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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9

       생각해보면, 양혜인의 태도는 저택에 있을 때와는 미묘하게 달랐다.

        

       저택에서는 내가 보이기만 해도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었는데, 지금 여기서는 내가 한 번 부른 뒤에도 따로 일어나 허리를 숙이지는 않았으니까.

        

       양혜인 본인은 잘 모르는 것 같지만.

        

       그러니까…… 내가 이쪽으로 온 것이 아무런 효과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거 하나만큼은 다행이었다.

        

       “…….”

        

       “…….”

        

       둘 다 아무 말도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양혜인도 나처럼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냥 이름으로 불러요.”

        

       나는 그렇게 말했다.

        

       “…….”

        

       양혜인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표정인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내가 양혜인 쪽을 바라보지는 않았으니까. 그저 곁눈으로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저도 여기에 있을 때는…… 언니라고 부를 테니까. 하늘이처럼.”

        

       솔직히, 언니라는 호칭은 내가 쓰기에는 너무 오그라드는 표현이다.

        

       그저 상대가 양혜인이기 때문은 아니다.

        

       조금 더 본질적으로 들어가서, 내가 남자였기 때문에 별로 그런 호칭을 쓰고 싶지 않았다. 뭐 조선시대에는 남자도 언니라는 호칭을 썼다지만, 그렇다고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자가 여자를 부르건, 남자를 부르건 언니라는 말을 쓰면 조금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테니까.

        

       사라 몸으로 그런 단어를 쓰면 사람들이야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나를 완전한 여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또 아니지 않은가.

        

       언니!

        

       ……적어도 너는 그렇게 부르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사라가 장난하듯 나를 그렇게 부르는 걸 듣고, 혼자 괜히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나는 사라의 꿈속에서도 사라의 모습이긴 했지.

        

       “알겠습니다.”

        

       잠깐 시간을 두고 생각하던 양혜인이 그렇게 대답했다.

        

       “적어도 할머니 앞에서는 반말로 해요.”

        

       “예, 알겠습니다.”

        

       양혜인이 다시 한번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침묵.

        

       참 아이러니하게도, 살가운 할머니 앞에서 느끼는 당혹스러움과 어색함보다, 양혜인의 침묵이 나에게는 덜 어색하게 느껴졌다. 물론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원래 메이드 같은 존재는 부려본 적도 없는 서민 집안의 자식이었으니까.

        

       하지만, 양혜인의 침묵은 그저 불편하고 말 걸기 싫어서 입 다물고 있는, 그런 태도로부터 나오는 침묵이 아니다.

        

       자신의 고용주를 방해하지 않도록, 스스로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그곳에 있는 듯 없는 듯 그저 부탁받기를 기다리는 사람의 자세.

        

       그게 양혜인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태도건, 학습된 태도건, 지난 몇 개월간 양혜인을 보아온 나로서는 몹시 반가운 종류의 침묵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랬고.

        

       “…….”

        

       하지만,

        

       그래도.

        

       나는 양혜인에 대해서는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도 그럴 게, 양혜인과는 인간적인 대화라는 것을 거의 나누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늘이, 소희, 수아야 처음 마주하면서부터 히로인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열심히 말을 걸어 친해질 수 있었지만, 양혜인만큼은 친해지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말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양혜인이 사라의 삶에 끼친 영향 때문이다.

        

       어쨌거나 공범은 공범이니까.

        

       아무리 사라가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해도, 이상하게 나는 양혜인을 보고 있으면 그 생각이 계속 났다.

        

       그리고, 그렇기에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말없이 자기 할 일만 하던 양혜인이, 갑자기 사라에게 인간적인 관심을 보이고, 급기야 사과까지 하려고 했는지. 자기 행동을 경찰에게 말했던 이유는 무엇인지.

        

       내가 납치당했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받을 것도 고려하지 않고 바로 달려와서 차 창문을 깨부수던 것은 왜인지.

        

       그저 메이드로서의 업무를 계속했을 뿐이라면,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한 이유를 모르겠다.

        

       차라리 다른 만화나 게임에서처럼 ‘유일하게 아가씨의 편이 되어준 전속 메이드’ 같은 설정이라도 있었다면 모를까.

        

       “……하아.”

        

       뭐, 아직 졸리지는 않으니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예.”

        

       내 말에 양혜인은 공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둘 사이의 나이 차가 어떻건 신경 쓰지 않는다는 프로의식이 느껴졌다.

        

       “제가 예전에, 회장님께 보고하지 않은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었죠.”

        

       내가 평소의 사라가 지켜오던 일상에서 마구 벗어나고 있었을 때, 양혜인 보고 ‘회장님께 보고했냐’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물어봤던 것이지만, 양혜인은 ‘보고하지 않았다’라고 대답해서 조금 놀랐다.

        

       “예, 그렇습니다.”

        

       양혜인도 그때를 기억하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긴, 기억력만 치면 나보다 더 좋을 것 같은 사람이니까.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당신이 저를 조금씩 돕기 시작했던 게.”

        

       처음에는 대놓고 도와주지는 않았다. 그런 식으로 보고를 빠뜨리거나, 회장에게 연락을 따로 취하지 않거나…… 그런 식으로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다가, 어느 순간부터 적극적으로 나를 돕기 시작했으니까.

        

       그게 너무 갑작스러워서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사라의 유서를 가져다가 친구들에게 보여줬던 사건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다.

        

       “그때는 ‘그냥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라고 말했었는데, 지금 다시 물어보면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사라는 양혜인을 용서했다고 한다.

        

       밤중에 꿈속에서는 사라와 대화하느라 사라의 기억을 따로 볼 틈이 별로 없긴 했지만, 그래도 사라와 대화하면서 듣기는 했다.

        

       한없이 가벼운, 용서받는 사람조차 이해하지 못할 간단한 용서.

        

       자기 삶에 대단한 열의가 없었던 시절의 기억이었기에, 사라는 그렇게 한마디만 하고 넘어가 버린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양혜인은 그걸 두고 ‘용서받지 못했다’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전력을 다해서 나를 돕고, 최나경으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노력한 거겠지.

        

       보통은 그냥 포기하고 끝낼 텐데 말이다.

        

       그리고 그건 ‘그냥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라고 대답한 사람이 할만한 행동이 아니었고.

        

       “그건…….”

        

       양혜인은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건, 아가씨께서 웃는 얼굴을 봤기 때문입니다.”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주시겠어요?”

        

       “…….”

        

       양혜인도 본인이 한 말이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듯, 다시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저, 아가씨께서 웃는 얼굴을 보고 나서, 지키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이번에는 내가 침묵할 차례였다.

        

       이 말도 당연히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양혜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를 최대한 이해할 수 있게 풀어내듯 천천히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처음 이 직업을 가지고 나서, 운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양혜인은 고해성사하듯, 자기 진심을 풀어냈다.

        

       “돈도 많이 받고, 일도 편했으니까요. 무엇보다 일이 편했던 이유는, 아가씨께서 얌전한 성격이었기 때문입니다.”

        

       “…….”

        

       확실히, 사라는 얌전한 성격이었다.

        

       물론 그게 ‘평범하게 얌전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상태. 가슴 속에 응어리진 것이 너무 많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그리고…….”

        

       양혜인이 평소에 쓰는 딱딱한 말투가,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리고, 저는 아가씨께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옆에서 보고 있었는데도요?”

        

       “…….”

        

       어쩌면 양혜인은 입술을 깨물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럴 거라고 혼자 합리화했던 것 같습니다.”

        

       양혜인은 쥐어짜 내듯 그렇게 말했다.

        

       “아가씨는 돈이 많으니까, 이 순간이 조금 괴롭더라도 몇 년만 더 있으면 성인이 될 거고, 그때가 되면 그 재산으로 자유롭게 살아갈 거로 생각했습니다.”

        

       “…….”

        

       나는 그 말에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나는 처음에, 사라를 뭐라고 생각했었지?

        

       “아마 그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저의 이 직업을 합리화하고 싶었기 때문이겠죠. 이렇게 돈을 많이 벌고, 이렇게 하기 쉬운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

        

       “아가씨께서 그 밤중에 비명을 지르셨을 때, 사실 저는 아가씨보다는 저의 일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아가씨께 무슨 일이 생기면, 저에게 어떤 불이익이 올지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아가씨께서 다시 깨어나시고…… 그 이후에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생각을 다르게 하게 되었습니다. 아, 아가씨도 평범한 아이였구나, 하고.”

        

       “…….”

        

       아니.

        

       아니, 그게 아니다.

        

       사라는 처음부터 평범한 아이였다.

        

       사라가 평범하지 못한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은, 그저 사라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비정상적인 상황 때문이었을 뿐이다.

        

       비정상적인 계모와 사라를 사람 취급해주지 않는 주변 사람들.

        

       감정도 관계도 모두 끊어져 버린 자신만의 인형으로 만들기 위해, 최나경은 사라를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몇 년 동안이나.

        

       “그리고, 그렇기에, 이 상황을 제대로 버틸 수 없을 평범한 아이였기에, 저는 그 웃음을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사라가 아니었어요. 저였죠.”

        

       “…….”

        

       양혜인이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몹시 떨리고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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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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