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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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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로 점철된 얼굴을 한 외신이 ‘그것’을 마주한 순간 적막이 내려앉았다. 마치 세계가 정지한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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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어떠한 소리도, 빛도, 맛도, 냄새도, 형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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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이 형체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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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외신을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는 듯이. 그러자 제 몸속 깊숙이 자리 잡은 근본이 뒤집히고, 흔들리고, 우그러지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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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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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체를 가지게 되었다고는 하나 인간이 아니기에 무언가 뱉어질 리 없음에도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쏟아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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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것이 가까이…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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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이 아득해지고 시야가 흐릿하다. 무언가가 투둑 떨어진다. 아, 눈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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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귓가에 쾅쾅 울려 퍼지고 눈앞이 빠질 듯이 뻐근했다. 얼굴을 따라 흘러내리는 식은땀은 살기 위한 발버둥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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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신은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끄집어내 한 가지 생각을 겨우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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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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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문은 제대로 된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대로 바스러져 버렸다. 어느새 시야의 끝에 그것의 끝자락이 들어왔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보이는 건 그녀와 똑같은 모습을 한 ‘무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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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헉,허억…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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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귓가에 이명이 들리고 정신이 몽롱하게 풀렸다. 현실과 유리된 기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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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하고, 단정했으며 서늘하고 따스했다.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개념이 눈앞에 자신과 같은 형태를 갖춘 채 서 있었다. 외신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눈앞에 있는 것은 자신과 모든 것이 같지만 같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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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지 않기에 같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그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런데 이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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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되지 말아야 할 것을 이해한다는 건 보지 말아야 할 베일 너머를 들여다본 것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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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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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신의 귓가에 뼈를 부수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니, 아니다. 그런 소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냄새가 맡아졌나? 색이 보였나? 손끝에 만져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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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르겠다. 아무것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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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건 부드러운 표정으로 다정하게 웃고 있는 얼굴과 온몸이 미세한 단위로 분해되는 끔찍한 고통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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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외신은 그것에게 집어삼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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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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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끄윽…아,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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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포만감이 느껴지는 배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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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먹은 것도 없는데 배가 부르네. 설마 아이리스의 영혼 일부를 먹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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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막 잠에서 깨어나 차가운 복도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아이리스를 바라보았다. 느껴지는 혼의 크기가 전과 다를 바가 없어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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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휴.. 다행히 그런 건 아닌가 보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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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을 쓸어내리곤 씩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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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래도 전할 말은 다 전했네. 이상한 기운도 사라졌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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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자신을 영혼 형태로 날려 보내줬던 점술가를 떠올리며 돌아가면 감사의 인사를 건네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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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런데.. 왜 안 돌아가지는 거지? 분명 일이 해결되면 바로 돌아가게 될 거라고 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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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술가는 리안의 영혼을 일시적으로 아이리스의 곁으로 보낼 때 경고했었다. 유지되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으니 일을 해결하고 나왔을 땐 바로 마왕성으로 돌아오게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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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점술가의 말과 달리 리안은 몇분 째 공작가에 머물고 있었다. 이는 점술가가 예상한 것보다 리안이 일을 너무 빨리 해결해버린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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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마 외신이나 되는 존재를 1분도 걸리지 않아 간단하게 처리해버릴 거라고는 모든 게 비밀로 감춰진 점술가도 예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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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으음… 이렇게 된 거 노아를 만나러 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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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는 유일하게 영혼을 볼 수 있는 존재이니 잘만하면 대화도 나눠볼 법했다. 리안은 곧바로 노아가 있을 법한 장소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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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무장, 없음.
    식당, 없음.
    정원, 없음.
    서재, 없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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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는 어딘가로 숨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카락 한 올도 찾을 수 없었다. 그 대신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제스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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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 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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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도 모르게 이름을 불렀지만, 영혼을 볼 수 없는 제스는 반응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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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서관엔 무슨 일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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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이 곁에 없어서 그런지 귀와 꼬리를 감쳐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한 제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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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지금까지 제스를 ‘어디선가 사고를 치고 다니는 시골 강아지’ 보듯 했기에 그녀의 이지적인 모습이 생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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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륵, 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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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책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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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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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고 있던 책을 끝까지 읽고는 덮어 옆에 내려놓는 폼이 꽤 익숙해 보였다. 그녀가 책을 내려놓은 곳엔 못해도 20권은 넘게 책이 쌓여있었다. 반대쪽에 쌓여있는 책을 끌고 와 읽기 시작하는 걸로 봐선 한쪽은 읽은 책, 다른 한쪽은 아직 읽지 않은 책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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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미녀가 책을 넘겨보는 아름다운 장면을 책 ASMR 보듯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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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럴 때가 아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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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다시 노아를 찾기 위해 붕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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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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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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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해가 중천에 떠오른 하늘과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노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가 아는 노아는 워낙 밤낮없이 성실하게 하루를 보내기에 당연히 밖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게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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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이불 밖으로 빼꼼 튀어나온 노아의 갈색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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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기 노아야? ]
    [ 노아? 자니? ]
    [ 혹시 괜찮다면 일어나 줄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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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쉽사리 흔들어 깨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모기만큼 작았던 목소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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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다 역 소환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어 결국 이불 위에 손을 얹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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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아! 잠깐만 일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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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이 다 끝맺기도 전에 슈우욱! 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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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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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치 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리안의 영혼이 노아의 몸속으로 호로록 삼켜졌다. 방 안은 침묵만이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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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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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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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식간에 노아에게 삼켜진 리안은 정신을 차리고자 고개를 살살 저었다. 눈을 뜨자 막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시야가 흐렸다. 
    ​
    ​
    ‘여긴… 어기지?’
    ​
    눈 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와 미간을 찌푸린 채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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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으흐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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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부드럽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
    ​
    달그락달그락, 뒤이어 그릇이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코끝에 달콤한 향기가 맴돌아 입에 침이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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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꿀꺽.
    ​
    ​
    마른침을 삼키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확 트였다. 새하얀 레이스 무늬 식탁보로 덮인 테이블, 푹신한 방석이 깔린 의자, 테이블 위에 놓인 새하얗고 둥근 접시, 식당으로 추정되는 장소 옆으로 활짝 열린 창문으로 따스한 봄볕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막 싹을 피운 노란 꽃이 나뭇가지 위에서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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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하얀 나비가 꽃 사이를 오가며 몸에 노란 꽃가루를 묻히고 다녔다. 한없이 안온하고 따스한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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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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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작스럽게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멍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리안은 곧바로 식당과 붙어있는 주방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끝이 하얀 레이스로 마무리된 분홍색의 앞치마를 착용한 긴 머리의 여성이 다정한 미소를 한껏 머금은 채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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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벅지를 반 정도 가리는 노란색 원피스 아래 쭉 뻗은 하얀 다리가 시선을 잡아끌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앞치마가 괴롭다는 듯 굴곡 진 가슴이 시선을 전부 빨아당긴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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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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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리까지 내려오는 살짝 웨이브 진 갈색 머리카락의 여성은 한껏 사랑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다가와 들고 있던 트레이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트레이 위에는 오븐에 구운 치즈그라탕이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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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꿀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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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앞에 먹음직스러운 향기가 훅 밀려오자 재차 침이 폭발하여 연신 침을 삼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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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맛있겠지?”
    “아, 으응! 아니, 네!”
    “응? 왜 이렇게 굳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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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개를 갸웃거리며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넘기는 모습이 너무나 치명적이었다. 리안은 심장이 고장 난 듯 쿵쾅거리는 걸 느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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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노아가 여자가 돼버려 -… 아니 애초에 여자였으니까 이게 맞는 거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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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에서 여자가 된 것을 넘어 청초하게까지 느껴지는 아찔한 외모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여성에 대한 면역력이 제로인 탓에 혀가 파업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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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리버리하게 어버버 거리는 사이 노아는 꽃무늬가 그려진 장갑을 끼고 와 그라탕을 테이블 가운데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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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기 전에 먹자.”
    “어,어,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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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여전히 고장 난 채 수줍게 웃는 노아에게 대답해주었다. 가출하려는 정신을 꽉 붙잡은 채 심호흡을 한 후 허벅지 위에 놓여있던 손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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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물 한 잔 마시고 정신 좀 차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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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이블 한쪽에 놓인 투명한 유리병엔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옆에는 유리컵이 뒤집어진 채 놓여있었다. 손을 뻗어 유리컵을 쥐려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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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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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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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리안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간질간질 굳어있는 손가락 사이를 살살 문지른 손가락이 그사이를 파고들어 깍지를 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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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싫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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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웃음치며 묻는 말에 기합이 가득 들어간 목소리로 소리치고 말았다. 노아가 작게 키득거리곤 다른 손을 뻗어 컵에 물을 따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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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불편하면 이러고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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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되지? 라고 물으며 묻는 눈동자에는 제 애정을 받아줄 거라는 확신이 가득했다. 저 눈을 마주하고 있다간 그대로 하얗게 재가 되어버릴 것 같아, 휙 하고 시선을 피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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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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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용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벽난로 위에 액자가 여러 개 놓여있었다. 노아가 시선을 돌려 행복한 미소를 한껏 지어 보인 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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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저 때 즐거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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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혼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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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가 나직하게 뱉어낸 단어에 리안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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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Ilham Senjaya님 오늘도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3

꿈 속에서 리안과 결혼생활 꾸고 있는 노아… 귀엽네요!

추천과 선작은 사랑입니다.다음화 보기

분노로 점철된 얼굴을 한 외신이 ‘그것’을 마주한 순간 적막이 내려앉았다. 마치 세계가 정지한 것만 같았다.

그 어떠한 소리도, 빛도, 맛도, 냄새도, 형태도..

모든 것이 형체를 잃었다.

그것은 외신을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는 듯이. 그러자 제 몸속 깊숙이 자리 잡은 근본이 뒤집히고, 흔들리고, 우그러지는 게 느껴졌다.

“우윽..”

육체를 가지게 되었다고는 하나 인간이 아니기에 무언가 뱉어질 리 없음에도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쏟아낼 것 같았다.

그것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것이 가까이… 가까이..

정신이 아득해지고 시야가 흐릿하다. 무언가가 투둑 떨어진다. 아, 눈물인가?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귓가에 쾅쾅 울려 퍼지고 눈앞이 빠질 듯이 뻐근했다. 얼굴을 따라 흘러내리는 식은땀은 살기 위한 발버둥처럼 느껴졌다.

외신은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끄집어내 한 가지 생각을 겨우 이었다.

‘저게.. 뭐지?’

의문은 제대로 된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대로 바스러져 버렸다. 어느새 시야의 끝에 그것의 끝자락이 들어왔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보이는 건 그녀와 똑같은 모습을 한 ‘무언가’였다.

“헉,허억…헉…”

귓가에 이명이 들리고 정신이 몽롱하게 풀렸다. 현실과 유리된 기분을 느낀다.

화려하고, 단정했으며 서늘하고 따스했다.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개념이 눈앞에 자신과 같은 형태를 갖춘 채 서 있었다. 외신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눈앞에 있는 것은 자신과 모든 것이 같지만 같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같지 않기에 같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그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런데 이해가 되었다.

이해되지 말아야 할 것을 이해한다는 건 보지 말아야 할 베일 너머를 들여다본 것과 같았다.

우드득.

외신의 귓가에 뼈를 부수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니, 아니다. 그런 소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냄새가 맡아졌나? 색이 보였나? 손끝에 만져졌나?

모르겠다.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저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건 부드러운 표정으로 다정하게 웃고 있는 얼굴과 온몸이 미세한 단위로 분해되는 끔찍한 고통뿐이었다.

그렇게 외신은 그것에게 집어삼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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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끄윽…아,뭐지? ]

리안은 포만감이 느껴지는 배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먹은 것도 없는데 배가 부르네. 설마 아이리스의 영혼 일부를 먹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

리안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막 잠에서 깨어나 차가운 복도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아이리스를 바라보았다. 느껴지는 혼의 크기가 전과 다를 바가 없어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 휴.. 다행히 그런 건 아닌가 보네. ]

가슴을 쓸어내리곤 씩 웃어 보였다.

[ 그래도 전할 말은 다 전했네. 이상한 기운도 사라졌고. ]

리안은 자신을 영혼 형태로 날려 보내줬던 점술가를 떠올리며 돌아가면 감사의 인사를 건네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런데.. 왜 안 돌아가지는 거지? 분명 일이 해결되면 바로 돌아가게 될 거라고 했는데? ]

점술가는 리안의 영혼을 일시적으로 아이리스의 곁으로 보낼 때 경고했었다. 유지되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으니 일을 해결하고 나왔을 땐 바로 마왕성으로 돌아오게 될 거라고.

그런 점술가의 말과 달리 리안은 몇분 째 공작가에 머물고 있었다. 이는 점술가가 예상한 것보다 리안이 일을 너무 빨리 해결해버린 탓이었다.

설마 외신이나 되는 존재를 1분도 걸리지 않아 간단하게 처리해버릴 거라고는 모든 게 비밀로 감춰진 점술가도 예상하지 못했다.

[ 으음… 이렇게 된 거 노아를 만나러 가자! ]

노아는 유일하게 영혼을 볼 수 있는 존재이니 잘만하면 대화도 나눠볼 법했다. 리안은 곧바로 노아가 있을 법한 장소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연무장, 없음.

식당, 없음.

정원, 없음.

서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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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는 어딘가로 숨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카락 한 올도 찾을 수 없었다. 그 대신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제스를 발견했다.

[ 어? 제스? ]

자신도 모르게 이름을 불렀지만, 영혼을 볼 수 없는 제스는 반응하지 않았다.

[ 도서관엔 무슨 일이지? ]

리안이 곁에 없어서 그런지 귀와 꼬리를 감쳐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한 제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리안은 지금까지 제스를 ‘어디선가 사고를 치고 다니는 시골 강아지’ 보듯 했기에 그녀의 이지적인 모습이 생경했다.

스륵, 쓱.

읽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책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탁.

읽고 있던 책을 끝까지 읽고는 덮어 옆에 내려놓는 폼이 꽤 익숙해 보였다. 그녀가 책을 내려놓은 곳엔 못해도 20권은 넘게 책이 쌓여있었다. 반대쪽에 쌓여있는 책을 끌고 와 읽기 시작하는 걸로 봐선 한쪽은 읽은 책, 다른 한쪽은 아직 읽지 않은 책처럼 보였다.

리안은 미녀가 책을 넘겨보는 아름다운 장면을 책 ASMR 보듯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 이럴 때가 아니지! ]

리안은 다시 노아를 찾기 위해 붕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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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네.. ]

리안은 해가 중천에 떠오른 하늘과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노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가 아는 노아는 워낙 밤낮없이 성실하게 하루를 보내기에 당연히 밖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게 실수였다.

리안은 이불 밖으로 빼꼼 튀어나온 노아의 갈색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 저기 노아야? ]

[ 노아? 자니? ]

[ 혹시 괜찮다면 일어나 줄 수 있을까? ]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쉽사리 흔들어 깨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모기만큼 작았던 목소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다.

이러다 역 소환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어 결국 이불 위에 손을 얹을 수밖에 없었다.

[ 노아! 잠깐만 일어..! ]

말이 다 끝맺기도 전에 슈우욱! 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 어억..?! ]

마치 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리안의 영혼이 노아의 몸속으로 호로록 삼켜졌다. 방 안은 침묵만이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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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

순식간에 노아에게 삼켜진 리안은 정신을 차리고자 고개를 살살 저었다. 눈을 뜨자 막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시야가 흐렸다.

‘여긴… 어기지?’

눈 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와 미간을 찌푸린 채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으흐흥..”

누군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부드럽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달그락달그락, 뒤이어 그릇이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코끝에 달콤한 향기가 맴돌아 입에 침이 고였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확 트였다. 새하얀 레이스 무늬 식탁보로 덮인 테이블, 푹신한 방석이 깔린 의자, 테이블 위에 놓인 새하얗고 둥근 접시, 식당으로 추정되는 장소 옆으로 활짝 열린 창문으로 따스한 봄볕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막 싹을 피운 노란 꽃이 나뭇가지 위에서 흔들렸다.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하얀 나비가 꽃 사이를 오가며 몸에 노란 꽃가루를 묻히고 다녔다. 한없이 안온하고 따스한 공간이었다.

“다 됐다.”

“…!”

갑작스럽게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멍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리안은 곧바로 식당과 붙어있는 주방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끝이 하얀 레이스로 마무리된 분홍색의 앞치마를 착용한 긴 머리의 여성이 다정한 미소를 한껏 머금은 채 서 있었다.

허벅지를 반 정도 가리는 노란색 원피스 아래 쭉 뻗은 하얀 다리가 시선을 잡아끌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앞치마가 괴롭다는 듯 굴곡 진 가슴이 시선을 전부 빨아당긴 탓이다.

탁.

허리까지 내려오는 살짝 웨이브 진 갈색 머리카락의 여성은 한껏 사랑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다가와 들고 있던 트레이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트레이 위에는 오븐에 구운 치즈그라탕이 놓여있었다.

꿀꺽.

코앞에 먹음직스러운 향기가 훅 밀려오자 재차 침이 폭발하여 연신 침을 삼켜야 했다.

“맛있겠지?”

“아, 으응! 아니, 네!”

“응? 왜 이렇게 굳었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넘기는 모습이 너무나 치명적이었다. 리안은 심장이 고장 난 듯 쿵쾅거리는 걸 느끼며 생각했다.

‘노,노아가 여자가 돼버려 -… 아니 애초에 여자였으니까 이게 맞는 거긴 한데..’

남자에서 여자가 된 것을 넘어 청초하게까지 느껴지는 아찔한 외모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여성에 대한 면역력이 제로인 탓에 혀가 파업을 선언했다.

어리버리하게 어버버 거리는 사이 노아는 꽃무늬가 그려진 장갑을 끼고 와 그라탕을 테이블 가운데에 올려놓았다.

“식기 전에 먹자.”

“어,어,응..”

리안은 여전히 고장 난 채 수줍게 웃는 노아에게 대답해주었다. 가출하려는 정신을 꽉 붙잡은 채 심호흡을 한 후 허벅지 위에 놓여있던 손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우선 물 한 잔 마시고 정신 좀 차리자.’

테이블 한쪽에 놓인 투명한 유리병엔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옆에는 유리컵이 뒤집어진 채 놓여있었다. 손을 뻗어 유리컵을 쥐려는 순간.

슥.

“헉…!”

노아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리안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간질간질 굳어있는 손가락 사이를 살살 문지른 손가락이 그사이를 파고들어 깍지를 끼었다.

“싫어?”

“아니!”

눈웃음치며 묻는 말에 기합이 가득 들어간 목소리로 소리치고 말았다. 노아가 작게 키득거리곤 다른 손을 뻗어 컵에 물을 따라 내밀었다.

“안 불편하면 이러고 먹자.”

그래도 되지? 라고 물으며 묻는 눈동자에는 제 애정을 받아줄 거라는 확신이 가득했다. 저 눈을 마주하고 있다간 그대로 하얗게 재가 되어버릴 것 같아, 휙 하고 시선을 피해버리고 말았다.

“어? 저건…”

사용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벽난로 위에 액자가 여러 개 놓여있었다. 노아가 시선을 돌려 행복한 미소를 한껏 지어 보인 채 말했다.

“아, 저 때 즐거웠지.”

신혼여행.

노아가 나직하게 뱉어낸 단어에 리안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나 혼자 장르가 다르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n the world of comedy anime, I was living an ordinary life until I became possessed by a dark fantasy novel I was reading before falling asleep. ‘Hahaha! Don’t hold a grudge -..!’ ‘Ugh, cough cough…seriously…my clothes are ruined.’ ‘…!?’ Though I was stabbed in the stomach, I calmly stood up and pulled out the spear. Originally, residents of the comedy world are a race that can be torn into 100 pieces and still come back to life the next day. ‘Stop it! Stop now! How long do you plan to sacrifice me?’ ‘No…I mean..’ ‘I’ve become strong to protect you…what have I become?’ Residents in the comedy world are just a race that vomits blood even if they stub their toe. I never made any sacrifices..but my delusion deepens and my obsession grows. One day, while I was half-imprisoned and taking care of some pitiful kids… ‘Are you the boss?’ ‘Excuse me?’ Before I knew it, I had become the behind-the-scenes boss of a huge underworld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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