 찾기 무섭게 문이 열리고 나희가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까지 뛰어오기라도 한 듯 거친 숨을 내쉬던 그녀는 안에 있던 두 사람의 얼굴을 실파다 다급히 외쳤다.

       

       “저 지각 안했죠?!”

       “그래.”

       “지각은 무슨 지각. 약속시간까지 이십분이나 남았거든?”

       “네?!”

       

       자신이 시간을 잘못 알았던 걸 깨달은 나희는 괜히 뛰었다며 투덜거리고는 안 쪽 자리로 들어가선 늘어지듯이 앉았다.

       

       그 뒤로 몇 분의 간격을 두고서 바니와 달빛이 약속장소에 도착했고 이제 남은 사람은 단 둘.

       

       엔리와 화령뿐이었다.

       

       막내이기에 솔선해서 엔리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확인한 나희는 네. 네. 알겠어요. 천천히 오세요. 라는 말을 한 후에 전화를 끊었다.

       

       “뭐래?”

       “이십 분 뒤쯤에 도착할 것 같으니까 음식 시켜 놓고 있으라는 데요.”

       “지각이네?”

       “오늘 주인공이라고 화려하게 등장하려나 보네요.”

       “둘이 친구라고 늦는 것도 같이 늦나 봐요?”

       

       여기에 모인 건 모두들 어느 정도 시청자들을 거느린 스트리머들인지라 모두들 하나 같이 말을 거들었다.

       

       사람 굴릴 때는 그렇게 칼 같더니 현실에선 게으르다느니.

       

       자기한텐 관대하고 남한테만 엄격하다느니.

       

       혹시 안 나오려던 거 엔리가 억지로 끌고 오는 거 아니냐느니.

       

       이주간의 울분을 담은 뒷담화에 가까운 언행이 연속해서 이어지던 중에 문득 바니가 이런 말을 꺼냈다.

       

       “화령님은 실제로 어떻게 생기셨을까요?”

       “어차피 조금 있으면 보게 될 텐데 그게 궁금해요?”

       “그건 그런데 이것도 상상하는 맛이 있잖아요.”

       “그럼 바니님부터 이야기 해봐요. 현실의 화령님은 어떤 사람일 것 같아요?”

       “어. 음. 그러니까…”

       

       바니는 화령이 실제로 격투기 같은 걸 배운 사람일 것 같다고 말했다.

       

       “VR에 익숙치 않은 사람이 처음부터 재능을 보이는 경우는 대부분 현실에서 강한 경우니까요.”

       “에이. 그건 너무 뻔하잖아요.”

       “그러는 나비린님은 뭐 생각해 둔 거 있어요?”

       “…어. 생각보다 말투는 평범하지 않을까요?”

       “그게 더 뻔하잖아요! 세상에 현실에서 그런 말투를 쓰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이 둘을 기점으로 해서 한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 둘 자신의 추측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공포게임을 하나도 안 무서워하는 걸 보면 대범한 성격일 거다.

       

       먹는 걸 좋아하니까 좀 통통하지 않겠느냐.

       

       무협을 잘 아는 데 VR이 서툰 걸 보면 나이가 좀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남자일 수도 있지 않으냐.

       

       컨셉질을 엄청 잘 하는걸 보면 뻔뻔한 사람일 거다.

       

       엔리랑 친하니까 똑같은 외국인 일수도 있지 않겠느냐.

       

       이런저런 이야기가 새어 나오던 중 가게의 문이 열리고 엔리가 먼저 안으로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버스가 막혀서!”

       “안 막히던데요?”

       “오늘 도로 완전 여유로웠는데 어디로 온 건가요?”

       “그냥 그런가보다 해주면 안 돼요?!”

       “당연히 안 되죠.”

       

       다들 장난스런 어투로 엔리에게 무어라 하고 있던 중 열린 문 안으로 한 여성이 들어왔다.

       

       세상을 무심히 바라보는 눈매와 무표정한 눈동자.

       

       꾹 다물린 입술에 잘 구워진 도자기마냥 새하얀 피부.

       

       비녀를 사용해 뒤로 묶어 올린 검은 색의 단발.

       

       정장마냥 각이 잡혀 있는 검은색의 외투와 그 안에 입은 새하얀 니트.

       

       다리에 딱 달라 붙는 검은 색 슬랙스.

       

       전체적으로 강한 인상을 주어서 자칫 잘못하면 허세를 부린다 여겨질 수도 있는 스타일링이었지만 그 옷을 입은 사람이 사람이라 조금도 과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딱딱하고도 고고해서 웃음 한 번 짓지 않을 것 같은 차가운 인상의 아름다운 여성.

       

       나비린은 그 여성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저 얼굴이 어째선지 익숙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선가 봤는데.

       

       분명 어디선가 봤는데.

       

       아! 생각났다!

       

       “화령님?”

       

       화령님이 평소에 사용하는 아바타.

       

       아피스 속의 천마의 외형을 가져와 꾸민 VR속 아바타와 지금 문을 열고 들어온 여성은 꼭 닮아있었다.

       

       꼭 그 VR아바타가 현실로 빠져나온 것처럼.

       

       “안녕하세요. 여러분. 화령이라고 합니다.”

       

       아바타의 입에서 새어 나온 정중하고도 어색한 한국어에 잠시 말을 잃었던 사람들이 현실로 돌아왔다.

       

       “어… 진짜 화령님이세요?”

       

       눈을 끔뻑이던 배민황이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지자 화령의 무표정하던 입가에 웃음이 새겨졌다.

       

       “그렇습니다만 너무 공손하시지 않나요? 현실에서 보면 기선제압을 해주시겠다더니.”

       “아니. 그! 농담이죠! 제가 화버지에게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화버지요? 그건 뭔가요?”

       “그게 화령님이 또 저흴 열심히 굴려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나비린은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배민황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자신이 남자였더라도 비슷한 감상을 품었을 테니까.

       

       VR시대를 맞이하고서 개나 소나 멋지고 아름다운 아바타를 쓸 수 있게 된 세상에서 아바타보다 아름다운 사람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조차도 VR세상의 아바타보다 못하단 소리를 듣는 게 현실인데 그런 사람을 찾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나비린이 생각하기에 화령은 몇 안 되는 예외 중 하나였다.

       

       VR의 아바타로도 그 아름다움을 모두 담아낼 수 없는.

       

       현실에서 만나야만 그 진가를 느낄 수 있는.

       

       같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질투를 품을 생각조차 들지 않는 경외스러운 사람이었다.

       

       평소에 워낙 자신감이 넘치는 분이라 예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나름대로 자신의 외모에 자신을 가지던 나비린이지만 화령과 마주한 순간 그녀는 자신이 쭈꾸미가 되어버렸음을 느꼈다.

       

       엔리님도 대단하네.

       

       어떻게 저 옆에서 있는데 나름대로 자기주장을 할 수가 있는 거지?

       

       하기야 그만큼 예쁘신 분이니까 자기 외모를 그대로 아바타로 쓸 수 있는 거겠지만.

       

       말을 더듬는 배민황의 모습에 이대로 가다간 얼마가 지나도 본론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이라 짐작한 나비린은 한숨으로 배민황의 말을 끊어냈다.

       

       “아저씨. 솔로 티 내지 말고 적당히 해요. 그리고 두 분도 서 있지 말고 자리에 앉아요. 회식해야죠.”

       “그래. 그래야지! 앉으십쇼! 오늘은 제가 쏘는 거니까 원하는 만큼 드시면 됩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식 시작입니다.

    다음화 보기


           


The Heavenly Demon is Broadcasting

The Heavenly Demon is Broadcasting

천마님 방송하신다
Status: Completed Author:
He couldn't pass his habits to others upon his return. The Heavenly Demon remained a martial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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