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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9

       이튿날 아침.

         

       궁전으로 들어가는 뜰에서 공개적으로 바렌베르크 해방식이 시작되었다.

         

       바깥쪽 뜰에는 제국민들과 유명한 저널리스트들로 북적였고, 안쪽 뜰에는 황실 관료들과 영향력이 높은 귀족들로 가득했다.

         

       [부모를, 자식을, 형제를 잃었던 끔찍한 전쟁이 끝난 지 1년이 지났소.]

         

       드넓은 뜰 전체로 널리 퍼지는 라자의 목소리. 데카르트 마탑에서 제작한 마도구다.

         

       [원래라면 전쟁이 끝난 즉시 바렌베르크를 제국의 지방 세력으로 편입해야 했소만, 전대 황제의 반대로 인해 그들은 전쟁이 끝났음에도 고통의 연속이었소.]

         

       남은 바렌베르크의 백성들은 따로 영토를 받아 자신들끼리 살고 있다곤 들었지만, 자세히 알아보니 제국민들과 충돌이 끊이지 않았었다.

         

       우리는 전쟁을 했고, 피를 흘려야 했던 사이였다는 건 달라지지 않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다르오. 제1 왕자였던 진 바렌베르크와 원만한 협의를 통해 전대 황제가 저지른 만행을 보상하기로 하였고, 바렌베르크 또한 제국의 세력으로 편입하여 충직한 신하가 되기로 하였소.]

         

       이러한 내 결정에 백성들은 비난의 목소리를 낼지도 모른다.

         

       제국은 바렌베르크 국민의 가족을 죽였고, 조국을 멸망시켰으니까.

         

       하지만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자는 최악의 선택을 피하기 위해선 차악이라도 골라야 하는 법.

         

       나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악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고른 것뿐이다.

         

       [따라서 바렌베르크의 대표인 진 바렌베르크에게는 그에 합당한 작위, 후작위를 선사했소.]

         

       라자는 두 팔을 넓게 벌리며 미소 지었다.

         

       [오늘 이 시간 이후로 바렌베르크를 해방하오. 그들은 더 이상 전쟁 포로의 신분이 아닌, 제국의 국민이며 황실의 충직한 신하가 될 것이오.]

         

       선포가 끝났다.

         

       바렌베르크는 이제 전쟁 포로가 아닌, 제국의 일원이 되었다.

         

       차별이나 핍박이 바로 없어지진 않겠지만, 라자가 윤택한 삶을 약속했으니…….

         

       아, 참고로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경우는 없다.

         

       라자는 자신을 위해 약속을 지켜야 하고, 무엇보다 데카르트 공작가도 붙어 있으니까.

         

       [바렌베르크의 대표, 진 바렌베르크 후작은 앞으로 나오시오.]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는 앞으로 나왔다.

         

       궁전으로 들어가는 입구, 뜰 전체가 보이는 높은 테라스.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바렌베르크의 대표로서 하고 싶은 말을 전하게. 그대의 말은 저널리스트들에 의해 제국 각지로 퍼질 걸세.”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마도구 앞에 섰다.

         

       [바렌베르크의 제1 왕자, 진 바렌베르크입니다.]

         

       저널리스트들이 수첩을 펼치고 빠르게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순간을 기록하는 수정구 또한 나를 비추고 있었다.

         

       [비록 역사적으로도 사이가 좋지 않았고, 전쟁까지 한 관계이지만, 황제 폐하와의 협의를 통해 바렌베르크는 제국의 충직한 신하가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제국은 바렌베르크의 원수다. 백 년의 적이라고 불리올 만큼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바렌베르크 국민 여러분. 이러한 결정을 내린 저를 비난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주십시오.]

         

       나는 모두를 위한 선택을 했다.

         

       [저는 마지막 남은 왕족으로서 책임을 졌을 뿐입니다.]

         

       그들을 책임져야 할 마지막 남은 왕족으로서.

         

       “할 이야기는 끝났는가?”

       “아직 한 가지 남았습니다.”

       “그렇군.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하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이제 제일 중요한 얘기를 꺼내야겠지.

         

       2천 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이어진 짝사랑.

         

       이번 생에서야 간신히 전할 수 있었던 마음.

         

       이제야 이어진 사랑.

         

       [이 자리에서 말씀드립니다. 저는 데카르트 공작님과 혼인할 예정입니다.]

         

       그 마음을 모두의 앞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이상입니다.]

         

       할 말이 끝난 나는 옆으로 자리를 비켰다.

         

       라자도 내가 이런 말을 꺼낼 줄 몰랐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런 건 그다지 좋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하네만.”

         

       그걸 노린 거다.

         

       나라는 존재는 이미 데카르트의 것이라는 걸 각인시켜주기 위함이었으니까.

         

       “괜한 정치 싸움에 말려들기 전에 미리 차단하는 게 맞다고 판단했습니다.”

         

       내게 내려진 작위는 후작위.

         

       국가 단위인 바렌베르크라는 큰 세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제국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어야 했던 괴물.

         

       이 세상에 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의 영향력.

         

       귀찮은 일이 많이 발생했을 거다.

         

       “그런가. 그대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뭐라도 주워 먹겠다며 들러붙는 귀족들이 있었겠지.”

         

       이는 라자도 이해한 듯 고개를 주억였다.

         

       “이것으로 할 일은 다 끝났네. 연회나 모임 같은 건 전부 넘겼으니 돌아가도 좋고, 용건이 더 있다면 황궁에 더 남아있어도 되네. 그대의 뜻대로 하게.”

         

       과도할 정도로 친절을 베푸는 라자.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군.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 * *

         

         

       해방식이 끝나고, 나는 곧장 프란체를 만나러 왔다.

         

       “진!”

       “프란체.”

         

       그녀는 싱긋 미소지으며 내게 달려와 안겼고, 나는 살포시 품에 안아주었다.

         

       “이제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되었네.”

       “그리고 프란체와 혼인할 수 있고요.”

         

       배시시 웃으며 내 가슴팍에 뺨을 비비는 프란체.

         

       “그런데 그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할 줄 몰랐어.”

       “허튼수작이 들어오기 전에 미리 차단한 거죠. 저는 프란체의 남자니까.”

         

       그리 말하고 픽 웃자 프란체는 내 뺨을 쓰다듬으며 입맞춤을 해왔다.

         

       “당시에는 좀 당황하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어.”

         

       그러면서 또 입맞춤. 이번엔 혀까지 섞었다.

         

       “우움…….”

         

       그렇게 그녀와 같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

         

       “…분위기 좋으시네요.”

       “크흠, 비켜드릴까요…?”

         

       카자르와 라데아였다. 그리 말하니 더 머쓱해지잖아.

         

       “…헛소리 그만하고. 왜 너희들뿐이야? 케일이 안 보이는데?”

       “아직 자고 있어요. 그 사람 맨날 늦게 일어나거든요.”

         

       아니, 이런 중요한 날에 잠을 자느라 참여도 하지 않았다는 건가? 좀 서운한데.

         

       “공작님, 바로 돌아가실 건가요?”

         

       라데아가 묻자 프란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황궁에는 그다지 오래 있고 싶지 않구나. 어제도 잠을 못 자서.”

         

       프란체의 표정을 보곤 아, 하면서 멈칫거리는 카자르와 라데아.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라드리엔이 보여줬기에 나도 알고 있다.

         

       도저히 편히 있을 수는 없었겠지.

         

       “빨리 이런 기분 나쁜 곳에서 벗어나죠? 마차를 준비할까요?”

       “안 그래도 헬레나가 이미 준비해뒀어. 몸만 가면 된단다.”

       “그럼 빨리 돌아가죠! 앞으로 결혼식 열어야 해서 바쁜 거 아닌가요?”

         

       괜히 정신 사납게 호들갑을 떨면서 분위기를 돌리는 라데아.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거 같은데…….

         

       “그래, 어서 가자꾸나. 케일을 데려오렴.”

         

       잠시 후 케일이 오고 마차를 타러 이동하던 도중, 황궁의 구석진 곳에 높이 솟아오른 탑이 보였다.

         

       금방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낡은 탑. 라드리엔이 머물던 장소.

         

       그녀가 떠나가며 모든 마법이 사라졌는지 이젠 그 어떤 마력의 흐름도 보이지 않았다.

         

       ‘…뭘 하고 있으려나.’

         

       라드리엔으로 인해 비록 예기치 않은 피해자가 생겼고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 모든 걸 만들 수 있었던 게 라드리엔의 덕이 크다.

         

       ‘뭐, 알아서 하겠지.’

         

       초월 마법을 뛰어넘어 천체 마법사가 된 라드리엔이다. 내가 따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진? 이제 돌아가자. 공작저로.”

         

       생각에 빠진 사이 마차에 도착했다. 나는 문을 열어 프란체가 탈 수 있도록 손을 잡아주곤 뒤따라 탑승했다.

         

       “출발하겠습니다!”

         

       마부의 신호가 울려 퍼지고 바퀴가 움직였다.

         

       가는 길에 물었다.

         

       “결혼식은 언제 올리실 건가요?”

       “최대한 빨리 올릴 거야. 예상하자면…….”

         

       프란체는 마차의 천장을 바라보며 검지로 볼을 톡톡 건드렸다.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일주일 안에는 진행되겠네.”

       “…일주일 안에요?”

       “약혼 같은 쓸데없는 절차는 넘길 거야.”

         

       그러면 가능하기야 한데…….

         

       “그래도 준비가 많이 필요해서 시간이 좀 걸리지 않나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가 지하실에 갇혀 있을 때부터 준비했으니까.”

         

       뭐지? 내가 감금당하고 있던 사이에 나도 모르는 결혼식이 준비되고 있었다.

         

       “아무튼, 결혼식은 내가 이미 다 준비해뒀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너는 그냥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돼.”

         

       프란체는 그리 말하고 내게 붙어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런데 프란체와 혼인하면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제가 공작의 자리는 받을 수 없고, 공작부인이라 하기엔 어감이 좀 이상한데요.”

         

       전부터 가지고 있던 의문이다.

         

       가주의 자리를 여자가 차지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라 모르겠다.

         

       ‘내가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건 맞는데.’

         

       공작가의 전통과 규칙을 지켜야 하니 가문의 주인은 프란체다.

         

       “그냥 내 남편이 끝이야.”

       “…남편이 끝이라고요?”

       “응.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

         

       그거 그냥 기둥서방이잖나. 몹쓸 놈 되는 기분인데.

         

       “애초에 이 모든 건 다 네가 만들어준 거잖니? 그러니 가문에 관해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그저 내 남편으로서 곁에만 있어 주면 되는 거야.”

         

       그리 말하곤 다시 내게 안겨서 포옹과 키스로 사랑 공세를 퍼붓는 프란체.

         

       ‘뭔가 남자로서 자존심이…….’

         

       이미 내가 도망치기 전에 모든 걸 완성하고 가서 할 게 없는 건 맞지만, 가만히 있기엔 좀 그렇다.

         

       “아, 중요한 게 있긴 하네.”

       “뭔가요?”

       “밤일.”

       “아…….”

         

       이거 진짜 기둥서방이 되게 생겼다. 어떻게든 내가 할 일을 찾아야 하는데…….

         

       ‘아, 그게 있었지.’

         

       다행히 아무것도 안 하는 프란체의 기둥서방이 될 일은 없겠다.

         

       “제가 빠지면 바렌베르크 업무를 볼 사람이 없으니 저는 그쪽을 담당할게요. 바렌베르크와 데카르트는 하나가 될 테니까요.”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 이제 내 영지가 생기고, 그곳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니까.

         

       “…그러니?”

       “예. 제가 없으면 안 되니까요.”

       “아쉽네. 아무것도 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어째 시대상에 맞지 않게 서로의 역할이 반대로 된 것 같다만…….

         

       나는 아쉬워하며 입술을 삐죽이는 프란체에게 말했다.

         

       “크흠, 우리는 이제 두 가문을 운영해야 해요. 바렌베르크가 데카르트의 산하로 들어가는 형태가 될 거고요. 많이 바빠질 테니 제가 돕는 게 좋을 거예요.”

         

       가문으로 분류된 바렌베르크와 데카르트가 합쳐지면 웬만한 국가는 뛰어넘는 힘을 가지게 될 거다.

         

       다행히 내 역할은 찾은 거 같군.

         

       “그래,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겠네…….”

         

       축 늘어져 고개를 내젓는 프란체. 정말로 아쉬운 듯했다.

         

       ‘뭐지?’

         

       등골에 오한이 깃드는 느낌. 그녀를 그 누구보다 오랫동안 봐온 나로서는 알고 있다.

         

       내게 아무것도 안 시키려고 하는 거에는 무언가 불순한 의도가 섞여 있는 게 틀림없다.

         

       그래, 마치 나를 프란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으로 만들려는 것처럼…….

         

       ‘…설마.’

         

       이건 너무 간 거겠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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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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