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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9

     

    약간의 소동이 있었기에 게오르크가 연 정찬 모임은 어수선하게 마무리됐다.

     

    게오르크가 조치를 위해 자리를 비우니 아셀라는 그와 나눌 말이 있다며 뒤따라 일어섰다.

     

    오늘 일을 빌미로 협박이라도 할 모양이다.

     

    “정말, 기분 다 잡쳤어. 나 배고픈데.”

     

    라우가는 게오르크에게 불평을 쏟아냈지만 헤이케는 꽤 덤덤했다.

     

    “1황녀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2황자께서 의도적으로 벌인 사건이라 의심하진 않으시는지요.”

     

    “뭘, 게오르크는 저러고도 남을 놈이다.”

     

    “하긴 그렇죠.”

     

    “오늘 자리의 보상이야 서면으로 보내면 그만이다. 중요한 시기에 굳이 분위기를 망칠 필요야 없지 않겠나.”

     

    헤이케는 좀 더 큰 그림을 보고 있었다.

     

    이 자리의 누구보다 먼저 복어를 먹으려고 했으니 진짜 사고이긴 했겠지.

     

    “그리고 혹시 위험한 일이 생겨도 고트베르크 선생님이 계시잖아요.”

     

    리셰가 한 마디 덧붙였다.

     

    “아무리 저라도 죽은 사람은 못 살립니다. 평소에 조심하세요.”

     

    “네엣.”

     

    배시시 웃는 리셰.

     

    잠시 후에 게오르크가 돌아와 짝짝, 손뼉을 쳤다.

     

    “귀빈들을 모셔놓고 체면이 말이 아니군. 형제들, 민폐를 끼쳤으니 선물이라도 잔뜩 가지고 돌아가시게나.”

     

    헤이케와 라우가는 대꾸 없이 자리를 나섰다. 둘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게오르크가 미소를 지우고는 십 년 감수했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네 덕분에 살았어, 고트베르크. 이 자리에서 제국의 역사가 끊길 뻔했군.”

     

    “그러니 주치의가 있지 않겠습니까. 전하도 빨리 새로 고용하세요.”

     

    “원, 팔켄하인 같은 인재를 찾을 수가 있어야지. 내 오늘 빚은 꼭 갚겠네.”

     

    “흠, 빚 말이군요.”

     

    결투에서 치고박고 했을 때를 생각하면 애가 유해지긴 했다.

     

    은혜를 갚을 줄 아네.

     

    나름 영향력이 강한 황족이다. 중요할 때 생각대로 움직여주면 써먹을 곳이야 많다.

     

    “하나 확인하고 싶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지금도 승계의 의지가 강하십니까?”

     

    “하하, 기묘한 질문을 하는군.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제국의 차기 황제로 이 게오르크 이외에 누가 어울린단 말인가?”

     

    “그렇군요. 투쟁하는 자세야말로 전하께 어울리시지요.”

     

    “암. 역시 그대는 알아보는군.”

     

    자신에게 취해 고개를 주억거리는 게오르크를 보며, 좋은 생각이 났다.

     

    “그 본격적인 투쟁의 일정 계획은 잡아놓으셨는지요.”

     

    게오르크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내가 무엇을 권유했는지 이해했다.

     

    승계를 위한 군사행동.

    즉, 쿠데타다.

     

    “아직은 궁의 재건이 먼저 아니겠는가. 때가 아닐세.”

     

    돌려서 거부하는 게오르크. 그도 당연하다. 아직은 황제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으니.

     

    나 역시 반역으로 취급될 수 있는 발언이 아니라고 의사를 확실히 표현해야 했다.

     

    “물론 제국의 안녕이 유지되는 한 그런 일은 있어선 안 되겠지요. 허나 제국을 받치는 디딤돌이 사라진다면 누군가는 대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도 옳다.”

     

    “제가 시기적절한 때를 알려드리면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호오.”

     

    게오르크가 흥미를 보였다.

     

    “그 독요리를 먹고 오늘 내가 절명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밖에서 독버섯 찌개도 국자로 퍼먹어 봤거든.”

     

    상당한 서바이벌을 경험하고 왔구나.

     

    “하지만 주치의도 고용하지 못한 상황이야. 자네는 3황녀를 먼저 치료했을 테니 혹시 모를 일이지. 그러니.”

     

    게오르크가 찡긋, 내게 윙크를 했다.

    나는 고개를 까딱여 날아온 윙크를 피했다.

     

    “목숨 반 개 정도는 고려해주겠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예상외의 수확이었다. 황궁에 있는 한 게오르크는 내게 좋은 보험이 되어주겠지.

     

    “게오르크, 거래의 준비는 마쳤느냐?”

     

    어느새 다가온 아셀라가 말을 걸었다. 게오르크가 턱짓하니 시종이 문서를 가져왔다.

     

    시녀장 누님이 그것을 받아 들어 내용을 보여주었다. 아셀라는 글자를 속독하고는 날카롭게 물었다.

     

    “무역 조세권이 빠졌잖니.”

     

    “하하, 빈틈이 없군. 받아가게나.”

     

    게오르크가 추가로 문서에 사인을 하고는 철을 덮었다.

     

    대충 옆에서 보기로는 황제가 게오르크에게 맡긴 경제 관련 업무를 월광궁에 이관하는 내용이었다.

     

    제도 관청은 물론 대부분의 귀족에게 세금을 뜯을 수 있으니 어마어마한 규모의 돈을 다룰 수 있을 텐데.

     

    엄청난 권력이다.

     

    겨우 사고 하나를 빌미로 저걸 뜯어왔다고?

     

    “용건은 끝났어. 라스, 돌아가자.”

     

    그녀가 내 팔을 잡았다.

     

    “아, 저도…”

     

    여태 뒤에서 머뭇거리던 리셰가 우리를 따라오려는데 확.

     

    아셀라가 팔을 젖히며 나와 리셰 사이에 끼어들었다.

     

    “넌 아니야.”

     

    아셀라가 리셰를 노려보며 강조했다.

     

    리셰는 평소와 다르게 기운찬 모습은 없고, 어깨를 움츠리며 힘없이 수긍했다.

     

    “…따로 돌아갈게요.”

     

    “못 알아들었어? 넌 월광궁에 못 온다고.”

     

    “네? 왜요?”

     

    아셀라가 리셰에게 서류를 보여줬다.

     

    “보이니? 뭔지도 모르겠지만. 너랑 교환했어. 지금부터 넌 2황자의 담당이야.”

     

    아셀라의 통보에 리셰가 크게 충격을 받았는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저를 팔았다고요?”

     

    “그래, 팔았어. 노예처럼 말이야. 다시는 월광궁에 발붙일 생각도 하지 마.”

     

    “싫어요. 저는 월광궁이 좋아요.”

     

    “하, 그럼 어쩌려고? 월광궁은 내 궁이야.”

     

    리셰가 나를 돌아보았다.

    아셀라를 설득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기다릴 것도 없어. 가자.”

     

    아셀라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팔다니, 표현이 안 좋군. 용사님, 거처만 잠깐 바뀌신 거요. 활동하시는 데는 지금과 다를 바 없도록 보조해드리겠소.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시오. 아, 고트베르크. 선물 챙겨가게.”

     

    게오르크가 상황을 수습하려 했지만 아셀라는 여유를 주지도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월광궁으로 돌아가는 마차에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미리 언질 정도는 주시지 그랬어요.”

     

    “네가 찬성할 리가 없었잖아.”

     

    “찬성은 안 했겠지만 황녀님의 이유가 합당하다면야 강하게 반대도 안 했겠죠.”

     

    “라스, 경고하겠는데.”

     

    아셀라가 내게도 경고하듯 쏘아붙였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설령 왕국과 전쟁이 일어나는 한이 있어도, 절대. 절대로 용사랑 두 번 다시 만나지 마.”

     

    어째서일까.

     

    달빛에 비친 그녀의 그림자에서, 오랜만에 내가 잘 알던 황제 아셀라가 비쳐 보이는 기분이었다.

     

    “황녀님. 혹시 용사가 저를 좋아할까 봐 그러시는 거라면, 그와 유사한 행동을 보이는 원인은 파악했고, 제가 직접 접촉하지 않더라도 경과는 파악할 필요가 있어서…”

     

    “하지 말라면 하지 마! 그게 그렇게 어려워?”

     

    지금은 안 되겠네.

     

    아직 주기는 아닌데.

     

    이럴 때 더 얘기해 봐야 자극하는 일 밖에 안 된다. 나중에 기분이 풀어지면 다시 얘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후 아셀라는 넘겨받은 황제의 업무를 이어가며 더 바빠졌고, 나는 나 대로 내의원을 정리하느라 시간이 없어졌다.

     

    무더위가 가라앉을 때 즈음, 왕국이 주최하는 대륙 연무회의 시기가 마침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

     

     

     

    “존안을 뵙습니다. 내방을 진심으로 환영하옵니다, 황녀 전하.”

     

    텔레포트 게이트를 나서니 슈바르츠슈바이크 공작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의 옆에서 프레다 공녀도 얌전하게 예도를 지키는 모습이었다.

     

     

    나는 아셀라와 함께 제국 최서부인 공작령에 도착했다.

     

    물론 연무회에 참가하기 위해 더욱 서방에 있는 왕국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다.

     

    월광궁이 금서궁과 함께 선발대를 맡아, 개최 한 달 전에 출발하게 됐다.

     

    그나마 제국엔 텔레포트 게이트가 있어서 이 일정이지, 법국 같은 곳은 넉 달 전에 이미 원정군을 꾸려 출발했다고 들었다.

     

    후발대로 헤이케와 함께 황제가 도착할 예정이 있었기에 공작은 남고, 나와 아셀라, 라우가와는 프레다가 동행했다.

     

    “왕국에 오신 걸 환영하오.”

     

    평소 같으면 엄중하게 닫힌 분쟁지역이었을 중앙 협곡이 열리는 걸 보니 조금 신기하긴 했다.

     

     

    왕도로 향하는 일정은 2주가 조금 넘게 소요됐다.

     

    “3황녀님도 참, 저 처음에 못 알아봤잖아요. 언제 이렇게 이뻐지셨대요? 고트베르크 공자님이 눈썰미가 진짜 좋으시네.”

     

    아셀라는 원래 눈엣가시였겠다, 라우가만큼 말 많은 프레다를 보고 처음엔 짜증을 냈으나 점점 그녀의 화술을 마음에 들어했다.

     

    잘 길들여 놓으면 나중에 사교계에서 쓸만한 말로 다루겠다는 생각이겠지.

     

     

     

    “왕국은 활기가 넘치는군요.”

     

    왕도에 들어서니 여태 조용하던 타냐가 못 참고 감상을 냈다.

     

    마차 밖으로 보이는 온갖 두서없이 증축된 통나무와 벽돌의 건물들. 엘프나 드워프, 수인, 드물게는 리저드맨 같은 이종족도 2할 비율은 됐다.

     

    타냐가 보기에도 꽤 신기한 광경이었나 보다.

     

    제국 기사단 깃발 때문인지 이목을 끌며 성문을 지나는 기분은 꽤 나쁘지 않았다.

     

    “연무회 기간 동안 안내하겠습니다.”

     

    왕국이 준비한 시종도 엘프였다.

    신세대적이네. 인종감수성이 풍부한 건 마음에 들었다.

     

    밖에 나와 있는 엘프를 보고 발렌은 곧장 이를 갈았지만.

     

    “그러고 보니 저희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군요.”

     

    “그러게? 분명 집에 돌아가려고 했는데.”

     

    파멜름과 발렌은 그제야 내게 속았다고 깨달은 모양이었지만 이미 늦었다.

     

    왕국산 길거리 음식을 물려주니 발렌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제야 좀 쉬겠구나.”

     

    왕국이 준비한 호텔 방에 들어서서 아셀라가 널찍한 침대에 엉덩이를 던지고는 몸의 힘을 뺐다.

     

    “먼 길 고생하셨습니다. 저는 시종들과 함께 옆 방에서 대기할 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불러주시죠.”

     

    “어머, 그게 무슨 말이니.”

     

    아셀라가 툭툭, 침대 자기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네 방도 여기야.”

     

    “그래요?”

     

    “연합군 모든 국가가 모이지 않니. 귀빈의 방만 해도 숫자가 모자랄 지경이래. 갈 데도 없어.”

     

    “저야 상관없습니다만.”

     

    “좀 더 기뻐하렴.”

     

    “아이고 신나라.”

     

    내 반응에 아셀라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똑똑, 노크 소리가 났다.

     

    내가 문을 여니 호위기사가 용건을 전했다.

     

    “접견을 요청하는 이가 있습니다.”

     

    “황녀님께서 방금 휴식에 드셨어. 나중에 오시라고 해.”

     

    “그게, 상대도 귀빈이시라 확인이 필요하다 아룁니다.”

     

    “어떤 귀빈인데?”

     

    내가 확인하기도 전에 불쑥 기사들 사이로 얼굴이 튀어나왔다.

     

    찰랑거리는 건강한 적발을 가진 미인이었다.

     

    “어머, 제가 실례되는 시간에 찾아왔나요? 그래도 귀인이 오셨다는데 마냥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요.”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황녀님을 뵈러 오셨습니까?”

     

    “내 정신 좀 봐. 소개도 안 했네요. 저는 왕국의 1왕녀, 페르시야라고 해요.”

     

    왕녀였구나.

    미래에는 없는 인물일 테니 내가 모를 만도 했다.

     

    “실례했습니다. 존안을 뵙습니다. 저는 황녀님의 주치의, 고트베르크입니다. 황녀님께 보고를 올리겠으니 잠시 기다려 주시면…”

     

    “어머, 당신이군요!”

     

    별안간 페르시야가 내게 다가와 생글생글 눈웃음을 흘렸다.

     

    “생각보다 젊은 분이라 상상도 못 했네요. 의사 고트베르크 선생님. 황녀님이 아니라 당신을 만나러 왔어요.”

     

    “저를 말입니까? 신기한 일이군요. 왕녀님께서 저를 어떻게 아시지요?”

     

    “후훗, 왜 모르겠어요. 요즘 왕국으로 상단이 수입하는 품목에서 가장 인기 많은 게 뭔지 아세요?”

     

    뉘앙스는 이해가 됐다.

     

    전에 장군이 고트베르크 공장의 상비약이 왕국으로도 수출되고 있다고 언급했었지.

     

    “저기, 의사 선생님.”

     

    어느새 내 어깨 위에 왕녀의 손이 올라와 있었다.

     

    왕국은 터치가 자유롭네.

     

    “선생님께 관심이 많은데…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사업 얘기였다.

     

    과연. 전 대륙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다 모이니 잠깐도 쉴 틈 없이 이렇게 영업 다니는 사람도 있는 건가.

     

    “하하, 왕녀님….”

     

    내가 일단 상황을 정리하려는데 쿵.

     

    어느새 문지방을 내려치는 손이 있었다.

     

    “야.”

     

    깜짝 놀란 1왕녀의 시선이 목소리가 난 내 등 뒤로 향했다.

     

    “넌 뭐야.”

     

    왕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도 대국의 왕족이다. 갑자기 반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입장은 아니었다.

     

    “무례하시군요. 저는 자유로운 윌리엄스의 평야를 수호하는 혈족이자…”

     

    “모르겠고, 너 뭐냐고.”

     

    아셀라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팔로 내 목을 휘감으며 말했다.

     

    “난 얘 약혼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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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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