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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8

       “…….”

        

       양혜인과 할머니가 나간 후, 집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바로 조금 전까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던 하늘이와 수아는 비로소 숨을 내쉬었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유일하게 멀쩡한 사람은 소희뿐이었다.

        

       뭐랄까, 할머니 상대로는 상냥한 양아치 설정이라도 있는 걸까? 왠지 서브컬쳐계 양아치는 그런 경우가 많았던 것 같은데.

        

       “다들 왜 그래?”

        

       소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하늘이와 수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냥.”

        

       차마 지친다거나 어색하다거나 하는 말을 꺼낼 수는 없어서, 나는 그저 그렇게 말을 얼버무렸다.

        

       솔직히 격하게 후회하고 있다. 아까 여기 도착했을 때부터 계속.

        

       양혜인이 눈치 좋게 할머니를 데리고 나가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물론 내가 딱히 잘못한 것은 없지만.

        

       양혜인에게 정상적인 휴식을 주려고 했는데 거부해서, 서로 물러나지 않고 말싸움을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을 뿐이니까.

        

       “그, 할머니도 좋은 분이시고, 이 집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데, 뭐랄까…….”

        

       정말로 친화력이 어마어마한 사람이 아니라면, 자기 집안 어른들이 아닌 남의 집안 어른들을 만났을 때 엄청나게 어색함을 느끼는 법이다. 결혼식에서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나를 기억하는데 나는 상대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엄청나게 어색한 상황이라면, 지금 이 상황은 그 상위호환이었다.

        

       “응, 아냐, 아무것도.”

        

       하지만, 역시 뭐라고 불평할 사안이 없다는 점 때문에,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저으며 말을 흐렸다.

        

       소희는 여전히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운 채, 약과를 하나 더 집어 입에 넣었다.

        

       “그런데…….”

        

       다음으로 입을 연 것은 하늘이었다.

        

       “그럼 혜인 언…… 아니, 양혜인 씨는.”

        

       아까 불렀던 호칭인 ‘혜인 언니’를 꺼내려다 황급히 다른 말로 바꾼다.

        

       “그러니까, 일하는 동안 여기에 한 번도 온 적이 없는 걸까?”

        

       “…….”

        

       흠.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서 억지로라도 휴가를 보내려고 했으니까.

        

       하지만 만약 그런 거라면…….

        

       ……아니다. 내가 판단할 수 없는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양혜인이 여기에 오지 않은 것은 최나경 때문이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직접 물어볼 수는 없겠지만.”

        

       “그렇겠지…….”

        

       수아가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 본인이 이야기할 의향이 있으면 말해주겠지.”

        

       그나마 소희만이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하긴, 얘는 양혜인의 개인사를 조금이나마 들은 적이 있는 애였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내 마음은 반반이었다.

        

       궁금하긴 하다는 생각. 그리고 동시에 불편해질 것 같아 듣기 싫다는 생각.

        

       ……뭐, 어쩌겠어.

        

       양혜인이 말해주기 전까지는 가만히 있는 수밖에.

        

       어쨌거나 여기로 끌고 온 건 나였으니까.

        

       *

        

       “여기는 변한 게 없네.”

        

       “어휴, 아니지.”

        

       작게 중얼거렸는데, 평소에는 귀도 어두우면서 이럴 때는 말을 어떻게 그렇게 잘 듣는 건지,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네가 보내준 돈으로 집도 고치고 다 했는데.”

        

       “……그 돈, 내가 달라니까 다시 돌려줬잖아요.”

        

       소희를 학교에 들여보내는 과정에서 다시 필요하다니까 할머니는 남은 돈을 그대로 돌려주는 수준으로 보내주었다. 양혜인이 지금까지 모은 모든 돈은 아니었지만, 은행에서 전화가 올 정도로 큰돈이긴 했으니까.

        

       덕분에 그때 일이 잘 풀리긴 했지만.

        

       “그래도 집 고치고 남은 돈이니까 괜찮아. 그리고 이 할미도 아직 팔팔하니까.”

        

       물론 할머니가 직접 일해서 버는 돈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특히, 아마 할머니보다 훨씬 적은 노동을 하면서 양혜인이 버는 돈 보다는 확실히 적겠지.

        

       할머니 성격에 하지 말란다고 안 할 리도 없으니, 양혜인은 굳이 그런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양혜인은 눈을 천천히 돌리며 둘러보았다.

        

       안 그래도 산 중턱에 있는 집이었는데, 밭은 그 뒤쪽으로 또 한참 올라가야 했다.

        

       가파른 산을 올라가다 보면 중간에 확 완만해지는 구간이 있는데, 밭은 거기에 있었다. 완만한 곳의 나무를 베어내고 그 부분만 흙이 보이도록 드러낸 땅. 거기 고구마가 싹이 줄지어 자라고 있었다.

        

       그렇게 큰 밭은 아니었다. 사실 고구마가 난다고는 해도 그걸 캐다가 팔 정도의 양도 아니고.

        

       그냥 이웃에 조금 나눠주고, 겨울 동안 먹으면 다 먹을 정도의, 딱 그 정도의 양이었다.

        

       “할머니, 서울로 올 생각은 없어요?”

        

       이미 몇 년 전부터 몇 번이고 물어봤던 질문을 해봤지만,

        

       “나는 여기가 좋아.”

        

       할머니의 대답은 여전했다.

        

       “…….”

        

       나는 여기가 싫어요.

        

       그런 말을 당당하게 했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이미 몇 번이고 했던 말이니까.

        

       할머니도 양혜인이 떠나는 것을 잡지 않았었고.

        

       양혜인은 한눈에 보이는 마을을 계속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머니.”

        

       “응?”

        

       “제가 원망스럽지 않아요?”

        

       여길 떠나서 몇 년이나 돌아오지 않은 그녀였다.

        

       그동안 할머니는 계속 혼자 살았고.

        

       돈을 보냈다가 다시 빌려 가겠다는 명분으로 받아 가기도 했었고.

        

       누가 봐도 불효녀가 아닌가.

        

       “괜찮다, 괜찮아.”

        

       하지만 할머니는 언제나 그렇듯, 그저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너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

        

       양혜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

        

       양혜인과 할머니가 돌아온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밭이 넓기라도 한 걸까?

        

       돌아오는 길을 보니 엄청나게 가팔라서 굳이 따라 올라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양혜인은 여전히 무표정했고, 할머니는 여전히 웃는 상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두 사람에게 정말 미안하지만, 솔직히 진짜 안 어울린다.

        

       그래도 할머니는 좋아.

        

       …….

        

       음, 확실히 좋은 분이시긴 하지.

        

       개인적으로는 처음 보는 사람, 그것도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사람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있기는 했지만, 이런 순수한 호의를 거의 마주해 본 적 없는 사라의 입장에서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집이 좁아서 어쩌나. 이불은 꺼내면 충분하겠지만, 아무래도 다 같이 누우면 좁을 텐데…….”

        

       할머니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보면서 말했지만,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저희는 괜찮아요.”

        

       정말 괜찮았다.

        

       왜냐하면 나는 매일 밤 이 세 사람 사이에 꽉 껴서 자고 있으니까. 하늘이가 자주 자고 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더더욱 침대가 좁아졌다.

        

       그렇기에 아침마다 움직이기도 어려울 정도로 꽉 낀 채 잠에서 깨는 일에는 익숙했다.

        

       어차피 침대보다는 훨씬 넓은 집이다. 좀 붙어서 자도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다행이다만…….”

        

       “정말 괜찮으니까요.”

        

       내가 몇 번이나 말하고 나서야, 할머니는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주셨다.

        

       *

        

       사람이 참 간사하다고 느끼는 게, 평소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생활하다 보면 그 생활에 완전히 익숙해져 원래 상태로 돌아가기 싫어진다.

        

       내가 이쪽 세상으로 오고 난 이후에 쓰고 있는 침대는 그야말로 고급 침대다. 단순히 크기뿐만이 아니라 누웠을 때 편한 정도가 내가 원래 세상에서 쓰던 침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다.

        

       그리고 당연히, 바닥에 깐 이불 위보다도 훨씬 편하다.

        

       눈을 감은 채로 귀를 기울여보면, 다른 아이들은 전부 잠이 든 모양이었다. 어쩌면 몇 시간 동안 차를 타고 달려온 것, 그리고 이것저것 많이 먹어 평소보다 더 배부른 것이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영 잠이 오지 않았다.

        

       평소처럼 꽉 끼어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딱딱한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이 엄청나게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몇 번이고 몸을 뒤척이다가, 나는 그냥 다시 일어나 앉았다.

        

       서울처럼 집 밖에 화려한 광원이 별로 없는 곳이었지만, 밤하늘은 밝았다. 창문 밖으로 희미하게 빛이 들어오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달이 밝게 떠 있는 것이리라.

        

       잠깐 앉아있던 나는, 한숨을 푹 쉬고 그냥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잠자리가 불편할 때 잠을 자는 좋은 방법은, 그냥 잠이 쏟아질 때까지 버티는 것이다.

        

       다행히도 사라의 몸은 졸음에 약했다. 조금만 깨어 있으면 바닥이 불편하고 어떻고 간에 잠이 쏟아지리라.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건 줄 알아?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사라가 몸이 약한 것은 아무래도 선천적인 원인과 후천적인 원인이 겹쳤기 때문인 것 같으니까.

        

       남들보다 더 빨리 지치고, 피로를 느낀다. 평소에는 별로 문제가 없지만, 지난번처럼 어떻게든 힘을 써야 하는 일이 생기면 엄청 곤란해진다.

        

       슬슬 운동의 종류를 늘려야 하려나.

        

       ……아, 진짜 싫다.

        

       한숨을 푹푹 쉬면서 낮에 앉았던 툇마루로 나오는데, 이미 누군가 나와서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낯이 익은 뒷모습이었다.

        

       “……양혜인 씨?”

        

       내가 작게 부르자,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양혜인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달빛에 희미하게 비친 양혜인의 모습은…… 솔직히 내가 아니라 이쪽이 ‘아가씨’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우아해 보였다.

        

       “아가씨.”

        

       “……여기선 아가씨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지만, 나 외에 다른 사람이 나를 따라 나온 것 같지는 않았다.

        

       “…….”

        

       “……알아요. 그럼 대체 어떻게 불러야 하냐는 말이죠?”

        

       그러게나 말이다.

        

       나도 ‘양혜인 씨’라는 호칭을 할머니 앞에서 쓸 수는 없었으니까.

        

       뭐, 기왕 이렇게 된 거 졸릴 때까지 합의나 보도록 할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양혜인의 옆에 가서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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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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