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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

     축제 준비에 관해서 더 이야기했으면 좋았겠지만, 시간이 늦었다.

     아버지는 부부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고, 나는 군말 없이 나의 방으로 돌아왔다.

     삐거덕.

     침대가 바닥을 끄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잠시, 회귀자의 시간.

     어머니나 아버지 앞에서는 ‘머리는 비상하지만 아직은 어린아이’를 연기하느라 절제했다면, 지금 이 순간은 매국노 그레이의 시간이다.

     삐거덕.

     

     한 번 더, 침대가 움직인다.

     다들 잠들어있는 와중, 부부가 서로의 사랑을 속삭이느라 정신이 없는 지금이야말로 오직 나만을 위한 시간이다.

     “후ㅡ우.”

     침대에 정좌한 채, 호흡을 가다듬는다.

     ‘마나를 쌓는다.’

     이미 아버지에게는 내가 마나를 느낄 수 있다는 걸 보여줬지만, 지금부터 할 행동은 편법이니까.

     ‘제국식 마나 연공법으로.’

     왕국의 몰락은 곧 마나의 몰락이었다.

     기사들은 제국을 무시했지만, 발전되고 개량된 머스킷의 마탄에 사살되며 기사의 시대는 몰락했다.

     -기사가 오러를 둘러서 마탄이 맞지 않는다고? 그럼 오러가 다 닳을 때까지 마탄을 쏴라.

     마탄의 집중사격에 몸에 두른 마나의 소모가 더 빨라지기 시작하며.

     -마나가 부족하다고? 그럼 마나를 빨리 쌓아라. 수명을 대가로 마나를 늘려. 마나 허브를 뱃속에 쑤셔 넣든, 마물의 피를 물처럼 마시든.

     그리고 제국이 물량 공세를 퍼부을 수 있게 될 만큼 국력이 강해진 뒤.

     -제국의 방식이지만, 노스트럼의 부활을 위해서는 적의 방식마저도 배울 필요가 있어.

     공주를 비롯하여, 왕국부활파는 새로운 마나연공법을 연구했다.

     -저들이 숨 쉴 때마다 마나를 모은다면, 우리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

     기존의 방식이 자연스레 마나를 몸에 쌓이게 한다면, 이 방법은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마나를 마구 쌓아나가는 방식.

     ‘제국식에, 혁명군의 방식을 더하여.’

     제국식이든 혁명군식이든, 그 방식은 지금 이 시점에서는 편법에 불과하다. 

     ‘편법은 정석을 이길 수 없다고들 하지.’

     하지만 편법이 정석보다 한 시대를 더 앞서나간다면, 정석은 구시대의 유물이 된다.

     “후ㅡ우.”

     호흡을 길게 가져가며, 공기 중에 흐르는 마나를 강제로 몸속에 끌어당긴다.

     ‘무조건, 마나를 쌓는다.’

     폐에서 숨을 내뱉을 때, 기관지와 목, 입을 통해 빠져나가는 공기 중의 마나를 강제로 몸에 남도록 잡아끈다.

     “…크륵.”

     목에 가래가 끼듯 목구멍이 껄끄럽다.

     실제로 무언가 목을 막는 건 아니지만, 순간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목이 턱턱 막힌다.

     마나가 날뛴다.

     멋대로 자신을 가두지 말라고 난리를 친다.

     자유를 억압하고, 강제로 지배하지 말라고 반항한다.

     “…….”

     하지만 입을 꾹 닫고 숨을 참은 결과.

     30초, 1분, 1분 하고도 15초-.

     “…파ㅡ하!”

     

     호흡을 멈추고 마나를 수용하는 데 성공하면 나의 승리.

     실패하고 마나와 함께 숨을 뱉어내면 나의 패배.

     ‘죽는 줄 알았네.’

     

     다행히 이번에는 성공했다.

     지브롤터의 터가 좋아서 그런지, 창문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밤공기는 맑고 깨끗했다.

     ‘공기가 좋아서 그런지, 마나의 상태도 순해서 다행이야.’

     저기 제국처럼 공기가 오염되어 혼탁하지 않아, 대기 중 마나를 흡수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최소한 15살 정도만 되어도 거뜬할 텐데.’

     신체가 더 성장한다면, 앞으로는 일상생활 중에도 숨을 쉬면서 마나를 쌓을 수 있을 터.

     ‘이래도 황제한테는 어려우려나.’

     10살부터 미래의 연단법으로 마나를 쌓는다고 한들, 황제는 그보다 더 무식한 방법으로 마나를 쌓고 있을 것이다.

     피로 점철된 세 가지.

     학살, 노예, 약물.

     정순함이고 나발이고 무조건 쌓기만 하면 된다는 패도적인 발상으로, 황제는 강해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쪽도 그렇게 해야 한다.

     누구보다 황제를 잘 알고 있는 이로서, 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준비해야 한다.

     단.

     ‘당장 걸리면 시작하기도 전에 축출당할 수 있으니.’

     물밑에서, 조용히.

     황제만큼 피가 흐르지는 않겠지만, 나의 방식대로 새롭게 움직여야 한다.

     왕국도 제국도, 심지어 아버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곳에서 은밀하게 움직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오직 나만을 위한 손과 발이 되어줄 이들이 필요하다.

     로버트 경?

     ‘너무 착해.’

     그는 충신이다.

     ‘적당히 더러운 인간이 필요한데.’

     

     피와 살육, 범죄와 비리로 점철된 길을 걷자고 하면 충심으로 나를 고발할 사람이다.

     나쁜 건 아니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고, 그는 흰색 지대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미래의 나처럼 검붉은 오탁, 짙은 회색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아니다.

     그러니, 그런 이들을 찾아야 한다.

     10살의 어린 아이가 성장하더라도, 성인이 되기 전에 내 얼굴을 대신해줄 존재가.

     몇몇.

     기억 속에서 올라온,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이 나타난다.

     무능 왕에 대한 복수.

     어려서부터 학습된 제국에 대한 충성.

     혹은, 그저 나라가 망하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저마다의 이유를 가진 회색지대의 인간들.

     ‘한 명이라도 왔으면 좋겠는데.’

     그들이 과연 이 청렴결백의 땅에 찾아올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적어도 시도는 해봐도 나쁘지 않겠지.

     제국이 왕국의 끄나풀을 내세워 지브롤터를 향해 친애의 편지를 보내는 것처럼, 이쪽에서도 손을 뻗으면 뭔가 반응이 있을 것이다.

     ‘명분만 잘 생긴다면.’

     제국이 ‘그레이 지브롤터’에게 손을 뻗게 하기 위한 명분.

     ‘연회장만큼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딱 좋은 장소가 또 없지.’

     호흡을 멈춘다.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에 놓여있는 목검을 움켜쥔다.

     -그레이 변경백. 잘 들으시오.

     황제가 이걸 가르쳐줄 때, 내게 그렇게 말했다.

     -숨 쉴 때, 물을 마실 때, 여자와 입을 맞출 때. 그 어떤 순간에도 항상 마나를 갈취할 수 있도록, 무의식이 알아서 마나를 쌓도록 몸을 만들어야 하오.

     일상생활 속에서, 마나가 자연스레 쌓이기를.

     -마나가 내 몸에 자연스레 머무르는 게 아니라, 내가 온 세상의 마나를 빼앗아 가지는 거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정복자.

     갈취. 약탈. 지배. 압제.

     -그것이야말로 나의 패도요.

     어떤 의미에서는 스승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번 생은 황제와 같은 길을 걸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 길을 부정할 생각도 없다.

     ‘폭군의 길을 걸을 생각은 없지만, 강자의 길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봤으니까.’

     나는 배웠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강자란 자신이 주(主)가 되어,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판을 만드는 이들. 

     오크 3천의 안에서도 중심에 있던 아버지처럼, 강자는 자신이 환경을 만들고 그 판을 주도하는 자.

     ‘판은 내가 만든다.’

     목검을 들고, 가볍게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다.

     “…쯧.”

     호흡은 가쁘고, 손아귀는 찢어질 것처럼 아프다.

     ‘강해져야 해.’

     아무리 입을 털어도, 정치적 상황을 좋게 만들어 권력을 차지하더라도.

     -명심하게. 그레이 지브롤터.

     그 누구보다 황제는 자기 말을 확실하게 증명했다.

     그러니 그가 싫다고 하더라도 명심해야 한다.

     -강한 무력이야말로, 진정한 권력이라는 것을.

     그의 사상을.

     -그를 위해서는 그 어떤 수단이라도, 사용하는 데 주저하면 안 된다네.

     제국은 왕국을 정복하기 위해, 상상을 뛰어넘는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 또한.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괴물이 되어야 하네.

     그 사상으로 비롯된 행보를.

     “후.”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나는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문제에 대하여, 정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3천의 오크.

     그 많은 오크는 왜 협곡으로 왔을까.

     과연 정말로, 여느 때처럼 오염지대에 있는 마물들이 협곡을 넘어오려고 한 것일 뿐일까?

     정말로?

     아니다.

     ‘마물이 협곡을 공격하는 건 흔한 일이긴 해. 하지만 이번은 아니야.’

     3천의 오크가 협곡을 넘어오려고 한 건 으레 있는 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어쩌면 당연하다고 여긴 것도, 사실은 원인이 따로 있을 수 있지.’

     지브롤터의 모두가, 심지어 아버지조차 그걸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던 것이 실은 계략과 전술의 일부였다.

     -잘 배워두게. 변경백.

     황제가 언젠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적을 상대하는데, 손속에 사정을 두는 건 하수의 짓이지.

     황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예절. 예법. 인륜. 정도(正道). 관습. 규율. 그 모든 것은 이 말 앞에 새롭게 정의되는 법. 그 말이 무엇인지, 자네라면 잘 알고 있겠지?

     “승리.”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도 된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니.

     끼이익.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되었나.’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말라는 건지, 잠이나 자라는 신호인 모양이다.

     “후ㅡ우.”

     밤은 깊어가고, 나는 이불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나는 아버지와 동생이 연무장에서 검술 연습을 하는 동안 어머니가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그레이. 분류는 이 정도면 되겠니?”

     어머니가 내 앞에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각각 가문의 이름이 크게 적힌 봉투로서, 봉투는 크게 세 분류로 나뉘어있다.

     “이 정도면…괜찮겠네요. 분류는 적당해도 됩니다. 어차피 이번은 처음이니까.

     “처음….”

     “파티는 계속 열어야 합니다. 많은 귀족이 찾아오고, 그들 중에 적당한 자들을 물색하기 위해서라도.”

     “아주 그냥 나를 죽이려고 드는구나.”

     “책임을 지셔야죠.”

     “그래.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의무지. 지브롤터 백작 부인으로서.”

     어머니는 목까지 올라오는 드레스를 잠시 만지작거리며 숨을 골랐다.

     “그런데 그레이. 한 가지 문제가 있단다.”

     “무엇입니까?”

     “초대할 명분이 없어.”

     “3천 마리의 오크를 도륙 낸 것이 명분 아닙니까.”

     “그건 파티를 열기 위한 대외적인 명분이잖니.”

     어머니는 마침 잘 되었다는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뭔가 교육이라도 하려는 걸까.

     “너는 귀족들이 파티를 여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말씀드리자면 최소한 양피지 다섯 페이지 분량은 나올 겁니다만.”

     “…….”

     “결론부터 말씀하시죠. 무엇이 문제인지.”

     “실질적인 명분이 없단다.”

     어머니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지브롤터까지 온 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럴싸한 명분은 있어야 하지 않겠니.”

     “우리 백작 부부의 사랑이 건재함을 알리기 위함이라거나, 우리 아직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거나.”

     “놀리는 거라면 그만두렴. 진지하게 말하는 거란다.”

     어머니가 표정을 굳혔다.

     “그런 목적으로 온 이들이 있든 말든, 우리가 저들에게 말할 명분이 하나 필요해.”

     “이해했습니다.”

     “너, 정말로 그걸 적으라는 거니?”

     어머니가 진지한 얼굴로 되묻는다.

     “왕도에서의 스캔들은 그냥 사고였을 뿐, 부부의 관계는 무너지지 않았다는 걸 알리기 위한 선전만으로 이렇게 많은 이들을 초대하자는 거니?”

     “그럴 리가요.”

     고작 ‘우리 결혼해서 잘살고 있습니다’라고 자랑질하려는 목적이었다면, 축하연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어머니. 저는 귀족들의 파티는 일종의 사업설명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단어는 또 언제 배웠니.”

     “어머니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제가 좀 많이 똑똑합니다.”

     “…그래.”

     어머니가 잠시 떫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들이 카르멘 왕비 못지않은 천재라서 다행이구나. 그럼 내게 알려주지 않을래? 네 계획을.”

     “귀족들, 분명 잘 보이려고 온갖 선물을 가져올 겁니다. 보물이든 사치품이든.”

     “지브롤터에?”

     “청렴결백한 가문이라고 해도, 일단 찔러는 보는 거죠. 가령 품질 좋은 홍차라거나, 와인이라거나.”

     약 3년 만에 열린 파티다.

     귀족들도 나름 ‘이 정도는 변경백도 받지 않을까’라는 적정선이 있을 터.

     “백작님께서는 안 받고 안 주는 게 편하다고 생각하시는데.”

     “선물을 보내준 이들의 명부와 품목, 가문의 정리는 어머니께 맡기겠습니다.”

     “…그래. 그게 내 일이지.”

     다행이다.

     미래에서는 내가 저걸 도맡아 했었는데, 이제는 내가 안 해도 되니.

     “초대장 문구는 제가 정리해서 한 장 적어드리겠습니다. 그걸 어머니께서는 필사하셔서 보내시면 될 겁니다.”

     “…지금 거의 초대하는 가문만 50이 넘는데?”

     “설마 저보고 편지를 쓰라는 건 아니겠죠?”

     “…….”

     어머니가 울상을 지었다.

     물론 어머니의 필체와 최대한 비슷하게 쓰는 것도 못 할 건 아니지만, 어머니가 손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내가 쓸 이유는 없다.

     “문구는 제가 마련한다고 했으니, 초대받는 이들의 호기심을 끌 명분은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나는 빈 편지 봉투를 가볍게 흔들었다.

     “보육원을 지으려고 하는데, 혹시 기부할 생각이 있는지 슬쩍 물어보면 되겠죠.”

     “뭐?”

     “당연히 편지로 쓸 때는 온갖 정치적 미사여구를 덧붙여야겠지요.”

     “아니, 그, 갑자기 보육원을…?”

     “네. 사실 꼭 보육원이 아니어도 되기는 합니다만, 이게 또 나름 제일 ‘효율’적일 것 같아서.”

     같은 게 아니라, 그러하다.

     “기부금만큼 눈먼 돈이 또 없습니다, 어머님.”

     경험담이니까.

     “선의로 주는 돈으로 고아들을 먹여주고 재워주겠다는데, 누가 거기에 얼마나 돈이 들어갔는지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하하.”

     당연히.

     “특히 부모 잃은 아이들이나, 가난해서 부모가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구호시설이라면 더더욱 좋겠죠.”

     해봐서 안다.

     또한.

     “우리의 사랑스러운 막내, 레타르에게 좋은 친구들이 생길 겁니다.”

     막내를 위해서도, 오빠로서 하나 좋은 걸 선물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 * *

     

     일주일 뒤.

     왕국 전역에 지브롤터의 초대장이 발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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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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