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79

       *

         

         

         군인으로서 전장에서 보낸 숫한 세월으로 다져진 일종의 본능이라 해도 좋았다.

         

         이반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을 보며 경악하는 엘피헤라를 힐끗 바라보며 본능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다.

         

         먼저 하나.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한겨울 평범한 자연현상이라 할 수 있겠으나, 이곳은 칼리온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명백한 이상기후에 속한다.

         

         다음, 하나.

         

         칼리온의 기후를 조작하는 것은 마일스톤의 힘이다.

         

         다시, 하나.

         

         마일스톤은 칼리온의 모든 섬들에 하나씩 박혀 있으며, 모든 마일스톤들이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모종의 대규모 마법진을 이룬다.

         

         마지막, 하나.

         

         마일스톤의 목적은 ‘엘프에게 유리한 환경 조성’이다. 즉, 작게는 기후와 식생이 해당되며, 크게는 마력과 운명까지 닿는다고 전해진다.

         

         즉, 마일스톤에 이상이 생길 경우 엘프의 마력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여기까지 0.23초.

         

         처음 흩날린 눈송이가 바다에 닿기 전, 분절된 시간 속에서 이반의 사고가 가속하고 있었다.

         

         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세상이 정지된 것처럼 고요했다. 저 먼 수평선은 차라리 정물에 가깝다.

         

         퍼즐이 맞춰진다. 파편화된 정보가 실선을 그리며 이어지고 있었다.

         

         어두운 밤, 흑백으로 나뉜 무채색의 표면에서 이반은 천천히 가속을 진정시켰다. 바람이 분다.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마력엔 문제가 없다.’

         

         

         초인의 영역이라 불리는 상대시간의 가속. 이 현상은 신경계를 마력으로 강화하며 생기는 부작용에 가깝다. 즉, 그의 몸에 흐르는 마력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엘피헤라.”

         “네? 네?”

         “마법을 써봐라.”

         “네? 마법이요?”

         “아무거나. 최대한 빨리.”

         

         

         이반의 말에 엘피헤라는 재빨리 손을 휘저었다. 보라색 마력이 그녀의 손끝에 머물다가 곧 팡, 하고 터졌다.

         

         

         “어…? 어?!”

         “마법 말고 다른 문제는 없나?”

         “수, 숨쉬기가 조금 힘든 것 같기도…. 아직 잘 모르겠어요. 무슨, 무슨 일이에요, 이거?”

         

         

         이반은 대답 없이 하늘을 올려보았다. 눈이 내린다. 마력이 끊기고 있다. 마법이 흩어지고 있다.

         

         마일스톤이,

         

         또는, 마일스톤의 축복이 걷히고 있다.

         

         엘프들의 시대를 상징하는 신화적인 유물이 사그라들고 있다.

         

         여기까지, 확인된 정보.

         

         

         “추밀의원들이 마일스톤을 개인적으로 유용하고 있었다.”

         “예?”

         “그리고 여왕은 베올그린 그리켄코스의 행선지를 거래 조건으로 추밀의원들을 자극해달라 요청했다.”

         “…폐하는 추밀의원들이 마일스톤에 장난질을 치는 것을 알고 있었고요.”

         “그리고 베올그린은, 네 아비는 결코 자신의 계획을 적에게 흘리지 않는다.”

         “여왕 폐하께서 아버지와 손을 잡은 것이 아니라면, 애초에 아버지의 소재지를 파악할 수 있을 리가 없고요.”

         

         

         엘피헤라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그녀의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용사 파티의 마법사는 위기의 순간일수록 더 냉정해져야 하는 법이다.

         

         

         “추밀의원들에게 마일스톤의 ‘다른 쓸모’를 가르쳐준 것은—.”

         “제 아버지. 베올그린 그리켄코스죠.”

         “여왕과 베올그린이 손을 잡고 추밀의원들을 충동했다. 그리고 우리가 도착한 시점에서, 추밀의원들의 시선을 내게 돌렸다.”

         “아주 잠시만이라도 관심을 여왕과 ‘난동을 부리는 인간’에게 쏠릴 수 있도록….”

         “엘피헤라.”

         

         

         이반의 말에 엘피헤라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드란힐로 항로를 돌리죠.”

         “대기 중에 마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이지?”

         

         

         이반의 물음에 엘피헤라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 무언가를 헤아리는 듯 했다. 그녀는 곧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농도가 바뀌었어요. 저희가 적응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교묘하게. 굳이 표현하자면… 열대 해수어종을 차가운 담수에 풀어 놓은 것처럼. 마력의 기초부터… 그러니까, 조립 과정부터 뒤틀어 놨어요.”

         “해결 방법은?”

         “시간. 얼마나 걸릴지는 몰라요. 하지만 꼭, 반드시 해낼게요.”

         

         

         이반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조타실로 향했다. 굳이 부연할 필요 없는 믿음이다. 그녀는 용사 파티의 마법사였으니까.

         

         마법으로 인한 사건을 조우할 때, 그녀를 제외하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이 칼리온에서는.

         

         

         “마일스톤이 작동을 정지한 것인가?”

         “그게… 확실하지 않아요. 확인해 봐야 하는 건 맞는데, 좀 이상해요.”

         

         

         엘피헤라는 잠시 어물거렸다. 그녀는 대기 중 마력을 훑으며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방향성이 바뀌었다고 보는 편이 맞아요. 마력 농도는 그대로인데, 수질이 바뀐 느낌. 네, 딱 그 정도에요.”

         

         

         엘피헤라의 말에 이반은 눈을 꾹 감았다.

         

         

         “최악의 상황일 수도 있겠군.”

         “어쩌면 그냥 단순한 기능 오류 정도일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리가.”

         

         

         마일스톤의 축복이 그대로 작용하고 있으나, 대기 환경만 변화했다면.

         

         ‘엘프에게 가장 완벽한 조건’을 맞춰준다는 이 고대 유물의 명제에서, 목적어만 바뀌었다고 가정한다면.

         

         

         ‘내게 썩 달가운 환경은 아니다.’

         

         

         특별히 적대적이진 않으나, 마력 순환도, 기후도 인간에게 완벽하다 보긴 어려운 이 환경은.

         

         과연 누굴 위한 ‘최상의 조건’이 되겠는가.

         

         

        *

         

         

         회의를 진행하던 잔영들이 일제히 꺼졌다.

         

         아이슬리프는 텅 빈 원탁을 한차례 둘러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거기 누구 없느냐? 투영장치의 동력계가 말썽인 모양이다!”

         “가, 각하! 잠시, 잠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밀실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요즘 젊은 엘프들 중 멀쩡한 것들이 없는 모양이다. 추밀원의 대의회가 고작 이런 문제로 중지되었다면, 추후 의회에서 그의 권위가 어찌 되겠는가.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곧 그대로 정지했다.

         

         

         “이게 다 무슨 소란이냐…?”

         “마력이…. 마력이 흐르지 않습니다!”

         

         

         아이슬리프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일로 놀라기엔 너무 오랜 삶을 살아온 엘프였다. 그는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성에 불이 꺼졌다. 모든 복도와 방을 포함해서, 성이 어둠에 잠겨 있었다.

         

         마력등이 모조리 나갔다. 당황한 시종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촛불을 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빛을 생성하는 하급 주문조차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테러…? 누가 감히 내 성을?”

         

         

         이 나라에서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놈들은 모두 회의실에 있었다. 그 놈들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칼리온에선 감히 추밀원장의 성을 테러할 수 있는 자가 없다.

         

         그는 황급히 뛰어 테라스로 나섰다.

         

         

         “하….”

         

         

         드높은 산맥의 중턱을 깎아 만든 탓에, 그의 성은 어느 테라스에서 내려보든 그의 산하 영지를 한눈에 내려볼 수 있었다.

         

         

        -후우욱, 하고 거친 바람이 불어닥쳤다. 시리도록 차가운 바람 탓에 그는 저도 모르게 옷깃을 여며야 했다.

         

         영지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칼리온 동부해역을 관할하는 거대한 군항이 밤바다 아래에 침잠하고 있는 듯 했다. 별조차 보이지 않는 짙은 먹구름 아래로, 꺼질듯한 등불을 들고 뛰어다니는 인부들만 간헐적으로 보일 뿐.

         

         거리를 밝히던 마력등과, 관청, 군항, 선착장과 물류창고를 포함한 모든 시설물에 불이 꺼졌다.

         

         

         “마일스톤…?”

         

         

         그는 의회가 마지막으로 논의하고 있던 주제를 본능적으로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

         

         

         헤르몬은 턱끝까지 올라온 거친 호흡을 간신히 다스리며 궁전을 향해 달렸다.

         

         도시는 혼란에 뒤덮여 있었다. 엘프와 노역부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소란을 피우며 등불과 촛대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마법이 끊겼다. 테러가 일어났다.

         

         그런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그러나 헤르몬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것이 정말 누군가의 테러라면, 그 ‘누군가’는 신이라고 보아도 좋았으니까.

         

         다른 엘프들과는 달리, 그는 천문을 읽을 수 있다. 만년궁의 고위천문관으로서, 그는 하늘을 뒤덮은 흉조를 직접 목도했지 않았던가.

         

         세상에 어떤 테러범이 종족 전체에 흉조를 내리겠는가. 마일스톤의 강대한 축복을 박살내가며—.

         

         

         “…마일스톤…?”

         

         

         마침내 사고가 여기에 이르렀을 때, 헤르몬은 창백하게 질려 바닥에 구르고 말았다.

         

         마일스톤이 정지했다고?

         

         그는 바닥을 벅벅 기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 순간에라도, 고위천문관은 왕에게 절차를 건너뛰고 직보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으므로.

         

         이제는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옛 율법이었으나,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천문관이 한때 왕의 조언가였다는 점에 감사해야 했다.

         

         

         “폐하, 폐하—!!”

         

         

         헤르몬이 경비를 윽박지르며 간신히 어전에 도착했을 때, 그는 차를 마시고 있는 여왕을 마주할 수 있었다.

         

         

         “폐하!! 마일스톤— 허억, 헉!! 마일스톤을 점검해야 합니다!!”

         “숨을 좀 돌리시게나.”

         “사태가 급박합니다…! 지금, 지금 당장—!”

         “어허.”

         

         

         여왕은 온후하게 웃고 있었다. 어둠에 잠긴 어전에서, 덜덜 떠는 시종이 들고 있는 작은 촛불 아래에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로, 평소처럼 다과를 즐기며.

         

         

         “폐하…?”

         “마일스톤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나?”

         “예…? 예!! 그 외에 다른 이유를 떠올릴 수가 없나이다. 하늘이 흉조로 가득합니다! 눈이 내리고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마법이 멈췄고, 마력이 흩어지고 있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예?? 하오나 폐하, 지금 상황이—.”

         “다시 묻지.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여왕은 조용히 찻잔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마일스톤의 대축복은 분명, 언제나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 맞나?”

         “…예, 폐하.”

         “그리고 이 세계의 흐름까지 뒤틀어가며, 적어도 칼리온 내에선 엘프 전체에게 언제나 유익한 운명을 부여한다. 맞는가?”

         “예, 폐하. 칼리온의 하늘은 언제나 엘프에게 길일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하늘엔 온통—.”

         “그만. 경. 생각해보게. 이상하지 않나?”

         “예…?”

         

         

         여왕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마일스톤이 정지하는 편이 우리 민족에게 더 유리한 것이 아니라면, 마일스톤은 꺼질 수가 없네.”

         “예??”

         “우리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그 어떤 자들도 감히 마일스톤을 끄거나 조작할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겠나? 우리가 검소해서?”

         

         

         여왕은 짓궂게 웃었다.

         

         

         “그럴 리가! 그 탐욕스러운 귀족들이, 무한한 마력을 제공하는 고대의 유물을 방치했던 이유가 그저 개인의 윤리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는가?”

         “유, 율법 탓에—.”

         “언제는 그 치들이 그토록 준법정신이 강했다고 그러나. 하하.”

         

         

         헤르몬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여왕은 침착하게 웃고 있었다. 그 표정에서, 헤르몬은 죽을 날을 알려달라 투덜거리는 그 친숙한 노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전혀 이질적인 생물이 엘프의 형상으로 그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

         

         

         “마일스톤의 축복이 가져오는 따듯한 기온, 쾌청한 하늘, 넘치는 마력은 모두 부수적인 작용에 불과하다네. 마일스톤은 단 하나의 목적만을 가지고 만들어졌어.”

         

         

         여왕의 껍질을 뒤집어 쓴 무언가가 즐겁게 말했다.

         

         

         “영원히 번영하리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다음화 보기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