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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8

       미아 옆에 멍하니 앉아있다가 내가 물에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클레어한테 다시 끌려 나가 물장구를 쳤다.

        

       이쪽 세계의 바다도 내가 살던 바닷물처럼 짜고 씁쓸했다. 처음 물에 들어갔을 때 클레어가 외친 “와 진짜로 짜네!” 하는 다소 해학적인 대사 이후에, 역시 바다에 가본 적이 없던 앨리스가 슬쩍 손가락을 찍어 맛보는 것도 보았다.

        

       황녀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서라도 그 말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는 않으리라.

        

       물에 영영 들어오지 않을 것 같던 미아도 어느 순간 누군가에게 끌려오고 말았다. 쟁반을 내려놓는 과정에서 모래가 쟁반을 침식하는 것을 안타깝게 보긴 했지만, 언제나 물에 들어가지 않을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결국 미아도 어느새 열심히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었다.

        

       레오는 물놀이하는 도중 자기한테 쏠리는 시선을 조금씩 느끼는 건지 슬쩍 몸을 빼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게임에서 외모를 따와서 그런지 기본적으로 미형인 경우가 많았지만, 우리 쪽은 그중에서도 ‘히로인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분명 실비아 팬그리폰이라는 캐릭터가 게임에도 존재했다면 여기 있는 다른 여성들과 똑같이 히로인 중 한 명이었으리라.

        

       황녀에 왕녀, 백작가의 딸까지.

        

       레나나 소피아도 나름대로 귀한 손님 취급이었고.

        

       단순히 외모의 문제를 넘어서 신분만으로도 넘보기 힘든 여성들이었다.

        

       그런데 그사이에 끼어있는 사람이 고작 남작가의 사람이니, 따가운 눈초리를 받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사실상 반나체의 여인들 사이에 있는 유일한 남자.

        

       부럽기도 하지.

        

       하지만 ‘유일한’ 남자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다른 남성진인 제이크는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다.

        

       제이크뿐만이 아니라 로티도 마찬가지였다.

        

       제이크는 물에서 노는 모습이 쉽게 상상이 갔지만, 로티는 아니다. 어째서인지 내 머릿속에서 로티는 검은 수영복을 입고도 메이드 헤어밴드를 하고 제이크 뒤에 서 있을 것 같은 이미지였으니까.

        

       정작 내 앞에서 메이드복을 입은 로티를 본 적은 없긴 하지만.

        

       “…….”

        

       하지만 그 둘을 그렇게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저 멀리, 바위 뒤로 들어가는 로티의 뒷머리가 보였으니까.

        

       ……다른 인물들이라면 저기서 무슨 일을 할지 생각해보겠지만, 상대는 제이크와 로티였다. ‘무슨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거다.

        

       서로 좋아하면서도 은근히 거리를 두고 있으니까.

        

       나는 여전히 왁자지껄 떠드는 일행을 한 번 돌아본 뒤, 슬금슬금 뒤로 빠졌다.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괜히 심각한 이야기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

        

       “……하지만 결국, 그 지위 또한 지배하는 자의 논리로 얻는 것입니다.”

        

       로티의 목소리였다.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았는데 그런 공을 세운 것이 되는 것은, 다른 귀족 분들의 자식들과 다를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일단은 받아서 지위를 올리는 데 쓰고, 나머지는 네 힘으로 올라가면 될 일이잖아. 기사 자리에 오르면 공을 세울 일도 많아지고.”

        

       “…….”

        

       제이크의 말에, 로티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 수영복, 얼마나 하는지 아십니까?”

        

       “……글쎄.”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도 잘은 모릅니다. 그냥…… 고르라고 해서 고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적지 않은 양의 고무가 들어갔을 거라는 생각은 할 수 있습니다. 천연고무를 사이에 두고 천을 감싼 뒤 압착하여 만드는 것이니까요.”

        

       “…….”

        

       “엄밀히 따지자면 저는 이 옷을 입을 사람도, 손을 댈 수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이미…… 도련님께 받은 것이 많습니다. 이 ‘쉬는 시간’도 도련님께서 주선하신 거지요?”

        

       “그래, 내가 했어.”

        

       “그 또한 결국, 도련님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로티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삼켰다.

        

       “너는—”

        

       그리고 제이크가 뭐라고 말을 하려던 찰나에,

        

       “여기서 뭐 해?”

        

       “으갹!?”

        

       어느새 내 옆까지 다가온 앨리스 때문에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갹?”

        

       바위 뒤에서 그런 소리가 났다.

        

       “……다시!”

        

       뒤이어서 앨리스가 뭐라고 말을 하기 전에, 나는 얼른 그렇게 외쳤다.

        

       *

        

       “그래서, 당신이 얻은 권위가 아니니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말씀하고 싶으신 겁니까?”

        

       시간을 되돌린 나는 곧장 둘 사이에 끼어들기로 했다.

        

       “……실비아.”

        

       “죄송합니다. 어쩌다가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습니다.”

        

       사실 ‘어쩌다가’ 엿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뭐 그거나 그거나.

        

       나는 바로 로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제가 당신에게 작위를 주고자 하는 것이 그저 ‘온정’으로만 보였습니까?”

        

       “…….”

        

       내 말에 로티는 뭐라고 대답하지 못한 채 눈을 피했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 모든 온정, 그러니까 제가 주려는 기사 작위를 포함해서, 제이크가 준 모든 선물이, 그저 자신이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받게 되는 무언가라고 생각하십니까?”

        

       역시 로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이고, 답답아.

        

       나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그 모든 것은 당신이 마음에 들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나는 로티에게 말했다.

        

       “당신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성품을 가지지 못했고, 그저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기만 하는 사람이라면 저는 이런 기회를 주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원하는 게 있지요?”

        

       “…….”

        

       “그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조차도 그저 다른 사람의 온정 때문에 얻었다고 생각하실 겁니까?”

        

       식민지 원주민 문제나, 플랜테이션 농장의 비인간성이나. 언젠가 파국을 맞이할 ‘그 좋았던 시절’이나.

        

       그래, 다 해결해야 할 일이지. 특히 윗자리에 앉아있는 우리니 언젠가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갑자기 계급사회가 붕괴하고, 제이크와 로티가 같은 계급의 사람이 되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십 년 뒤에도, 이십 년 뒤에도, 귀족계급은 존재할 것이고 그 자체만으로 다른 사람을 착취할 수 있는 도구가 되리라.

        

       그러니 그때까지도 그저 옆에 있는 하녀로 만족할 것인가? 언제까지고 짝사랑만 하면서, 제이크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결혼하는 것을 보기만 할 건가?

        

       물론 제이크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않겠지만, 아무튼.

        

       

       “이유 같은 것은 따지지 마십시오. 만약 손에 들어온 수단이 있다면 기꺼이 활용하십시오. 적어도 한 가문에 종속된 메이드보다는 기사 작위를 가진 쪽이 훨씬 자유로울 테니.”

       나는 로티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어차피 기회는 곧 온다. 귀족사회가 완전히 붕괴하는 것은 아니지만, 찔러서 피가 나는 사람이라는 것을,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만인이 알게 되는 때가.

        

       그런 상황에서조차 제이크를 가지지 못한 채 멀찍이 떨어져 있으려는 건가?

        

       “원하는 것이, 있지요?”

        

       로티에게 작게 말했다. 그녀만 들을 수 있도록. 내 시선이 제이크를 향하는 것을 보고, 로티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어떻게 알았나 싶은 모양이다.

        

       ……모를 수가 있나. 원작을 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두 사람이 그렇게 붙어 다니는 것을 보고 의심 한 번 해보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로티가 반에서 따돌림당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고.

        

       “두 번째여도 좋다느니, 그저 옆에 있기만 해도 좋다느니 하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저는 제 주변 사람이 그런 식으로 자기합리화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로티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 몸에 진 그늘이 로티를 그대로 덮고 있었다.

        

       ……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한 것은 아닌데.

        

       “가지고 싶다. 이유는 그거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곳에 다른 핑계를 가져다 붙일 이유가 있습니까?”

        

       “…….”

        

       로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시간을 멋대로 빼앗아서 죄송합니다.”

        

       나는 로티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나며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뒤, 몸을 돌려서 저벅저벅 걸었다.

        

       “…….”

        

       그리고, 이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방향에서 바위에 기대 서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앨리스였다.

        

       ‘으갹!’ 하는 소리는 취소되었지만…… 앨리스의 얼굴에 떠 있는 미소는 조금 전 나의 그 비명을 들었을 때보다 훨씬 복잡해 보였다.

        

       뭔가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 보였지만—

        

       나는 집게손가락을 세워서 입 앞에 올렸다. 앨리스는 말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황녀 두 명이 모두 공작가 아들의 이야기를 몰래 듣고 있었다니, 황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질 사건이었다.

        

       내가 집게손가락으로 해변을 다시 가리키자, 앨리스는 고개를 끄덕인 뒤 얼른 내 옆으로 붙었다.

        

       “……두 사람은 어때?”

        

       한참을 걸은 뒤, 뒤를 돌아보고 소리가 거기까지 가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정도가 되어서야 앨리스가 물었다.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기왕이면 내가 한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으면 좋겠는데.

        

       정치적인 이야기를 끼워서 생각하는 거 아니야? 린드버러 공작처럼.

        

       ……괜히 끼어들었나?

        

       이제 와서야 나는 조금 후회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몸살 기운이 있네요…
    후원 감사는 최대한 빠르게 추가하도록 하겠습니다!

    =

    cubic2584 님, 후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쩌면 익명 후원 때문에 노벨피아 독자닉네임 기능을 썼기 때문일 수도 있겠네요. 해당 기능을 쓰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의 닉네임이 그 자리에 들어가서 보입니다. 심지어 제가 제 소설에 들어와도 저의 닉네임이 보입니다! 저의 글을 읽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처음에는 막연한 두려움을 품고 글을 썼는데,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독자 여러분 덕분에 오늘도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제 글을 읽으시는데 쓰신 돈과 시산이 아깝지 않도록, 꾸준히 열심히 쓰는 작가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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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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