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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7

   「그 남자를 덮쳐서 아이를 만드세요.」

     

   다음 말을 들은 순간 메리는 경악했다.

   지금 자신이 무얼 들었는지 두 귀를 의심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시그린의 눈은 진심이었다.

     

   어떻게 시그린이 자신에게 이런 명령을 할 수 있는가.

   시그린과 자신은 평생 마음을 준 이가 같다.

     

   아서 그라말테.

   같은 낭군을 사랑하고, 같이 사랑을 속삭였던 자신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다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시그린 님, 아무리 그래도 전!」

   「메리.」

     

   그 순간 시그린이 일갈하듯 메리를 불렀다.

   흠칫한 메리가 시그린을 바라보자 그녀의 눈에는 일말의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설마 예전의 당신과 지금의 당신이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깊숙이 파고드는 그 말은 자신의 마음을 마구잡이로 후벼 팠다.

   그러나 시그린은 말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예전의 당신은 분명 아서 님께 사랑받을 자격이 있었어요. 저도 기꺼이 허락할 수 있었고요. 하지만 지금의 당신에게 그럴 가치가 있을까요?」

     

   메리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자신에게 그럴 가치가 없다는 건 메리 또한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시, 시그린 님, 그래도 전, 전 아서 님밖에 없습니다! 제발 이번 명령만큼만은 철회할 수 없겠습니까? 제가 다른 건 뭐든 할 테니.」

   「하.」

     

   시그린은 메리를 보고 기막힌 반응을 보였다.

   그러고는 이내 자기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넘긴 뒤 팔짱 낀 자세로 메리를 바라보았다.

     

   「메리, 그거 말고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없어요.」

     

   황녀 시해자에 타고난 재능과 회귀의 기억으로도 중간 평가에서 보충 시험을 치르게 생긴 마당.

   누가보아도 그녀는 이제 정말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당신이 그나마 마지막으로 정말 할 수 있는 일은 여자의 무기를 사용하는 거죠.」

     

   아이를 잉태해라.

   그걸 성공한다면 크라슈를 묶어 놓을 수 있는 확실한 무기가 된다.

     

   「그리고 이건 아서 님 또한 같은 생각이시기도 해요. 아서 님이 직접 그 저주 받이 놈을 반드시 끌어들이라고 했으니까요.」

   「아, 아서 님이요? 아서 님이 정말로 저한테 그런 명령을 하셨다는 건가요? 그, 그럴 리가.」

   「아직도 현실을 부정하는 건가요? 이건 아서 님 또한 메리 당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해요.」

     

   시그린의 얼굴에 방긋하는 웃음이 서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게 바로 아서 님이잖아요? 저희가 아서 님의 생각을 지지해주지 않는다면 누가 해주겠어요.」

     

   메리가 꿀 먹은 벙어리가 마냥 입술을 벙긋거렸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더 이상 없었다.

     

   「자, 여기 그런 당신을 위해 제가 선물을 준비해놨어요.」

     

   멍하게 있는 메리에게 시그린은 선물을 하나 쥐여 줬다.

     

   「매혹의 향이라는 물건이에요. 방에 풀기만 해도 그 사람을 무척이나 매혹적으로 느끼게 만들죠.」

     

   메리는 여전히 멍한 채로 시그린이 건넨 물건을 받았다.

     

   「이걸 푼다면 저주 받이는 당신에게 넘어가 덮치겠죠. 그때 확실하게.」

     

   시그린의 손가락이 쭈욱 뻗어져 그녀의 배 앞에 툭 닿았다.

     

   「담아 두도록 하세요.」

     

   시그린은 그걸 끝으로 메리를 두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늘 그랬던 것처럼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잘 부탁해요. 메리 다이아나.」

     

   어느샌가 풀네임으로만 부르는 시그린은 그렇게 방을 떠났다.

     

   그 명령을 듣고, 메리가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은 한참 후에 일이었다.

   밤이 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메리는 홀린 듯이 기숙사 방을 나왔다.

     

   마지막 명령.

   아서의 부탁.

   이제는 갈 곳 없는 자신.

   유일하게 가진 여자의 무기.

   매혹의 향.

     

   수많은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힌 끝에 그녀는 크라슈의 방을 찾은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런 그녀의 등 뒤에는 매혹의 향이 방 안에 풀리고 있었다.

     

   크라슈의 코끝이 아주 작게 반응했다.

   어느샌가 방안을 채워 나간 달콤한 향이 코끝을 간질이는 느낌을 받았다.

     

   ‘이거.’

     

   크라슈는 그 향을 맡자마자 메리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치챘다.

   자신이 차를 가지러 간 틈에 저번에 달링이 말해주었던 약을 사용한 것이 분명했다.

     

   크라슈의 입에서 기가 차서 한숨이 나왔다.

     

   무언가 헛짓거리를 할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설마하니 메리를 이용해 이따위 짓을 벌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어디까지 망가진 거냐.’

     

   예전에 신창에게서 흘러나오던 기백은 온데간데없었다.

   이따위 걸로 사람을 유혹해보려는 메리의 모습은 이제 정말로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쩌적-

     

   그래서일까.

     

   메리의 엑셀을 블랙 후드로 빼앗기 위해 채워져 있던 두 개의 다이얼 중 하나.

     

   [ 메리를 ‘고립’ 시킬 것 ]

     

   그 마지막 다이얼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메리.”

     

   크라슈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메리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곧 있을 일을 미리 상상하기라도 한 듯 메리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져 있었다.

     

   수치심과 부끄러움, 자존심이 너무나 금이 가 이제는 가루조차 남지 않은 모습이었다.

     

   “네게 생긴 모든 일들이 정말 네 탓인 거 같냐.”

     

   그 순간 다음 말이 이어졌을 때.

   메리의 고개가 번쩍 들어 올려졌다.

   

   

   

   

     

   자신이 싫어하는 남자다.

   그런 남자와 몸을 섞어 아이를 잉태해야 하는 만큼 메리 또한 매혹의 향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래서일까.

   눈에 비추는 크라슈의 모습이 예전과는 다르게 마냥 싫게만은 보이지 않았다.

     

   “내, 탓이 아니란 거야?”

     

   크라슈의 물음을 들은 메리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연달아 있었던 일 탓에 정신이 이리저리 망가져 있던 메리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크라슈가 어떻게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아는지 상관없었다.

     

   그저, 자신이 지금까지 마음속 깊은 곳에 품고 있던 끔찍한 생각을 크라슈가 건드리자 무심코 반응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입학 후부터 지금까지 너와 라이벌로서 붙어본 나다.”

     

   그러자 크라슈는 매혹의 향 속에서도 처음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태도로 그녀에게 답해 주었다.

     

   “네 실력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라헬른 아카데미에서 나와 이 정도로 동등하게 싸울 수 있는 녀석은 너밖에 없을 거다.”

     

   크라슈의 말을 들은 메리의 어깨가 떨렸다.

     

   자신이 아무리 필사적으로 노력해도 어느 사람 한 명 자신을 존중해주는 이가 없었다.

   그저 핍박과 매몰찬 시선만 있을 뿐.

     

   4황녀를 시해하려 했을 때도 그녀는 정말 필사적으로 노력했었다.

   일이 잘못되긴 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자신의 노력을 비웃고, 폄하하며 존중해주지 않았다.

     

   “잘 생각해 봐라.”

     

   어느새 침대에서 일어난 크라슈가 메리의 앞에 다가왔다.

   메리는 그런 크라슈를 홀린 듯이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네가 이토록 해온 노력이 물거품이 된 것이 정말로 네 탓인지.”

   “내 탓이, 아니면 누구, 의 탓인 건데.”

     

   부디 해답을 알려 달라는 듯이.

   메리는 애원을 담아 크라슈에게 물었다.

     

   마지막까지 현실 도피를 하는 그녀를 보며 크라슈는 입꼬리를 천천히 틀어 올렸다.

     

   “사냥개에게 명령을 한 건 주인이잖냐. 보통 사냥개의 실수를 사냥개에게 묻냐?”

     

   메리의 눈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크라슈가 가리킨 이가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줄곧 그녀의 마음속 어두운 한쪽에 있던 의문이기도 했다.

     

   자신이 지금 이렇게 된 건 명령에 충실히 따른 것밖에 없었다.

   비록, 그 명령에 성공해내지 못했지만, 처음부터 명령이 잘못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네가 이렇게 된 건 네 탓이 아니야. 주인인 시그린의 명령 때문이지.”

     

   그녀의 마음속에 줄곧 담겨 있던 의문.

     

   이 모든 것은 시그린의 명령 탓에 일어난 일이 아닌가라는 그 의문.

     

   그것을 크라슈가 열어버린 순간이었다.

     

   매혹의 향이 뿌려진 크라슈의 방 안.

   혼미해진 정신 속.

     

   메리의 머릿속에는 크라슈의 말이 반복적으로 두드려지고 있었다.

     

   매혹의 향은 정신을 교란하고, 상대에게 깊숙이 빠지게 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메리도 매혹의 향에 취할 필요 없었지만.

   그러나 내몰린 그녀의 정신은 크라슈의 아이를 잉태하기 위해서 매혹의 향에 기대기라도 해야 했다.

     

   그리고 그 결과 교란된 정신 속에서 크라슈의 말은 세뇌와 같이 깊숙하게 파고들어 왔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제 무덤을 판 것이었다.

     

   “전부 시, 그린 님 탓이라고.”

     

   크라슈는 타고난 눈치가 빠르다.

   그래서인지 풀려버린 그녀의 눈을 보며 크라슈는 시선을 맞추듯 자세를 낮췄다.

     

   “그래, 그 녀석의 명령을 들어 한 번이라도 뭔가 잘된 적이 있었냐. 명령을 한 녀석은 책임을 안 지고, 모든 책임은 언제나 네가 지었지 않냐.”

     

   그 말대로 시그린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책임을 진 적이 없었다.

     

   전부 메리 본인의 탓으로 이어질 뿐.

   그녀는 지시를 내리고, 자신을 모멸하기를 반복했다.

     

   메리의 마음속 시그린의 모습이 점차 갈라져 가기 시작했다.

     

   늘 자신을 헤아려 주고, 제국을 아끼는 주인.

   그러나 이제는 오만하고, 치졸하며 부하조차 헤아리지 못하는 연적.

     

   시그린이 그렇게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메리의 눈에서 눈물이 차올랐다.

     

   뚝뚝 흐르기 시작한 그녀가 서러움을 참지 못했다.

     

   분명 자신도 잘못했다.

   그러니 몇 번이고 뉘우치고, 다시 시그린에게 인정받고자 그토록 노력했다.

     

   하지만 시그린은 늘 매몰차기 그지없었다.

     

   딱 한 번이면 되었다.

     

   메리 수고했어요.

     

   이 말 한마디를 원했다.

   그러나 시그린은 늘 자신을 도구로서 이용할 뿐 단 한 번도 상냥한 말을 해주지 않았다.

     

   아무리 평생의 충성을 맹세한 주인일지라도 메리의 마음속에는 자꾸만 금이 갔다.

     

   “메리.”

     

   크라슈가 다시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눈물이 범벅이 되어 꼴이 엉망이 된 메리가 고개를 들었다.

   시그린의 마지막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일념으로 했던 화장은 어느새 눈물에 번져가고 있었다.

     

   “넌 혼자서도 설 수 있는 녀석이다.”

     

   크라슈의 다음 말은 메리를 또 한 번 크게 흔들리게 했다.

     

   “지금껏 네가 시그린을 따르며 얻은 게 뭐가 있어. 무위? 직위? 자리? 연인? 시그린은 단 하나도 네게 내어주려 한 적이 없어.”

     

   그 말대로 시그린은 오만하기 그지없는 인간이다.

   그녀가 지닌 독점욕은 종종 화를 부를 만큼 강했다.

     

   지금 그녀가 모은 창공의 세대 꼴만 봐도 그렇다.

   세상 모두에게 사랑받기를 바라는 그녀는 남성 구성의 자기를 따르는 이들만을 모아 놓았다.

     

   그것이 시그린의 현실이었다.

   그리고 메리는 그런 시그린의 현실을 볼 시간이었다.

     

   시그린은 분명 뛰어난 편에 속한다.

   지닌 무위야 말할 것도 없고, 독점욕과 같은 비뚤어진 욕망이 강해서이지 머리 자체도 나쁜 편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세계를 구할 위인은 아니다.

   자신의 제국을 사랑하는 이에게 냉큼 바쳐 버릴 정도로 병신 같은 여자니까.

     

   “언제까지고 명령을 따르기만 할 테냐.”

   “나, 는.”

     

   메리는 평생토록 시그린의 기사로서 살아왔다.

   그녀는 명령에 익숙했고, 그렇기에 명령받기를 갈구했다.

     

   머리가 나쁜 그녀는 스스로 생각해 봤자 실수하기 일쑤였으니까.

     

   “이제는 홀로 서라. 내가 본 너는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음 말은 또 한 번 메리를 흔들어 놓았다.

   자신을 무위로 직접 꺾은 크라슈.

     

   비록, 메리가 신창일 때의 힘을 모두 되찾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이기기 위해 기를 쓰고 노력했음에도 그녀는 크라슈에게 무참히 깨졌다.

     

   입학시험 때부터 메리는 줄곧 크라슈 앞에서 한없이 약해진 모습만을 보여주었다.

   지금도 쭈그러든 어깨와 그의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는 게 증거였다.

     

   그래서일까.

   은연중 그녀의 마음속에서 크라슈는 자기보다 더 위에 있는 위치에 올라 있었다.

     

   본래는 그 위에 시그린이 있으므로 그녀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시그린이 무너져 가는 지금 그 바로 아래에는 크라슈가 자리하고 있었다.

     

   평생을 아랫사람으로서 살아왔던 그녀기에.

   윗사람의 말은 모든 게 진실한 조언으로 들렸다.

     

   자신 같은 것보다 훨씬 대단한 크라슈가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이라 해주었다.

     

   인정받았다.

   이런 자신이 인정받은 것이다.

     

   “하으우.”

     

   왜인지 몸이 자꾸만 따끔거렸다.

   붉게 달아올라진 몸과 함께 입에서 뜨거운 숨결이 한차례 흘러나왔다.

     

   회귀를 난 이후 줄곧 인정 욕구에 사로잡혀 살았던 메리다.

   그러나 어느 사람도 그녀의 인정 욕구를 채워주는 이가 없었다.

     

   그토록 사랑하던 아서마저도 채워주지 못했던 것이다.

     

   붉어진 메리의 눈이 더더욱 혼미해졌다.

   방 안을 가득 메운 달콤한 향기는 어느새 크라슈에게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메리의 마음속.

   시그린이 완전히 깨져 나가며 그녀가 고립된 순간이었다.

     

   쩌적!

     

   이윽고, 메리의 남은 두 개의 다이얼 중 하나가 갈라져 갔다.

     

   부서진 다이얼이 파편이 되어 바닥으로 흘러 내린 순간.

   크라슈의 눈앞에 마지막 다이얼이 비추었다.

     

   [ 메리를 ‘굴복’ 시킬 것 ]

     

   그 다이얼을 본 순간 크라슈는 천천히 웃음을 지었다.

   그의 악의적인 웃음의 이유를 메리는 영원히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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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Thief Who Steals Overpowered Skills

I Became A Thief Who Steals Overpowered Skills

Became a Munchkin skill thief meonchikin seukil dodug-i doeeossda 먼치킨 스킬 도둑이 되었다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used to think that my stealing skill only worked on what was worthless to a person.

But just before I died, I realized that I could also steal the skills.

So I stole the reg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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