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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8

     

    아셀라가 리셰의 앞에 섰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황금색 눈동자는 기세만으로도 매서운 마법을 뿜어낼 듯했다.

     

    천진난만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리셰를 보니 아셀라는 더욱 머리에 열이 차올랐다.

     

    “용사.”

     

    싸늘하게 그녀를 부르는 아셀라.

     

    “아무리 여신에게 선택받은 신비라 한들, 그대는 평민 아닌가.”

     

    “어, 그렇죠….”

     

    “인간사, 각자 제천의 타고난 천명이 있거늘. 그대는 본녀가 가진 혈통의 고결함을 의심하는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어려운 단어에 리셰가 입술을 깨물자 아셀라가 호통을 쳤다.

     

    “예의를 지키란 말이야!”

     

    깜짝 놀란 리셰가 어깨를 움츠렸다.

     

    고작 옷가게에서 같은 제품을 동시에 집었다는 상황.

    평범하게 넘어갈 수도 있는 장면에서 폭언과 함께 화를 낸다.

     

    주변에서 본다면 누구나 아셀라를 악녀라고 여길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아셀라로서는 많이 참은 결과였다.

     

    당장에라도 리셰의 뺨을 후려치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고 있었으니, 예전에 비하면 성질이 많이 죽었다.

     

     

    리셰는 소심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전에 사근한 태도를 받아준 적도 있었던 아셀라였다.

     

    자신의 잘못으로 한 번 미움을 사긴 했어도, 다시 친근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죄송해요, 제가 배우질 못해서….”

     

    “자각은 있구나, 무식한 것.”

     

    아셀라는 홱 몸을 틀어 드레스를 집었다.

     

    시녀와 장인이 즉시 우르르 몰려와 거울을 대령하고 세팅을 했다.

     

    얼추 대본 모습은 역시나 어울린다. 자신의 눈썰미는 틀림없었다.

     

    이 드레스로 정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뒤에서 다시 생글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와아, 잘 어울리시네요. 그 드레스는 처음부터 황녀님을 위해서 만들어졌나 봐요.”

     

    아셀라는 짜증이 몰려왔다.

     

    멕이는 건가?

     

    그녀가 미간을 찌푸려도 리셰는 기죽지도 않고 다시 말을 걸어온다.

     

    “황녀님, 혹시 저도 한 벌 골라주실 수 있으세요? 제가 눈썰미가 없어서요.”

     

    아셀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리셰의 태도.

     

    천진난만하게 실실 웃고 있으니 놀리고 있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너 미쳤니?”

     

    “네? 아, 아뇨…”

     

    “그럼 어떻게 그런 소리가 나와?”

     

    “아, 아핫, 그게… 황녀님께서 옷 고르시는 솜씨가 좋으신 것 같아서요. 황녀님이랑 좀 더 친해지고 싶어서…”

     

    또각, 아셀라가 리셰의 앞에 서서 벌레라도 쳐다보듯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관리도 안 한 몸에 드레스가 어울릴 리가 없잖니. 주제 넘는 짓 하지 말거라. 꼴사나워서 우스울 뿐이니.”

     

    “…그렇네요.”

     

    그제야 리셰도 포기했다.

     

    아셀라는 마음껏 폭언을 쏟아내고는 가게를 나섰다.

     

     

     

    ***

     

     

     

    얼추 준비를 마친 후, 월광궁의 내 방을 나서서 아셀라를 기다리며 대기했다.

     

    “옷깃이 빠지셨습니다.”

     

    타냐가 매무새를 다듬어주었다.

     

    “그래? 분명히 아까 체크했는데.”

     

    타냐가 코웃음을 치고는 호위로 돌아갔다.

     

    리셰는 따로 먼저 화량궁으로 출발했다는 모양이다.

     

     

    잠시 후에 아셀라가 1층 로비로 내려왔다.

     

    “오.”

     

    노란 계열의 드레스는 오랜만이다.

    머리 색과도 어우러져서 꼭 커다란 황금 장미 한 송이가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 같다.

     

    어른스러운 화장을 한 그녀는 내려오자마자 나를 향해 걸어와서는, 악마 같은 미소를 흘렸다.

     

    “어때 보이니?”

     

    “질투 담긴 벌을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여신의 아름다움을 훔쳐오셨으니까요.”

     

    “하여간 혀 놀림은. 진짜 그렇게 생각 안 하잖아.”

     

    “2할 정도는 진짜 생각해요.”

     

    “생각보다 후하구나.”

     

    아셀라는 쿡쿡대며 내 목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그에 비해 넌 꼴이 이게 뭐니. 옷깃이 다 빠져 있잖아.”

     

    “예? 그럴 리가 없…”

     

    아하.

     

    타냐를 못마땅하게 노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싱글댔다.

     

    아셀라는 내 옷매무새를 만진 후 가슴팍을 톡톡 두드렸다.

     

    “가자, 에스코트 해주렴.”

     

    “오늘은 혼약자입니까?”

     

    “왜, 주치의로 남고 싶어?”

     

    아셀라의 옆에 서면 헤이케나 게오르크와도 함께 앉아야 한다.

     

    흠, 밥은 맛있겠지.

    기왕 추가근무니 저녁은 든든하게 먹자.

     

    “모시지요, 황녀님.”

     

    아셀라는 자연스럽게 내게 팔짱을 꼈다.

     

     

     

    ***

     

     

     

    “하하하, 고트베르크! 내게 반해 찾아올 줄 알았지. 자, 들어오게.”

     

    마차에서 내려 정문을 넘어서니 게오르크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량궁은 토진궁보다는 작았지만 화려하게 꾸며놔서 비루해 보이진 않았다.

     

    분수대에서 포도주가 나오고 있는 건가?

     

    “선물은요?”

     

    “아, 선물. 물론 준비했지. 이리 오게나.”

     

    게오르크는 새로 단장한 궁을 자랑하고 싶었는지 궁 여기저기를 안내했다.

     

    별 관심 없으니 빨리 와이번 날개나 받았으면 좋겠네.

     

    “어머, 아셀라, 고트베르크. 둘이 나온 건 오랜만에 본다.”

     

    홀에 들어서니 라우가가 샴페인 잔을 들고는 눈웃음을 흘리며 인사해왔다.

     

    “낙락한 일석입니다, 황녀님.”

     

    “소식 들었어. 용사가 돌아오자마자 너한테 러브콜했다며. 아셀라, 위기감 느끼겠다?”

     

    라우가가 농담처럼 던지며 팔꿈치로 아셀라의 어깨를 툭 쳤다.

     

    하지만 아셀라는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인사도 받지 않고 미간에 힘을 줬다.

     

    그녀의 반응을 본 라우가가 상체를 빼며 내게 속삭였다.

     

    “혹시 러브콜이 아니라 진짜로 프로포즈였니?”

     

    “야!”

     

    참다 못 한 아셀라가 소리를 빽 지르니 라우가가 총총걸음으로 도망갔다.

     

    “기운차군, 아셀라. 안심했다.”

     

    헤이케였다.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심이라, 여유가 넘치는구나, 헤이케.”

     

    “진심으로 한 말이다. 네가 건장해야 국정이 원활이 돌아가는 실정이지. 피차 천황궁의 업무를 분담받는 신세 아닌가.”

     

    헤이케의 말대로 최근 아셀라에게는 황제의 업무가 점점 더 많이 넘어오고 있었다.

     

    그건 헤이케와 게오르크에게도 마찬가지다.

    이유야 명확하다. 황제의 건강 악화다.

     

    “안심했다면 네가 맡은 타국과의 외교 업무도 월광궁에 넘겨도 좋단다, 헤이케.”

     

    제국을 운영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승계전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아셀라는 틈을 보이지 않을 생각이다.

     

    하지만 헤이케의 반응은 아셀라가 의도한 것과는 조금 달랐다.

     

    “견제는 잠시 멈춰라, 아셀라. 그럴 시국이 아니다.”

     

    “마치 내가 시국도 읽지 못한다는 소리로 들리는구나.”

     

    “언제까지 경쟁만 고수할 셈인가. 이제 단기전으로 안 끝난다고 잘 알지 않나.”

     

    “우리가 승계권을 걸고 승부를 벌였던 게 몇 달 전이었더라.”

     

    헤이케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봐도 오늘 아셀라는 꽤 저기압이다. 헤이케에게 악의는 없었겠지만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았다.

     

    “월광궁이 맡은 중요한 업무는 알아서 처신하리라 믿고 있겠다. 무려 그 용사를 관리하고 있지 않나.”

     

    용사라는 단어에 아셀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용사는 어디 계신가?”

     

    헤이케의 질문에 아셀라가 고개를 돌렸다.

     

    “나도 몰라.”

     

    “모른다? 네 관할이잖나.”

     

    헤이케가 아셀라를 질책하려 하듯 눈을 크게 떴을 때였다.

     

    “다들 주목해주게! 오늘의 주인공이 지금 입장하시는군!”

     

    게오르크가 크게 손뼉을 두 번 쳤다.

     

    커다란 문이 열리고 안에서 기사들이 멋들어지게 열을 맞춰 걸어 나왔다.

     

    “대륙을 위기에서 구해줄 희망의 빛, 여신이 보낸 사자, 무슨 뜸을 더 들이겠나. 그녀가 바로 용사라네!”

     

    철컥, 철컥. 쇳소리가 홀에 울린다.

     

    기사들 사이로 나타난 리셰의 드레스코드.

     

    그녀는 세련되고 날렵한 경갑을 입고, 성검을 등 뒤에 맨 모습이었다.

     

    시선을 살짝 위로 하고 당당하게 걸어 나오는 리셰는 세상 겁나는 게 하나도 없다는 태도였다.

     

    “호오, 갑옷인가. 멋지지 않은가.”

     

    헤이케가 그녀를 보고 감탄했다.

     

    “하하, 과연. 실로 용사에 어울리는 품격이로군. 당장에라도 마족의 목을 베어줄 기백이 느껴진다네!”

     

    게오르크 역시 리셰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정찬 자리에 갑옷 차림은 당연히 어울리지 않지만, 용사라는 리셰의 특수성이 오히려 그녀를 돋보이게 해줬다.

     

    “에헷, 감사해요. 사실은 입을 옷이 없어서 그냥 익숙한 걸로 입고 왔어요. 예의가 없어서 죄송하지만…”

     

    “귀여워라. 용사님, 나랑은 처음 얘기해 보지? 나중에 파티도 소개해줄까?”

     

    “파, 파티요?”

     

    라우가가 어느새 리셰에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황녀님?”

     

    나는 슬쩍 아셀라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리셰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어쩐지 빛을 잃은 듯 보이는 노란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꽉 붙잡고 있었다.

     

     

     

    정찬 자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화량궁을 방문한 소감은 어떠셨는가, 헤이케 누님.”

     

    “마음에 들었다. 네가 이리 빨리 재기하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게오르크.”

     

    “재기라니, 너무 얕잡아보는군. 나는 전보다 높은 비전을 가지게 되었지. 지금부터 증명해주겠네.”

     

    얘도 헤이케한테는 누나라고 부르는구나.

     

     

    물론 겉으로만 화기애애하다고 보는 게 올바르긴 했다.

     

    게오르크와 라우가가 텐션이 높아서 그렇지, 대화 내용을 보면 정치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특히 최근 황제가 각 궁에 배분한 권한을 놓고 은근히 신경전이 오고 갔는데, 담당할 분야에 따라 궁의 활동 범위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연무회에서 폐하는 목휘궁이 모시기로 정했다.”

     

    헤이케가 연무회의 주제를 꺼냈다.

     

    “출전권에 관해서는, 전에 얘기했던 대로 기사단 전체를 담당하려 한다.”

     

    “그거, 아직 나랑 얘기 안 끝났잖아.”

     

    아셀라가 곧장 반발했다.

     

    “아셀라 너는 용사를 담당하고 있잖나. 거기에 집중하기도 바쁠 텐데. 몇 자리는 만들어주겠다고 했잖나.”

     

    헤이케가 전채로 나온 야채를 절도있게 입에 넣으며 말했다.

     

    “월광궁이 목휘궁의 산하가 아니잖니? 그 형태는 용납할 수 없구나.”

     

    아셀라가 강하게 의견을 주장했다.

     

    “대신 치유사 부문을 담당하면 되지 않겠나. 고트베르크, 내의원은 조율 중이라 들었다만.”

     

    “그렇습니다.”

     

    “그런데 의사와 치유사만으로 연무회에서 민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가 있겠는가? 기사야 기술을 보여주면 되지만,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군.”

     

    게오르크가 의문을 제시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놓은 퍼포먼스는 몇 있습니다.”

     

    “다름아닌 자네가 있으니 기대해볼 만하겠지. 각 분야에서 우수한 참가자에게는 부상도 주어진다 하더군.”

     

    “그렇습니까? 이를테면.”

     

    “왕국에선 모험가들이 희귀한 전리품을 모으지 않겠나. 소문으로는 ‘벼랑꽃’도 있다는 모양이더군.”

     

    “오호라.”

     

    벼랑꽃, 분명 황금 장미의 상위 품종이다.

    미래에서는 왕국이 멸망해서 구할 방도가 없었는데, 종묘를 추출하면 사탕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짝, 게오르크가 손뼉을 쳤다.

     

    “다들 전채는 충분히 즐긴 듯하니 주요리로 넘어가지. 내 특별히 희귀한 음식을 준비했다네!”

     

    시종들이 잔뜩 들어와서는 동시에 접시를 바꿔주었다.

     

    접시 위에는 장인의 정성이 느껴지는 먹음직스러운 생선이 올라와 있었다.

     

    “…후.”

     

    아셀라가 짧게 한숨을 쉬고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이 자리가 영 스트레스 받는 모양이었다.

     

    ‘음?’

     

    살짝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생선을 향해 스킬을 사용했다.

    성분 분석으로 화학식을 파악한다.

     

    탁, 내가 포크를 쥔 아셀라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다들 생선은 드시지 마세요.”

     

    “뭐라고?”

     

    요리를 입에 넣기 직전인 게오르크가 깜짝 놀라며 혀를 다시 집어넣었다.

     

    “희귀한 재료라고 하셨지요. 제국에서 안 나는 생선이다 보니 조리법이 잘못됐군요. 독이 남아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생선은 복어였다.

    조리 중에 알주머니를 터트린 모양이었다.

     

    “뭐, 뭣! 요리사!”

     

    게오르크가 격하게 반응하며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헤이케와 라우가는 얘가 사고 칠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식기를 내려놓았다.

     

    나는 헤이케에게 말했다.

     

    “연무회에서 저희 퍼포먼스는 이것보단 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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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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